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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점성국(占城國)의 풍속과 의복

  • 국가
    점성(占城)
그 풍속과 의복은 대식(大食)과 유사하다.주 001
각주 001)
참파는 본래 인도 문화가 일찍부터 수입되어 그 영향을 깊이 받았는데, 대략 중국의 송대에 해당하는 시기는 이슬람교를 위시한 아랍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때였다. 大食이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인들이 아랍땅을 가리키는 이름이 된 Tazi 또는 Tazik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당대부터 12세기까지 아랍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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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사(蠶絲)는 없으며, 백첩포(白氎布)로 가슴을 동여매고 발까지 아래로 늘어뜨리며 웃옷 소매는 좁다. 머리는 한 웅큼을 모아 틀어올리고 나머지 머리카락을 그 뒤로 풀어 늘어뜨렸다. 서로 교역할 때 동전꿰미[緡錢]는 쓰지 않고 다만 금은(金銀)으로 무게를 달거나 혹은 길패 비단[錦]으로 두루 교역의 가치를 정한다.주 002
각주 002)
『占婆之梵文碑誌(Inscriptions Sanscrites de Champa)』에 의하면 화폐가 있었던 것 같은데 통용되지는 않았다는 의견이 있다(馬司培羅, 197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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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樂器)로는 비파[胡琴],주 003
각주 003)
胡琴: 두 줄의 현을 가진 활 모양의 악기에 대한 포괄적인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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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笛], 북, 큰북이 있고, 음악단[樂部]에 많은 무용수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왕은 머리 뒤쪽에 상투를 틀고 길패 옷을 느슨하게 걸쳐 입고, 금으로 세공한 관[金花冠]을 쓰고 일곱 가지 다양한 보석의 영락(纓絡)주 004
각주 004)
纓絡: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식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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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장식을 한다. [옷을 입어도] 정강이와 허벅지는 모두 드러나고 양말은 신지 않고 가죽 신발을 신는다. 부인들도 마찬가지로 뒷머리에 쪽을 지는데 비녀나 빗[笄梳]을 꽂지는 않고, 복장과 허리를 굽혀 절하는 예[拜揖]가 남자와 같다. 왕은 매일 정오에 선의(禪椅)주 005
각주 005)
禪椅: 좌선을 할 때 앉는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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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앉는다. 관속(官屬)들이 알현(謁見)할 때는 엎드려 절하는데[膜拜] 한 번만 하고, 사정 보고를 마친 후에 다시 막배(膜拜)를 한 번 하고 물러간다. [왕이] 때로 여행을 가면, 코끼리 구경, 채집과 수렵, 물고기 잡기를 구경하는데, [그 무엇을 하든] 모두 몇 날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가까운 곳은 연포두(軟布兜)를 타고 먼 곳은 코끼리를 타고 가며, 때때로 나무봉대[木杠]를 타는 경우에는 4명이 들어 올려 멘다. 먼저 한 사람에게 빈랑 쟁반주 006
각주 006)
檳榔盤: 빈랑을 담은 그릇인지 아니면 빈랑목재로 만든 기구인지 분명하지 않은데, 전자의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빈랑에 대해서, 중국의 사서에서는 고대로부터 현재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지에 있던 고대 국가의 주산품으로 특기하고 있지만, 빈랑반 기록은 별로 없다. 단, 『南齊書』 「扶南傳」에 檳榔柈을 공물로 중국에 바친 기사가 있고, 본문 『송사』 「점성전」에도 희녕 연간 점성에서 온 사신이 본국의 풍속을 설명하면서 왕의 행차 때 부인들이 금제쟁반(金柈合)에 빈랑을 담아들고 수행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빈랑을 담는 쟁반이 금과 같은 귀한 재료로 만들 만큼 정성으로 장식한 器皿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조 粱의 문인 沈約의 「詠竹檳榔盤詩」라는 시가 있는데, 대나무로 만든 빈랑 담는 그릇을 귀히 여겨 시로 노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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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들고 [수행단의] 앞에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 십 여주 007
각주 007)
『宋會要』에는 “從者千餘輩”로 기재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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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輩]의 수종하는 사람들은 각자 활과 화살, 칼과 창, 손방패[手牌] 등을 들고 가며, 백성들이 이 [왕의 행차를] 보면 엎드려 절[膜拜]을 한 번 한다. 어떤 때는 하루에 두 번 외출하기도 한다. 매년 벼가 익을 때면, 국왕이 친히 벼 한 줌을 벤다. 수종자 및 무리의 부녀들이 경쟁적으로 벼를 베었다.

  • 각주 001)
    참파는 본래 인도 문화가 일찍부터 수입되어 그 영향을 깊이 받았는데, 대략 중국의 송대에 해당하는 시기는 이슬람교를 위시한 아랍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때였다. 大食이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인들이 아랍땅을 가리키는 이름이 된 Tazi 또는 Tazik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당대부터 12세기까지 아랍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占婆之梵文碑誌(Inscriptions Sanscrites de Champa)』에 의하면 화폐가 있었던 것 같은데 통용되지는 않았다는 의견이 있다(馬司培羅, 1973: 16). 바로가기
  • 각주 003)
    胡琴: 두 줄의 현을 가진 활 모양의 악기에 대한 포괄적인 명칭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4)
    纓絡: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식품 바로가기
  • 각주 005)
    禪椅: 좌선을 할 때 앉는 의자. 바로가기
  • 각주 006)
    檳榔盤: 빈랑을 담은 그릇인지 아니면 빈랑목재로 만든 기구인지 분명하지 않은데, 전자의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빈랑에 대해서, 중국의 사서에서는 고대로부터 현재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지에 있던 고대 국가의 주산품으로 특기하고 있지만, 빈랑반 기록은 별로 없다. 단, 『南齊書』 「扶南傳」에 檳榔柈을 공물로 중국에 바친 기사가 있고, 본문 『송사』 「점성전」에도 희녕 연간 점성에서 온 사신이 본국의 풍속을 설명하면서 왕의 행차 때 부인들이 금제쟁반(金柈合)에 빈랑을 담아들고 수행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빈랑을 담는 쟁반이 금과 같은 귀한 재료로 만들 만큼 정성으로 장식한 器皿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조 粱의 문인 沈約의 「詠竹檳榔盤詩」라는 시가 있는데, 대나무로 만든 빈랑 담는 그릇을 귀히 여겨 시로 노래한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7)
    『宋會要』에는 “從者千餘輩”로 기재되어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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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국(占城國)의 풍속과 의복 자료번호 : jo.k_0020_0489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