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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연간 태조(太祖) 재위 시에 특목이(特穆爾)가 처음으로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다는 내용

  • 국가
    살마아한(撒馬兒罕)
홍무(洪武)주 001
각주 001)
洪武: 明朝를 창업한 太祖 朱元璋의 年號이다. 한편 明 太祖 以來로 1世 1元, 즉 한 황제가 하나의 연호만을 제정하여 사용하는 제도가 확립되어 관례화하였다. 明淸 시대 중국의 황제는 하나의 연호만을 제정하여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明朝의 英宗만이 正統(1336~1449)과 天順(1457~1464)이라는 두 개의 연호를 사용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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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1368~1398)에 태조(太祖, 1328~1398; 재위 1368~1398)주 002
각주 002)
太祖: 明朝를 창시한 洪武帝 朱元璋을 가리킨다. 원래의 이름은 重八이었으나, 紅巾軍 수령 郭子興의 사위가 되면서 元璋으로 개명하였다. 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때 전염병으로 부모와 큰 형을 잃고, 부근에 있는 皇覺寺에 들어가 중이 되어 3년여에 걸친 유랑생활을 하였다. 이후 그는 元 至正 12년(1352)에 고향인 濠州에 근거지를 둔 郭子興의 紅巾軍에 가담하였다. 郭子興이 죽은 뒤 실질적으로 郭子興 군단을 이끌면서 江蘇, 安徽, 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세력을 확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儒者와 地主들을 대거 흡수하는 한편 白蓮敎의 색채도 점차 탈각시켜 나갔다. 특히 至正 23년(1363)에 江西 지역에서 雄據하던 陳友諒 세력을 鄱陽湖 전투에서 타도하고, 1367년에는 江蘇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張士誠을 그의 근거지인 平江(현재의 蘇州)에서 멸하였다. 각지의 群雄들을 차례로 제압한 그는 元朝를 타도하기 위한 북벌군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1368년 정월, 應天府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大明’, 연호를 ‘洪武’라 정하였다. 31년의 재위 동안 명 왕조의 기틀이 되는 여러 가지 제도와 정책을 행했으며, 1398년 윤 5월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諡號는 高皇帝, 廟號는 太祖로 追尊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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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과 통교(通交)하고자 하여, 여러 차례 사신(使臣)을 파견하여 초무(招撫)하여 효유(曉諭)하였으나 원방(遠方)의 군장(君長) 가운데 온 자가 없었다. [홍무] 20년(1387) 9월에 첩목아(帖木兒)가 처음으로 회회(回回) 주 003
각주 003)
回回: 이슬람교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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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랄합비사(滿剌哈非思) 주 004
각주 004)
滿剌哈非思: 티무르가 보낸 使者인 Mulla Hafiz의 音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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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보내 내조(來朝)해서 말 15마리와 낙타 2마리를 바쳤다. 조서(詔書)주 005
각주 005)
詔書: 황제가 관리와 천하의 백성들에게 내리는 문서를 말한다. 周代에는 君臣 모두가 ‘조서’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秦이 천하를 통일한 후, 진시황이 자신을 이른바 “三皇의 덕을 겸비하고, 공은 五帝보다 드높다(德兼三皇, 功高五帝)”라는 견지에서 자신을 황제로 칭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詔’라 부르게 되었다. 唐宋 시기에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元代에 다시 사용하게 되었으며, 明代에는 조서를 이용하여 중대한 명령을 반포하거나 신하들을 훈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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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내려 그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고, 백금(白金)주 006
각주 006)
白金: 銀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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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정(錠)주 007
각주 007)
錠: 寶鈔 5貫에 해당하는 화폐의 단위이다. 보통 1관은 동전 1,000錢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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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사하였다.주 008
각주 008)
『太祖實錄』 卷185 洪武 20년 9월 己丑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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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거의 매년 말과 낙타를 바쳤다. [홍무] 25년(1392)에 융(絨) 6필, 청사폭(靑梭幅)주 009
각주 009)
靑梭幅: 청색의 梭幅이란 뜻이다. 梭幅은 梭服을 의미한다. 즉, 새의 깃털로 加工해서 만든 織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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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필, 홍색과 녹색의 살합날(撒哈剌)주 010
각주 010)
撒哈剌: 撒哈剌은 페르시아어로 Sagheree라 하며, 皮革 혹은 폭이 넓은 毛絨을 말하는데, 紅과 綠 두 종류가 있다(周連寬, 1991: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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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2필 및 빈철(鑌鐵)의 도검(刀劍)·갑주(甲冑) 등의 여러 공물을 바쳤다.주 011
각주 011)
撒馬兒罕의 駙馬 帖木兒가 萬戶 尼咎卜丁 등을 명에 使者로 보내 말과 낙타 등의 공물을 바치자, 洪武帝는 使者에게 白金과 文綺 등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太祖實錄』 卷217 洪武 25년 3월 壬午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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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나라 안의 회회가 다시 스스로 말을 몰아 양주(涼州) 주 012
각주 012)
涼州: 甘肅省 西北部에 있는 武威의 옛 지명이다. 이곳은 河西走廊의 東端에 위치해 있으며, 실크로드 상의 중요한 요충지이다. 漢代에 설치된 13州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며, 涼州는 서방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항상 춥고, 서늘한 곳이기 때문에 西涼이라고도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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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교역(交易)하였다. [그러나] 홍무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경사(京師)주 013
각주 013)
京師: 明初의 수도였던 應天府, 즉 오늘날의 南京을 가리킨다. 應天은 元 至正 16년(1356)에 朱元璋이 集慶路를 應天府로 개칭하면서 불리어졌으며, 明初에 이곳에 定都했다. 그러나 永樂 19년(1421)에 北平府, 즉 현재의 北京으로 遷都를 선포하면서 北京이 새로운 京師로 정해졌고, 正統 6년(1441)에 行在라는 칭호가 탈락하면서 정식 수도가 되었다. 이에 應天府는 南京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淸 順治 2년(1645)에는 江寧府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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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말을 팔도록 하였다. 원(元)나라 때에 회회가 천하에 두루 퍼졌는데, 이에 이르러 감숙(甘肅) 주 014
각주 014)
甘肅: 황하 상류 지역에 위치하며, 先秦 시대 9州 가운데 雍州에 속한 지역으로 元代에 甘肅行中書省이 설치되었는데, 明代에 이르러 甘肅省으로 고쳤다. 東으로는 陝西, 南으로는 巴蜀·靑海, 西로는 新疆, 北으로는 內蒙古·寧夏와 연접해 있다. 한편 甘肅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의 중심도시인 甘州(지금의 張掖)와 肅州(지금의 酒泉)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며, 簡稱하여 甘 혹은 隴으로도 불린다. 省都는 蘭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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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거주하는 자가 아직 많았으므로 수신(守臣)주 015
각주 015)
守臣: 한 지역을 鎭守하는 지방장관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巡撫 등 甘肅의 주요 지휘관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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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조서를 내려 모두 돌아가도록 하니, 이에 살마아한(撒馬兒罕)으로 돌아간 자가 1,200여 명이었다.

  • 각주 001)
    洪武: 明朝를 창업한 太祖 朱元璋의 年號이다. 한편 明 太祖 以來로 1世 1元, 즉 한 황제가 하나의 연호만을 제정하여 사용하는 제도가 확립되어 관례화하였다. 明淸 시대 중국의 황제는 하나의 연호만을 제정하여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明朝의 英宗만이 正統(1336~1449)과 天順(1457~1464)이라는 두 개의 연호를 사용한 바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太祖: 明朝를 창시한 洪武帝 朱元璋을 가리킨다. 원래의 이름은 重八이었으나, 紅巾軍 수령 郭子興의 사위가 되면서 元璋으로 개명하였다. 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때 전염병으로 부모와 큰 형을 잃고, 부근에 있는 皇覺寺에 들어가 중이 되어 3년여에 걸친 유랑생활을 하였다. 이후 그는 元 至正 12년(1352)에 고향인 濠州에 근거지를 둔 郭子興의 紅巾軍에 가담하였다. 郭子興이 죽은 뒤 실질적으로 郭子興 군단을 이끌면서 江蘇, 安徽, 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세력을 확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儒者와 地主들을 대거 흡수하는 한편 白蓮敎의 색채도 점차 탈각시켜 나갔다. 특히 至正 23년(1363)에 江西 지역에서 雄據하던 陳友諒 세력을 鄱陽湖 전투에서 타도하고, 1367년에는 江蘇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張士誠을 그의 근거지인 平江(현재의 蘇州)에서 멸하였다. 각지의 群雄들을 차례로 제압한 그는 元朝를 타도하기 위한 북벌군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1368년 정월, 應天府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大明’, 연호를 ‘洪武’라 정하였다. 31년의 재위 동안 명 왕조의 기틀이 되는 여러 가지 제도와 정책을 행했으며, 1398년 윤 5월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諡號는 高皇帝, 廟號는 太祖로 追尊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回回: 이슬람교도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4)
    滿剌哈非思: 티무르가 보낸 使者인 Mulla Hafiz의 音譯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5)
    詔書: 황제가 관리와 천하의 백성들에게 내리는 문서를 말한다. 周代에는 君臣 모두가 ‘조서’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秦이 천하를 통일한 후, 진시황이 자신을 이른바 “三皇의 덕을 겸비하고, 공은 五帝보다 드높다(德兼三皇, 功高五帝)”라는 견지에서 자신을 황제로 칭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詔’라 부르게 되었다. 唐宋 시기에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元代에 다시 사용하게 되었으며, 明代에는 조서를 이용하여 중대한 명령을 반포하거나 신하들을 훈계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白金: 銀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7)
    錠: 寶鈔 5貫에 해당하는 화폐의 단위이다. 보통 1관은 동전 1,000錢에 해당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8)
    『太祖實錄』 卷185 洪武 20년 9월 己丑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9)
    靑梭幅: 청색의 梭幅이란 뜻이다. 梭幅은 梭服을 의미한다. 즉, 새의 깃털로 加工해서 만든 織物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0)
    撒哈剌: 撒哈剌은 페르시아어로 Sagheree라 하며, 皮革 혹은 폭이 넓은 毛絨을 말하는데, 紅과 綠 두 종류가 있다(周連寬, 1991: 78). 바로가기
  • 각주 011)
    撒馬兒罕의 駙馬 帖木兒가 萬戶 尼咎卜丁 등을 명에 使者로 보내 말과 낙타 등의 공물을 바치자, 洪武帝는 使者에게 白金과 文綺 등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太祖實錄』 卷217 洪武 25년 3월 壬午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2)
    涼州: 甘肅省 西北部에 있는 武威의 옛 지명이다. 이곳은 河西走廊의 東端에 위치해 있으며, 실크로드 상의 중요한 요충지이다. 漢代에 설치된 13州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며, 涼州는 서방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항상 춥고, 서늘한 곳이기 때문에 西涼이라고도 칭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3)
    京師: 明初의 수도였던 應天府, 즉 오늘날의 南京을 가리킨다. 應天은 元 至正 16년(1356)에 朱元璋이 集慶路를 應天府로 개칭하면서 불리어졌으며, 明初에 이곳에 定都했다. 그러나 永樂 19년(1421)에 北平府, 즉 현재의 北京으로 遷都를 선포하면서 北京이 새로운 京師로 정해졌고, 正統 6년(1441)에 行在라는 칭호가 탈락하면서 정식 수도가 되었다. 이에 應天府는 南京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淸 順治 2년(1645)에는 江寧府로 개칭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4)
    甘肅: 황하 상류 지역에 위치하며, 先秦 시대 9州 가운데 雍州에 속한 지역으로 元代에 甘肅行中書省이 설치되었는데, 明代에 이르러 甘肅省으로 고쳤다. 東으로는 陝西, 南으로는 巴蜀·靑海, 西로는 新疆, 北으로는 內蒙古·寧夏와 연접해 있다. 한편 甘肅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의 중심도시인 甘州(지금의 張掖)와 肅州(지금의 酒泉)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며, 簡稱하여 甘 혹은 隴으로도 불린다. 省都는 蘭州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5)
    守臣: 한 지역을 鎭守하는 지방장관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巡撫 등 甘肅의 주요 지휘관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태조, 太祖, 첩목아(帖木兒), 만랄합비사(滿剌哈非思), 홍무제
지명
서역, 회회(回回), 회회, 양주(涼州), 원(元), 회회, 감숙(甘肅), 살마아한(撒馬兒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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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연간 태조(太祖) 재위 시에 특목이(特穆爾)가 처음으로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다는 내용 자료번호 : jo.k_0024_0332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