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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成祖) 즉위 후 사신을 보내 칙서로 효유하였기 때문에 특목이가 죽고 손자 합이(哈爾)가 잇고서도 공물을 바쳤으며, 조정 또한 두터이 보답한 내용

  • 국가
    살마아한(撒馬兒罕)
성조(成祖, 1360~1424; 재위 1402~1424)주 001
각주 001)
成祖: 明朝의 3대 황제인 永樂帝 朱棣의 廟號이다. 성조는 太祖 洪武帝와 馬皇后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과연 실제 그러한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가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洪武 13년(1380) 北平에 燕王으로 봉해지면서부터이다. 조카인 建文帝가 諸王削藩策을 펼치자 위기감을 느끼고 擧兵하였다. 4년간에 걸친 ‘靖難의 役’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어 帝位에 올랐다. 영락제는 환관 鄭和에게 寶船 수십 척 등 대규모의 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인도 및 페르시아만·홍해연안·아프리카 東岸을 무대로 원정을 감행케 하였다. 이후 그는 北京으로의 遷都, 漠北에 대한 대대적인 親征 등 수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재위한지 22년만인 1425년에 北征에서 돌아오는 길에 楡木川(현재 內蒙古自治區 多倫縣의 서북부)에서 病死했다. 諡號는 文皇帝이며, 廟號는 太宗이었으나 16세기 중반의 嘉靖 연간(1522~1566)에 成祖로 廟號가 바뀌었다. 그의 陵은 長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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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즉위해서 사신을 보내어 칙서로 그 나라를 효유하였다. 영락(永樂)주 002
각주 002)
永樂: 明朝 제3대 황제인 成祖 朱棣의 年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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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1405)에 부안(傅安) 등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첩목아별실팔리(別失八里) 주 003
각주 003)
別失八里는 현재 新疆 위구르자치구의 중북부 지역에 해당하는데, 상세한 것은 후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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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길을 빌려 군대를 거느리고 동진(東進)주 004
각주 004)
티무르의 明朝 원정 기도의 원인에 대하여 朱亞非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티무르의 覇權에 대한 야심은 유래가 깊었다는 것이다. 그는 내부 안정을 취한 후 바로 대외 확장 정책을 추진하였다. 동시에 蒙古의 귀족으로서 元朝의 복수를 여러 차례에 걸쳐 聲言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먼저 역량을 서남 방면의 각국으로 집중시켜 인도와 서아시아는 물론 멀리 터키에까지 원정을 마친 뒤인 洪武 말년에 이르러 본격적인 東征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둘째, 建文帝 즉위 후 ‘靖難의 役’으로 明朝가 내란 상태에 돌입하자 티무르는 東征의 호기로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1404년 그는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직접 出征의 길에 나섰다고 한다. 다만 출정하자마자 永樂 3년 2월, 軍中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는 朱亞非, 2007; 6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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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는 소식을 듣고 감숙(甘肅) 총병관(總兵官)주 005
각주 005)
總兵官: 鎭守總兵을 일컫는다. 총병관은 전쟁 등 유사시에, 公·侯·伯 등 勳臣이나 都督 등의 관리 가운데 充任을 하고, 일이 끝나면 본래의 직무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변경에 일이 많아지자 현지에 계속 머물면서 鎭守를 담당하면서 사실상 鎭의 최고 무관직으로 고정되어 갔다. 황제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기 때문에 그 권한은 매우 컸으며, 品級과 定員은 없었다. 명 중기 이후에는 설치된 곳이 날로 늘어나 점차 流官으로 充任되었고, 총독과 순무의 지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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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宋晟) 주 006
각주 006)
宋晟(1342~1407): 安徽 定遠 사람으로, 字는 景陽이다. 元末에 아버지 朝用과 형 國興을 따라 朱元璋의 농민반란군에 투신하여 反元전쟁에 참여하였다. 명 왕조 성립 후, 洪武 초에 都指揮同知가 되어 江西, 大同, 陝西 등지에 鎭守했으며, 洪武 17년(1384)에 右軍都督僉事로 승진하여 諒州를 鎭守했고, 이후 수차례 군대를 이끌고 元의 잔적을 征討하여 威名을 떨쳤다. 永樂 初年에 이르러서도 後軍都督府 左都督拜平羌將軍에 임명되어 西北 지역 방위의 임무를 맡는 등 20여 년에 걸쳐 西北邊疆을 保衛하는 데 큰 공을 세워 永樂 3년(1405)에 西寧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永樂 5년(1407)에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鄆國公에 追封되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영락제의 駙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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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칙서를 내려 경계하고 방비토록 하였다.주 007
각주 007)
이에 관한 내용은 『太宗實錄』 卷39 永樂 3년 2월 庚寅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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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 5년(1407) 6월에 부안 등이 귀국하였다. 이전에 부안이 그 나라에 이르러 억류되고, 입조(入朝)하여 공물을 바치는 일도 끊겼다. 얼마 후에 사람을 시켜 부안을 안내하여 여러 나라 수만 리를 편력(遍歷)토록 하여 그 나라의 광대함을 과시하였다. 이에 이르러 첩목아가 사망하자 그 손자 합리(哈里) 주 008
각주 008)
哈里: 할릴(Halil)의 音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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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뒤를 잇고서는 곧 사신 호알달(虎歹達) 주 009
각주 009)
虎歹達: Khudaidad의 音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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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파견하여 부안을 호송해서 귀국토록 하고, 공물을 바쳤다.주 010
각주 010)
傅安 등은 洪武 28년(1395)에 출국했으니, 결국 13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太宗實錄』 卷67 永樂 5년 6월 癸卯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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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는 그 사신에게 두터이 상을 내리고, 지휘(指揮)주 011
각주 011)
指揮: 衛를 관장하는 指揮使의 약칭으로 正三品職이다. 한편 1衛는 각 지역에 편성된 명조의 군사단위인데, 5,600명의 병사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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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아흔태(白阿兒忻台) 등을 보내어 작고한 국왕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새로운 왕 및 부락주 012
각주 012)
部落은 『太宗實錄』 卷67 永樂 5년 6월 癸卯條에서는 部屬으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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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은과 폐백을 하사하였다.주 013
각주 013)
永樂帝는 指揮 白阿兒忻台를 보내 帖木兒를 제사지내도록 하고, 그 손자인 哈里에게 璽書와 銀幣를 하사하는 한편 그 部屬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품을 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太宗實錄』 卷67 永樂 5년 6월 癸卯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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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우두머리인 사리노아정(沙里奴兒丁) 등도 또한 낙타와 말을 바쳤다. 부안 등에게 명하여 그 왕에게 채폐(綵幣)주 014
각주 014)
綵幣: 채색의 비단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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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사토록 하고, 조공사신과 함께 가도록 하였다. [영락] 7년(1409)에 부안 등이 돌아올 때, 왕이 사신을 딸려 보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이로부터 혹은 해마다, 혹은 격년마다, 혹은 3년마다 곧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영락] 13년(1415)에 사신을 이달(李達) 주 015
각주 015)
李達: 生卒 연대는 不明이다. 鳳陽 定遠 출신이다. 永樂 초에 都指揮使로서 洮州를 鎭守했으며, 영락 7년(1409)에는 군대를 거느리고 西寧을 공격했다. 都督僉事로까지 승진했다. 軍陣 생활 40년 동안 各 部族 軍民이 그를 매우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正統 연간(1436~1449)에 致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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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陳誠) 주 016
각주 016)
陳誠(1365~1457): 字는 子實이며, 江西 吉安府 臨川縣 사람으로, 進士가 되었다. 洪武 연간(1368~1398)에 安南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吏部員外郞을 지냈다. 永樂 연간(1403~1424)에는 5차례에 걸쳐 西域의 티무르 제국과 漠北의 韃靼 등으로 出使했는데, 특히 哈里 등 17개국을 편력하고 그 山川·城郭·風俗과 物産을 『西域行程記』, 『西域蕃國志』 등으로 정리하여 황제에게 헌상하였다. 그 공로로 吏部郞中에 발탁되었고, 이후 廣東參議·右通政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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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딸려 보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하직 인사를 하고 돌아갈 때, 진성 및 중관(中官)주 017
각주 017)
中官: 中官은 內職의 官, 京官 등의 뜻이 있지만 대개 宦官을 가리키며, 閹人 혹은 寺人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周代부터 淸末까지 환관이 있었다. 『明史』 卷74 「職官志」3 宦官條에 의하면, 명대에는 宦官十二監이 있었고, 이들의 기관에서는 政事에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司禮監은 그 중심에 있었고, 각 기관에는 太監(正四品)·小監(從四品)·監丞(正五品)·典簿(正六品) 외에 從六品인 長隨·奉御 등의 職官이 있었다. 명대 환관을 각 방면에 기용하기 시작한 것은 永樂帝 때부터이며, 이들을 해외 각국으로 보내는 使臣이나 外征의 지휘관으로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永樂 18년(1420)에 비밀경찰기관으로 신설된 東廠을 관장토록 하여 경찰권을 위임하였다. 이후 錦衣衛까지 사실상 지휘를 하면서 官民의 행동을 감시하였으며, 宣宗 시대 이후에는 정치 분야에 발언권을 증대시켜 왕조의 정치를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明 中後期 환관의 발호로 인한 각종 폐해는 明朝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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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魯安)에게 함께 가도록 명했고, 그 우두머리 올노백(兀魯伯) 주 018
각주 018)
兀魯伯: 후에 사마르칸트를 통치한 바 있는 울룩벡(Ulugh Beg)의 音譯인데, 『殊域周咨錄』에서는 그에 대하여 割註로 “帖木兒孫”이라 기재(『殊域周咨錄』 卷15)하여 티무르의 손자임을 밝혔다. 즉 티무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샤루흐(Shah Rukh)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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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게 백은(白銀)·채폐를 하사했다.주 019
각주 019)
이에 관한 내용은 『太宗實錄』 卷177 永樂 14년 6월 己卯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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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에서 다시 사신을 진성 등에게 딸려 보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영락] 18년(1420)에 다시 진성 및 중관 곽경(郭敬)에게 명하여 칙서와 채폐를 가지고 가서 보답토록 하였다.주 020
각주 020)
廣東布政司 右布政 陳誠을 右參政으로 삼아 中官 郭敬과 함께 哈烈 등 諸國에 出使토록 한 바, 당시 撒馬兒罕國은 哈烈 등 각 국과 마찬가지로 말 등을 貢物로 바쳤기 때문에 답례로 陳誠 등을 보내어 勅書와 綵幣 등을 하사했다. 이에 대해서는 『太宗實錄』 卷226 永樂 18년 6월 己酉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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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宣德)주 021
각주 021)
宣德: 明朝 제5대 황제인 宣宗 朱瞻基의 年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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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1430) 가을과 겨울에 우두머리 올노백미아찰(兀魯伯米兒咱) 주 022
각주 022)
兀魯伯米兒咱: 米兒咱에 대해서는 『西域蕃國志』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즉, “國王之妻皆尊稱之曰阿哈, 其子則稱米兒咱, 蓋米兒咱者, 猶華言舍人也”라 하여, 왕의 아들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兀魯伯米兒咱은 왕의 아들 울룩벡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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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사신을 보내어 다시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주 023
각주 023)
두목 兀魯伯米兒咱은 宣德 5년 7월에 사신 卜顔火力 등을, 윤12월에는 사신 卜顔箚法兒 등을 명에 보내어 각각 方物을 바쳤다. 이에 대해서는 『宣宗實錄』 卷68 宣德 5년 7월 庚子條; 『宣宗實錄』 卷74 宣德 5년 윤12월 乙巳條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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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 7년(1432)에 중관 이귀 등을 보내 문기(文綺)주 024
각주 024)
文綺: 무늬를 수놓은 비단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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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금(羅錦)주 025
각주 025)
羅錦: 꽃무늬가 있는 비단이나 매우 정교하게 아름다운 비단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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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지고 가서 그 나라에 상으로 내려주도록 하였다.주 026
각주 026)
宣德帝는 中官 李貴 등을 西域의 哈烈 등 국에 出使토록 한 바 있다. 『宣宗實錄』 卷86 宣德 7년 정월 丁卯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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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成祖: 明朝의 3대 황제인 永樂帝 朱棣의 廟號이다. 성조는 太祖 洪武帝와 馬皇后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과연 실제 그러한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가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洪武 13년(1380) 北平에 燕王으로 봉해지면서부터이다. 조카인 建文帝가 諸王削藩策을 펼치자 위기감을 느끼고 擧兵하였다. 4년간에 걸친 ‘靖難의 役’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어 帝位에 올랐다. 영락제는 환관 鄭和에게 寶船 수십 척 등 대규모의 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인도 및 페르시아만·홍해연안·아프리카 東岸을 무대로 원정을 감행케 하였다. 이후 그는 北京으로의 遷都, 漠北에 대한 대대적인 親征 등 수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재위한지 22년만인 1425년에 北征에서 돌아오는 길에 楡木川(현재 內蒙古自治區 多倫縣의 서북부)에서 病死했다. 諡號는 文皇帝이며, 廟號는 太宗이었으나 16세기 중반의 嘉靖 연간(1522~1566)에 成祖로 廟號가 바뀌었다. 그의 陵은 長陵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永樂: 明朝 제3대 황제인 成祖 朱棣의 年號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別失八里는 현재 新疆 위구르자치구의 중북부 지역에 해당하는데, 상세한 것은 후술함. 바로가기
  • 각주 004)
    티무르의 明朝 원정 기도의 원인에 대하여 朱亞非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티무르의 覇權에 대한 야심은 유래가 깊었다는 것이다. 그는 내부 안정을 취한 후 바로 대외 확장 정책을 추진하였다. 동시에 蒙古의 귀족으로서 元朝의 복수를 여러 차례에 걸쳐 聲言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먼저 역량을 서남 방면의 각국으로 집중시켜 인도와 서아시아는 물론 멀리 터키에까지 원정을 마친 뒤인 洪武 말년에 이르러 본격적인 東征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둘째, 建文帝 즉위 후 ‘靖難의 役’으로 明朝가 내란 상태에 돌입하자 티무르는 東征의 호기로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1404년 그는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직접 出征의 길에 나섰다고 한다. 다만 출정하자마자 永樂 3년 2월, 軍中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는 朱亞非, 2007; 67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5)
    總兵官: 鎭守總兵을 일컫는다. 총병관은 전쟁 등 유사시에, 公·侯·伯 등 勳臣이나 都督 등의 관리 가운데 充任을 하고, 일이 끝나면 본래의 직무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변경에 일이 많아지자 현지에 계속 머물면서 鎭守를 담당하면서 사실상 鎭의 최고 무관직으로 고정되어 갔다. 황제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기 때문에 그 권한은 매우 컸으며, 品級과 定員은 없었다. 명 중기 이후에는 설치된 곳이 날로 늘어나 점차 流官으로 充任되었고, 총독과 순무의 지휘를 받았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宋晟(1342~1407): 安徽 定遠 사람으로, 字는 景陽이다. 元末에 아버지 朝用과 형 國興을 따라 朱元璋의 농민반란군에 투신하여 反元전쟁에 참여하였다. 명 왕조 성립 후, 洪武 초에 都指揮同知가 되어 江西, 大同, 陝西 등지에 鎭守했으며, 洪武 17년(1384)에 右軍都督僉事로 승진하여 諒州를 鎭守했고, 이후 수차례 군대를 이끌고 元의 잔적을 征討하여 威名을 떨쳤다. 永樂 初年에 이르러서도 後軍都督府 左都督拜平羌將軍에 임명되어 西北 지역 방위의 임무를 맡는 등 20여 년에 걸쳐 西北邊疆을 保衛하는 데 큰 공을 세워 永樂 3년(1405)에 西寧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永樂 5년(1407)에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鄆國公에 追封되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영락제의 駙馬가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이에 관한 내용은 『太宗實錄』 卷39 永樂 3년 2월 庚寅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8)
    哈里: 할릴(Halil)의 音譯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9)
    虎歹達: Khudaidad의 音譯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0)
    傅安 등은 洪武 28년(1395)에 출국했으니, 결국 13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太宗實錄』 卷67 永樂 5년 6월 癸卯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1)
    指揮: 衛를 관장하는 指揮使의 약칭으로 正三品職이다. 한편 1衛는 각 지역에 편성된 명조의 군사단위인데, 5,600명의 병사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2)
    部落은 『太宗實錄』 卷67 永樂 5년 6월 癸卯條에서는 部屬으로 표기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3)
    永樂帝는 指揮 白阿兒忻台를 보내 帖木兒를 제사지내도록 하고, 그 손자인 哈里에게 璽書와 銀幣를 하사하는 한편 그 部屬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품을 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太宗實錄』 卷67 永樂 5년 6월 癸卯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4)
    綵幣: 채색의 비단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15)
    李達: 生卒 연대는 不明이다. 鳳陽 定遠 출신이다. 永樂 초에 都指揮使로서 洮州를 鎭守했으며, 영락 7년(1409)에는 군대를 거느리고 西寧을 공격했다. 都督僉事로까지 승진했다. 軍陣 생활 40년 동안 各 部族 軍民이 그를 매우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正統 연간(1436~1449)에 致仕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6)
    陳誠(1365~1457): 字는 子實이며, 江西 吉安府 臨川縣 사람으로, 進士가 되었다. 洪武 연간(1368~1398)에 安南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吏部員外郞을 지냈다. 永樂 연간(1403~1424)에는 5차례에 걸쳐 西域의 티무르 제국과 漠北의 韃靼 등으로 出使했는데, 특히 哈里 등 17개국을 편력하고 그 山川·城郭·風俗과 物産을 『西域行程記』, 『西域蕃國志』 등으로 정리하여 황제에게 헌상하였다. 그 공로로 吏部郞中에 발탁되었고, 이후 廣東參議·右通政 등을 역임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7)
    中官: 中官은 內職의 官, 京官 등의 뜻이 있지만 대개 宦官을 가리키며, 閹人 혹은 寺人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周代부터 淸末까지 환관이 있었다. 『明史』 卷74 「職官志」3 宦官條에 의하면, 명대에는 宦官十二監이 있었고, 이들의 기관에서는 政事에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司禮監은 그 중심에 있었고, 각 기관에는 太監(正四品)·小監(從四品)·監丞(正五品)·典簿(正六品) 외에 從六品인 長隨·奉御 등의 職官이 있었다. 명대 환관을 각 방면에 기용하기 시작한 것은 永樂帝 때부터이며, 이들을 해외 각국으로 보내는 使臣이나 外征의 지휘관으로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永樂 18년(1420)에 비밀경찰기관으로 신설된 東廠을 관장토록 하여 경찰권을 위임하였다. 이후 錦衣衛까지 사실상 지휘를 하면서 官民의 행동을 감시하였으며, 宣宗 시대 이후에는 정치 분야에 발언권을 증대시켜 왕조의 정치를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明 中後期 환관의 발호로 인한 각종 폐해는 明朝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8)
    兀魯伯: 후에 사마르칸트를 통치한 바 있는 울룩벡(Ulugh Beg)의 音譯인데, 『殊域周咨錄』에서는 그에 대하여 割註로 “帖木兒孫”이라 기재(『殊域周咨錄』 卷15)하여 티무르의 손자임을 밝혔다. 즉 티무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샤루흐(Shah Rukh)의 아들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9)
    이에 관한 내용은 『太宗實錄』 卷177 永樂 14년 6월 己卯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20)
    廣東布政司 右布政 陳誠을 右參政으로 삼아 中官 郭敬과 함께 哈烈 등 諸國에 出使토록 한 바, 당시 撒馬兒罕國은 哈烈 등 각 국과 마찬가지로 말 등을 貢物로 바쳤기 때문에 답례로 陳誠 등을 보내어 勅書와 綵幣 등을 하사했다. 이에 대해서는 『太宗實錄』 卷226 永樂 18년 6월 己酉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21)
    宣德: 明朝 제5대 황제인 宣宗 朱瞻基의 年號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2)
    兀魯伯米兒咱: 米兒咱에 대해서는 『西域蕃國志』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즉, “國王之妻皆尊稱之曰阿哈, 其子則稱米兒咱, 蓋米兒咱者, 猶華言舍人也”라 하여, 왕의 아들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兀魯伯米兒咱은 왕의 아들 울룩벡을 뜻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3)
    두목 兀魯伯米兒咱은 宣德 5년 7월에 사신 卜顔火力 등을, 윤12월에는 사신 卜顔箚法兒 등을 명에 보내어 각각 方物을 바쳤다. 이에 대해서는 『宣宗實錄』 卷68 宣德 5년 7월 庚子條; 『宣宗實錄』 卷74 宣德 5년 윤12월 乙巳條 등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24)
    文綺: 무늬를 수놓은 비단을 일컫는다. 바로가기
  • 각주 025)
    羅錦: 꽃무늬가 있는 비단이나 매우 정교하게 아름다운 비단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26)
    宣德帝는 中官 李貴 등을 西域의 哈烈 등 국에 出使토록 한 바 있다. 『宣宗實錄』 卷86 宣德 7년 정월 丁卯條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성조, 成祖, 부안(傅安), 첩목아, 송성(宋晟), 부안, 부안, 부안, 첩목아, 합리(哈里), 호알달(虎歹達), 부안, 영락제, 백아아흔태(白阿兒忻台), 사리노아정(沙里奴兒丁), 부안, 부안, 이달(李達), 진성(陳誠), 진성, 노안(魯安), 올노백(兀魯伯), 진성, 진성, 곽경(郭敬), 올노백미아찰(兀魯伯米兒咱), 이귀
지명
별실팔리(別失八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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