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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가정 연간에 두 동물을 공물로 바치고 하사품을 늘려 줄 것을 청하니, 어사 장록(張祿)이 공물을 물리치고 하사를 줄이도록 아뢴 등의 내용

  • 국가
    노미(魯迷)
[가정] 5년(1526) 겨울에 다시 두 동물을 가지고 와서 공물로 바쳤다. 하사품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사신은 먼 길을 건너 와서 비용이 22,000여 금(金)에 이르렀다고 말하면서 하사품을 늘려줄 것을 청하였다. 어사(御史) 장록(張祿)이 아뢰기를, “화(華)와 이(夷)는 위치가 달라 사람과 만물이 품성이 다르므로, [이적(夷狄)의] 사람을 머물게 하고 [이적의] 동물을 기르는 것은 물정(物情)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인의(人意)에도 위배됩니다. 하물며 사자를 기르는 데 매일 양 2마리가 들고, 서우(西牛)를 기르는 데 매일 과일이 소모됩니다. 동물이 서로 잡아먹고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어치우는 것을 성현(聖賢)은 모두 미워하였습니다. 또 이를 기르는 역인(役人)에게도 매일 [양식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광록시(光祿寺)의 한정된 재물로 사람과 동물의 무익한 비용을 충당하는 것은 상리(常理)에 크게 위배됩니다. 청컨대 그 사신을 돌려보내고, 그 공물을 물리치며, 그들에게 상으로 주는 하사품을 줄임으로써 중국의 성인(聖人)이 이물(異物)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시기를 바랍니다”라 하였으나, [가정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예부의 관원의 말에 따라 홍치 연간(1488~1505)의 살마아한의 예(例)대로 하사품을 늘려주었다. [가정] 22년(1543)에 천방 등 여러 나라와 함께 말과 방물을 바치고, 이듬해(1544)에 돌아가다가 감주(甘州) 주 001
각주 001)
甘州: 지금의 甘肅省 張掖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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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다. 마침 이북(迤北) 주 002
각주 002)
迤北: 지금의 新疆 烏魯木齊市에 위치하고 있는데, 元朝가 패망한 이후 北元이 세워진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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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적(賊)이 침입하여 노략질을 했는데, 총병관 양신(楊信) 주 003
각주 003)
楊信: 字는 文實로서 明朝의 將領이다. 어려서부터 숙부 楊洪을 따라 興州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후에 指揮僉事로 승진하였다. 正統 말년에 都指揮僉事가 되어 柴溝堡를 지켰다. 正統 14년(1449) 오이라트의 에센이 침공했을 때 참전했고, 都指揮同知로 승진하였다. 景泰 원년(1450)에는 懷來를 鎭守했으나 오이라트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탄핵을 당하였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중이라는 이유로 問罪하지 않았고, 都督僉事를 거쳐 楊能을 대신하여 左副總兵이 되어 宣府를 協鎭하였다. 天順 원년(1457)에 延綏로 옮겼고, 이듬해에는 靑陽溝에서 오이라트 부대를 대파하여 彰武伯으로 封을 받고 總兵官으로 充任되었다. 후에 高家堡, 野馬澗, 楡林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후에 李文을 代理하여 大同을 鎭守했다. 憲宗이 繼位한 후에 世券을 하사받았다. 成化 원년(1465) 방어에 실패하자 소환되었다. 成化 6년(1470)에는 副將 徐怒, 參將 張瑛과 함께 길을 나누어 長城을 넘어 出征하여 승리를 거둔 뒤 돌아왔다. 成化 13년(1477) 겨울에 사망했다. 侯로 추증되고, 武毅라는 諡號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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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공사절 90여 명으로 하여금 가서 방어케 하니, 죽은 자가 9명이었다. 가정제는 [이 소식을] 듣고 양신의 직위를 벗기고, 담당 관원에게 명하여 관(棺)으로 [시신을] 거두어들인 뒤 본국으로 보내어 상례(喪禮)를 치르도록 하였다. [가정] 27년(1548)과 33년(1554)에 모두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그 공물로는 산호(珊瑚)·호박(琥珀)·금강찬(金剛鑽)주 004
각주 004)
金剛鑽: 金剛石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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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기(花瓷器)·쇄복(鎖服)·살합날장(撒哈剌帳)·영양각(羚羊角)·서구피(西狗皮)·사열손피(舍列猻皮)·철각피(鐵角皮) 등의 종류가 있었다.

  • 각주 001)
    甘州: 지금의 甘肅省 張掖의 옛 이름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迤北: 지금의 新疆 烏魯木齊市에 위치하고 있는데, 元朝가 패망한 이후 北元이 세워진 지역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楊信: 字는 文實로서 明朝의 將領이다. 어려서부터 숙부 楊洪을 따라 興州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후에 指揮僉事로 승진하였다. 正統 말년에 都指揮僉事가 되어 柴溝堡를 지켰다. 正統 14년(1449) 오이라트의 에센이 침공했을 때 참전했고, 都指揮同知로 승진하였다. 景泰 원년(1450)에는 懷來를 鎭守했으나 오이라트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탄핵을 당하였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중이라는 이유로 問罪하지 않았고, 都督僉事를 거쳐 楊能을 대신하여 左副總兵이 되어 宣府를 協鎭하였다. 天順 원년(1457)에 延綏로 옮겼고, 이듬해에는 靑陽溝에서 오이라트 부대를 대파하여 彰武伯으로 封을 받고 總兵官으로 充任되었다. 후에 高家堡, 野馬澗, 楡林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후에 李文을 代理하여 大同을 鎭守했다. 憲宗이 繼位한 후에 世券을 하사받았다. 成化 원년(1465) 방어에 실패하자 소환되었다. 成化 6년(1470)에는 副將 徐怒, 參將 張瑛과 함께 길을 나누어 長城을 넘어 出征하여 승리를 거둔 뒤 돌아왔다. 成化 13년(1477) 겨울에 사망했다. 侯로 추증되고, 武毅라는 諡號를 받았다. 바로가기
  • 각주 004)
    金剛鑽: 金剛石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장록(張祿), 가정제, 양신(楊信), 가정제, 양신
지명
중국, 살마아한, 천방, 감주(甘州), 이북(迤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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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연간에 두 동물을 공물로 바치고 하사품을 늘려 줄 것을 청하니, 어사 장록(張祿)이 공물을 물리치고 하사를 줄이도록 아뢴 등의 내용 자료번호 : jo.k_0024_0332_035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