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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고창국(高昌國)의 역사

  • 국가
    고창(高昌)
고창국(高昌國) 주 001
각주 001)
高昌國: 여기서는 9세기 후기부터 高昌回鶻 또는 西州回鶻로 불리던 위구르족 지배하에 있던 국가를 말한다. 9세기 중엽 몽골고원의 위구르제국의 국세가 약해지자 黠嘎斯(키르키즈)수령이 스스로 가한을 칭하다가 840년에 회골 汗國을 무너뜨리고 黠嘎斯汗國을 건립하였다. 회골왕자 龐特勤이 15개 회골부락을 거느리고 고창 지역으로 西遷하여 고창회골 즉 서주회골을 세웠다. 焉耆, 龜兹 등 많은 도시를 병탄하고 龐特勤은 언기를 치소로 삼았다. 그 강역은 당조의 伊州, 西州, 庭州 및 언기, 구자 2개 도독부의 땅을 포괄하였다. 10~11세기에 오대, 북송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12세기에 西遼에게 예속되고, 13세기 몽골에 귀속되어 1320년대부터는 차가타이한국에 속했다. 17세기에 준가르부에 점령되었다가 18세기 중엽에 淸朝 관할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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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 시대 거사전왕(車師前王) 주 002
각주 002)
車師前王: 車師의 발음은 Kiwo si이다. 車師는 동남으로 敦煌, 남으로 樓欄, 서로는 焉耆, 서북으로는 烏孫, 동북으로는 匈奴와 통하는 비단길의 요충지에 있었다. 漢 宣帝 때 車師前國과 車師後國으로 나누어졌으며, 車師前國은 交河城(지금 新疆省 吐魯番市 서북)을 車師後國은 務塗穀(지금 新疆省 奇臺縣 서남 산곡)을 다스렸다(岑仲勉,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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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땅이었다. 고창성은 그 지세가 높고 평평하고 인구가 창성한 데서 [뜻을] 취하여 이름을 삼았다. 북위[後魏] 초에 저거무휘(沮渠無諱) 주 003
각주 003)
沮渠無諱(?~444): 오호십육국 시대 北涼國의 군주이다. 흉노 지파인 盧水胡 족으로 沮渠蒙遜의 아들이며 沮渠牧犍의 동생이다. 牧犍 재위시 沙州刺史, 都督建康以西諸軍事, 領酒泉太守로 임명되었다. 北涼 永和 7년(439)에 北魏가 姑臧을 공격하자 牧犍은 出降하고 無諱는 酒泉을 거점으로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北魏에 투항하였고, 441년 酒泉王으로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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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스스로 고창 태수(太守)가 되었다. [저거]무휘가 죽자 여여(茹茹) 주 004
각주 004)
茹茹: 柔然을 말한다. 유연은 蠕蠕, 芮芮, 茹茹, 蝚蠕 등으로 칭해졌다. 북조의 기록에서는 匈奴, 鬼方 등으로 범칭되기도 하였다. 북위 후기에 유연이 茹茹를 자칭 성씨로 하였다. 유연의 내원에 대해서 사서 기록마다 분분하여 동호, 선비, 흉노, 또는 塞外雜胡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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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백주(闞伯周) 주 005
각주 005)
闞伯周(?~477): 闞氏고창을 개국한 군주로 460년에서 477년까지 재위하였다. 460년에 柔然이 高昌을 공격하여 하서왕 즉 沮渠安周가 피살되고 高昌北涼이 멸망하고, 감백주가 유연에 의해 고창국왕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477년에 그가 죽자 아들 闞義成이 즉위하였으나 곧 의성의 형 闞首歸가 의성을 살해하고 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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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고창왕으로 삼았는데 고창에 왕이 있게 된 것은 이때가 시작이었다. 북위에서 수(隋)대까지 모두 와서 조공을 바쳤다. 당대(唐代)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후군집(侯君集) 주 006
각주 006)
侯君集(?~643): 중국 唐朝 초기의 장령이다. 豳州 三水(현재 陝西 旬邑北) 사람으로 『舊唐書』 卷69 및 『新唐書』 卷94에 立傳되어 있다. 수대 말부터 李世民의 막부에 있었고 玄武門의 變이 발생할 때도 이세민을 위하여 계획했던 그는 太宗 즉위 후에 左衛將軍·潞國公에 임명되었다가 右衛大將軍으로 승진하고, 貞觀 4년(630) 兵部尙書·檢校吏部尙書가 되어 실제로 宰相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貞觀 13년(639) 겨울에 후군집은 交河道行軍大總管이 되어 高昌王 麴文泰를 공격하였고, 이듬해 고창국 도성을 함락시켜 그곳에 西州를 두었다. 그러나 고창 정벌 이후 재물을 사사로이 취하였다는 죄, 모반의 의혹을 받고 결국 태자 太子 李承乾이 魏王 李泰와 대립했을 때 太子를 지지하여 兵變을 획책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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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 나라를 평정하고 이 지역을 서주(西州) 주 007
각주 007)
西州: 본래는 高昌國으로 唐 太宗 貞觀 13년(639) 高昌國을 멸한 후 이곳에 西州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玄宗 天寶 원년(742)에 交河郡으로 고쳤다가 肅宗 乾元 원년(758) 西州로 다시 고쳤다(『舊唐書』 卷40). 治所는 高昌縣(지금 新疆省 吐魯蕃市 부근)이었다. 德宗 貞元 7년(791) 吐蕃에게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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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안사의 난 때 이 지방이 함락되자 다시 국가를 회복하였다. 말이 와전되어 ‘고창(高敞)’이라고도 칭하며, 그 땅에 꽤 많은 회골인(回鶻人)이 있었기 때문에 회골이라고도 부른다.주 008
각주 008)
현재 신강 위구르자치구의 투루판 분지에 있던 高昌에는 송대 고창회골 이전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종족들의 정권들이 있었다. 漢代에는 車師前國이 있었는데 이때 고창벽을 쌓아 흉노 침입을 막았다. 그 뒤 高昌城으로 불리고 5호16국 혼란기에 한족이 들어와 살게 되고 북위의 화북지방 통일 이후에는 서쪽으로 도주한 흉노족 출신 沮渠씨가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車師國을 멸망시켰는데 이것이 高昌國의 기원이다. 柔然의 속국으로 세워진 闞氏高昌(460~488 혹은 491)을 비롯해 張氏高昌(488 혹은 491~496), 馬氏高昌(496~501), 麴氏高昌(501~640) 등 四代의 한족 정권에 이어 640년 唐이 정복하여 고창현을 설치하였다. 840년대에 위구르제국이 키르키즈에게 멸망당한 후 西遷하는 가운데 일부가 고창을 점거하여 회골정권을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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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高昌國: 여기서는 9세기 후기부터 高昌回鶻 또는 西州回鶻로 불리던 위구르족 지배하에 있던 국가를 말한다. 9세기 중엽 몽골고원의 위구르제국의 국세가 약해지자 黠嘎斯(키르키즈)수령이 스스로 가한을 칭하다가 840년에 회골 汗國을 무너뜨리고 黠嘎斯汗國을 건립하였다. 회골왕자 龐特勤이 15개 회골부락을 거느리고 고창 지역으로 西遷하여 고창회골 즉 서주회골을 세웠다. 焉耆, 龜兹 등 많은 도시를 병탄하고 龐特勤은 언기를 치소로 삼았다. 그 강역은 당조의 伊州, 西州, 庭州 및 언기, 구자 2개 도독부의 땅을 포괄하였다. 10~11세기에 오대, 북송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12세기에 西遼에게 예속되고, 13세기 몽골에 귀속되어 1320년대부터는 차가타이한국에 속했다. 17세기에 준가르부에 점령되었다가 18세기 중엽에 淸朝 관할로 들어갔다. 바로가기
  • 각주 002)
    車師前王: 車師의 발음은 Kiwo si이다. 車師는 동남으로 敦煌, 남으로 樓欄, 서로는 焉耆, 서북으로는 烏孫, 동북으로는 匈奴와 통하는 비단길의 요충지에 있었다. 漢 宣帝 때 車師前國과 車師後國으로 나누어졌으며, 車師前國은 交河城(지금 新疆省 吐魯番市 서북)을 車師後國은 務塗穀(지금 新疆省 奇臺縣 서남 산곡)을 다스렸다(岑仲勉, 2004). 바로가기
  • 각주 003)
    沮渠無諱(?~444): 오호십육국 시대 北涼國의 군주이다. 흉노 지파인 盧水胡 족으로 沮渠蒙遜의 아들이며 沮渠牧犍의 동생이다. 牧犍 재위시 沙州刺史, 都督建康以西諸軍事, 領酒泉太守로 임명되었다. 北涼 永和 7년(439)에 北魏가 姑臧을 공격하자 牧犍은 出降하고 無諱는 酒泉을 거점으로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北魏에 투항하였고, 441년 酒泉王으로 책봉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茹茹: 柔然을 말한다. 유연은 蠕蠕, 芮芮, 茹茹, 蝚蠕 등으로 칭해졌다. 북조의 기록에서는 匈奴, 鬼方 등으로 범칭되기도 하였다. 북위 후기에 유연이 茹茹를 자칭 성씨로 하였다. 유연의 내원에 대해서 사서 기록마다 분분하여 동호, 선비, 흉노, 또는 塞外雜胡라는 설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闞伯周(?~477): 闞氏고창을 개국한 군주로 460년에서 477년까지 재위하였다. 460년에 柔然이 高昌을 공격하여 하서왕 즉 沮渠安周가 피살되고 高昌北涼이 멸망하고, 감백주가 유연에 의해 고창국왕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477년에 그가 죽자 아들 闞義成이 즉위하였으나 곧 의성의 형 闞首歸가 의성을 살해하고 찬위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侯君集(?~643): 중국 唐朝 초기의 장령이다. 豳州 三水(현재 陝西 旬邑北) 사람으로 『舊唐書』 卷69 및 『新唐書』 卷94에 立傳되어 있다. 수대 말부터 李世民의 막부에 있었고 玄武門의 變이 발생할 때도 이세민을 위하여 계획했던 그는 太宗 즉위 후에 左衛將軍·潞國公에 임명되었다가 右衛大將軍으로 승진하고, 貞觀 4년(630) 兵部尙書·檢校吏部尙書가 되어 실제로 宰相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貞觀 13년(639) 겨울에 후군집은 交河道行軍大總管이 되어 高昌王 麴文泰를 공격하였고, 이듬해 고창국 도성을 함락시켜 그곳에 西州를 두었다. 그러나 고창 정벌 이후 재물을 사사로이 취하였다는 죄, 모반의 의혹을 받고 결국 태자 太子 李承乾이 魏王 李泰와 대립했을 때 太子를 지지하여 兵變을 획책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7)
    西州: 본래는 高昌國으로 唐 太宗 貞觀 13년(639) 高昌國을 멸한 후 이곳에 西州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玄宗 天寶 원년(742)에 交河郡으로 고쳤다가 肅宗 乾元 원년(758) 西州로 다시 고쳤다(『舊唐書』 卷40). 治所는 高昌縣(지금 新疆省 吐魯蕃市 부근)이었다. 德宗 貞元 7년(791) 吐蕃에게 빼앗겼다. 바로가기
  • 각주 008)
    현재 신강 위구르자치구의 투루판 분지에 있던 高昌에는 송대 고창회골 이전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종족들의 정권들이 있었다. 漢代에는 車師前國이 있었는데 이때 고창벽을 쌓아 흉노 침입을 막았다. 그 뒤 高昌城으로 불리고 5호16국 혼란기에 한족이 들어와 살게 되고 북위의 화북지방 통일 이후에는 서쪽으로 도주한 흉노족 출신 沮渠씨가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車師國을 멸망시켰는데 이것이 高昌國의 기원이다. 柔然의 속국으로 세워진 闞氏高昌(460~488 혹은 491)을 비롯해 張氏高昌(488 혹은 491~496), 馬氏高昌(496~501), 麴氏高昌(501~640) 등 四代의 한족 정권에 이어 640년 唐이 정복하여 고창현을 설치하였다. 840년대에 위구르제국이 키르키즈에게 멸망당한 후 西遷하는 가운데 일부가 고창을 점거하여 회골정권을 건국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거사전왕(車師前王), 저거무휘(沮渠無諱), [저거]무휘, 여여(茹茹), 감백주(闞伯周), 후군집(侯君集)
지명
고창국(高昌國), 한(漢), 고창성, 북위[後魏], 고창, 북위, 수(隋), 서주(西州), 고창(高敞), 회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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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국(高昌國)의 역사 자료번호 : jo.k_0020_049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