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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회상, 논평, 자료에 따른 1895~1897년 일본의 대러 군사계획 기록 및 일본 민족성의 몇 가지 특징

Мемория о военных намерениях Японии против России в 1895-1897 года по воспоминаниям, заметкам и материалам, и о некоторых особенностях Японской националиности
  • 구분
    보고서
  • 저필자
    부딜롭스키
  • 문서번호
    ГАРФ,ф.543,оп.1,д.174,лл.1-11об.
  • 원소장처
    러시아연방 국립문서보관소
  • 대분류
    외교(국제문제)
  • 세부분류
    국제관계
  • 주제어
    러일전쟁, 러시아의 극동 정책
  • 색인어
    거문도, 나오노리, 묄렌도르프, 베베르, 황화론
  • 형태사항
    22  , 타이핑  , 러시아어 
1895, 1896, 1897년 일본에 거주하면서 그곳에 살던 외국인이나 러시아 상인 들과 만나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일본 사람들이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에게 얼마나 적대적이었는가를 눈으로 보고 생생하게 체감했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일본 및 특히 현지의 영국 간행물에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런 감정을 더욱 더 부추기려 노력하였다. 모든 것의 원인으로 제시된 것은 러시아의 약간의 압력으로 1895년 5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 측의 모든 불만의 근본 원인이자 그들이 러시아를 상대로 권리주장을 하는 근본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다. 19세기 일본과의 교류를 역사적으로 개관해 보면 러시아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만에는 이미 그 내력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가령 1803~1806년의 러시아 탐사대는 일본 해안에서 일본인들에게 적대적으로 보였을 어줍은 행동 때문에 아마도 처음으로 러시아인에 대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이 불만은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불필요한 쿠릴 열도를 사할린 섬과 교환하던 1875년에 우리와 일본의 관계를 첨예하게 만들어서, 이때부터 일본에 반러파가 생겨날 정도였다. 반러파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속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95년까지 그 존재는 정말 보잘것없었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다른 계획에 마음을 쓰느라, 즉 순전히 아시아를 향한 야망에서 한국을 그리고 중국과의 구원(舊怨)을 생각하느라(오만방자한 중국인들은 경우가 되는 안 되는 가리지 않고 정치 교류와 무역 교류의 모든 단계에서 무조건 일본인들을 깔보았는데, 복수심과 집념이 강한 무츠히토주 001
각주 001)
睦仁. 일본의 천황 메이지[明治]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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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그 내각은 당연히 이것을 언짢아했던 것이다) 반러파의 요구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일본이 중국에 승리하여 제멋대로 평화조약을 명하려 하였고 이것이 유럽 열강의 이해관계를 건드리자, 알려진 바와 같이 러시아, 독일, 프랑스는 한 무리를 이뤄 중국 편을 들었고, 영국은 일본 편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영국의 지원을 별로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에 양보를 해야만 했다. 정치 행위 하나하나가 전민족적으로 논의되는 일본 같은 나라에서 이런 개입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존재가 의심스럽던 바로 그 미약한 반러파가 급성장하여 쇼시주 002
각주 002)
일본의 쇼군, 다이묘 등을 정점으로 하는 가신단에 소속된 상급 무사를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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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름의 거대한 정치파벌로 부상하고 있고, 기억에 남을 이 시기부터 일본 전역에서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촉구하는 선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활하고 조심스러운 일본 정부는 자신은 이런 선동에 동조하지 않고 관여도 하지 않는 듯한 시늉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토 후작(일본의 재상)이나 오야마 제독(육군상), 가와카미 장군(육군 총참모장), 이토 백작주 003
각주 003)
이토 스케유키(伊藤佑亨)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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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상) 같은 친러 인사들조차도 마치 정부 생각을 따르는 듯이 행동하면서, 쇼시의 회합에 가서 일본으로서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고 전쟁을 하려면 믿을 만한 동맹국이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집회들의 논쟁에서 누가 진실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의심할 바 없는 사실 하나는 이런 집회들이 정부 당국이 참석한 가운데 항상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요컨대 이런 집회들은 미카도주 004
각주 004)
일본어로 미카도(Mikado)는 ‘帝(御門)’로 속세의 최고 통치자, 즉 천황을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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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필요한 것이었으며, 미카도는 분명 쇼시파에 전적으로 동조했지만 현명하고 조심스런 국가 통치자는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마치 쇼시파의 호전적인 과업들은 친러파가 처리하도록 맡겨 놓은 것 같았다. 이것은 러시아와의 친선을 떠들어대던 친러파 앞에서 정부의 진정한 의도를 위장하기 위한 정교한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친러파나 반러파나 정부 상층부의 진정한 의도를 몰랐기 때문에 쇼시파는 1895년 후반 러시아에 대한 전쟁 선포를 요구하는 특별 청원서를 미카도에 제출하기 위해 도쿄에서 인민 대표자 회의를 여는 방식으로 일본 전역에서 선동을 강화하고 있다. 그 후 드러난 것처럼 이 집회는 1895년 11월에 열렸고, 거기에는 인민 대표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육군 및 해군 장교도 참석해 선조들의 무덤 앞에서 일본과 중국의 다툼에 러시아가 개입한 것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검이나 그밖의 다른 것을 들고 맹세하는 당시의 소가극과 흡사했지만 정부는 제출된 청원을 교묘히 이용하여 러시아와의 전쟁을 민족 문제로 만들어버렸다. 이 불운한 때부터 러시아와의 전쟁은 결정되었고 친러파는 사라졌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은 다른 유럽 열강들이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더 심각한 사안인 데다가 이 전쟁은 민족적 성격을 띠게 될 수도 있어서, 사전 준비가 철저한 일본 정부는 민족 전체에 전술을 가르치려 고심하였다. 이것은 인민교육부가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학교에서 빠짐없이 교련을 실시하고, 지난 청일전쟁 중의 전투들을 예행연습하며 신호를 익히도록 조치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에 학교가 있던 일본 각지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장면을 아주 빈번하게 보았을 것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소년 소녀들이 지난 전쟁에 참전한 어떤 노병의 지휘를 받으며 행군 종대를 이루어, 대도시의 경우에는 음악대(역시 학생들로 구성됨)와 함께 학교에서 나오는 장면 말이다. 이때, 몇몇 학교의 학생들은 하나의 어떤 부대로 통합되었고, 시골이나 소도시에서는 미래의 군대가 신호에 따라 행진을 했으며, 학교에서는 소년들에게 신호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가장 호기심이 생긴 부분은, 어째서 소녀들이 이 행군연습에 참가하는가 하는 지적에 대해 일본인들은 걷는다는 것은 대체로 유익하며 또한 여자들도 군사 신호를 알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전투를 예행연습하는 이 교련 수업에서(일본인들은 이것을 다른 나라의 전투연습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수행했다) 왠지 일본인들은 중국 요새를 장악하거나 지상전과 해전까지 치르는 훈련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목적으로 도시 근처의 벌판에는 모형 요새가 세워졌으며, 참호와 방공호, 심지어 모형 선박까지 제작되었다. 전투 연습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종대를 이뤄 행군해 온 청소년들은 신호에 따라 중국인과 일본인으로 나뉘었는데, 중국인을 맡은 것은 소녀와 품행이 나쁜 학생 들이었고, 우수한 학생들은 일본인을 맡았다. 중국인 쪽이 요새를 점령하면 일본인 쪽은 “반자이”주 005
각주 005)
반자이는 1만 년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중국어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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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외치며 돌격해 요새를 차지했다. 그러면 중국인 쪽은 요새를 버리고 떠나고, 일본인 쪽은 요새를 점령해 중국기를 내린 뒤 일본기를 게양했으며, 게다가 불꽃놀이를 하고 폭죽을 쏘고 하는 일들을 하였다. 이렇게 8세에서 16세 사이의 모든 일본 청소년은 1896년과 1897년에 지금의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3만 개가 넘는 학교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 학교당 학생 수를 100명으로 잡는다면(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전장에서 활동하게 될 군이 어쨌든 1백만 명 이상이라는 아주 놀랄 만한 수치가 나온다.
러시아와의 전쟁 계획에 몰두하면서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군사력과 재원을 면밀히 조사하고 러시아 전쟁사를 아주 부지런히 연구했는데, 이것은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 얼마나 가능한지 아니면 불가능한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리하여 확실한 승리를 담보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기록 대상이 되고 있는 시기에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주의 깊게 관찰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즉,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민족 문제로 만들어 어느 정도 유리한 상황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서는 동방의 정치적 사안들에 관심이 있던 유럽 국가들로부터 러시아를 고립시켜야만 했다는 것,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했으며, 동시에 미래의 분쟁에서 영국을 수동적인 자세로 두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아주 심각하게 여긴 이 문제는 쇼시의 회합과 의회, 언론에서 오랫동안 열심히 토의되었다. 이미 1896년에 일본에서 러시아를 얼마나 연구했는지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 일본 잡지 『타이오(Таио)』주 006
각주 006)
태양(太陽). 정확한 이름은 ‘타이요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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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실린 기사 한 편을 원문 그대로 번역해 옮겨본다. 「영국과 러시아」라는 이 기사는 정치가이자 문학가인 오치아오 나오노리(Очиао Наонори)주 007
각주 007)
오치아이 나오노리(五鄕淸彦)인 듯. 오치아이 나오노리는 일본의 국학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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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쓴 것으로, 1896년 11월 혹은 12월에 게재되었다.
 

영국과 러시아주 008
각주 008)
이 기사의 날짜상 오류는 다른 부정확한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나오노리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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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나 러시아나 모두 지구상에서 매우 광활한 지역을 점유하고 있다. 러시아 영토가 좀 더 넓어서, 북으로는 백해와 북빙양을 경계로 삼아 하나의 선으로 끊임없이 뻗어나가고 있고, 남으로는 흑해 연안과 중앙아시아까지 미치며, 서쪽에서 동쪽으로는 하나의 연속선으로 뻗어 동시베리아의 해안에까지 이른다. 이 광대무변한 공간은 거의 평지로, 기후와 자연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자연자원이 풍부하긴 해도 공간이 계속해서 확장되지 않는다면 러시아의 위력을 완전히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영국의 광대한 영토도 전 세계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있지만, 영구적인 평화를 통해 소유권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영국의 위력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지구상의 다른 국가들 가운데 그처럼 광범위한 영토를 소유한 국가는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그처럼 광범위한 과제를 안고 있지도 않다. 이 때문에 대외교류 분야에서 두 나라는 우선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대외교류 분야에서 두 나라의 관계에 관해 말하자면, 두 나라는 아직 의견이 일치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러시아의 공격적 과제가 영국의 방어적 과제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러시아가 역사적인 과제 때문에 새로운 영토 점령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같은 보호령들을 만들고 있고 페르시아, 벨루치스탄,주 009
각주 009)
파키스탄, 이란,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있는 인도양 북쪽 해안의 역사적인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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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시아(아르메니아), 터키, 슬라브 지역, 그리고 심지어 폴란드에서도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 반대로, 영국이 새로운 점령 정책을 펴는 곳에서 러시아는 피억압 민족을 지원하려 노력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영국에는 이익인 것이 러시아에는 근본적으로 불이익이 되는 것이다. 두 나라가 처한 이런 상황은 그 밖의 다른 모든 나라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둘 중 한 나라가 숙원 과제들을 달성할 것으로 예견될 경우 그것은 거의 불가피하게도 전세계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예단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나라의 상호 적대적 관계, 특히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두 나라의 태도는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대단히 바람직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당연히 위험하기도 하다.
황제 표트르 대제의 유훈인 러시아의 공격적 과제는 가장 중요하게 다음 세 가지이다. 1) 서유럽에서 러시아의 경계는 콘스탄티노플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2) 중부아시아에서는 인도반도 전체를 아우른다. 3) 아시아 대륙의 변경에서는 태평양 쪽으로부터 한국과 요동반도가 러시아 영토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 같은 러시아의 과제들은 영국에 많은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그래서 영국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 애쓰고 있고, 러시아는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러시아의 집요함은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들에서 드러났는데, 러시아는 이를 위해 모든 역량을 투여한 바 있다. 표트르 대제 이래 러시아는 이 때문에 터키와 몇 차례나 전쟁을 했던가! 그리고 자신의 숙원 계획을 실행하는 일에 몇 번이나 착수하였던가! 그러나 영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반대로 러시아는 지금까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표트르 대제의 제1차 터키 전쟁은 아조프 해의 점령으로 끝났지만, 그 뒤 1711년에는 완전히 격파를 당해 터키에 아조프 해를 돌려주고 평화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흑해 연안에 대한 러시아의 희망이 이것으로 사라지지는 않았다.
여제 예카테리나 2세는 터키와의 전쟁을 통해 1774년 크림반도를 영유하였고, 터키와의 다음 전쟁 때인 1792년에는 베사라비아 조약주 010
각주 010)
야시조약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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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라 흑해 연안 지역이 러시아로 넘어왔다. 그 뒤 니콜라이 1세는 흑해에서 독점적 항행권을 획득하길 원했고, 이것은 다시 1853년 터키와의 전쟁에 빌미가 되었으나 영국‐프랑스 군에 패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 전쟁은 크림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1877년 터키에 전쟁을 선포했다. 6개월간의 끔찍한 유혈 전투 끝에 러시아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산스테파노 조약의 7조 아니면 8조에 따라 숙원 목표를 이룰 뻔했다. 그런데 다시 영국이 다른 유럽 열강과 합의하여 반대함에 따라 이 조약은 베를린 회의에서 심의에 부쳐졌고, 러시아는 서너 군데의 영토만 얻었을 뿐이다. 이런 결과가 러시아에 얼마나 격렬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는지! 그렇다. 지중해의 동부 지역을 점령하고 유럽의 위세를 저지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획득하려는 러시아의 열망은 표트르 대제가 유훈으로 남긴 대를 이은 과업이자 목표인 것이다. 만일 러시아가 목표를 이루었다면 어떤 나라보다도 영국이 가장 괴로웠을 것이며, 아드리아해에 연한 오스트리아나 이탈리아보다도 훨씬 더 괴로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은 현재 지중해를 거의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지배하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동방의 모든 식민지에서 자국의 무역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지중해의 핵심 지역을 장악하고 거기에 함대를 구축한다면, 영국은 여기에 아무리 분함대를 늘리더라도 자국 무역의 안전에 대해 결코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지브롤터 해협과 홍해의 중요성이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할 것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와 함께 러시아의 위세가 남쪽으로 확산될 경우 다른 유럽 국가들도 절대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런 경우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늘 영국에 동조했던 것이다. 영국은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 등을 점령한다는 바로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자국의 위세에 가장 큰 위협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영국은 이를 방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만일 러시아가 이곳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게 된다면 표트르 대제의 두 번째 유훈인 러시아의 인도 진출은 결코 어렵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다.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강력한 권력을 쥐고 통치하던 지난 시기는 러시아에 평화로운 시기였는데,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치하에서는 러시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대단한 변화는 급작스럽게 발생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훈과 관계 있는 아르메니아 사태도 바로 그런 경우로, 이것은 부득이하게 유럽 국가들의 개입을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터키는 영국의 맹렬한 군사행동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정책과 달리 러시아에 기대려는 의향을 보였고, 반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는 영국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만일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영국에 대한 지원이 기정사실로 되었다면 러시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어쨌든 상황은 머지않은 미래에 콘스탄티노플이 러시아 아니면 영국으로 넘어가도록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이제 황제 표트르 1세의 두 번째 유훈, 즉 러시아의 인도 진출 문제로 넘어가보자. 현재 파미르에 국경이 설치되면서 그곳 사정은 마치 평온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이는 중앙아시아 철도를 연장하려는 러시아의 계획을 보면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이제는 역사로 눈을 돌려, 표트르 대제 때의 1차 페르시아 전쟁 이후 러시아가 이 방면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살펴보자. 러시아는 인도의 보고(寶庫)로 가는 길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즉, 1811년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때는 자바이칼 지역을 점령했으며, 이 전쟁이 끝난 후 1826년에는 양국 사이에 국경을 확정하고 페르시아로부터 배상금으로 350만 파운드스털링주 011
각주 011)
영국 파운드의 공식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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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아냈던 것이다. 이때부터 캅카스 전체에 대한 정복이 시작되고,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토 확대, 즉 인도 방면으로의 진출이 시작된다. 이 때문에 영국은 페르시아와 몇 번이나 동맹을 맺었던가! 원정대는 몇 번이나 조직했던가! 국경은 몇 번이나 확정했던가! 그런데도 지금까지 편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국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러시아는 쿨자와 북만주 지방을 점령하려 했는데, 이 지방들은 1871년 조약에 따라 러시아로 넘어갔다가 중국인들이 이 조약에 불만을 품고 전쟁을 하겠다고 위협하자 1881년 조약에 의해 중국에 반환되어 모든 일이 평화롭게 종결되었다. 이와 같이 러시아는 인도로 진출하라는 표트르 대제의 유훈을 한 번도 방기한 적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유훈의 궁극적인 실현은 오로지 우연한 기회에 달려있게 된다. 러시아는 전세계적으로 중요성을 획득하려는 야망이 있기 때문에 조만간 인도양 쪽으로 손을 뻗쳐야만 할 것이다. 영국에 대해 말하자면, 이 나라는 인도에 속령을 확보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곳에서 영국은 부(富)를 얻고 있는데 이것이 없다면 영국은 존립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가 인도를 점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무엇보다 먼저 보스포루스 해협과 지중해의 연안에 발판을 구축하는 것이다. 반대로 영국은 이를 막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도를 자기 것으로 확보해야 한다. 따라서 러시아도 영국도 터키를 자신들의 영향력과 힘 아래 두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러시아가 지중해 연안에 발판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럴 경우 영국은 즉시 그곳에 대량의 군대와 함대를 항시 준비 태세로 유지시켜야 할 텐데, 그 비용은 어마어마하게 높다. 따라서 인도에서 나온 많은 수입을 지출하게 될 것이다. 만일 영국이 막대한 군비를 소홀히 한다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것이고, 필요할 경우에는 군대와 군수품을 희망봉을 돌아서 보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금부터 영국에 가장 고역스러운 문제가 된다. 러시아는 행동이 극히 조심스럽고 대외교류에서 풍부한 기지를 발휘하기 때문에 기회를 빈틈없이 이용할 줄 알고 한번 목표로 삼은 것은 결코 잊는 법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 점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좋은 기회가 오더라도 결코 인도 국경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영국은 지중해에서 자국의 위력을 확보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러시아가 설정한 세 번째 과제의 지향점은 만주를 통해 한국과 요동반도를 장악하는 것이다. 아이훈 조약에 따라 1853년주 012
각주 012)
1858년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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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텐진조약에 따라 1859년부터, 그리고 베이징조약에 따라 1860년부터 러시아는 만주 우수리 강 유역의 드넓은 만주 땅을 무력 사용 없이 획득했다. 하지만 아직 이것이 다가 아니다.
러시아는 청일전쟁의 결과물로 일본이 조약을 통해 중국에게서 양도받았던 요동반도를 빼앗았다. 그런 당사자가 [전에는 일본에 대해서] 동방의 평화 유지를 구실로 독일, 프랑스와 연합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요동반도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흔히 말하듯이 실제로 이런 요구의 진정한 원인은 중국 공사 오시 심(한자의 일본식 독음)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체결한 비밀조약에서 찾아야 한다. 러시아의 한국 정책에 대해 말하자면, 만주 지역의 점령으로 러시아는 한국과 가까워졌으나 동유럽 문제와 중앙아시아 사태로 당장은 이 나라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884년 러시아 정부는 한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대리공사 베베르주 013
각주 013)
칼 이바노비치 베베르(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 1841.6.17~1910.1.8). 제정러시아의 외교관으로 1884년 조선 공사에 임명되어 통상 조약을 체결했으며, 1896년에는 아관파천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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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전권대표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베베르 씨는 대리공사이자 총영사로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곧이어 한국 정부 고문이던 모렌도르프(Морендорф)주 014
각주 014)
묄렌도르프(Möllendorf, Paul George von)의 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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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의 도움을 얻어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러시아는 이를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자신도 어떤 형태로든 한국을 점령하지 않겠으니 영국은 섬에서 철군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는 사이 한국의 대리공사는 데니(Дени) 고문의 협조를 얻어 다양한 방법으로 이 무지한 왕조국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였다. 특히 그는 자기 아내를 왕비와 친하게 만들어 이 나라에 점차 러시아에 대한 애정을 심어 주려고 애썼다. 1888년 조약은 러시아에 각별한 이점을 제공했고, 그리하여 러시아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때부터 대리공사 베베르는 한편으로는 왕과 왕비와 친목을 다져 나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워둔 계획을 수행할 적당한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과 청나라가 한국 문제에 직접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손을 뻗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청일전쟁이 그 기회를 제공했다. 청나라가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면서 한국을 포기했던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기회이고, 요동반도 문제에서 일본이 러시아의 요구에 양보한 것이 두 번째 기회이다. 반일파의 비밀 음모로 초래된 10월 8일과 1월 11일의 사건주 015
각주 015)
한국에서 일본 공사가 한국의 왕비를 살해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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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 일본의 후퇴 정책은 세 번째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이 기회들은 모두 베베르 씨와 그 아내의 10년에 걸친 활동의 결과로, 이것은 자기 일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며 러시아가 설정한 과제들이 이루어지리라는 전조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한국을 사실상 자국의 보호령으로 삼기 위한 근거를 이미 충분히 갖게 된다. 러시아가 숙원 목표를 최종 실현할 때까지는 당연히 몇 가지 변화가 있을 것이고 정치적 문제도 어느 정도 제기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과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것인 만큼, 국가 자체가 멸망하지 않는 한 왕이 되었든 대통령이 되었든 그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일로매진할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 목표 달성을 위해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고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할지라도 그 목표는 달성될 것이라고 누구나 예단할 수 있다.
이제, 러시아가 자국의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어느 나라가 가장 위험에 처하고 어느 나라의 국익이 최고로 의미를 갖게 될지 물음을 던져보자. 가장 많은 고통을 겪을 나라는 일본이라는 사실 외에 답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세 번째 목표를 이룰 경우 동해주 016
각주 016)
원문 표현대로 하면 ‘일본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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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중국해를 자기의 영향력 아래 놓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아시아 대륙에 우리 세력이 확장할 수 있는 통로는 영원히 닫히게 될 뿐 아니라 포르모자주 017
각주 017)
대만의 옛 이름. 16세기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발견해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붙인 이름으로, 이 명칭은 1895년까지 유지되다가 일본에 의해 대만으로 개칭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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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포함한 우리 열도와 우리의 해상무역 전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러시아가 과업을 완수하게 되면 우리의 정치, 상업, 군사적 미래는 완전히 막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이해관계 다음으로는 곧바로 영국의 이해관계가 걸린다. 태평양 연안에서 러시아의 위세가 나날이 커지면 영국의 위세는 침해를 당하게 된다. 하지만 영국인들의 이런 손실을 일본의 손실과 비교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어떤 사람들은 러시아가 남쪽에 있는 한국으로 진출하면 영국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영국은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식으로 보지 않는다. 영국이 장래에 북중국과 한반도에 어떤 기대를 품고 있는지 헤아리긴 불가능해도 현재로선 확실히 영국의 위세가 이 지역에서 아주 멀리까지 뻗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이 지역에서 영토를 획득할 기회를 모색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이 영국의 상업적 이익에만 직접적으로 위협이 안 된다면, 다른 이해관계가 심하게 저촉되더라도 영국은 러시아의 행동에 대해 무력을 써서 무조건 억지로 대항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러시아가 한국을 장악하기로 결정하면 영국은 러시아가 거문도에서의 철군을 요구할 때 했던 약속을 언급할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러시아는 그런 비난의 빌미를 주지는 않을 것이고, 틀림없이 자기 행동이 정당해질 수 있는 호기를 기다릴 것이다. 요컨대, 한국에서 러시아 세력이 확산되는 것은 영국이 무력으로 그것에 대항할 만큼 그렇게 거부할 사안은 아니라는 말이다.
프랑스, 독일 및 그밖의 국가에 대해 말하자면,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든 이 나라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입장에서 러시아의 확고한 조치를 바라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즉 어떤 식으로도 영국의 이해관계와 비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위험한 오해를 피하려면 지금 우리 쪽에서 큰 결심을 해야 한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러일동맹이 우리의 구원책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영국과의 동맹을 제안한다. 하지만 두 견해 모두 헛된 논의일 뿐이다. 영일동맹을 논하는 사람들은 러시아가 우리의 그런 정치 행보에 겁을 먹고 남쪽으로의 진출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한국에서 영국의 이익과 불이익이 우리와 동일하다면 영일동맹을 맺기는 당연히 쉬울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의 이해관계는 그 가치가 똑같지 않으며, 또한 영국으로서는 유럽과 인도에서의 이해관계가 우선적인 의미를 갖는 데다가 지금 고찰하고 있는 문제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의 진심에 희망을 걸 수 있다면 그런 동맹은 가능할 테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단점이 있다. 즉, 현명한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영국은 필요 없이 자국 병력을 멀리 파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밖에도, 대외교류 분야에서의 영국의 무능력은 베네수엘라 사태를 통해 여지없이 드러났는데, 베네수엘라에서 영국은 치욕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국의 요구조건을 포기해야만 할 정도로 추락했다. 영국의 앵글로 색슨족 정신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과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한들 무슨 이익이 있을까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모든 것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헛된 것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동방에 평화를 공고히 하고 영국의 침해 기도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 동맹이 자국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면 우리의 제안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결론은 우리에게 동맹이 필요한 그만큼 러시아에는 동맹이 필요 없으며, 동맹은 러시아에 무조건 손해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동맹은 러시아가 설정한 과제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은 특히 청일전쟁 후였는데, 당시 러시아는 중국이 극도로 쇠약해 있으며 일본은 고분고분하다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러시아는 또한 이미 몇 가지 우호적인 행동으로 중국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고, 동시에 한국에서는 친러파를 확대시켜 놓았다. 그런데도 러시아가 일본과의 동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까. 동맹을 맺기 위해 우리가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러시아는 이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치자. 그러나 이 동맹에서 생기는 이익은 전적으로 러시아 차지가 될 것이다. 아무리 동맹을 맺고 싶더라도 그런 나라와는 하지 말 것!
영국과 러시아가 동방에서 갖는 의미를 검토했다면 나머지 국가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며, 그 경우에 발생하게 될 문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결론이 어떻든 우리 정책은 반러, 반한, 반중, 반영, 반아시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 문제들은 모두 이 글에서 다룰 사항이 아니며, 특히 몇 가지 문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 어쨌든 가장 바람직한 것은, 우리 정부가 응당 필요한 결단력과 확고함을 가지고 동방 전체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도록 고심하고, 그것을 통해 국익을 확보하는 일이다.
영국과 러시아를 가리켜 세계의 거인이라 일컫는다. 영국과 러시아는 동유럽과 인도에서 상호 불신과 증오를 가지고 서로의 정치 행위를 주시하고 있으며, 영국이나 러시아 모두 똑같이 동방의 각종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서로에 대해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러시아는 유리한 공세적인 위치에 있으며, 영국은 불리한 수세적인 위치에 있다. 만일 이 두 나라의 대외교류 관계가 좋지 않다면 다른 국가들도 반드시 이 반목 상황에 휘말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오랫동안 평화로운 시기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나라의 정치에 관해 말하자면, 영국은 항상 강도처럼 직선적이고 무례하게 행동하며, 러시아는 교활한 사기꾼처럼 신중하고 유연하게 행동한다. 영국이 베네수엘라와 트란스발에서 했던 행위들주 018
각주 018)
영국이 트란스발에서 했던 행위란 보어전쟁을 가리킨다. 1899년 영국은 금과 다이아몬드를 획득하기 위해 보어인이 건설한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침략하여 1902년에 영국령 남아프리카로 병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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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타국 영토에 대한 또다른 강제 점령은 다름 아닌 명백한 강도짓이다. 러시아의 영토 획득 방법에 관해서 말한다면, 이 나라가 유일하게 즐겨 쓰는 방법은 약하고 가난한 모든 국가에 선심을 베푸는 것으로, 이는 다름 아닌 교묘한 사기행각이다. 지금 한국과 터키도 이 사기에 걸려들 뻔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19세기 말 러시아와 영국의 위상은 우리가 충분히 밝혀놓았다. 하지만 이 4년 동안과 20세기 초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달리 말해 강도와 교활한 사기꾼 중에서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하지만 그곳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나라는 위대한 역할을 할 준비를 해야 하며, 당연히 주의 깊게 모든 일을 주시하면서 필요할 경우에는 유리한 상황을 과감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 글의 저자가 일급 정치가가 아니라 단순한 글쟁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일본인들이 러시아를 얼마나 훌륭하게 연구했는가를 보여주는 확실한 지표가 될 것이다. 이에 더해, 일본에는 러시아에 관한 온갖 출판물이 수두룩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1896년에 러시아가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 후작이 러시아에서 고등교육을 받은(특히 신학대학을 졸업한) 일본인들에게 맡긴 임무를 설명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일본 정부가 제때 신경을 썼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사실은 가까운 장래에 일본 정부가 갖고 있는 음흉한 의도를 분명하게 집약적으로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공부한 일본인들에게 맡긴 임무는, 추적이 가능한 선에서 본다면, 확실히 엄격하게 고안된 계획안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두 개의 범주로 나뉜다. 첫 번째 범주에는 러시아-일본어 입문서주 019
각주 019)
저자의 자필 사인이 들어간 실제 책자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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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들어가며, 두 번째 범주에는 군사심리학을 주제로 엮은 저술들이 들어가는데, 즉 일반론으로 러시아인의 성격을, 개별론으로 러시아 병사의 성격을 특징짓고 있다. 이 저술들의 일부 저자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다방면으로 환대를 받던 유명인사들이다. 시민 활동가와 정치가 들이 각자의 일을 하고 있던 그때 군 당국은 더욱더 강도 높은 활동을 했다. 해군 당국은 영국에 거대한 함대를 주문했고, 모두 5개의 해군공창에 도크와 선박 건조(建造)용 자재를 설비하는 일에 맹렬히 착수했다. 육군성은 각종 무기와 예비탄약을 보관할 창고를 짓기 위해 병기고용 기계란 기계는 모두 주문했다. 이미 1896년에는 아카바네(도쿄 교외에 위치)에 있는 해군성 병기고에 얼마나 훌륭한 기계들이 설치되었는지 볼 수 있었는데, 이 기계들은 하루 작업 시간 동안 47mm 대포에 필요한 통합 약포를 2천 개까지 만들어냈다. 청국과의 전쟁이 이제 막 끝났는데도 그곳에는 속사포 창고가 있었다. 창고 개수를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으나 몇 백 개라고 단정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징후들을 볼 때, 일본은 아주 면밀하게 러시아를 연구하고 있으며 열심히 전투수단을 장비하고 있다고 확실히 결론 내릴 수 있다. 일본이 어떤 군사행동을 할지, 장비는 언제 끝날지에 대해 당시에는 당연히 확신있게 얘기할 수 없었는데, 이는 파벌들이 완전히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가령 쇼군주 020
각주 020)
將軍. 일본 막부의 수장을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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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달리 말하면 구질서 추종자인 사츠마 번)나 보수주의자들은 다른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말하자면 필리핀 제도를 점령하고 순다 열도주 021
각주 021)
말레이 반도에서 아시아 대륙 남동쪽 몰루카 제도까지 뻗은 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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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나아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점령한다는 계획이다. 많은 일본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자기네 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계획은 1896년 6월 5일자 『타이요오(Тайёо)』지에 실린 1등 대위 기모츠키의 글 「열도의 여명」(시마노 아네보노)에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영국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수치화된 자료를 통해 일본이 영국보다 우월한 점들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세계 일류 열강이 될 것이며, 심지어 영국을 굴복시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주 022
각주 022)
나오노리의 기사 12쪽에서도 이 계획에 대한 암시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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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벌은 꽤 대단했으며,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확신을 갖고 증명하였다. 그러나 쇼시파 쪽에서 생각하기에 그런 계획은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여 러시아로부터 응당한 배상금을 받을 경우에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논쟁에서 돈 문제는 아주 강력한 미끼가 되어, 러시아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자들은 인민에게 일본의 전투수단이 실제로는 외국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다고 쉽게 주장할 정도였다. 마지막 경우는 일본인들이 완전히 옳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해서, 그야말로 공식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거나 어렵게 비싼 대가를 치르고 일본에서 얻은 모든 정보는 분명히 이 나라의 전투수단과 관련해 고의적으로 틀리게 되어 있으며, 웬일인지 자국의 전투수단을 다루고 있는 다른 많은 통계 수치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재정도 포함된다. 러시아 신문 등에서 이야기되었던 일본 재정에 관한 정보가 완전히 틀리다는 것은 수중에 있는 수치로도 쉽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1870년 이후 일본의 연간 수출입 보고서를 가지고 연도별 무역을 조사해 보면, 우선 일본의 수출액이 수입액을 평균 25%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일본에서는 매년 2,000만 엔의 금이 축적되며, 34년 동안이면 5억 2천 2백만 엔 이상이 될 것이다. 여기에, 수입의 상당 부분은 외국인들이 소비하였고주 023
각주 023)
일본 사람들은 외국 상품을 좋아하지 않아 자국 생산품에 만족하고 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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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한국과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두 번째로,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독일 정부는 일본 해역에 1년 내내 자국 분함대를 주둔시켰는데 이 분함대들은 일본에 적지 않은 금을 남겨 두었다. 마지막으로, 일본 항구를 열심히 드나든 상선들도 역시 일본의 모든 서비스와 물품에 대해 금을 지불했다. 마침내 금은 일본 자체에서도 채취되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그 이상의 금을 한국에서 들여오고 있다. 이렇게 해서 모든 항목에 따라 금을 정확하게 추산해보면 전쟁 시작 무렵에 일본에는 20억 엔 이상의 금이 있었을 것이며, 이를 통해 당연히 일본 정부는 비교적 쉽게 국내 채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된다.주 024
각주 024)
일본에 금이 얼마나 많은지는 아무런 재정적 강제 없이 금본위가 도입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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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민족성의 몇 가지 특징

어느 민족이든 그 성격은 주로 주변 환경이라는 외적 조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기 마련이고, 이때 한 민족 집단이 다른 민족과의 교류에서 오래 고립돼 있으면 있을수록 그들의 생활양식과 사회제도에서는 특수성이 더 많이 나타난다. 바로 일본의 민족성이 수백 년 동안 꼭 그런 조건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일본인을 연구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 얼마간이라도 일본인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러시아어 저술은 한 권도 없으므로, 이 짤막한 기록에서 그토록 광범위한 주제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거의 증빙자료 없이 개괄적으로만 가능하다. 어쨌든 여기서는 일본의 역사, 일본에 있는 종교 관련 논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접적 관찰을 자료 삼아 본 주제를 논할 것이다.
 
우선 먼저 일본의 역사를 보면 일본인들은 태곳적부터 호전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미카도와 봉건 제후 사이의 내란이 서기 1192년까지 끊임없이 역사의 페이지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192년에 요리모토주 025
각주 025)
源 頼朝. 가마쿠라 쇼군의 창시자이자 그 첫 통치자. 재위 기간은 1192~11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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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쇼군을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하였으며 미카도에게는 정신적인 권력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쇼군은 내란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다이묘주 026
각주 026)
大名. 일본에서 10세기경부터 19세기 말까지 넓은 영지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유력자를 일컫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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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무사도 정신은 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심심찮게 무기를 드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란 이외에도 일본인들은 일본국 북쪽과 마츠마이, 사할린 등에 거주하던 아이누족과 자주 싸우고 한국인들과도 자주 전쟁을 벌였으며, 역시 전쟁터가 된 포르모자를 포함해 일본 열도 전체에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하지만 일본 역사를 메우고 있는 모든 전쟁 관련 사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조선 점령이다.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조선은 서기 200년에 전설적인 진구황후(神功皇后)에 의해 처음으로 점령을 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일본 역사가들이 날조한 것인지는 말하기 어려우나, 쇼군 히데요시가 1592~1598년에 조선을 점령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는 사실상 조선을 일본에 복속시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과감하게 습격하여 그들을 매우 불안에 떨게 했고 해안가 주민들을 약탈했다. 따라서 논쟁의 여지가 없고 역사에 의해서도 확인되는 두 번째 사실은 서력기원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일본인들은 항해술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단 하나의 올바른 결론은, 일본인들은 뛰어난 항해자임이 틀림없으며 이들의 모험심은 분명 에게 해의 그리스인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후의 역사는 서기 552년에 한국을 통해 불교가 일본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주 027
각주 027)
불교와 함께 중국 문화도 들어왔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도교 문화를 완전히 [1단어 판독불가]한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이는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일본인을 강도로 생각했으며,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는 중국 황제의 성명서에는 이에 대한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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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 이성의 판단에 바탕을 둔 매우 철학적인 이 교의는 일본에 급속히 퍼졌다. 일본인들에게는 조상을 숭배하는 자신만의 종교(신도)가 있었지만 불교철학은 비할 데 없이 고상한 것이어서 지혜로운 일본인들은 곧 이것을 거의 주된 종교로 삼았다. 그런데도 미카도 왕조는 변함없이 신도에만 충실했다.
여기서 일본의 민족적 특징을 다시 지적하자면, 일본의 민족성에서는 공자나 부처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한 번도 출현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늘 위대한 모방자에 불과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명제에서 아주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즉, 일본의 민족적 특수성은 자신만의 민족적 위인이 전혀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모방 능력은 틀림없이 창의성을 잠식하면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이 창의성은 유럽과 심지어 아시아의 제민족을 말레이 족과 예리하게 구별시켜 주는데, 일본인들 역시 바로 이 말레이 족에 확실히 속해 있다.
이상에서 밝힌 일본의 민족적 특성 세 가지는 일본인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만들어 주기에는 근본적으로 너무나 불충분하다. 그렇지만 주요 요소를 전반적으로 살펴본 후 몇 가지 결론을 위한 근거를 마련하는 일은 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그 몇 가지 결론을 해명하는 것이 굉장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천 년의 시기 동안 일본을 지배했던 종교인 불교의 본질을 확인해야 한다. 불교는 신과, 신이 인간에 불어넣은 신적인 요소인 불멸의 정신과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해 인간에게 아무런 관념도 제공하지 않는다. 부처의 교의는 인간의 순수 이성의 판단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 교의에 따르면 인간의 삶의 본질은 지상의 삶으로만 귀결될 뿐이며, 지상의 삶은 고등동물에서 하등동물로 또는 그 반대로 온갖 변모를 거듭하면서 진화한다. 이 진화[윤회]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현세를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것, 즉 존재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교의는 일본인들에게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는 합리주의자라는 딱지가 붙게 만들었고, 그 결과 일본인들은 대단히 질서정연하고 따라서 정확한 계산을 기본으로 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며 정확한 계산 없이는 어떤 일에도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들의 그와 같은 생활 원칙은 엄청난 결과를 낳고 있는데, 즉 신은 없으며 모든 힘은 이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이 통제하는 대상은 신이 준 살아있는 영혼이 아니라 관념작용이므로, 이 관념작용이 타격을 받으면 일본인들에게 남는 것은 할복밖에 없다. 더 이상 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군사(軍事)에서도 언제나 적의 관념작용에 영향을 주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고대 갑옷의 투구가 가장 잘 확인해 준다. 그밖에 일본 역사에서는 몇몇 민족 영웅들이 적군 병사의 관념작용에 교묘하게 영향을 주어 군 전체를 물리친 사례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 기준을 러시아 병사에게 적용하는 그들의 중대한 실수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일본인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이미 1896년에 군사지식의 한 학문 분야인 군사심리학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거의 검토조차 되지 않던 이 철학적 학문은 일본에서는 매우 인기가 있어서 심지어 일반 병사들도 적에게 어떻게 적용할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 이토 후작은 러시아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불교로 개종하거나 아니면 정교에 무관심해진 거의 모든 일본인 정교 신자들을 외무성 산하에서 일하도록 불러들인 후 그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다. 그 후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밀려들었고, 또한 일반적으로는 러시아인, 개별적으로는 러시아 병사의 성격적 특징을 작성하는 것이 업무 과제가 되었다. 이들에게는 간단한 러시아어 입문서를 만드는 일이 부과되었고, 1896년에 이미 저자가 서로 다른 입문서가 10종이 넘게 나왔다. 일본에는 전반적으로 러시아에 관한 출판물이 굉장히 많아서, 이것들을 모아놓으면 유익한 의미를 지닌 귀중한 서고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그 누구도 일본을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없어서,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이 모든 의외의 사태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현재 일본과의 무력 충돌에서 지대한 의미를 갖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현지에서 일본인들을 직접 연구해보면 일본인들은 매우 교활하고 비밀스런 민족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파벌 싸움이 너무 격렬해서 때로는 분별을 잃고 유럽인 친구에게 너무 속을 털어놓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이를 통해 능력껏 이 나라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소위 공식적인 정보는 대체로 믿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 정보들은 별도의 기관에서 날조를 거친 후 대단한 비밀이 되어 때로는 아주 비싼 가격으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외국인들에게 교묘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유럽 사람들의 인종적 우수성과 오만함 때문에 그들을 대체로 싫어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인을 싫어하는데, 영국인이 보이는 오만함과 일본인에 대한 멸시는 너무나 대단해서 일본인과 원숭이를 거의 같이 취급한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일본인들은 이미 지난 세기의 90년대 초에 원한을 품고 영국인들의 거만함을 어떻게 복수할지 진지하게 궁리해왔다. 정부가 이런 생각에 공감하리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친러파의 정치 강령이 다른 어떤 강령보다 인기가 높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만일 친러파(사츠마 번)가 원하던 대로 러시아와 동맹이 이루어졌다면, 일본은 필리핀 군도를 점령한 다음 순다 열도를 점령하여 태평양에서 영국 같은 나라가 될 권리를 확보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분명 유럽은 태평양에서 아마 영원히 쫓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사태를 통해 일본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전쟁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열심히 저울질했고, 일본 함대가 러시아의 태평양 함대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밖에 일본은 5개의 훌륭한 해군공창을 갖고 있으며, 여기에는 각각 1만 명 이상의 최고 숙련 노동자들이 있다. 러시아는 동쪽에 블라디보스토크와 여순항만 갖고 있는데, 이곳에는 훌륭한 기술자가 겨우 수백 명씩만 모여 있고 그나마 대부분은 중국인이다. 러시아 군대에 관해 말하자면, 그 인원이 비록 37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이기는 하지만 첫째로, 이 군대는 전장에서 12,000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있게 될 것이고, 둘째로, 러시아는 일본이 총 35만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어떤 의외의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군대를 계산할 때 얼마나 정확한지는 1903년에 유럽 군대를 비교한 다음 표를 보면 알 수 있다.
인구(단위:100만)군 인원 수인구 대비 군 인원 수(백분율)
러시아1283,700,000(2.89%)
오스트리아471,872,000(4.0%)
영국291,000,000(3.5%)
독일564,350,000(7.76%)
이탈리아321,100,000(3.4%)
프랑스864,382,000(5.1%)
터키241,500,000(6.3%)
일본48350,000(0.626%)
 
표에 인용된 모든 정보는 공식적인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 관한 공식 정보를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이 정보에 각별히 주의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일본이 대단히 야비하게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일본의 공식 정보는 완전히 불확실하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병력을 계산을 할 때는 언제나 공식 정보에서 출발할 것이라는 점을 일본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일본은 스스로 승리를 자신할 만큼 충분히 강해져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실제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인구의 10%까지 차출할 수 있는데, 그러면 벌써 480만 명이나 된다.주 028
각주 028)
1896년 일본 인구는 남자 49%, 여자 51%로 나뉘어졌다. 남자의 경우 18세 미만은 62%, 18세 이상 45세 미만은 28%. 45세 이상 100세 미만은 10%이다. 이 중 군 복무가 가능한 사람은 16%이므로 10%로 계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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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군대가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가공되지 않은 재료로 남는 대신, 무기를 잘 다룰 줄 알고 신호 훈련을 받았으며 읽고 쓰는 능력이 좋은 충분히 훈련된 병사가 될 것이다. 즉, 특별 편성된 이 부대는 모든 면에서 러시아 병사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그런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재원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이에 대해, 일본은 아직 이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데다가 인력과 무기 면에서 러시아 군보다 수적으로 우위라는 사실 때문에 일본 정부의 걱정은 당분간 해소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일본은 금세 파산하고 말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실제로는 어느 누구도 일본의 물적, 재정적 자원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아직 일본에서 수많은 의외의 사태를 맞게 되리라 예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어떤 올바른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두 가지 주된 결론이 있을 수 있다. 1) 일본은 러시아의 모든 전투수단을 면밀하게 헤아리고 깊이 생각한 끝에 러시아를 이기기 위한 전투력을 내부에서 찾아냈는데, 그것은 유럽에서 생각한 것보다 더 큰 것이었다. 2) 만일 일본이 승전한다면 그것은 아시아 제민족과 불교 문명·문화가 기독교 전통의 유럽보다 우월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몽골 종족은 일본에 붙을 것이고 그러면 일본은 모든 문명 세계에서 이미 개별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 황화론(黃禍論)주 029
각주 029)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일어난 ‘황인종 경계론’(yellow peril)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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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핵이 될 것이다.
 
[1897년]
중령 부딜롭스키

  • 각주 001)
    睦仁. 일본의 천황 메이지[明治]를 말함. 바로가기
  • 각주 002)
    일본의 쇼군, 다이묘 등을 정점으로 하는 가신단에 소속된 상급 무사를 가리키는 말. 바로가기
  • 각주 003)
    이토 스케유키(伊藤佑亨)를 가리킴. 바로가기
  • 각주 004)
    일본어로 미카도(Mikado)는 ‘帝(御門)’로 속세의 최고 통치자, 즉 천황을 가리킴.  바로가기
  • 각주 005)
    반자이는 1만 년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중국어에서 나왔다.  바로가기
  • 각주 006)
    태양(太陽). 정확한 이름은 ‘타이요우’임. 바로가기
  • 각주 007)
    오치아이 나오노리(五鄕淸彦)인 듯. 오치아이 나오노리는 일본의 국학자임.  바로가기
  • 각주 008)
    이 기사의 날짜상 오류는 다른 부정확한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나오노리의 책임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9)
    파키스탄, 이란,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있는 인도양 북쪽 해안의 역사적인 지역.  바로가기
  • 각주 010)
    야시조약을 말함.  바로가기
  • 각주 011)
    영국 파운드의 공식 명칭.  바로가기
  • 각주 012)
    1858년의 오기. 바로가기
  • 각주 013)
    칼 이바노비치 베베르(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 1841.6.17~1910.1.8). 제정러시아의 외교관으로 1884년 조선 공사에 임명되어 통상 조약을 체결했으며, 1896년에는 아관파천을 기획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4)
    묄렌도르프(Möllendorf, Paul George von)의 오기. 바로가기
  • 각주 015)
    한국에서 일본 공사가 한국의 왕비를 살해한 것.  바로가기
  • 각주 016)
    원문 표현대로 하면 ‘일본해’임.  바로가기
  • 각주 017)
    대만의 옛 이름. 16세기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발견해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붙인 이름으로, 이 명칭은 1895년까지 유지되다가 일본에 의해 대만으로 개칭됨.  바로가기
  • 각주 018)
    영국이 트란스발에서 했던 행위란 보어전쟁을 가리킨다. 1899년 영국은 금과 다이아몬드를 획득하기 위해 보어인이 건설한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침략하여 1902년에 영국령 남아프리카로 병합시켰다.  바로가기
  • 각주 019)
    저자의 자필 사인이 들어간 실제 책자가 존재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0)
    將軍. 일본 막부의 수장을 가리키는 말.  바로가기
  • 각주 021)
    말레이 반도에서 아시아 대륙 남동쪽 몰루카 제도까지 뻗은 열도. 바로가기
  • 각주 022)
    나오노리의 기사 12쪽에서도 이 계획에 대한 암시를 볼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3)
    일본 사람들은 외국 상품을 좋아하지 않아 자국 생산품에 만족하고 지낼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4)
    일본에 금이 얼마나 많은지는 아무런 재정적 강제 없이 금본위가 도입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5)
    源 頼朝. 가마쿠라 쇼군의 창시자이자 그 첫 통치자. 재위 기간은 1192~1199년. 바로가기
  • 각주 026)
    大名. 일본에서 10세기경부터 19세기 말까지 넓은 영지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유력자를 일컫던 말.  바로가기
  • 각주 027)
    불교와 함께 중국 문화도 들어왔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도교 문화를 완전히 [1단어 판독불가]한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이는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일본인을 강도로 생각했으며,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는 중국 황제의 성명서에는 이에 대한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8)
    1896년 일본 인구는 남자 49%, 여자 51%로 나뉘어졌다. 남자의 경우 18세 미만은 62%, 18세 이상 45세 미만은 28%. 45세 이상 100세 미만은 10%이다. 이 중 군 복무가 가능한 사람은 16%이므로 10%로 계산할 수는 없다.  바로가기
  • 각주 029)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일어난 ‘황인종 경계론’(yellow peril)을 말함.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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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논평, 자료에 따른 1895~1897년 일본의 대러 군사계획 기록 및 일본 민족성의 몇 가지 특징 자료번호 : kifr.d_0002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