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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弘治) 연간, 사신이 사자 등 여러 동물을 바치자 도중에 소요를 일으키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을 들어 물리쳐 돌려보냈으나 다시 내조하여 조공한 설명

  • 국가
    살마아한(撒馬兒罕)
홍치(弘治)주 001
각주 001)
弘治: 明朝의 제10대 황제 孝宗 朱祐樘의 年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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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1489)에 그 사신이 만랄가로부터 광동(廣東)에 이르러 사자·앵무새 등 여러 동물을 바치니, 수신이 이를 보고하였다. 예부의 관원 경유(耿裕) 주 002
각주 002)
耿裕(1430~1496): 字는 好問이며, 景泰 5년(1454)의 進士로 庶吉士에 제수되었다. 이후 戶科給事中, 工科給事中을 거쳐 天順 초년에 檢討가 되었는데, 그의 부친 耿九疇가 張鵬이 石亨을 탄핵한 사건에 연루됨으로 인해 그 역시도 泗州 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定州知州에 보임되었으며, 成化 초년에 다시 檢討에 임명되었고, 이후 國子司業, 祭酒의 직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明朝는 어린 侯와 伯에게 國子監에 와서 讀書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그는 古代 諸侯와 國戚의 아름다운 言行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여 이들에게 강의하였다. 이후 그는 吏部左·右侍郞을 거쳐 尙書에 올랐으나 李孜省 등에게 모함을 당해 南京 禮部로 좌천되고, 후에 南京 兵部參贊機務로 전임되었다가 弘治 9년(1496)에 67세의 나이로 병으로 죽었다. 死後 太保를 追贈받았으며, 諡號는 文恪이다. 한편 張文德은 耿裕 외에 대표적인 인물이 倪岳임을 밝힌 바 있다. 실제로 『明史』가 작성되기 전의 여러 史書에서는 모두 倪岳의 말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 倪岳은 禮部左侍郞이었다. 한편 禮部尙書 耿裕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만큼 『明史』 修撰者의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님도 분명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張文德, 2000, 95~9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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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아뢰기를, “남해(南海) 주 003
각주 003)
南海: 先秦 시대에 南海는 九州 밖의 ‘四海’ 가운데 하나로서 원래는 오늘날 중국의 東海와 南海를 가리켰는데, 점차 그 범주가 廣東과 베트남의 海域을 넘어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한편 ‘南海’는 南宋 이래로 東·西洋이라는 용어로 대치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明代 중엽 이후에는 南洋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邱炫煜, 1995: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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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에서 공물을 바치는 길이 아니니, 청컨대 이를 거절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예과(禮科) 급사중 한정(韓鼎) 주 004
각주 004)
韓鼎: 字는 延器, 號는 斗庵으로 樂蟠(지금의 合水縣) 사람이다. 어렸을 때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천성이 가볍지 않고 의지가 굳세어 학문에 뜻을 두었다. 成化 18년(1482) 進士에 及第하였다. 禮科 給事中을 거쳐 兵部 右侍郞에 이르렀다. 弘治帝 즉위 이후 韓鼎은 여러 차례 上書하였는데 時弊에 절실하였다. 그는 환관의 수를 줄이고, 節儉을 제창하고 백성에게 휴식을 줄 것을 주장하여 ‘弘治中興’을 이루는 데 일조하였으며, 弘治帝로부터 賞讚을 받았다. 上疏 시에 權貴를 거리낌 없이 비판하여 皇后의 미움을 받았다. 弘治帝는 韓鼎이 해를 당할까 염려하여 通政右參이란 閒職을 주어 皇后의 노여움을 덜도록 배려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皇后의 감정이 남아있음을 보고는 南京 尙寶卿으로 轉任시켰다. 후에 右通政으로 補任하여 安平鎭에 머물렀는데, 水利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安平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生祠를 세워주기도 하였다. 후에 通政使, 戶部 右侍郞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斗庵集』, 『尙寶實錄』 등이 있고, 그가 修撰한 『慶陽府志』는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된 府志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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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도 또한 아뢰기를, “쟁녕(猙獰)의 맹수는 가까이서 즐기기에 마땅치 않고, 또 도중(途中)에 소요(騷擾)를 일으키며, 비용이 많이 드니 받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홍치제가 말하기를, “진귀하고 기이한 금수(禽獸)를 짐은 진헌 받지 않았다. 하물며 [그들이] 온 길도 정도(正道)가 아니니 즉각 물리쳐 돌려보내도록 하라. 수신은 규정을 어기어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하나 잠시 용서해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예부의 관원이 다시 아뢰기를, “바닷길은 본디 개통(開通)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단절시킴이 지나치게 심해도 안 되니, 청컨대 그 사신에게 조금 음식을 보내어 위로하고, 적정량을 헤아려서 기백(綺帛)주 005
각주 005)
綺帛: 무늬를 넣어 짠 비단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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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그 왕에게 하사해주시기 바랍니다”라 하니, [홍치제는] 이를 승낙하였다. 이듬해(1490)에 다시 토로번(土魯番) 주 006
각주 006)
土魯番: Turfan의 음역이다. 여러 서적에는 吐魯番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新疆 위구르자치구(維吾爾自治區) 투르판 분지의 북부를 가리킨다. 前漢 시대에는 이곳에 車師國의 하나인 車師前國이 있었다. 그 후로 중국에서 전란을 피해 이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나 北涼에 의해 차사국은 멸망했다. 이후 이곳에는 450년에 高昌國이 세워져 640년에 당나라에 멸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창을 정복한 당나라는 이곳에 安西都護府를 두고, 서역 경영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宋代에는 위구르에 장악되었고, 몽골 제국이 성립될 때에는 차가타이(察合台, Chaghatai) 칸국(汗國)에 예속되었으며, 차가타이 칸국이 분열된 후에는 東차가타이 칸국에 예속되었다. 투르판이라는 이름은 明代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西域番國志』에 의하면, 1414년에 明朝 永樂帝의 명을 받은 陳誠이 이곳을 방문하여 土爾番이라 기록하였고, 이로부터 명과의 교류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명 중기에 투르판은 주변에 있는 哈密·火州·柳城을 倂呑하여 세력을 확대했지만, 청대에 들어와 이 지역은 청과 준가르의 쟁탈 대상이 되었으며, 결국 청이 승리하여 그 지배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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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함께 사자와 합날호랄(哈剌虎剌)주 007
각주 007)
哈剌虎剌: Karakulak의 음역으로서 중앙아시아 일대의 野獸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英文의 Caracal에 해당하는데, 스라소니의 일종이다. 아프리카살쾡이라고도 한다. 산기슭의 덤불숲, 초원, 사막의 풀밭에서 서식한다. 몸길이 65~80cm, 몸무게 18kg 정도이다. 겨울털은 짧고 배며 몸에 착 달라붙어 있다. 한편 哈剌虎剌을 『明史』의 中華書局本에서는 頓號를 붙여 양자를 분리하고 있으나 받아들이기 힘들다. 문맥 상 哈剌도 동물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哈剌은 그러한 의미는 없고, 단지 하나의 國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용어에 대해서는 張文德, 2000: 96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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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여러 맹수를 바치면서 감숙(甘肅)으로 들어왔다. 진수(鎭守) 중관 부덕(傅德)·총병관 주옥(周玉) 등이 먼저 형상을 그려 상주하여 아뢰니, 곧 사람을 시켜 역마(驛馬)를 타고 급히 달려가서 [그들을] 출발시켜 보내도록 하였다. 유독 순안어사(巡按御史)주 008
각주 008)
巡按御史: 본래 唐代에 御史臺를 설치하여 감찰의 임무를 맡도록 했는데, 明初에 어사대 대신 都察院을 설치하였다. 이때 都察院의 말직으로 13道에 監察御史를 두고 지방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그 별칭이 巡按御史이다. 都察院 소속으로 天子를 대신하여 지방을 순찰하고, 각 지방 정치의 得失, 군민의 利病 등을 直言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고, 官品은 正七品으로 높은 편이 아니지만, 지방 정국에 관여하는 바가 많았기 때문에 그 정치적 비중은 자못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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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요(陳瑤)만이 그것이 낭비가 되고 번거롭게 소요(騷擾)를 일으킬 것이라 논하며, 받아들이지 말 것을 청하였다. 예부의 관원이 그의 말에 따라 헤아려서 위로하는 [의미의] 상을 보내줄 것을 건의했고, 또 상언하기를, “[황상(皇上)의] 성명(聖明)으로 누차 공헌(貢獻)을 물리쳤는데, 부덕 등이 [황상의] 은덕을 펼치려는 뜻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그들을 처벌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홍치제가 이르기를, “조공사신이 이미 이르렀으니, 물리쳐 돌아가도록 할 필요 없이, 다만 한 두 명만 보내어 경사(京師)에 이르도록 해도 좋을 것이다. 사자 등 여러 동물은 마리 당 매일 양 한 마리를 주어 함부로 낭비할 수 없도록 하라. 부덕 등은 용서해주어 치죄(治罪)하지 말라”고 하였다. 후에 [홍치] 12년(1499)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이듬해(1500)에 다시 이르렀다. 정덕(正德)주 009
각주 009)
正德: 明朝 제11대 황제 武宗 朱厚照의 年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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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1506~1521)에도 여전히 몇 차례 이르렀다.

  • 각주 001)
    弘治: 明朝의 제10대 황제 孝宗 朱祐樘의 年號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耿裕(1430~1496): 字는 好問이며, 景泰 5년(1454)의 進士로 庶吉士에 제수되었다. 이후 戶科給事中, 工科給事中을 거쳐 天順 초년에 檢討가 되었는데, 그의 부친 耿九疇가 張鵬이 石亨을 탄핵한 사건에 연루됨으로 인해 그 역시도 泗州 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定州知州에 보임되었으며, 成化 초년에 다시 檢討에 임명되었고, 이후 國子司業, 祭酒의 직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明朝는 어린 侯와 伯에게 國子監에 와서 讀書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그는 古代 諸侯와 國戚의 아름다운 言行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여 이들에게 강의하였다. 이후 그는 吏部左·右侍郞을 거쳐 尙書에 올랐으나 李孜省 등에게 모함을 당해 南京 禮部로 좌천되고, 후에 南京 兵部參贊機務로 전임되었다가 弘治 9년(1496)에 67세의 나이로 병으로 죽었다. 死後 太保를 追贈받았으며, 諡號는 文恪이다. 한편 張文德은 耿裕 외에 대표적인 인물이 倪岳임을 밝힌 바 있다. 실제로 『明史』가 작성되기 전의 여러 史書에서는 모두 倪岳의 말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 倪岳은 禮部左侍郞이었다. 한편 禮部尙書 耿裕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만큼 『明史』 修撰者의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님도 분명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張文德, 2000, 95~96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3)
    南海: 先秦 시대에 南海는 九州 밖의 ‘四海’ 가운데 하나로서 원래는 오늘날 중국의 東海와 南海를 가리켰는데, 점차 그 범주가 廣東과 베트남의 海域을 넘어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한편 ‘南海’는 南宋 이래로 東·西洋이라는 용어로 대치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明代 중엽 이후에는 南洋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邱炫煜, 1995: 19~33). 바로가기
  • 각주 004)
    韓鼎: 字는 延器, 號는 斗庵으로 樂蟠(지금의 合水縣) 사람이다. 어렸을 때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천성이 가볍지 않고 의지가 굳세어 학문에 뜻을 두었다. 成化 18년(1482) 進士에 及第하였다. 禮科 給事中을 거쳐 兵部 右侍郞에 이르렀다. 弘治帝 즉위 이후 韓鼎은 여러 차례 上書하였는데 時弊에 절실하였다. 그는 환관의 수를 줄이고, 節儉을 제창하고 백성에게 휴식을 줄 것을 주장하여 ‘弘治中興’을 이루는 데 일조하였으며, 弘治帝로부터 賞讚을 받았다. 上疏 시에 權貴를 거리낌 없이 비판하여 皇后의 미움을 받았다. 弘治帝는 韓鼎이 해를 당할까 염려하여 通政右參이란 閒職을 주어 皇后의 노여움을 덜도록 배려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皇后의 감정이 남아있음을 보고는 南京 尙寶卿으로 轉任시켰다. 후에 右通政으로 補任하여 安平鎭에 머물렀는데, 水利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安平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生祠를 세워주기도 하였다. 후에 通政使, 戶部 右侍郞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斗庵集』, 『尙寶實錄』 등이 있고, 그가 修撰한 『慶陽府志』는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된 府志로 알려져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綺帛: 무늬를 넣어 짠 비단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土魯番: Turfan의 음역이다. 여러 서적에는 吐魯番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新疆 위구르자치구(維吾爾自治區) 투르판 분지의 북부를 가리킨다. 前漢 시대에는 이곳에 車師國의 하나인 車師前國이 있었다. 그 후로 중국에서 전란을 피해 이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나 北涼에 의해 차사국은 멸망했다. 이후 이곳에는 450년에 高昌國이 세워져 640년에 당나라에 멸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창을 정복한 당나라는 이곳에 安西都護府를 두고, 서역 경영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宋代에는 위구르에 장악되었고, 몽골 제국이 성립될 때에는 차가타이(察合台, Chaghatai) 칸국(汗國)에 예속되었으며, 차가타이 칸국이 분열된 후에는 東차가타이 칸국에 예속되었다. 투르판이라는 이름은 明代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西域番國志』에 의하면, 1414년에 明朝 永樂帝의 명을 받은 陳誠이 이곳을 방문하여 土爾番이라 기록하였고, 이로부터 명과의 교류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명 중기에 투르판은 주변에 있는 哈密·火州·柳城을 倂呑하여 세력을 확대했지만, 청대에 들어와 이 지역은 청과 준가르의 쟁탈 대상이 되었으며, 결국 청이 승리하여 그 지배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哈剌虎剌: Karakulak의 음역으로서 중앙아시아 일대의 野獸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英文의 Caracal에 해당하는데, 스라소니의 일종이다. 아프리카살쾡이라고도 한다. 산기슭의 덤불숲, 초원, 사막의 풀밭에서 서식한다. 몸길이 65~80cm, 몸무게 18kg 정도이다. 겨울털은 짧고 배며 몸에 착 달라붙어 있다. 한편 哈剌虎剌을 『明史』의 中華書局本에서는 頓號를 붙여 양자를 분리하고 있으나 받아들이기 힘들다. 문맥 상 哈剌도 동물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哈剌은 그러한 의미는 없고, 단지 하나의 國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용어에 대해서는 張文德, 2000: 96을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8)
    巡按御史: 본래 唐代에 御史臺를 설치하여 감찰의 임무를 맡도록 했는데, 明初에 어사대 대신 都察院을 설치하였다. 이때 都察院의 말직으로 13道에 監察御史를 두고 지방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그 별칭이 巡按御史이다. 都察院 소속으로 天子를 대신하여 지방을 순찰하고, 각 지방 정치의 得失, 군민의 利病 등을 直言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고, 官品은 正七品으로 높은 편이 아니지만, 지방 정국에 관여하는 바가 많았기 때문에 그 정치적 비중은 자못 높았다. 바로가기
  • 각주 009)
    正德: 明朝 제11대 황제 武宗 朱厚照의 年號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경유(耿裕), 한정(韓鼎), 홍치제, 홍치제, 부덕(傅德), 주옥(周玉), 진요(陳瑤), 부덕, 홍치제, 부덕
지명
만랄가, 광동(廣東), 남해(南海), 서역, 토로번(土魯番), 감숙(甘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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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弘治) 연간, 사신이 사자 등 여러 동물을 바치자 도중에 소요를 일으키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을 들어 물리쳐 돌려보냈으나 다시 내조하여 조공한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32_0010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