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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극동에서 열강의 이해관계 - 경제적·정치적 경쟁대(大)시베리아 철도 건설과 관련한, 극동에서 러시아의 국가적 이해관계

 
러시아만 제외하고 모든 열강들은 극동에서 이해관계, 무엇보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이는 공산품의 판로와, 이익이 되는 투자처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인구가 4억인 중국,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남부 전체는 경제적 경쟁을 벌이는 주요 무대가 되고 있다. 국내 시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출구를 찾아야 하는 공업 발달과 인구의 증가에 따라 유럽과 아메리카의 산업 국가들은 갈수록 이 경쟁에 걷잡을 수 없이 점점 더 빠져들고 있다.
국외 시장을 찾아야 한다는 요구는 본래 의미에서의 경제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궁핍한 상황을 바탕으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극단적 교의(敎義)가 세력을 확대할 위험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요컨대 국외 시장 때문에 일어나는 열강의 경제적 경쟁은 각 식민국들의 모든 물질 및 정신생활을 극히 민감하게 건드리고 있다.
이들 국가에게 해상로(海商路)는 생사가 걸릴 만큼 중요한 교통로이므로, 그들은 이 항로로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외교는 불가피하게 자국의 이런 현실적 이해관계를 최우선 고려 대상으로 한다.
영국. - 전 세계 공업국가의 선두에는 가장 많은 상선을 소유한 영국이 있다.
아시아와 영국의 직접 무역은 총액 13억 2천만 루블 [주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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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자료.

이며 이것은 러시아의 대외 무역량 전체와 거의 맞먹는다. 그 밖에 영국령 아시아 국가들의 대외 무역량은 총 16억 3천5백만 루블이다. 자국 상품과 외국 상품의 운송은 영국 상선에 커다란 돈벌이를 제공한다. 영국의 거대 자본은 아시아의 철도, 공업 기업, 상사(商社)에 투자된다. 4억 루블의 인도 재정 가운데 1억 6천만 루블은 영국에서 지출된다. 영국은 싱가포르와 홍콩 같은 국제 거대 무역 중심지의 무역거래에 중심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을 얻고 있다. [주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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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와 홍콩의 무역량은 1899년 4억 4천 4백 루블로 평가된다.


이런 실제적인 이해관계가 정치적 이해관계도 규정한다. 그것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과제다.
다른 어느 강국보다 훨씬 많은 상선을 보유한 영국은 열강 두 나라 선박을 합친 것과 같은 해상력을 바탕으로 통상로를 확보하고 있다. 더구나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주요 해상로(지브롤터-수에즈-싱가포르)에 있는 모든 해협은 영국이 지배하고 있다.
최근 20년간 영국 무역과 군사-정치 상황은 점차 어려워졌다.
전 세계 시장에 독일과 미합중국으로 대변되는 강력한 경쟁자가 출현했으며,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여기에 가세하였다.
독일. - [18]90년대부터 독일은 단호한 식민정책의 길에 나섰다. 아프리카 식민지의 획득, 터키에서의 행동들, 특히 페르시아 만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바그다드 철도 건설은 영국인들에게 아주 반갑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1898년 중국으로부터 석탄 매장량이 풍부한 캬오 샤오(Кiao-Шао) [주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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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膠州). 산동성에 위치. ‘자오저우’로 발음

를 99년 동안 조차지로 얻은 것과 열정적인 지도자의 지휘에 따른 체계적인 공업 발달은 영국에게는 불안한 징표들이다.
미국. - 영국의 또 다른 위험한 경쟁자는 미합중국이다. 이 나라는 파나마 운하를 점유한다는 결정으로 극동에서 커다란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이 운하는 가장 공업적인 대서양 연안의 주(州)들을 아시아 해안에 상당히 근접시킬 것이다. 필리핀 획득은 바로 이러한 방향에서의 중요한 일보다.
일본. - 마지막으로, 최근 10년간 중국 시장에 심각한 영국 경쟁자로 나선 나라는 일본이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대외 무역 전체의 2/3는 영국이 차지하며, 1898년 조약으로 중국 해양 세관의 책임자는 영국 무역이 다른 민족의 무역을 능가할 때까지는 영국인이 맡고 있어야 한다. 중국에서 영국 무역은 점차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는 데 반해 미합중국, 독일, 일본의 무역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일본은 중국에 대해 다른 백인종 국가들보다 커다란 이점을 가지고 있다. 즉 지리적 위치의 근접함, 저렴한 교통, 백인종 국가들에게 접근이 차단된 대륙 내부 지역으로의 침투의 용이함, 문화 및 문자의 공통성에 의한 실무 거래의 용이함이 그것이다.
러시아. - 러시아는 열강들의 아시아 무역 경쟁에서 벗어나 있다. 그 이유는 미약한 공업 발달, 비싼 생산 비용, 폭넓은 내부 시장-러시아 상품은 보호주의적인 높은 관세로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때문이다. 하지만 아시아는 특히 저렴한 상품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와 아시아의 무역 거래는 주로 아시아의 육로 국경 지대에 속하는 지역과, 외국의 경쟁이 허용되지 않는 페르시아 및 터키의 지역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아시아에서 우리의 이해관계는 지대하지만 아직은 오로지 지리적 위치에 좌우되고 있다. 즉 아시아에서 러시아는 가령 영국처럼 식민국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토착국가다.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이동은 15세기부터, 그리고 예르마크 [주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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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시베리아를 정복한 카자크 탐험대장

의 점령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이 이동은 분리파 교도 [주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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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황제 때 니콘 총주교의 종교 개혁에 반대하여 박해를 당하며 정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분파. 본래의 정교가 아닌 러시아적인 정교를 주장했다 하여 구교도라고도 한다

의 퇴출이나 범법자의 유형으로 유지되었다. 지난 세기[19세기] 중엽에 우리는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Муравьёв-Амурский) 백작의 열정 덕택에 태평양 해안에 서게 되었으며 그 때부터 이곳에 굳건히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다.
이런 이동에 얼마간의 자연발생성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확장을 할 직접적인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에서는 미래 세대를 위한 예비분의 토지를 획득하려는, 이해할 만한 본능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역사적 역할이라 부를 만한 더 깊은 의미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 문화를 지닌 민족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부유한 동남아시아 지역이 산업화된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이해관계 영역 바깥에 영원히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이들 [유럽]국가는 동아시아와 교류를 하기 시작한 후 자국의 공산품을 팔 수 있는 광범위한 시장을 이곳에서 찾았다. 세계경제의 무게 중심은 점차 극동 쪽으로 이동했다. 다른 한편 극동은 개발된 유럽 문명 기술을 받아들여 오랜 침체에서 깨어 일어나야 했다. 경제적 이해관계에 이어 정치적 이해관계-처음에는 영국, 그리고 그 뒤에는 다른 공업국가의-가 뒤따랐다.
육로로 광대무변의 시베리아 공간을 넘어 태평양 연안에 근접한 러시아는 마치 침략적-경제적인 위력(сила завоевательно-экономического влияния)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 영향력은 아시아 지역 국가들에 대한 커다란 인상을 심어줄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인상은 크면 클수록 더 지우기 어려운 것이었다. 러시아라는 이름만 들어도 매료되는 것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런 매료는 실제로는 우리가 아시아에서 전혀 갖고 있지 못했던 허구적인 힘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이런 상황은 저절로 조성된 것인데, 우리는 어떤 외교적 노력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 의도에도 어긋난 것이었다. 즉 극동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전진 운동에서 우리 외교는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두려워했다.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실제 이해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아시아에서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영토를 내적으로 정비하는 일이다. 즉 본래의 러시아인을 합리적으로 정주시키고 교통로와, 평화적인 성공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보장해주는 것이다.
이 과제를 올바르게 해결하는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유럽지역 러시아의 소규모 토지 소유 농민을 위해 시베리아의 토지 여유분(запасы)을 이용한다는 것. 2) 아시아에서 러시아 인구 밀도가 높아질수록 이곳에서 우리에 대한 군사적 저항은 더 커지게 될 것이라는 것.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우리의 약점은, 인구가 적다는 것 말고도 육상 국경이 엄청나게 길고 군대와 식량의 공급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이런 약점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커져서 프리아무르 지역에 이르면 최고점에 이른다. 이에 덧붙여 이곳에서는 군사 고유의 성격을 갖는 국경(國境)이 부족하다.
아무르 강을 따라 이뤄지는 국경은 세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1) 강안(江岸)의 특성 때문에 아무르 강은 그 자체로써 방어에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 2) 강이 북쪽을 향해 흐르며 커다란 굴곡을 이루고 있어서 쐐기처럼 우리 경계로 들어오는 타국 영토와 경계를 이루게 되고, 대양(大洋) 연안의 유일한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와 우리의 연결선이 적의 공격 위협에 노출된다. 3) 남부의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식량 자원, 교통로(요하강과 송화강)및 위치의 편의성 때문에 만주는 군대가 남쪽에서 북쪽 방면으로 공격하는데 극히 적합한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략적 방어선은 남쪽을 향해야 하며, 더욱이 거대한 지역으로 뻗어 있어야 한다. 한편 우리의 중심 교통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즉 방어선과 평행하게 가고 있다. 군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상황은 매우 불리하고 위험하다. 특히 이 교통로를 적이 끊어버리면 핀 만의 우리 핵심 해군기지와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지 못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제국과 단절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그렇다. 극동은 러시아의 아킬레스건이다.
우리는 자위(自衛) 때문에 아시아에서 우리와 거대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 지역-중국령 투르키스탄, 몽골, 그리고 특히 만주-의 정치 상황에 무심한 태도를 취할 수 없다. 이 지역들이 중국의 중앙권력으로부터 반(半)독립적인 상태로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익이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중국이 자신의 국경을 강화하려고 일반 군사적 성격의 조치를 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에 우리와 적대적인 나라, 가령 영국인이나 일본인의 영향력이 침투해 들어오면 우리에게 극히 불리하다. 이곳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적·군사적 성격의 변화, 즉 시베리아, 그리고 특히 극동에서 우리의 모든 상황이 극도로 위험하게 되거나, 혹은 우리가 대규모의 상비군-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현재 우리의 물질적 이해관계로써는 결코 용인될 수 없으며 유럽지역 러시아 주민에게 무거운 부담을 안겨 줄 것이다-을 유지해야 하는 그런 변화를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훌륭한 정책은 바로 아시아 지역에서 우리 조국을 위해 아주 중요한 봉사를 하게 해 줄 것이며, 반대로 나쁜 정책은 이곳에서 우리에게 오로지 힘겨운 곤란만을 안겨줄 것이다.
한국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 나라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입하는 자연스런 발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물론 일본 함대가 인근 해역을 지배하고 있는 조건에서다. 군대는 상륙, 집결하여 대열을 갖춘 후 압록강 하류 지역의 중심 도로를 통해 북쪽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른편에는 조선 북부 지역의 험준한 산악이, 왼편에는 해안이 완전하게 안전을 확보해 줄 것이다. 남만주 연안지대와 요동반도에서도 상륙은 가능하지만 필수 조건이 있다. 즉 한국이 공격하는 적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순 항이 있는 요동반도까지 소유하고 있다면 적은 유리할 것이다.
두만-압록-여순 항 전선은 아주 훌륭한 전초기지가 된다. 만일 이 전선이 우리 수중에 있다면 모든 이점은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 바다를 확고하게 장악하지 못하더라도 이 조건만 갖춘다면 아무르의 우리 점령 지역의 안전에 대해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그 이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조선 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형과 해안이라는 자연적 장애물에 의거하는 최단거리의 국경. 2) 과학적 요구에 부합하게도 전략방면군의 위치가 후방의 연락보급로(коммуникационная линия)에 대해 수직이 된다는 점이다.
한국에 공격 정책을 도입한다는 목적이 아니라 방어 정책에서 멈춘다는 목적을 세우려 했다면 조선 북부를 도로가 없는 원시적인 미개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이익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아무르 강을 따라 이루어진 우리 국경이 취약한 조건에서 극동에서의 우리의 자연상 약점은 남쪽에서 다가오는 위협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이 방면에서 안전을 확보하는 가장 나은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1899년 러시아는 여순 항을 점령했는데 이 사실은 논리상으로 조선 북부에서 우리의 지위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음에 틀림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상황 고찰이 1898년 이후 А.М. 베조브라조프의 모든 생각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는 극동에서 외면상으로는 적극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방어적인 역할을 한 우리의 행동이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 얼마나 정당화되었는지 살펴보자.
극동에서는 이웃한 세 나라-중국(군사 기구), 조선(국가적 쇠약함) 그리고 일본(섬나라라는 위치와 구식의 국가 기구 및 군사 기구)-의 몇 세기에 걸친 평온 상태와 몇 세기에 걸친 균형이 아직 깨지지 않았다. 그 당시까지는 러시아도 자신의 약점(교통수단이 없고 변경이 멀다는 점)을 감수하고 시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극동의 이 모든 상황에 대격변이 일어나도록 자극을 준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일본의 국내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은 그 후 일본을 아주 활발한 대외 정책과 전쟁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1868년 일본은 과거의 봉건체제를 포기하고 미카도 [주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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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도(御門). 황제가 드나드는 문을 지칭하지만 천황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말

와 쇼군의 이중권력을 황제 중심의 단일 권력으로 바꿨다. 이런 대격변에 의해 일본은 국내적으로 강고해졌으며, 유럽을 본받아 강력한 군대와 함대를 만든 뒤 오랜 폐쇄와 고립에서 벗어나 청국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자로서 국제적인 투쟁 무대에 나섰다. 그리고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1895년 4월 5일 조선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강변하고, 여순 항이 있는 요동반도와 대만을 점령했으며, 그 밖에 전쟁배상금을 받았다.
이렇게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었으므로 우리는 군사-정치 상황을 재평가해야 했다.
그 시기 우리 외교부의 수장은 로바노프-로스톱스키 공이었다. 그는 일본의 여순 항 점령이 우리에게 미치는 위험을 완전히 올바르게 평가했는데, 이곳은 한국이 약체인 상황에서 한국을 점령하는 열쇠였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일본이 여순 항과 한국에서 자리를 굳혔다면 일본은 우리에게 위협적인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로바노프 공은 시모노세키 조약 가운데서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에 대한 항의를 주도했는데, 이를 위해 독일과 프랑스가 우리와 공동행동을 하도록 솜씨 좋게 끌어들였다. 공동 노력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반도와 여순 항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일어난 이 첫 번째 외교적 충돌은 우리가 두 가지 길, 즉 극동에서 두 제국의 정책을 동맹의 토대 위에서 조율을 할 것인지, 아니면 무력 투쟁을 준비할 것인지 어느 하나를 단호히 결정해야 할 필요성을 그 내부에 포함하고 있었다.
로바노프 공은, 행위로써 그의 계획을 판단할 수 있다면, 투쟁을 예견하고 이를 위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유럽 열강 중에서는 독일과 프랑스를 러시아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영국은 분명히 이런 상황 외부에 있었다. 즉 여기에는 이미 향후 영·일 동맹의 맹아가 있었다. [주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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Н.Г. 마튜닌은 1898년 9월 16일자 서신에서 이런 동맹의 가능성에 대해 М.Н. 무라비요프 백작에게 경고했다.


시베리아 지역에 활력을 주고 그 생산력을 발전시킨다는 평화적이고 문화적인 구상에 따라 알렉산드르3세 황제폐하 치세에 처음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시베리아 철도는 제반 사정에 의해 매우 중요한 군사적 의미도 획득하게 되었으며, 태평양 연안에서 우리 지위가 강화되도록 촉진시켰다.
이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철로를 아무르 강의 좌안(左岸), 즉 러시아 쪽에 놓을 것인지, 아니면 우안(右岸)인 중국 쪽에 놓을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첫 번째 결정을 따르게 된다면 문화적·군사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의 이점이 있음은 물론이다. 1) 철도가 러시아의 본래 영토를 지나는 것이므로 이주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도울 수 있어 변방에 활력을 주고 [적에 대한] 대항력을 높여준다. 2) 남쪽인 만주 방면에서 쳐들어오는 적군의 타격 위험에 노출될 위험이 적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단점도 있었다. 1) 길이 굽어 있기 때문에 중국 영토 쪽으로 철로를 건설해 직선화하고 비용을 줄이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2) 아무르 강 좌안에서는 커다란 기술적 곤란에 부딪쳤다.
시베리아 철도를 북만주를 통과하는 중국 영토에 건설하여 철로를 직선화한다는 우리의 결정은 의심할 바 없이 거대한 정치적 행보로서, 이것은 상황을 불가피하게 얽히게 함으로써 아주 중요한 일련의 사건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과 별도의 협정도 맺지 않고, 공동의 정치적 프로그램도 없이 우리가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후자[공동의 정치적 프로그램]는 러시아와 중국의 공통된 이해관계라는 원칙 위에 1896년 5월 22일의 모스크바 조약으로 설정되었고 [주010]
원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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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5월 23일자 람즈도르프 백작의 서신에 대한 재무대신의 답신에서 인용.

, 그 후 같은 해 8월 27일 중국 정부와 러-청은행 사이에 만주 경유 시베리아 간선 철도의 직선화 계약이 체결되었다. 같은 시기에 이 은행과 관계를 갖고 있던 동청철도-법률상으로는 민간회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관영회사-가 설립되었다.
1896년 5월 22일의 모스크바 조약뿐 아니라 시모노세키 조약 후 겨우 8개월 밖에 안 된 1896년 12월 10일에 러-청은행이 설립된 것은 극동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의 징표라 볼 수 있다.
정상적인 조건에서 러시아 공업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시베리아 철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중국은 미합중국, 일본, 영국과 같은 경쟁국들과 경쟁을 벌일 만한 이익이 되는 시장이라 간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다지 유망할 것 같지 않은 경쟁을 지원한다는 목적만으로 새로운 은행을 설립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당치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극동에서의 적극적인 정책을 펴겠다는 생각이 있던 것이고, 이 생각은 그 후에 만주에 세운 일련의 상공업 회사들로 나타났다. 이 회사들은 재무부가 국고로 세운 것으로 러-청은행이 지배적인 지분을 차지하게 되어 있었다.
만주에서 철도와 일련의 상공업 회사의 건설로 우리가 활동하는 데는 무엇보다 실질적인 보장이 필요했다. 1896년 8월에 작고하신 로바노프-로스톱스키 공은 자기 계획을 부분적으로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공의 서거 후에는 그의 모든 생각 가운데 하나만이, 즉 중국과의 협정이라는 것만이 우리에게 굳어졌다. 그러나 이 협정 그 자체로서는 가망이 없는 것이었다. 만주에서 우리의 이해관계는 본질적으로 중국의 이해관계와 적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우리에 대적하기 위해 이 적대감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일본과 미합중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결국 로바노프-로스톱스키 공이 이루려고 했던 영국의 고립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대립적인 것이고 러시아에 대한 공통의 적대감으로 일시적으로만 단합한 것이라고 한다면, 영국의 정치는 아시아에서 자신의 두 경쟁자인 일본과 러시아를 서로 싸우게 하여 그 싸움에서 둘을 무력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일본, 러시아의 정치 상황이 어떠했든 상관없이 우리는 외국 영토에 전략적인 연락보급로를 건설하는 결정에 의해 극동에서의 우리의 전진 운동에서 새로운 분기점을 열었다.

 

{과제의 복잡성} [주011]

 

북만주를 경유하는 1,400 베르스타의 철도를 건설하여 시베리아 간선철도를 직선화한다는, 알렉산드르 3세 황제 폐하 때 이미 이루어진 결정이 나오게 된 이유는, 거리를 상당히 단축시킬 수 있으리라는 유혹 외에도, 철도가 아무르 강 좌안 우리 본래 영역에 있게 되면 만주 쪽에서 공격해오는 적의 공격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시베리아 간선철도를 직선화하는 사업에서는 우리가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든 구상을 고찰할 것이 아니라, 최단거리로 [러시아]제국과 블라디보스토크 간의 교통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우리 대신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완수하는 방법을 더 자세히 고찰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이 과제는 극동에서 러시아의 힘이 비교적 크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려웠다. 외교적인 책략으로 [우리] 위치를 보강할 필요가 있었다.
시베리아 철도의 직선화로 인하여 중국과,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일본 및 모든 열강-극동에서 서로 충돌하는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과 새롭고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로바노프-로스톱스키 공이 1895년 여순 항 문제의 해결에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인 예는 매우 교훈적이다. 그 당시 우리는 중국을 옹호하고 나섰고, 반대 진영에는 일본과 영국이 있었다.
중국과 우리의 관계는 우호적(상공업적 이해관계)이면서도 적대적(군사-정치적 이해관계)이다. 시베리아 간선철도의 만주 부분이 우리 태평양 지역의 군사적 방어 체계에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킬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중국에서 우리에 대한 적대감이 커져 가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바람과는 별개로 중국이 거대한 한 성(省)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위협은 여기서 생긴 것이었다.
우리는 타국 영토에 침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의 삶에 침입한 것이다. 철도통과지역에서 외국에 대한 이권 역사상 전례가 없는 주권(суверенитет)을 얻으면서도 이에 더해 이 지역은 어떤 정확한 한계 규정 [주012]
원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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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8조 . “…… la Société aura le droit absolu et exclusif de l'administration de ses terrains(이 회사가 자기 영토에 관한 행정관리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갖는다).”

으로도 제한받지 않았다. 의화단 [주013]
번역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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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 사건.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동지방, 화북 지역에서 발생한 배외격 인민봉기이다. 이들은 서양 문물,철도,기독교인등 무자비로 살해했으며, ‘부청멸양’을 구호로 배외격을 전개해 나아갔다. 청조 역시 이를 뒤에서 지원하나 결국에는 8개국 연합군(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일본)이 강력 진압했다. 이후 신축조약(베이징의정서)로 열강들의 이권침탈은 더욱더 심화되었다

봉기 후 동청철도회사는 철도 통행 지역에 자국 무장 경비대를 보유할 권리를 얻었다.
이런 특별 권리에는 중국에 대한 우리의 불신이 분명하게 들어가 있다. 그러지 않고 달리 어쩌겠는가? 전쟁 때 블라디보스토크와 교통이 단절되는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무엇으로도, 나중 어느 때에도 보상받을 수 없는 재난이 될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즉 자신에게 명백히 위험한 특권을 이웃 국가에 제공할 때 중국이 생각하는 구상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특히 깊게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는, 러-청간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때 걸출한 위정자이자 의심할 바 없는 애국자인 이홍장 같은 인물이 중심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홍장이 그와 같은 역할을 맡게 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이유는 당시 중국 상황이 출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 닥친 두 개의 위험 중에서 일본으로부터의 위험은 가장 먼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제거해야만 할 가장 근접한 것이었다. 그 후 만주에서 러시아의 처지가 매우 곤란하고 복잡해지자 새로운 복잡한 사태나 외교술에 의한 어떤 우연적인 출구에라도 희망을 걸게 되었다. 여기서 고려할 사실은 중국이 수백 년 역사 동안 증오심을 품어 왔던 백인종 국가들의 공격을 반격하기 위해 훌륭히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900년의 의화단 봉기는 이홍장이 권좌에 있을 때 일어났다. 이 봉기가 중국에 더 안 좋은 결과를 내는 쪽으로 귀결되자 이홍장은 어쩔 수 없이 러-청의 ‘우정’을 지속하겠다는 지지자로 나섰다. 그는 중국이 장차 분할될 것이라는 전망으로 우리 외교를 교란하면서 1900년 북경에 맞서 행동했던 열강들의 협조체제에서 러시아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홍장은 이런 교묘한 방법으로 러시아를 고립시켰고, 그런 후 중국은 전선을 급전환하여 러시아에 대항한 공동의 외교 행동을 위해 영국, 일본, 미국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적대적인 이런 행동의 역사는 1901-1904년 시기에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904년에 영국 정부가 발행한 외교문서집 [주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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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2-3글자 흐림] 1904). 만주와 우장(牛莊)의 러시아 점령에 관한 서한집. China ? 1904). Correspondence respecting the Russian occupation of Manchuria and Newchwang .

을 보면 알 수 있다.
이홍장 사망(1901년 10월 25일) 후 그의 정당한 후계자는 원세개였다. 러·일 전쟁 때 유럽식으로 훈련받은 5만 명의 군단이 마장군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전략상 중요한 전선 서쪽에 주둔했다. 물론 이것은 이미 우리에게 우호적인 시위라고 볼 수 없었다. 중국 당국과 관계를 유지하던 소위 마적[의화단]은 1900년 중국 군대와 공동으로 우리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했으며, 1904-1905년에는 일본인들을 도왔다.
1895년 이후 중국의 행동에서는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온, 우리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볼 수 있다.
러·중 관계의 발전에서 이홍장이 행한 역할에 관한 이상의 이야기들이 모든 사건이 끝난 후머리에서 생각해 낸 추상적 가설이 아니라 현실과 실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의화단 운동 이전에 이미 А.М. 베조브라조프가 이홍장의 정책을 바로 이런 의미로 평가하고 이 문제에 대해 당시 재무대신 비테(С.Ю. Витте)와 논쟁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주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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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인민 봉기와 철도 파괴의 가능성은 М.Н. 무라비요프 앞으로 보내는 마튜닌 Н.Г. Матюнин의 1897년 9월 12일자 서신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정치적 구상 외에도 모든 정황-사소한 일상적 현상에서 시작하여 더 커다란 현상으로 끝나는-때문에 우리는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지방 정부와 주민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철도 회사의 주권이 보장된 철도통과지역 외에도 이곳에는 러시아 직원, 러시아 전신국, 우체국이 있었으며, 러시아어가 지배했고, 그 후에는 러시아 경비대가 생겼다. 따라서 만주에서 러시아 철도는 마치 점령한 타국 영토에서 의기양양하게 펼쳐 들고 승리의 행진을 하는 국기 같았다.

 

{최초의 곤란들}

 

앞에서 서술한 상황에서 우리가 중국 영토에 러시아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자마자 남쪽에서 이 철도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철로 북쪽은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알려진 곳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로 남쪽의 상황은 불확실하고 불가해했다. 이곳은 인종과 종교가 우리와 다른 수백만의 과밀한 인구가 수백 년간 타국인과 완전히 분리된 채 살던 곳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주민들이 다양한 종류의 권력, 즉 중앙의 중국 정부, 반(半)자치적인 지방 기관, 만주에서 공인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공공연한 비적들과 비밀 단체들의 복잡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주에서 우리의 지위는 유럽지역 러시아의 국경에 있는 이른바 카자크 ‘선(линии)’의 상황을 상기시켰다. 그곳에서는 이전 선로[주변]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남쪽으로부터 공격의 위험성이 나타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타국 영토는 이전보다 의심할 바 없이 위험했으므로 그곳에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을 때 우리는 새로운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국 영토에서 우리는 완전한 주인이었지만 만주에서는 스스로를 철도통과지역-그 양쪽은 공격에 노출되어있는-주변에 사는 사람 정도로만 간주했기 때문에 위험성은 커졌다. 상황 전체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 영향력을 최대한 확대시킬 것을 우리에게 명령했다. 문제는 우리가 미치는 영향력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었다.

 

{로바노프-로스톱스키 공의 정책}

 

결국 러시아 정책의 과제는 만주에서 우리의 지위를 확보하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로바노프 공의 행동은 이런 면에서 심사숙고한 계획이라 볼 수 있다.
이 계획은 1896년 5월 거의 같은 시기에 체결된 두 협정문, 즉 만주 문제에 대한 중국과의 협정과, 한국 문제에 관한 일본과의 협정을 대조해보면 드러난다.
5월 22일의 협정은 만주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정치적으로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원칙을 확인했다. 그 후 이 지역의 북부에 시베리아 간선철도를 건설한다는 같은 해 8월 27일의 철도 계약은 그 논리적 결과였다.
하지만 중국을 믿을 수는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중국이 그 의무조항을 이행하도록 보장을 받아야 했다.
주지하다시피 1895년에 이미 로바노프 공은 독일과 프랑스, 두 열강을 러시아 편으로 끌어들여 적극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대신 [로바노프 공]이 신뢰할 만한 이 동맹국들을 나중에라도 포기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없었다. 이 동맹이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협박 하나만으로도 중국에 정신적인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1896년 5월 28일 로바노프 공은 일본과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러시아가 한국에 군대를 진입시킬 수 있는 권리였다. 사실 일본도 같은 권리를 얻었다. 하지만 한반도와 직접 맞닿아 있는 인접국인 덕택에 우리는 특권을 얻었다. 이 특권은 역량 면에서는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인 북쪽을 실질적으로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이 방면에서 중국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상기 협상에서는 만주를 남쪽에서 포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지위, 즉 주로 우리 철도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지향이 이미 보인다.
그 후 로바노프 공의 서거 후 우리는 여순 항을 점령했다. 러시아의 이 행동은 논리적으로 고인이 된 대신의 정책 구도에 포함되는 것이다. 즉 이 요새가 일본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시베리아 철도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우리에게 아주 불리한 시기에 러시아가 극동에서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라면, 요컨대 우리가 이곳에서 약체였다고 한다면, 우리가 직접 이 요새를 장악한 것은 일본이 이미 시모노세키 조약에 나타난 것과 같은 시도를 하는 것을 경고하는 바람직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여순 항 점령 후 만주 철도 남부 지선의 건설은 러시아에게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사업이었다. 러시아는 충분히 강력한 지역 해군기지나, 태평양과 핀 만 사이를 연결해주는 안전한 해로를 소유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만주에서 우리의 향후 모든 행동은 로바노프 공의 처음 정책 구도에서 직접 그리고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의 행동으로 증명되는 바와 같이 그는 만주에서 우리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준비로써 동시에 세 가지 책략, 즉 1) 중국과의 협정, 2) 프랑스 및 독일과의 협정, 그리고 3) 일본과의 협정-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에 러시아 군대를 진입시킬 권리를 얻었다-을 썼다.
이 권리에 의해 우리는 점령지와 군사력으로써 고리(環)처럼 만주를 남쪽에서 포위하면서 한국 북부를 ‘엄폐물’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 ‘엄폐물’의 보호를 받으면서 만주에 러시아의 지배적 영향력을 확립하고 안정적으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영향력은 중국 영토를 경유하여 [러시아]제국과 블라디보스토크 사이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간선철도의 교통로를 보호해주는 바람직한 보호막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 밖에 이 모든 조건이 이루어지자 비로소 여순 항과의 연락로도 바람직한 안전을 확보하게 되어 우리 후방은 강화되었으며 한국 북부에서 후방이 공격받을 위험은 약해졌다.

 

{М.Н,무라비요프 백작의 대신 취임 첫해인 1897년 러시아 정책의 계승성}

 

1896년 8월 18일 로바노프-로스톱스키 공이 서거했다. 1897년 1월 1일부터는 М.Н. 무라비요프 백작이 외무부를 관장하였다.
1897년 전 기간 동안 극동에 대한 우리의 정치적 판단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 우리에게 유리하게 조성된 상황이 여기에 비상한 도움이 되었다.
한국 국왕이 러시아의 역량과 능력을 믿고 우리의 보호를 받겠다고 결정한 후 한국에서 우리의 영향력은 커졌다. 자신의 외교를 위해 조선 왕후의 살해(1895년 9월 26일) 같은 방법을 사용한 일본인들의 모략에서 빠져나온 조선 국왕은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여 1896년 1월 30일부터 1897년 2월 3일까지 손님으로 머물렀다.
조선 국왕이 궁내에 러시아 경비대를 두려 한 것이나, 조선 군대에 러시아 교관단을 초빙하고 탁지부에 러시아 고문을 초빙하기를 바란 것은 이 같은 상황의 결과였다. 그에 상응하는 임명은 1897년 8월에 이루어졌다. 같은 시기에 러-한은행(Русско-Корейский банк) 문제가 해결되어 같은 해 12월 5일에 은행이 건립되었다. 러시아 신민이자 블라디보스토크의 1급상인인 브리네르(Ю.И. Бринер)가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한반도 북쪽의 두 바다를 이은 지역-에서 중요한 삼림채굴권을 얻은 것도 이 시기였다.
이 모든 것은, 만주에서 우리의 위치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에 요새를 세운다는 로바노프 정책의 전체적인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당시 우리의 계획에 대해서는 매우 중요한 문서가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 문서는 새로운 임명된 주한 대리공사 Н.Г. 마튜닌이 자신에게 하달된 구두 훈령을 기억해두려고 곧 바로 기록해놓은 것이다. 즉 그가 하달 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한국을 점령한다거나 심지어 보호통치를 할 의향도 없다. 러시아로서는 한국이 독립적인 상태가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아직은 이미 획득한 것, 즉 교관단과 탁지부 고문 임명에 머물러야 한다. 인력이 부족하고, 그 결과로 한국 재정을 어렵게 만들어 손실을 초래할 수 있는 관세를 우리 수중에 이관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보기에 오직 러시아를 겨냥한 듯한 일본의 무장 강화는 유감스럽게도 몇 년 후에 충돌에 이를지도 모른다. 야전군의 주요 군수품 발송지가 너무 멀고, 더구나 고립돼 있을 상태에서 그런 충돌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일본과 최대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1898년 여순 항 점령 결정과 한국에서 관영 사업(ведомственные предприятия)의 돌발적인 폐쇄}

 

1898년 1월 우리는 여순 항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우려, 즉 1896년 대대적인 무장에 착수한 일본-그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는 점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은 그가 우리를 겨냥해 획책하고 있던 전쟁이 시작되면 바로 이곳을 점령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여순 항과 한국을 거점으로 삼게 될 일본은 전쟁 초기에 우리에 비해 엄청난 이점을 얻게 될 것이어서 이러한 이점은 극히 위험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 일본은 바다를 장악한다는 이점도 갖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이 전장(戰場)에 근접해 있고 해군기지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용이했다. 대규모 상선대(商船隊)를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단기간에 한국에 상륙하는 일은 쉬웠다. 우리는 자위 수단을 취해야 했다.
일본이 여순 항을 점령할 위험을 경계하여 우리 자신이 여순 항을 점령함으로써 우리는 이중의 이익을 얻었다. 1) 이 요새를 포위하려고 적의 대군은 분산되었다. 요컨대 야전에서 우리 적의 힘은 그만큼 약해졌다. 2) 태평양 연안 지역에 훌륭한 항구가 우리에게 생겼다. 이 항구는 얼지 않기 때문에 특히나 중요하다.
후자의 상황과 관련하여 1905년 무렵에는 일본보다 더 강해지려는 계산으로 1898년에 실행에 옮긴 우리의 조선(造船)계획은, 일 년에 4개월 동안 얼어붙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만 있는 상황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의미를 획득했다.
여순 항 점령이 현명했다는 것은 여러 사건들로써 증명된다. 이 요새는 몇 개월 동안 10만 명의 적군을 이곳으로 분산시켰던 것이다.
군사 행동이 개시될 시기에 여순 항이 적절히 공고화되고 항구에 필요한 제방을 쌓고 수심을 깊게 하여 최대한 요새를 지켰다면, 1898년 1월에 채택한 결정으로부터 얻었을 이익은 훨씬 더 대단했을 것이고 여순 항은 전쟁 진행 과정 전체를 바꿔놓았을 것이다.
우리가 여순 항을 점령함과 동시에 한국에서 모든 관할 사업을 폐기한다는 외무부의 결정은 로보노프의 방침에서 새로운 방침-그 계기를 이해하기는 어려운-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전환이었다. 적어도 이 새로운 방침은 그 일관성이나 논리, 현실성에서 로바노프의 정책과 비교될 수 없다.
이러한 폐기 결정은 돌발적으로 일어났다.
한국 국왕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자마자 다시 일본인들의 영향력에 굴복했다. 일본인들은 완전히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군주로 행동해야 한다고 국왕을 부추겼다. 그로 인해 한국 국왕은 1898년 [주016]
번역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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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자신을 황제라 선포했다. 러시아 정부는 한국 정부에게 궁궐수비대나 군사교관, ‘탁지부 고문’과 같은 러시아의 계속적인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그렇게 물었다는 사실 자체가 부정적인 응답을 예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 정부는 한때 한국에 보내준 도움에 깊은 감사를 표시하고 앞으로 한국은 러시아의 지원이 없이도 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우리는 즉시 교관단과 탁지부 고문을 소환하고 러-한 은행의 활동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후 바로 1903년 5월에 외무부는 우리의 여순 항 점령과 한국에서 우리의 정책 사이에 존재했던-외무부의 견해로 볼 때의-연관관계에 관한 견해를 서술했다. 이것은 간략 보고서 [주017]
원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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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평은 황제 폐하의 시종무관 육군소장 보간 К.И. Воган의 간략보고서인 「만주 문제의 발저에서 1902년 3월 26일 조약의 의의」에 대한 외무부의 논평을 말한다. 이 보고서는 황제 폐하의 주재로 열린 1903년 5월 7일 회의에서 보고되었다.

에서 이루어졌다. 아래에 일부를 발췌해 인용해본다.
외무부는 무엇보다 먼저 “러시아는 그 보호를 받는 민족에게 은혜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베풀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러시아는 기존에 약속한, 한국에서의 재정 및 군사 사업 참여를 상황에 의해 포기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분야에 대한 일본의 직접 개입을 예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즉 도쿄 의정서 제2조는 조약 쌍방 중 한 나라에게 한국이 도움과 자문을 구할 경우, 양자 간의 사전 합의 없이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의무 조항을 조약국 쌍방에 부과했다.”
 

실제로 1898년 4월 13일(25일) 도쿄에서 로젠 남작과 니시는 전부 3개 조항을 담은 의정서에 서명을 했다. 그 중 제2조는, 두 열강은 “군사 교관과 재정고문의 임명에 관해, 이 문제에 대한 양자 간의 사전 합의가 없이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의무 조항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제3조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의 상공업 회사가 널리 발전하고 이 나라에 거주하는 일본 신민의 수가 상당함을 고려하여 [러시아]제국 정부는 일본과 한국 간 상업 및 공업 교류의 발전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의정서는 우리가 여순 항을 점령한 지 한 달 후에 체결됐으며, 외무부의 동일한 ‘해명서’에서는 여순 항 점령과 니시-로젠 협정 제3조라는 두 사실 사이의 연관관계에 관한 다음과 같은 판단을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가 두 개의 항구를 포함한 관동 지역을 점령한 데 대한 유일한 보상책이 상기한 협정문 제3조였다. 이 조항에서 [러시아]제국 정부는 일본과 한국 간 상업 및 공업 교류의 발전을 ‘방해하지 않을’ 각오가 돼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처럼 도쿄 정부는-러시아가 태평양의 부동항으로 나아가는 출구를 획득하는 대신에-일본이 20년 이상 한국의 상업 등 경제 기업 분야에서 자연스럽게 이룩해온 지배력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관념적인(platonic) 약속에 만족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토대 위에서 러시아 공업 기업들은 자본의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어떤 경쟁력도 보이지 못했다.”
“한국 문제를 다른 원칙 위에서 러시아와 협의를 해보자는 1900, 1901, 1902년의 잇따른 일본의 제안은 러시아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우리 외무부는 한국 내의 우리 기업들을 이 나라에 베푼 ‘은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외무부는] 이 기업들의 목적이 한국에 ‘은혜’를 베푸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곳에서 충분히 기반을 다져서 만주에서 우리의 지위 그리고 특히 이곳에서 철도의 안전을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
만일 모든 일이 외무부가 상상했던 것처럼 진행됐다면 우리 외교의 승리는 완전할 뿐만 아니라 믿기 어려울 정도였을 것이다. [일본과의]거래가 우리에게 극히 이득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일본은 그 거래에서 어떤 이익을 보았을까? 혹은 실제로 일본 외교가 그렇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근시안이었을까?
이런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 되는 것은 일본의 말이 아니라 그 행동들이다. 그 행동들은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한국에 있는 모든 기업들을 폐쇄하면서, 말하자면, 그곳에서 일본이 우려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에서 놨기 때문이다.
러시아인 탁지부 고문이 한국에서 소환되자마자 한국의 궁내부(министерств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имущества) 고문 자리에는 서울 주재 일본 공사직을 맡고 있던 일본인 가토 [주018]
번역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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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마스오(加藤增雄)

가 임명되었다.
일본의 그런 행동은 니시-로젠 의정서 제3조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탁지부’ 고문을 임명한 것은 아니었으며 우리가 트집을 잡을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이고 문구상의 말일 뿐이고, 일의 본질상 일본 대리인이 한국의 고위직 가운데 어떤 자리에 앉더라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이 일을 행하는 데는 미국과의 협의가 없지 않았다.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 서기 샌즈(Sands William Franklin)씨가 동시에 한국 궁내부 고문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 후 러시아 군사 교관단이 철수하자 한국 군대는 더 이상 러시아의 견본(сигналы)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일본인들이 훈련을 맡게 되고 일본 교관들-이들은 처음에는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는 것을 피했다-도 임명되었다.
이 모든 상황은 우리가 한국에서 물러선 자리를 우리의 적이 곧 바로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점차 한국을 수중에 넣기 시작했다. 일본은 자국 주민들 가운데 쓰레기 같은 자들을 이주민의 형태로 강제로 정주(定住)시켰는데 이들은 난폭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 당국의 조치와 행동에 개입하는 구실을 주었다. 일본은 경부선과 전신선을 건설하고 일본에서는 태환되지 않는 한국의 니켈 동전으로 비용을 지불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한국에 자국 상비군을 주둔시키기 시작했으며, 이 부대-물론 우리는 이것을 검증할 수 없었다-는 정기적인 교대를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상시 이동했다.
이처럼 한국에서 경쟁하던 두 열강의 처음에 대등했던 지위-1896-1897년 시기에 러시아의 군사·정치적 영향력이 우월했음은 분명했다-는 우리가 관영 기업을 폐쇄하면서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98년의 ‘유리한’ 조약[체결] 후 우리 외무부가 일본과 어떤 새로운 협정도 맺으려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치는 왠지 어느새 변화하더니 역전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1903년 중반에는 한국에서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우세하다는 얘기는 할 수도 없게 되었고 완전히 그 반대가 되었다. 러-일 교섭 초기에 일본은 ‘한국에서 일본의 이해관계-더구나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것도-가 우세하다’는 사실을 국제 문서에 인정하라는 무례한 제안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외무부는 이것에 즉시 동의를 하면서도 만주에서 러-중 관계에 일본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에 유리한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앞선 6년 동안 착실하게 전쟁을 준비했고, 한국에서 우리의 ‘은혜’나 만주에서 우리의 권리-이 권리는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인 이익 [주019]
원주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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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서 Английская Синяя книга, 문서 № 97.

이 되는 문화적인 기업이 만주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얻게 되는 것이었다-를 고려할 의사가 없었으며 러시아 점령군을 무조건 물러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요컨대 한국과 극동에서 우리 지위가 전반적으로 엄청나게 변화한 것은 1898년과 1903년 사이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때야 비로소 1898년의 러-일 의정서에 나타난 것과 같은, 러시아 정책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외교적 ‘성과’[믿을 수 없을 정도의 러시아 외교 정책의 ‘성과’]라는 게 사실은 우리의 거대한 외교적 패배였다는 사실을 우리 외무부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결국 우리 외무부는 1898에 [한]반도에서 우리의 영향력을 굳히는 데 실제적인 의미가 있던 한국 내 러시아 관영 기업을 폐쇄했고, 우리가 한국문제에서 사실상 물러서면 일본이 암묵적 으로 동의하여(tacitu consensu) 여순 항 및 만주에서 우리가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 충분히 보상할 것이라는 허구(虛構)에 빠져 한국과 만주를 동시에 상실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 외무부는 그토록 어렵게, 물질적인 희생을 감수하고 많은 세월 동안 극동에서 이룩한 우리의 모든 지위를 훼손했던 것이다.
 

주 005
교주(膠州). 산동성에 위치. ‘자오저우’로 발음
주 006
최초로 시베리아를 정복한 카자크 탐험대장
주 007
알렉세이 황제 때 니콘 총주교의 종교 개혁에 반대하여 박해를 당하며 정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분파. 본래의 정교가 아닌 러시아적인 정교를 주장했다 하여 구교도라고도 한다
주 008
미카도(御門). 황제가 드나드는 문을 지칭하지만 천황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말
주 011
이하 { } 표시된 것은 난외(欄外)에 적힌 글임
주 013
의화단 사건.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동지방, 화북 지역에서 발생한 배외격 인민봉기이다. 이들은 서양 문물,철도,기독교인등 무자비로 살해했으며, ‘부청멸양’을 구호로 배외격을 전개해 나아갔다. 청조 역시 이를 뒤에서 지원하나 결국에는 8개국 연합군(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일본)이 강력 진압했다. 이후 신축조약(베이징의정서)로 열강들의 이권침탈은 더욱더 심화되었다
주 016
1897년
주 018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주 003
1899년 자료.
주 004
싱가포르와 홍콩의 무역량은 1899년 4억 4천 4백 루블로 평가된다.
주 009
Н.Г. 마튜닌은 1898년 9월 16일자 서신에서 이런 동맹의 가능성에 대해 М.Н. 무라비요프 백작에게 경고했다.
주 010
1903년 5월 23일자 람즈도르프 백작의 서신에 대한 재무대신의 답신에서 인용.
주 012
조약 8조 . “…… la Société aura le droit absolu et exclusif de l'administration de ses terrains(이 회사가 자기 영토에 관한 행정관리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갖는다).”
주 014
중국([2-3글자 흐림] 1904). 만주와 우장(牛莊)의 러시아 점령에 관한 서한집. China ? 1904). Correspondence respecting the Russian occupation of Manchuria and Newchwang .
주 015
만주에서 인민 봉기와 철도 파괴의 가능성은 М.Н. 무라비요프 앞으로 보내는 마튜닌 Н.Г. Матюнин의 1897년 9월 12일자 서신에서 제기되었다.
주 017
이 논평은 황제 폐하의 시종무관 육군소장 보간 К.И. Воган의 간략보고서인 「만주 문제의 발저에서 1902년 3월 26일 조약의 의의」에 대한 외무부의 논평을 말한다. 이 보고서는 황제 폐하의 주재로 열린 1903년 5월 7일 회의에서 보고되었다.
주 019
영국 청서 Английская Синяя книга, 문서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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