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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少度와 黃昌瓘이 당의 州들을 함락시킴

  • 국가
    서원만(西原蠻)
황소도(黃少度)황창관(黃昌瓘)의 두 부(部)가 있었는데, 빈주(賓州) 주 001
각주 001)
賓州: 唐 太宗 貞觀 5年(631)에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嶺方縣(廣西省 賓陽縣 東南 古城村)에 두었다.『輿地紀勝』卷115에서는 賓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다. 관할구역은 오늘날 廣西省의 賓陽縣 지역에 상당하였다. 玄宗 天寶 1年(742)에 安城郡으로 바뀌었고, 肅宗 至德 2年(757)에 領方郡으로 바뀌었다가, 乾元 1年(758)에 賓州가 되었다. 北宋 太祖 開寶 5年(972)에 폐지되었다. 그 다음 해에 다시 설치되었으며, 치소를 현재의 賓陽縣 北쪽 5km 新賓鎮으로 옮겼다. 元初에 賓州路로 승격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賓州로 되었다. 明 태조 洪武 2年(1369)에 州治 嶺方縣을 폐지하여 州로 편입하였다. 淸 雍正 3年(1725)에 直隸州로 승격되었다. 관할구역은 오늘날 廣西省 賓陽·來賓·上林·武宣 等의 縣에 상당하였다. 12年(1734)에 散州로 강등되었으며, 思恩府에 속하였다. 1912年에 고쳐서 賓縣이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賓陽縣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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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巒州) 주 002
각주 002)
巒州: 唐 順宗 永貞 1年(805)에 淳州를 바꾸어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永定縣(廣西省 橫縣 西北 巒城鎮 北의 鬱江 東岸)에 두었다. 관할구역은 오늘날 廣西省 橫縣·邕寧·賓陽 세 縣 사이의 땅에 상당하였다. 北宋 太祖 開寶 5年(972)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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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州)를 함락하여 차지하였다. [원화] 11년(816)에 흠주횡주 두 주를 공격하니, 옹관경략사(邕管經略使) 위열(韋悅)이 격파하여 패주시키고, 빈주만주 두 주를 취하였다. 이 해에 [적이] 다시 엄주(巖州) 주 003
각주 003)
巖州: 唐 高宗 乾封 2年(667)에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來賓縣(廣西省 來賓縣 東北 근교)에 두었다. 玄宗 天寶 1年(742)에 循德郡으로 바꾸었다가, 肅宗 乾元 1年(758)에 다시 嚴州로 삼았다. 관할구역은 오늘날의 廣西省 來賓縣 지역에 상당하였다. 北宋 太祖 開寶 7年(974)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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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빼앗고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계관관찰사(桂管觀察使) 배행립(裴行立)이 그 군대를 얕보아 약하다고 여겨, 앞장서 군대를 일으켜 반도(叛徒)를 모두 주멸하겠다고 청하였다. 분수를 모르고 공을 바란 것이었으나, 헌종(憲宗)이 허락하였다. 행립은 군대가 출격하여 다시 두 해가 꽉 차자, 2만을 베고 사로잡았다고 거짓 상주하여 천자를 속여서 모면하였다. 이로부터 옹(邕)용(容) 두 도(道)에서 살상을 당하거나 질병으로 죽는 자가 열에 여덟을 웃돌았다. 징발과 [재화의] 소모 그리고 싸우다 죽는 것이 행립양민(陽旻)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주 004
각주 004)
『新唐書』卷163 「孔戣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貞元 연간부터 黃洞의 諸蠻이 이반하였는데, 오래도록 평정하지 못하였다. 容管과 桂管 두 管이 虜掠을 다스리는데, 다행이 功이 있었고, 이에 군대를 합하여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孔戣가 고집스럽게 不可하다고 말했으나, 帝가 듣지 않았다. 江과 湖의 군대를 크게 징발하여 두 管의 군대와 만나 들어가 토벌하도록 하였다. 병사들이 瘴毒에 걸려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安南의 병사들이 이것을 기화로 都護 李象古를 죽였으나, 桂管 경략사 裴行立과 容管경략사 陽旻이 모두 공이 없었고, 죽임을 당할까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직 孔戣만이 하루아침의 功을 바라지 않은 까닭에 交州와 廣州는 편안하여 크게 다스려졌다.”(『新唐書』卷163: 5009~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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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들을 책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안남[도호부]의 병사들이 소란을 일으켜 도호(都護) 이상고(李象古)를 죽이는데 미치자, 당주자사(唐州刺史) 계중무(桂仲武)를 발탁하여 도호로 삼았는데,주 005
각주 005)
『舊唐書』卷15 「憲宗本紀」下에 따르면, 이러한 일들이 발생한 시점은 唐 憲宗 元和 14年(819) 겨울 十月이다(『舊唐書』卷15: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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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거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니, 안주자사(安州刺史)로 강등하고, [배]행립으로 대신하게 하였다.주 006
각주 006)
『舊唐書』卷16 「穆宗本紀」에 따르면, 이 인사 조치는 목종 長慶 元年 以前, 즉 원화 15년 2월에 일어났다(『舊唐書』卷16: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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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되지 않아 소환되었고, 죽었다.

  • 각주 001)
    賓州: 唐 太宗 貞觀 5年(631)에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嶺方縣(廣西省 賓陽縣 東南 古城村)에 두었다.『輿地紀勝』卷115에서는 賓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다. 관할구역은 오늘날 廣西省의 賓陽縣 지역에 상당하였다. 玄宗 天寶 1年(742)에 安城郡으로 바뀌었고, 肅宗 至德 2年(757)에 領方郡으로 바뀌었다가, 乾元 1年(758)에 賓州가 되었다. 北宋 太祖 開寶 5年(972)에 폐지되었다. 그 다음 해에 다시 설치되었으며, 치소를 현재의 賓陽縣 北쪽 5km 新賓鎮으로 옮겼다. 元初에 賓州路로 승격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賓州로 되었다. 明 태조 洪武 2年(1369)에 州治 嶺方縣을 폐지하여 州로 편입하였다. 淸 雍正 3年(1725)에 直隸州로 승격되었다. 관할구역은 오늘날 廣西省 賓陽·來賓·上林·武宣 等의 縣에 상당하였다. 12年(1734)에 散州로 강등되었으며, 思恩府에 속하였다. 1912年에 고쳐서 賓縣이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賓陽縣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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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巒州: 唐 順宗 永貞 1年(805)에 淳州를 바꾸어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永定縣(廣西省 橫縣 西北 巒城鎮 北의 鬱江 東岸)에 두었다. 관할구역은 오늘날 廣西省 橫縣·邕寧·賓陽 세 縣 사이의 땅에 상당하였다. 北宋 太祖 開寶 5年(972)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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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巖州: 唐 高宗 乾封 2年(667)에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來賓縣(廣西省 來賓縣 東北 근교)에 두었다. 玄宗 天寶 1年(742)에 循德郡으로 바꾸었다가, 肅宗 乾元 1年(758)에 다시 嚴州로 삼았다. 관할구역은 오늘날의 廣西省 來賓縣 지역에 상당하였다. 北宋 太祖 開寶 7年(974)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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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新唐書』卷163 「孔戣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貞元 연간부터 黃洞의 諸蠻이 이반하였는데, 오래도록 평정하지 못하였다. 容管과 桂管 두 管이 虜掠을 다스리는데, 다행이 功이 있었고, 이에 군대를 합하여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孔戣가 고집스럽게 不可하다고 말했으나, 帝가 듣지 않았다. 江과 湖의 군대를 크게 징발하여 두 管의 군대와 만나 들어가 토벌하도록 하였다. 병사들이 瘴毒에 걸려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安南의 병사들이 이것을 기화로 都護 李象古를 죽였으나, 桂管 경략사 裴行立과 容管경략사 陽旻이 모두 공이 없었고, 죽임을 당할까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직 孔戣만이 하루아침의 功을 바라지 않은 까닭에 交州와 廣州는 편안하여 크게 다스려졌다.”(『新唐書』卷163: 5009~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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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舊唐書』卷15 「憲宗本紀」下에 따르면, 이러한 일들이 발생한 시점은 唐 憲宗 元和 14年(819) 겨울 十月이다(『舊唐書』卷15: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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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舊唐書』卷16 「穆宗本紀」에 따르면, 이 인사 조치는 목종 長慶 元年 以前, 즉 원화 15년 2월에 일어났다(『舊唐書』卷16: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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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황소도(黃少度), 황창관(黃昌瓘), 위열(韋悅), 배행립(裴行立), 헌종(憲宗), 행립, 행립, 양민(陽旻), 이상고(李象古), 계중무(桂仲武), [배]행립
지명
빈주(賓州), 만주(巒州), 흠주, 횡주, 빈주, 만주, 엄주(巖州), 옹(邕), 용(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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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少度와 黃昌瓘이 당의 州들을 함락시킴 자료번호 : jo.k_0017_0222_1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