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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가정 연간, 예부 관원이 조공 사신이 조악한 옥석(玉石)을 바쳤다고 상주한 일로 인해 원한을 품고 무고한 일 등에 대한 설명

  • 국가
    천방(天方)
가정 4년(1525)에 그 국왕 역마도아(亦麻都兒) 등이 사신을 보내어 말·낙타·방물을 바쳤다.주 001
각주 001)
이에 관한 내용은 『世宗實錄』 卷55 嘉靖 4년 9월 丁巳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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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의 관원이 아뢰기를, “서역인이 와서 공물을 바쳤는데, 섬서(陝西) 행도사(行都司)에서 반년 이상이나 천연(遷延)해서 이제야 비로소 문장을 갖추어 상주하였습니다. 진헌(進獻)한 옥석이 모두 조악한데, 사신이 사적으로 가져온 화물(貨物)은 모두 좋습니다. 청컨대 순안대신(巡按大臣)에게 내려 조사토록 하고, 지금부터는 옥석을 많이 가져와서 지나는 지방을 번거롭고 소란스럽게 하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공물로서 쓸 만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도사(都司)의 관원을 치죄하시기 바랍니다”라 하니, [가정제는] 이를 승낙하였다. 이듬해(1526)에 그 나라 액마도항(額麻都抗) 등 8왕이 각기 사신을 보내어 옥석을 바쳤는데,주 002
각주 002)
이에 관한 내용은 『世宗實錄』 卷62 嘉靖 5년 3월 庚寅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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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랑중(主客郞中) 진구천(陳九川) 주 003
각주 003)
陳九川(1494~1562): 字는 惟溶 또는 惟浚이고, 號는 竹亭인데 후에 明水라 하였다. 江西 臨川 출신이다. 正德 9년(1514)에 進士가 되었고, 太常博士로 제수되었다. 武宗이 南巡할 때 환락을 추구하자 贛籍의 官員인 修撰 舒芬과 考功員外郞 夏良勝 및 禮部主事 萬潮 등과 連名으로 上疏하여 이를 諫하였으나 武宗의 노여움에 저촉되어 하옥되고, 午門에서 닷새 동안 밤낮으로 罰跪하였으며, 廷杖에 처해져 죽기 직전까지 갔다. 관직을 삭탈당하여 평민이 되었는데, 이 4인을 ‘江西四諫’이라 불렀다. 世宗이 즉위한 후에 禮部主客司郞中으로 복직되었는데, 다시 舊制를 개혁하려다 權貴에게 득죄하여 무함을 받아 하옥되고, 鎭海衛, 즉 지금의 福建 龍海縣 鎭海鄕으로 유배되었다. 勅書에 따라 復官되었는데, 후에 관직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다만 집안에 여러 변고를 만나 부모와 형제가 모두 사망하여 큰 충격을 받고는 臨川의 明水山 등으로 거주지를 옮겨 독서와 講學 활동에 전념하면서 號를 明水로 바꾸었다. 이후 名山을 周遊하며 講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理學을 숭상했고, 일찍이 王守仁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江右王門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저서로 『明水先生集』 14卷(그의 門人인 董君和 編輯)이 있는데, 그 가운데 8卷은 講稿와 散文이고 6卷은 詩이다. 만년의 저서로는 『傳習續錄』 등이 있다. 이상에 대해서는 (同治)『臨川縣志』, 『明吏』, 『四庫全書』, 『江西通通志』, (淸)黄宗羲의 『郞中陳明水先生九川』, 『江西詩征』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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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려서 그 가운데 조악한 것을 돌려보내니, 사신이 원한을 품게 되었다. 통사(通事) 호사신(胡士紳) 또한 진구천에게 유감으로 여겨서 이에 거짓으로 사신의 주문(奏文)을 작성하여 진구천이 옥석을 착복하였다고 무고하니, [진구천을] 조옥(詔獄)주 004
각주 004)
詔獄: 皇帝의 특별지시로 收監한 후 詔書에 의하여 판결하는 것으로, 明代에는 錦衣衛의 北鎭撫使가 詔獄을 전담하였다(王天有, 1992: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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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내려 고문을 가하여 신문하였다. 상서 석서(席書) 주 005
각주 005)
席書(1461~1527): 字는 文同, 號는 元山이며, 四川 蓬溪縣 출신이다. 弘治 3년(1490)에 科擧에 급제하여 進士가 되었다. 正德 연간(1506~1521)에 河南 按察司僉事, 貴州提學副使, 湖廣巡撫 등을 역임하였다. 嘉靖帝가 즉위한 뒤 ‘大禮의 議’가 일어나자 황제의 뜻을 헤아려 宋 英宗의 예에 준하여 皇父 興獻王을 皇考로 하자는 上疏를 올렸다. 嘉靖帝는 席書를 불러들여 特旨로 禮部尙書로 발탁하였다. 이로부터 嘉靖帝의 親臣이 되어 輔臣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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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사중 해일관(解一貫) 주 006
각주 006)
解一貫: 字는 曾唯로, 山西 交城 사람이다. 正德 16년(1521)에 進士가 되었고, 通政使司, 工科給事中을 역임하였는데, 건의하여 채택되는 바가 많았다. 嘉靖 연간(1522~1566)에 刑科 左右給事中을 역임하였다. 張璁과 桂萼이 嘉靖帝에게 총애를 입고 파격적으로 승진했는데, 解一貫은 憤然히 上書하여 張과 桂 양인을 공격하였지만, 결국 보복을 당하여 開州判官으로 좌천되었다가 任地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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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상서(上書)하여 이를] 논하며 [그들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가정제는 이를] 듣지 않고, 결국 변방에 수자리를 보냈다.주 007
각주 007)
이에 관한 내용은 『世宗實錄』 卷62 嘉靖 5년 3월 庚子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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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이에 관한 내용은 『世宗實錄』 卷55 嘉靖 4년 9월 丁巳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2)
    이에 관한 내용은 『世宗實錄』 卷62 嘉靖 5년 3월 庚寅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3)
    陳九川(1494~1562): 字는 惟溶 또는 惟浚이고, 號는 竹亭인데 후에 明水라 하였다. 江西 臨川 출신이다. 正德 9년(1514)에 進士가 되었고, 太常博士로 제수되었다. 武宗이 南巡할 때 환락을 추구하자 贛籍의 官員인 修撰 舒芬과 考功員外郞 夏良勝 및 禮部主事 萬潮 등과 連名으로 上疏하여 이를 諫하였으나 武宗의 노여움에 저촉되어 하옥되고, 午門에서 닷새 동안 밤낮으로 罰跪하였으며, 廷杖에 처해져 죽기 직전까지 갔다. 관직을 삭탈당하여 평민이 되었는데, 이 4인을 ‘江西四諫’이라 불렀다. 世宗이 즉위한 후에 禮部主客司郞中으로 복직되었는데, 다시 舊制를 개혁하려다 權貴에게 득죄하여 무함을 받아 하옥되고, 鎭海衛, 즉 지금의 福建 龍海縣 鎭海鄕으로 유배되었다. 勅書에 따라 復官되었는데, 후에 관직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다만 집안에 여러 변고를 만나 부모와 형제가 모두 사망하여 큰 충격을 받고는 臨川의 明水山 등으로 거주지를 옮겨 독서와 講學 활동에 전념하면서 號를 明水로 바꾸었다. 이후 名山을 周遊하며 講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理學을 숭상했고, 일찍이 王守仁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江右王門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저서로 『明水先生集』 14卷(그의 門人인 董君和 編輯)이 있는데, 그 가운데 8卷은 講稿와 散文이고 6卷은 詩이다. 만년의 저서로는 『傳習續錄』 등이 있다. 이상에 대해서는 (同治)『臨川縣志』, 『明吏』, 『四庫全書』, 『江西通通志』, (淸)黄宗羲의 『郞中陳明水先生九川』, 『江西詩征』 등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4)
    詔獄: 皇帝의 특별지시로 收監한 후 詔書에 의하여 판결하는 것으로, 明代에는 錦衣衛의 北鎭撫使가 詔獄을 전담하였다(王天有, 1992: 141). 바로가기
  • 각주 005)
    席書(1461~1527): 字는 文同, 號는 元山이며, 四川 蓬溪縣 출신이다. 弘治 3년(1490)에 科擧에 급제하여 進士가 되었다. 正德 연간(1506~1521)에 河南 按察司僉事, 貴州提學副使, 湖廣巡撫 등을 역임하였다. 嘉靖帝가 즉위한 뒤 ‘大禮의 議’가 일어나자 황제의 뜻을 헤아려 宋 英宗의 예에 준하여 皇父 興獻王을 皇考로 하자는 上疏를 올렸다. 嘉靖帝는 席書를 불러들여 特旨로 禮部尙書로 발탁하였다. 이로부터 嘉靖帝의 親臣이 되어 輔臣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解一貫: 字는 曾唯로, 山西 交城 사람이다. 正德 16년(1521)에 進士가 되었고, 通政使司, 工科給事中을 역임하였는데, 건의하여 채택되는 바가 많았다. 嘉靖 연간(1522~1566)에 刑科 左右給事中을 역임하였다. 張璁과 桂萼이 嘉靖帝에게 총애를 입고 파격적으로 승진했는데, 解一貫은 憤然히 上書하여 張과 桂 양인을 공격하였지만, 결국 보복을 당하여 開州判官으로 좌천되었다가 任地에서 사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이에 관한 내용은 『世宗實錄』 卷62 嘉靖 5년 3월 庚子條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역마도아(亦麻都兒), 가정제, 진구천(陳九川), 호사신(胡士紳), 진구천, 진구천, 진구천, 석서(席書), 해일관(解一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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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연간, 예부 관원이 조공 사신이 조악한 옥석(玉石)을 바쳤다고 상주한 일로 인해 원한을 품고 무고한 일 등에 대한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32_031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