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살마아한(撒馬兒罕)의 역사적 연혁과 지리적 설명

  • 국가
    살마아한(撒馬兒罕)
살마아한(撒馬兒罕) 주 001
각주 001)
撒馬兒罕: 우즈베키스탄의 古都이자 제2의 대도시인 사마르칸트(Samarqand) 지역을 일컫는다. 현재 撒馬爾罕이라 표기되고 있는 撒馬兒罕, 즉 사마르칸트는 ‘비옥한 토지’라는 의미이다. 사마르칸트는 기원전 3세기의 西漢 시기에 건립되었는데, 페르시아 및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물자가 집중적으로 교류되는 곳이어서 현지의 경제는 자못 번성하였다. 『魏書』에서는 悉萬斤이라 칭했고, 『隋書』 「西域記」와 慧超의 『往五天竺國傳』에서는 각각 康國이라 칭했으며, 唐 杜環의 『經行記』에서는 康國과 薩末建, 『新唐書』에서는 康國과 薩秣建, 元 耶律楚材의 『西游錄』에서는 尋思干, 『長春眞人西游錄』에서는 邪米思干, 『元史』에서는 薛迷思加라고 표기했는데, 明 陳誠의 『西域蕃國志』, 『明史』, 嚴從簡의 『殊域周咨錄』 卷15 등에서는 모두 撒馬兒罕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편 사마르칸트는 13세기 이전에는 호라즘(Xorazm)국의 중심지였으나, 1219년에 칭기스칸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으며, 14세기 후반 이후 突厥系 몽골인이 세운 帖木兒(Temür)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닫기
은 곧 한(漢)나라 때의 계빈(罽賓) 주 002
각주 002)
罽賓: 漢代 西域의 國名으로서 凜賓, 劫賓, 羯賓이라고도 한다. 印度 북부의 카시미르 일대에 위치한다. 國名에 대해서는 諸書에 따라 동일하게 記載되어 있지 않다. 이 나라에 대해서는 중국의 正史와 佛典 속에 빈번히 보이는데, 시대의 相異에 따라 가리키는 바의 지역도 차이가 난다. 대개 迦濕彌羅國의 古稱이다.
닫기
지역으로서 수(隋)나라 때는 조국(漕國) 주 003
각주 003)
漕國: 인도 서북부에 위치하는데,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동남부에 상당하는 옛 나라이다. 漕矩, 漕利, 訶達羅支, 社護羅薩他那國이라고도 불린다. 『大唐西域記』 卷12의 기재에 의하면, 이 나라의 주위는 7,000여 리이고, 鶴悉那, 鶴薩羅의 두 개의 城이 있었다. 기후는 寒冷하고, 霜雪이 많으며, 밀의 산출이 풍부하고, 草木이 扶疏하며, 花果가 茂盛하고, 郁金香이 산출된다고 한다. 百神을 제사지내고, 각종 종교가 혼재하였다. 三寶도 崇敬하여 伽藍 수백 刹이 설치되어 승려의 수는 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大乘佛敎를 숭상하였다. 한편 본문에서 漕國이 漢代의 罽賓이라고 하였지만, 일본의 白鳥庫吉 등은 『梵語雜名』 등의 諸書에 근거하여, 이 罽賓은 迦畢試國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대개 隋代의 漕國이 唐代 초기에 이르러 그 동북부가 迦畢試國으로 독립했고, 漕矩吒國만이 그 서남부에 존속했는데, 그 후에 漕矩吒國은 도리어 迦畢試國에 臣屬하였다. 또 다른 한편, 이 나라는 漕矩吒라고도 하는데, 5세기 말에 大月氏를 멸망시키고 喀布爾河 流域 및 堪達哈(Kandahar) 지역을 점령했으며, 詹布拉(Jabula)이라고 總稱하였다.
닫기
이라 했다가 당(唐)나라 때 다시 계빈이라 했는데, 모두 중국과 왕래하였다. 원(元)나라 태조(太祖, 1162~1227; 재위 1206~1227)주 004
각주 004)
太祖: 몽골 제국 초대 황제 칭기스칸(成吉思汗)을 가리킨다.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어려서 부친 이쉬게이를 잃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으나, 1189년 부족의 수장, 즉 칸(汗)으로 추대되었고, 차례로 대항자를 무너뜨려 1204년에 나이만部를 깨뜨리고 전 몽골부족을 통일하였다. 1206년에는 오논강 상류의 草地에서 열린 쿠릴타이(大集會)에서 칭기스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탕구트(西夏) 정벌, 金國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트라르 사건이 일어난 것을 기화로 1219년부터 호라즘국을 공격하는 한편 長子 조치 등을 시켜 러시아 남부까지 정복토록 한 뒤 1225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西夏를 討滅시켰으나, 직전에 병사하였다. 개국의 군주로서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여 내정과 대외원정 양면에 걸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東西문화에 대한 존중, 종교에 대한 관용과 보호, 각종 제도의 정비 등은 유목사회가 단기간에 유목국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자양이 되었다.
닫기
서역(西域) 주 005
각주 005)
西域: 이 단어는 『漢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현재의 新疆 위그르자치구(維吾爾自治區)인 타림분지에 산재해 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지칭하였다. 그 뒤 중국인의 서방에 관한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서역이 뜻하는 지역범위도 확대되어, 西투르키스탄·서아시아·소아시아는 물론이고 때로는 인도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동·서 투르키스탄을 합친 중앙아시아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닫기
을 소탕하고 평정하고는 모두 제왕(諸王)과 부마(駙馬)로 그곳의 군장(君長)으로 삼았고, 전대(前代)의 국명(國名)을 몽골어로 바꾸니 비로소 살마아한(撒馬兒罕)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가욕관(嘉峪關) 주 006
각주 006)
嘉峪關: 甘肅省 嘉峪關市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 실크로드의 교통요충지였다. 명대 만리장성 西端의 起點으로, 이 관문은 明 洪武 5년(1372)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이후 168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가욕관은 만리장성의 여러 관문 중 壯觀을 이루는 關城으로 1961년에 國務院에 의해 第一批全國文物重點保護單位로 지정되었다.
닫기
에서 9,600리(里)주 007
각주 007)
里: 明代에 길이를 표시하는 尺度는 裁衣尺·量地尺·營造尺으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 明代 量地尺의 1里는 360步이고, 『算法統宗』 卷3에 의하면 ‘五尺爲一步’로 되어 있음으로 1里는 1,800尺이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1리는 576m이며, 따라서 1,600리는 약 921.6km의 거리이다.
닫기
떨어져 있다. 나라 말에 그곳의 왕(王)이 된 자가 부마 첩목아(帖木兒, 1336~1405; 재위 1370~1405)주 008
각주 008)
帖木兒: 티무르 왕조의 창설자인 티무르를 가리킨다.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 남방 케슈에서 태어났다. 몽골계 바르라스部 소속의 귀족이었다.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별명 때문에 유럽에서는 Tamerlane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불렸는데, 실제로 그가 절름발이였다는 사실이 遺體조사에 의하여 밝혀진 바 있다. 1370년에 西차가타이 칸국이 쇠퇴해지자 그 틈을 타 트랜스옥시아나를 통일하고, 사마르칸트에 수도를 둔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명목상으로는 차가타이칸의 후예를 추대하고, 스스로는 칸家의 사위가 되어 아미르(君侯) 신분에 머물렀다. 몽골 제국의 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全 이란, 코카사스, 東이라크, 킵차크 칸국을 병합하고, 北인도에 침입하였으며, 오스만朝 투르크를 앙카라의 전투에서 격파하여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수도 사마르칸트를 아껴 각지에서 건축가와 공예가, 문인과 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이에 사마르칸트가 부흥하여 동서무역의 최대 중계시장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란·이슬람 문화가 開花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세계 제국의 지배자로서 중국의 신흥 왕조인 明朝를 타도하기 위하여 감행한 원정 도중 오트라르의 陣中에서 병사하였다.
닫기
였다.

  • 각주 001)
    撒馬兒罕: 우즈베키스탄의 古都이자 제2의 대도시인 사마르칸트(Samarqand) 지역을 일컫는다. 현재 撒馬爾罕이라 표기되고 있는 撒馬兒罕, 즉 사마르칸트는 ‘비옥한 토지’라는 의미이다. 사마르칸트는 기원전 3세기의 西漢 시기에 건립되었는데, 페르시아 및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물자가 집중적으로 교류되는 곳이어서 현지의 경제는 자못 번성하였다. 『魏書』에서는 悉萬斤이라 칭했고, 『隋書』 「西域記」와 慧超의 『往五天竺國傳』에서는 각각 康國이라 칭했으며, 唐 杜環의 『經行記』에서는 康國과 薩末建, 『新唐書』에서는 康國과 薩秣建, 元 耶律楚材의 『西游錄』에서는 尋思干, 『長春眞人西游錄』에서는 邪米思干, 『元史』에서는 薛迷思加라고 표기했는데, 明 陳誠의 『西域蕃國志』, 『明史』, 嚴從簡의 『殊域周咨錄』 卷15 등에서는 모두 撒馬兒罕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편 사마르칸트는 13세기 이전에는 호라즘(Xorazm)국의 중심지였으나, 1219년에 칭기스칸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으며, 14세기 후반 이후 突厥系 몽골인이 세운 帖木兒(Temür)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罽賓: 漢代 西域의 國名으로서 凜賓, 劫賓, 羯賓이라고도 한다. 印度 북부의 카시미르 일대에 위치한다. 國名에 대해서는 諸書에 따라 동일하게 記載되어 있지 않다. 이 나라에 대해서는 중국의 正史와 佛典 속에 빈번히 보이는데, 시대의 相異에 따라 가리키는 바의 지역도 차이가 난다. 대개 迦濕彌羅國의 古稱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漕國: 인도 서북부에 위치하는데,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동남부에 상당하는 옛 나라이다. 漕矩, 漕利, 訶達羅支, 社護羅薩他那國이라고도 불린다. 『大唐西域記』 卷12의 기재에 의하면, 이 나라의 주위는 7,000여 리이고, 鶴悉那, 鶴薩羅의 두 개의 城이 있었다. 기후는 寒冷하고, 霜雪이 많으며, 밀의 산출이 풍부하고, 草木이 扶疏하며, 花果가 茂盛하고, 郁金香이 산출된다고 한다. 百神을 제사지내고, 각종 종교가 혼재하였다. 三寶도 崇敬하여 伽藍 수백 刹이 설치되어 승려의 수는 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大乘佛敎를 숭상하였다. 한편 본문에서 漕國이 漢代의 罽賓이라고 하였지만, 일본의 白鳥庫吉 등은 『梵語雜名』 등의 諸書에 근거하여, 이 罽賓은 迦畢試國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대개 隋代의 漕國이 唐代 초기에 이르러 그 동북부가 迦畢試國으로 독립했고, 漕矩吒國만이 그 서남부에 존속했는데, 그 후에 漕矩吒國은 도리어 迦畢試國에 臣屬하였다. 또 다른 한편, 이 나라는 漕矩吒라고도 하는데, 5세기 말에 大月氏를 멸망시키고 喀布爾河 流域 및 堪達哈(Kandahar) 지역을 점령했으며, 詹布拉(Jabula)이라고 總稱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太祖: 몽골 제국 초대 황제 칭기스칸(成吉思汗)을 가리킨다.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어려서 부친 이쉬게이를 잃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으나, 1189년 부족의 수장, 즉 칸(汗)으로 추대되었고, 차례로 대항자를 무너뜨려 1204년에 나이만部를 깨뜨리고 전 몽골부족을 통일하였다. 1206년에는 오논강 상류의 草地에서 열린 쿠릴타이(大集會)에서 칭기스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탕구트(西夏) 정벌, 金國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트라르 사건이 일어난 것을 기화로 1219년부터 호라즘국을 공격하는 한편 長子 조치 등을 시켜 러시아 남부까지 정복토록 한 뒤 1225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西夏를 討滅시켰으나, 직전에 병사하였다. 개국의 군주로서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여 내정과 대외원정 양면에 걸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東西문화에 대한 존중, 종교에 대한 관용과 보호, 각종 제도의 정비 등은 유목사회가 단기간에 유목국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자양이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西域: 이 단어는 『漢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현재의 新疆 위그르자치구(維吾爾自治區)인 타림분지에 산재해 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지칭하였다. 그 뒤 중국인의 서방에 관한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서역이 뜻하는 지역범위도 확대되어, 西투르키스탄·서아시아·소아시아는 물론이고 때로는 인도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동·서 투르키스탄을 합친 중앙아시아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嘉峪關: 甘肅省 嘉峪關市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 실크로드의 교통요충지였다. 명대 만리장성 西端의 起點으로, 이 관문은 明 洪武 5년(1372)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이후 168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가욕관은 만리장성의 여러 관문 중 壯觀을 이루는 關城으로 1961년에 國務院에 의해 第一批全國文物重點保護單位로 지정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里: 明代에 길이를 표시하는 尺度는 裁衣尺·量地尺·營造尺으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 明代 量地尺의 1里는 360步이고, 『算法統宗』 卷3에 의하면 ‘五尺爲一步’로 되어 있음으로 1里는 1,800尺이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1리는 576m이며, 따라서 1,600리는 약 921.6km의 거리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8)
    帖木兒: 티무르 왕조의 창설자인 티무르를 가리킨다.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 남방 케슈에서 태어났다. 몽골계 바르라스部 소속의 귀족이었다.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별명 때문에 유럽에서는 Tamerlane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불렸는데, 실제로 그가 절름발이였다는 사실이 遺體조사에 의하여 밝혀진 바 있다. 1370년에 西차가타이 칸국이 쇠퇴해지자 그 틈을 타 트랜스옥시아나를 통일하고, 사마르칸트에 수도를 둔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명목상으로는 차가타이칸의 후예를 추대하고, 스스로는 칸家의 사위가 되어 아미르(君侯) 신분에 머물렀다. 몽골 제국의 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全 이란, 코카사스, 東이라크, 킵차크 칸국을 병합하고, 北인도에 침입하였으며, 오스만朝 투르크를 앙카라의 전투에서 격파하여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수도 사마르칸트를 아껴 각지에서 건축가와 공예가, 문인과 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이에 사마르칸트가 부흥하여 동서무역의 최대 중계시장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란·이슬람 문화가 開花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세계 제국의 지배자로서 중국의 신흥 왕조인 明朝를 타도하기 위하여 감행한 원정 도중 오트라르의 陣中에서 병사하였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원(元)나라 태조, 太祖, 첩목아, 帖木兒
지명
살마아한(撒馬兒罕), 한(漢), 계빈(罽賓), 수(隋), 조국(漕國), 당(唐), 계빈, 중국, 서역(西域), 살마아한(撒馬兒罕), 가욕관(嘉峪關),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살마아한(撒馬兒罕)의 역사적 연혁과 지리적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32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