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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벌에 실패한 원 군사의 보고

  • 국가
    일본(日本)
얼마 지나지 않아, 패한 군사 우창(于閶)이 탈출하여 돌아와 말하기를, “관군이 6월에 바다로 나가 7월에는 평호도(平壺島)주 001
각주 001)
平壺島: 平戶島의 오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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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착하고 오룡산(五龍山)주 002
각주 002)
五龍山: 平戶島의 동쪽에 위치한 鷹島를 가리킨다. 오늘날 長崎縣 松浦(마쓰우라)市에 속해 있다. 몽골의 2차 일본 정벌 때 博多(하카다)에서 상륙을 저지당한 몽골·고려 연합군이 그곳에서 강남에서 출발한 몽골군과 합류하여 체제를 정비하고 있었는데 마침 불어닥친 폭풍으로 인해 대부분의 전함이 파괴되었다. 현재에도 鷹島 앞바다에 몽골군의 30∼40m급 목조선이 가라앉아 있고, 鷹島에는 전쟁의 유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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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이동하였습니다. 8월 1일, 바람이 배를 파괴하였습니다. 5일, [범]문호 등 장군들이 각자 튼튼하고 좋은 배를 골라 타고, 군사 10여 만을 산 아래에 버려두었습니다. [남은 무리들이] 의논하여 장백호(張百戶)주 003
각주 003)
百戶: 몽골 시대 각 지역에 설치된 군사기구인 萬戶府 千戶所에 소속된 百戶所의 장관이다. 百戶所는 관할하는 군대 수에 따라 上百戶所와 下百戶所로 구분된다. 上百戶所에는 2명의 百戶가 두어지는데 몽골인 1명, 한인 1명이고, 품계는 종6품이다. 下百戶所에는 百戶1인이 두어지고 품계는 종7품이다. 百戶직은 모두 세습이 허용되었다(『元史』 卷91 「百官志」 7 〈諸路萬戶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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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자를 뽑아 우두머리로 삼고 그를 장총관(張總管)이라고 부르며 지휘를 받았습니다. 곧바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돌아가려 하였는데 7일, 일본인의 공격을 받아 모두 죽었습니다. 남은 2~3만은 그들에게 사로잡혀 갔습니다. 9일, [일본인이] 팔각도(八角島)주 004
각주 004)
八角島: 일본 중세시대 기타규슈에서 무역도시로 발전한 博多(하카다)를 가리킨다. 오늘날 福岡(후쿠오카)市에 속한다. 日·宋 무역의 거점으로 크게 번창하였으나 몽골의 1차 일본 정벌 때 몽골·고려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후 鎌倉막부는 몽골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하카다만 연안에 대규모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몽골의 2차 일본 정벌이 실패한 후 몽골-일본 간 민간무역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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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몽골인·고려인·한인을 모두 죽이고 신부군(新附軍)주 005
각주 005)
新附軍: 몽골이 남송을 정복한 후 투항한 남송군을 몽골의 군사체계 안으로 편입시켜 조직한 군대이다. 대체로 侍衛親軍이나 지방 鎭戍軍의 임무를 띠었다. 몽골이 대외정벌을 수행하거나 내부반란에 직면하였을 때 각 군대 안의 신부군을 선발해 출정시키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군사를 둔전과 노역에 종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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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당인(唐人)주 006
각주 006)
唐人: 전통시대 일본에서 漢人을 부르는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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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여 죽이지 않고 노예로 삼았습니다. [우]창의 무리가 이들입니다”라고 하였다.주 007
각주 007)
『高麗史』 卷29 「忠烈王世家」 〈忠烈王 8년 6월〉조에 蠻軍摠把 沈聰 등 여섯 명이 일본에서 도망쳐 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본래 明州 사람으로 至元 18년(1281) 6월 18일에 葛剌 歹 만호를 따라 배를 타고 일본에 이르렀는데, 사나운 풍랑을 만나 배가 부서졌습니다. 군사 13∼14만 명이 어떤 산에 숨어들었다가 10월 8일에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굶주려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 항복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기술자와 농사지을 줄 아는 사람만 가려서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죽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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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행성관(行省官)주 008
각주 008)
行省官: 일본 정벌을 수행한 日本行省 관리들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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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의논할 때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두 군대를 버리고 돌아온 것이다. 오랜 후에 막청(莫青)오만오(吳萬五)라는 자들이 또한 도망쳐 돌아왔는데, 10만의 무리 중 돌아올 수 있었던 자가 [이들] 세 사람이었다.주 009
각주 009)
『高麗史節要』 卷20 「忠烈王世家」 〈忠烈王 7년 윤8월〉조에도 일본 원정에 나섰던 군사 중 귀환하지 못한 자가 무려 몽골군 10만, 고려군 7천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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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平壺島: 平戶島의 오기로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2)
    五龍山: 平戶島의 동쪽에 위치한 鷹島를 가리킨다. 오늘날 長崎縣 松浦(마쓰우라)市에 속해 있다. 몽골의 2차 일본 정벌 때 博多(하카다)에서 상륙을 저지당한 몽골·고려 연합군이 그곳에서 강남에서 출발한 몽골군과 합류하여 체제를 정비하고 있었는데 마침 불어닥친 폭풍으로 인해 대부분의 전함이 파괴되었다. 현재에도 鷹島 앞바다에 몽골군의 30∼40m급 목조선이 가라앉아 있고, 鷹島에는 전쟁의 유적이 남아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百戶: 몽골 시대 각 지역에 설치된 군사기구인 萬戶府 千戶所에 소속된 百戶所의 장관이다. 百戶所는 관할하는 군대 수에 따라 上百戶所와 下百戶所로 구분된다. 上百戶所에는 2명의 百戶가 두어지는데 몽골인 1명, 한인 1명이고, 품계는 종6품이다. 下百戶所에는 百戶1인이 두어지고 품계는 종7품이다. 百戶직은 모두 세습이 허용되었다(『元史』 卷91 「百官志」 7 〈諸路萬戶府〉). 바로가기
  • 각주 004)
    八角島: 일본 중세시대 기타규슈에서 무역도시로 발전한 博多(하카다)를 가리킨다. 오늘날 福岡(후쿠오카)市에 속한다. 日·宋 무역의 거점으로 크게 번창하였으나 몽골의 1차 일본 정벌 때 몽골·고려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후 鎌倉막부는 몽골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하카다만 연안에 대규모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몽골의 2차 일본 정벌이 실패한 후 몽골-일본 간 민간무역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新附軍: 몽골이 남송을 정복한 후 투항한 남송군을 몽골의 군사체계 안으로 편입시켜 조직한 군대이다. 대체로 侍衛親軍이나 지방 鎭戍軍의 임무를 띠었다. 몽골이 대외정벌을 수행하거나 내부반란에 직면하였을 때 각 군대 안의 신부군을 선발해 출정시키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군사를 둔전과 노역에 종사시켰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唐人: 전통시대 일본에서 漢人을 부르는 명칭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7)
    『高麗史』 卷29 「忠烈王世家」 〈忠烈王 8년 6월〉조에 蠻軍摠把 沈聰 등 여섯 명이 일본에서 도망쳐 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본래 明州 사람으로 至元 18년(1281) 6월 18일에 葛剌 歹 만호를 따라 배를 타고 일본에 이르렀는데, 사나운 풍랑을 만나 배가 부서졌습니다. 군사 13∼14만 명이 어떤 산에 숨어들었다가 10월 8일에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굶주려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 항복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기술자와 농사지을 줄 아는 사람만 가려서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죽였습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行省官: 일본 정벌을 수행한 日本行省 관리들을 지칭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9)
    『高麗史節要』 卷20 「忠烈王世家」 〈忠烈王 7년 윤8월〉조에도 일본 원정에 나섰던 군사 중 귀환하지 못한 자가 무려 몽골군 10만, 고려군 7천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우창(于閶), [범]문호, [우]창, 막청(莫青), 오만오(吳萬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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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벌에 실패한 원 군사의 보고 자료번호 : jo.k_0023_0208_0010_0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