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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韓愈의 건의

  • 국가
    서원만(西原蠻)
[당 목종(穆宗)] 장경(長慶) 연간(821~824) 초에 용관경략사(容管經略使) 유후(留後) 엄공소(嚴公素)를 경략사로 삼았는데, 다시 표문을 올려 황씨(黃氏)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 한유(韓愈) 주 001
각주 001)
韓愈(768~824): 唐代의 文學家이자 哲學者이다. 德宗 貞元 8年(792)의 進士이며, 柳宗元·歐陽修·王安石·蘇軾·蘇轍·蘇洵·曾鞏과 더불어 “唐宋八大家”라고 불린다. 韓愈는 3세에 아버지를 잃고, 그 兄 韓會의 손에 자랐다. 貞元 2年(786)에 19세의 나이로 長安에 가서 처음 進士 시험에 응시하였고, 세 번 낙방하고서야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 뒤에 또 연속하여 吏部의 博學鴻詞科에 응시하였으나, 세 번 모두 떨어졌다. 29세가 되어서야 겨우 汴州 董晉의 幕府에 있다가, 동진의 추천으로 宣武軍節度使府의 觀察推官이라는 말단 官職을 얻었다. 나중에 경사로 돌아와 四門博士의 직임을 맡았다. 36歲가 되었을 때, 監察禦史의 직임을 맡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가뭄으로 백성이 아사하는 상황과 부세 감면의 주장을 담은 상서를 올렸다가 陽山縣令으로 좌천되었다. 憲宗 時에 귀경하여 國子博士가 되었고, 누차 승진하여 太子右庶子에 이르렀으나, 뜻을 펼치지는 못하였다. 이후 50歲에 이르도록, 관직이 부침이 일정하지 않았다. 憲宗 元和 12年(817) 韓愈가 50歲가 되던 해에 淮西절도사 吳元濟를 평정하는 전역에 참여하면서 軍國의 大事를 처리하는 데에 재능을 보였고, 吏部侍郎으로 승진하면서 朝廷의 상층부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2년 뒤에 한유는 헌종이 佛骨을 맞이하는 것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潮州에서 8개월을 지냈다. 宦官이 憲宗을 죽이고, 穆宗을 세우자, 韓愈도 징소되어 조정으로 회귀하였다. 이후 國子祭酒·兵部侍郎·吏部侍郎·京兆尹 等의 職을 거쳤다. 長慶 4年(824)에 長安에서 향년 57歲로 병사하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潮州刺史를 지냈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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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건의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황적(黃賊)은 모두 동료(洞獠)입니다. 성곽이 없고 산의 험함에 의지하여 각기 생업에 종사합니다. 급박하면 집결하여 죽기로 저항합니다. 예전에 옹관경략사가 덕으로 편안하게 품지도 못하고 무위(武威)로 제어하지도 못한 채, 법을 굽혀 속여서 얽어매기만 하니, 한을 품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夷)는 성질이 요동시키기는 쉬우나, 안정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주현(州縣)을 겁박(劫迫)하고 사적인 원수를 갚는 것은 소리(小利)를 탐하는 것이니, 큰 우환이 못됩니다. [배]행립양민이 정토를 건의하여 일을 만들고 상(賞)을 속일 때로부터, 옹부(邕府)용부(容府)의 두 관할 지역은 조락(凋落)하였습니다. 살상과 질환으로 열 집 가운데 아홉이 비었습니다. 백성의 원망과 탄식이 마치 한 입에서 나오는 듯하여, 사람과 귀신이 모두 미워하니, 두 장수는 연달아 죽었습니다. 지금 엄공소가 위무하거나 제어할 만한 재목도 아닌데도, 다시 예전의 과실을 거듭하려 하니, 진실로 영남이 안녕할 때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앞서 옹부용부를 합하여 하나의 도(道)로 만들었습니다. 옹부와 적(賊)은 강 하나로 막혀 있으니, 만약 경략사를 두고 군대를 요해처마다 주둔시키면, 물자와 병력이 훌륭하게 완비될 것이니, 적이 감히 가벼이 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용주는 멀고 험한 것이 이미 심한데도, 경략사를 거하게 하니, 옹주의 군대의 실정이 조금이라도 밖으로 드러나면, 쉽게 만(蠻)의 욕심을 자극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경략사를 옹주로 돌리시고, 용주에는 자사를 두십시오. [이것이] 가장 편합니다. 또 근자에 일으킨 남방의 군대는 먼 타향에서 기거(寄居)하는 자들입니다. 질병과 살상으로 죽어, 계속 보충하여도 계속 죽으니, 징발할 때마다 어려움이 배가(倍加)됩니다. 만약 옹부용부에서 천인(千人)을 모집하여, 행영(行營)에 보낸다면, 군량을 늘리지 않아도 되고 병사들은 익숙하니, 지키면 병위(兵威)가 있고, 공격하면 날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남쪽을 토벌하다가 손상을 입은 때로부터 영남에는 인구가 희박합니다. 적이 거처하는 곳은 골짜기가 포개진 거칠고 후미진 곳입니다. 가령 그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 땅을 얻는다 하여도, 나라의 재정에는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용서하여 베풀고 기미(羈縻)하는 것을 금수로 비유하자면, 오면 막고 가면 좇지 않는 것이니, 조정에는 손해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개원의 큰 경사를 기화로 그 죄를 모두 사하시고, 낭관(郞官)과 어사(御史)를 보내어 재삼 간절히 선유(宣諭)하신다면, 반드시 [저들이] 기뻐서 부르짖으며 명을 기다리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威)와 신(信)을 쓸 수 있는 인재를 뽑아 경략(經略)을 맡긴다면, 처리(處理)가 방도를 얻게 될 것이니, 마땅히 침범하거나 반란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각주 001)
    韓愈(768~824): 唐代의 文學家이자 哲學者이다. 德宗 貞元 8年(792)의 進士이며, 柳宗元·歐陽修·王安石·蘇軾·蘇轍·蘇洵·曾鞏과 더불어 “唐宋八大家”라고 불린다. 韓愈는 3세에 아버지를 잃고, 그 兄 韓會의 손에 자랐다. 貞元 2年(786)에 19세의 나이로 長安에 가서 처음 進士 시험에 응시하였고, 세 번 낙방하고서야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 뒤에 또 연속하여 吏部의 博學鴻詞科에 응시하였으나, 세 번 모두 떨어졌다. 29세가 되어서야 겨우 汴州 董晉의 幕府에 있다가, 동진의 추천으로 宣武軍節度使府의 觀察推官이라는 말단 官職을 얻었다. 나중에 경사로 돌아와 四門博士의 직임을 맡았다. 36歲가 되었을 때, 監察禦史의 직임을 맡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가뭄으로 백성이 아사하는 상황과 부세 감면의 주장을 담은 상서를 올렸다가 陽山縣令으로 좌천되었다. 憲宗 時에 귀경하여 國子博士가 되었고, 누차 승진하여 太子右庶子에 이르렀으나, 뜻을 펼치지는 못하였다. 이후 50歲에 이르도록, 관직이 부침이 일정하지 않았다. 憲宗 元和 12年(817) 韓愈가 50歲가 되던 해에 淮西절도사 吳元濟를 평정하는 전역에 참여하면서 軍國의 大事를 처리하는 데에 재능을 보였고, 吏部侍郎으로 승진하면서 朝廷의 상층부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2년 뒤에 한유는 헌종이 佛骨을 맞이하는 것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潮州에서 8개월을 지냈다. 宦官이 憲宗을 죽이고, 穆宗을 세우자, 韓愈도 징소되어 조정으로 회귀하였다. 이후 國子祭酒·兵部侍郎·吏部侍郎·京兆尹 等의 職을 거쳤다. 長慶 4年(824)에 長安에서 향년 57歲로 병사하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潮州刺史를 지냈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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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당 목종(穆宗), 엄공소(嚴公素), 한유(韓愈), [배]행립, 양민, 엄공소
지명
옹부(邕府), 용부(容府), 영남, 옹부, 용부, 옹부, 용주, 옹주, 옹주, 용주, 옹부, 용부, 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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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愈의 건의 자료번호 : jo.k_0017_0222_1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