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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昌蠻의 반란과 內屬, 撲子蠻·望蠻의 습속

요주(姚州) 주 001
각주 001)
姚州: 唐 武德 4年(621)에 설치되었으며, 姚州都督府의 치소가 두어졌다. 그 治所는 姚城縣에 두었는데, 요성현은 오늘날의 雲南省 姚安縣 서북 8.5km 지점의 舊城에 해당된다. 관할구역은 대략 雲南省 姚安縣 경계에 상당한다. 唐代 西南邊疆 경영을 위한 重鎭이었으나,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南詔에서는 弄棟節度로 바꾸었다. 大理에서는 姚府로 고쳤다. 元 至元 12年(1275)에 다시 설치하여, 大理路에 속하게 하였다. 治所는 지금의 姚安縣 북쪽 9.5km의 光祿鎭에 두었다. 天曆 元年(1328)에 姚安路의 치소가 되었다. 明代에는 姚安府의 치소가 되었고, 治所는 姚安縣城의 棟川鎭으로 옮겨졌다. 淸 乾隆 35年(1770)에 고쳐서 楚雄府에 속하게 하였다. 1913年에 폐하여 縣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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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는 영창만(永昌蠻)이 있는데, 옛 영창군(永昌郡) 주 002
각주 002)
永昌郡: 後漢 永平 12年(69)에 哀牢夷가 內屬하자, 그 땅과 益州郡의 西部 6縣을 모아서 설치하였다. 治所는 嶲唐縣(현재의 雲南省 雲龍縣 西南 35km의 漕澗鎮)에 두어졌다. 관할구역은 대체로 현재의 滇西·滇南의 상당 지역에 해당하며, 서쪽으로는 인도와 미얀마 경계의 巴特開山(Patkai Range), 東南쪽으로는 禮社江과 把邊江 사이의 哀牢山에 이르고, 南部는 지금의 西雙版納 等의 지역을 포함한다. 建初 1年(76) 뒤에는 治所를 不韋縣(雲南省 保山市 東北 11km의 金雞村)에 두었다. 三國 蜀 시기에는 庲降都督에 속하였으며, 建興 3年(225)의 관할구역의 동부는 洱海 지역을 포함하지 않게 되었다. 西晉 泰始 7年(271)에 寧州에 속하게 되었다. 元康 9年(299)에는 치소를 永壽縣(雲南省 耿馬傣族佤族自治縣 境內)으로 옮겼다. 南齊 시기에는 치소를 永安縣으로 옮겼다. 南朝 梁代末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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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산다. [당 고종] 함형(咸亨) 5년(674)에 반란을 일으켰는데,주 003
각주 003)
咸亨 5년(674)이라는 연도에 문제가 있다.『舊唐書』「高宗本紀」에서는 “(咸亨)3年 春正月 辛丑일에, 梁·益 等 18州의 병사들 가운데 5300인을 모집하고, 右衛副率 梁積壽를 보내 姚州에 가서 叛蠻을 치게 하였다.”(『舊唐書』卷5: 96)라고 적었고,『新唐書』「高宗本紀」에서는 “(咸亨)3年 正月 辛丑일에, 姚州蠻이 변경을 침구하여, 太子右衛副率 梁積壽를 姚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하게하였다.”(『新唐書』卷3: 70)라고 적었다. 「王仁求碑」의 기록 등 다른 사료들이 제공하는 정보들을 모아 생각해 보면, 우선 함형 3년은 당 조정에서 원정군을 파견한 연도로 생각된다. 그리고『舊唐書』본기의 기록으로 보건대, 반란이 시작된 것은 함형 3년 이전이다. 그리고『왕인구비』에서 ‘蒙儉實始其亂, 咸亨之歲, 犬羊大擾’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볼 때, 반란이 시작된 것은 함형 연간 초나 그 이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姚府 관내의 서쪽 변경에서 시작된 반란이 姚府의 長史 둘을 살해할 정도로 커지자, 함형 3년 정월 당 조정에서 중앙군을 파견하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滇略』에서는 함형 3년에 永昌蠻이 변경에 침입하여, 長史 李孝讓과 辛文協을 죽이니, 조를 내려 梁積壽를 姚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하였다라고 적었다(鄭勉,『東洋史學硏究』, 2010: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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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태자우위부솔(太子右衛副率) 양적수(梁積壽)를 요주도행군총관(姚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무후(武后) 천수(天授) 연간(690~692)에 어사 배회고(裴懷古)를 보내 초무하였다.주 004
각주 004)
裴懷古:『舊唐書』「良吏傳」에 따르면, 裴懷古는 壽州 壽春(현재의 安徽省 壽縣) 사람으로 唐 高宗 儀鳳 연간(676~678)에 闕에 나와 上書하여, 下邽主簿에 제수되었다. 唐 中宗 長壽 연간(692~693)에는,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긴 끝에 監察御史가 되었다. 때마침 姚州와 巂州의 蠻이 首領들이 이반하자, 詔를 내려 裴懷古에게 가서 招輯하게 하였다. 懷古가 賞罰을 분명하게 하니, 賊徒가 歸附하는 것이 매일 천을 헤아렸다. 마침내 그 수괴를 사로잡고, 그 거민들은 내버려두고 돌아왔다. 蠻夷가 은혜에 감복하여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또, 祠部員外郎으로 있던 聖曆 연간(698~699)에는 요주와 수주의 만이 수령들이 궐에 이르러 회고가 초무한 상황을 칭송하여 자신들의 牧守로 삼아주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姚州都督에 제수하였으나, 병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였고, 司封郎中이 되었다고 한다(『舊唐書』卷185下: 4807~4808).『新唐書』「循吏傳」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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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長壽) 연간(692~693)에 이르러, 대수령 동기(董期)가 부락 2만을 거느리고 내속(內屬)하였다. 그 서쪽에는 박자만(撲子蠻)이 있는데, 재빠르고 사나우며, 청사라(靑娑羅)주 005
각주 005)
靑娑羅: 청색으로 물들인 木棉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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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통신고(通身袴)를 만들어 입는다. 대나무로 만든 활을 잘 쓰는데, 숲에 들어가 날짐승이나 쥐를 쏘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식기는 없고, 파초잎을 깔고 먹는다. 사람들이 대부분 장대하여, 방패를 진 채로 삼모창을 잡고 싸운다. 또 망만(望蠻)은 나무 활과 짧은 살을 쓰는데, 촉에 독약을 발라서 맞은 자는 선 채로 죽는다. 부인은 소나 양의 젖으로 만든 식품을 먹는데, 하얗게 살이 쪘다. 맨발로 다닌다. 푸른 빛 베로 적삼과 치마를 만들고, 아패주(阿貝珠)를 꿰어 이어서 두른다. 상투를 틀어 뒤로 늘어뜨리며, 남편이 있는 사람은 두 갈래로 상투를 튼다.

  • 각주 001)
    姚州: 唐 武德 4年(621)에 설치되었으며, 姚州都督府의 치소가 두어졌다. 그 治所는 姚城縣에 두었는데, 요성현은 오늘날의 雲南省 姚安縣 서북 8.5km 지점의 舊城에 해당된다. 관할구역은 대략 雲南省 姚安縣 경계에 상당한다. 唐代 西南邊疆 경영을 위한 重鎭이었으나,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南詔에서는 弄棟節度로 바꾸었다. 大理에서는 姚府로 고쳤다. 元 至元 12年(1275)에 다시 설치하여, 大理路에 속하게 하였다. 治所는 지금의 姚安縣 북쪽 9.5km의 光祿鎭에 두었다. 天曆 元年(1328)에 姚安路의 치소가 되었다. 明代에는 姚安府의 치소가 되었고, 治所는 姚安縣城의 棟川鎭으로 옮겨졌다. 淸 乾隆 35年(1770)에 고쳐서 楚雄府에 속하게 하였다. 1913年에 폐하여 縣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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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永昌郡: 後漢 永平 12年(69)에 哀牢夷가 內屬하자, 그 땅과 益州郡의 西部 6縣을 모아서 설치하였다. 治所는 嶲唐縣(현재의 雲南省 雲龍縣 西南 35km의 漕澗鎮)에 두어졌다. 관할구역은 대체로 현재의 滇西·滇南의 상당 지역에 해당하며, 서쪽으로는 인도와 미얀마 경계의 巴特開山(Patkai Range), 東南쪽으로는 禮社江과 把邊江 사이의 哀牢山에 이르고, 南部는 지금의 西雙版納 等의 지역을 포함한다. 建初 1年(76) 뒤에는 治所를 不韋縣(雲南省 保山市 東北 11km의 金雞村)에 두었다. 三國 蜀 시기에는 庲降都督에 속하였으며, 建興 3年(225)의 관할구역의 동부는 洱海 지역을 포함하지 않게 되었다. 西晉 泰始 7年(271)에 寧州에 속하게 되었다. 元康 9年(299)에는 치소를 永壽縣(雲南省 耿馬傣族佤族自治縣 境內)으로 옮겼다. 南齊 시기에는 치소를 永安縣으로 옮겼다. 南朝 梁代末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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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咸亨 5년(674)이라는 연도에 문제가 있다.『舊唐書』「高宗本紀」에서는 “(咸亨)3年 春正月 辛丑일에, 梁·益 等 18州의 병사들 가운데 5300인을 모집하고, 右衛副率 梁積壽를 보내 姚州에 가서 叛蠻을 치게 하였다.”(『舊唐書』卷5: 96)라고 적었고,『新唐書』「高宗本紀」에서는 “(咸亨)3年 正月 辛丑일에, 姚州蠻이 변경을 침구하여, 太子右衛副率 梁積壽를 姚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하게하였다.”(『新唐書』卷3: 70)라고 적었다. 「王仁求碑」의 기록 등 다른 사료들이 제공하는 정보들을 모아 생각해 보면, 우선 함형 3년은 당 조정에서 원정군을 파견한 연도로 생각된다. 그리고『舊唐書』본기의 기록으로 보건대, 반란이 시작된 것은 함형 3년 이전이다. 그리고『왕인구비』에서 ‘蒙儉實始其亂, 咸亨之歲, 犬羊大擾’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볼 때, 반란이 시작된 것은 함형 연간 초나 그 이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姚府 관내의 서쪽 변경에서 시작된 반란이 姚府의 長史 둘을 살해할 정도로 커지자, 함형 3년 정월 당 조정에서 중앙군을 파견하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滇略』에서는 함형 3년에 永昌蠻이 변경에 침입하여, 長史 李孝讓과 辛文協을 죽이니, 조를 내려 梁積壽를 姚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하였다라고 적었다(鄭勉,『東洋史學硏究』, 2010: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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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裴懷古:『舊唐書』「良吏傳」에 따르면, 裴懷古는 壽州 壽春(현재의 安徽省 壽縣) 사람으로 唐 高宗 儀鳳 연간(676~678)에 闕에 나와 上書하여, 下邽主簿에 제수되었다. 唐 中宗 長壽 연간(692~693)에는,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긴 끝에 監察御史가 되었다. 때마침 姚州와 巂州의 蠻이 首領들이 이반하자, 詔를 내려 裴懷古에게 가서 招輯하게 하였다. 懷古가 賞罰을 분명하게 하니, 賊徒가 歸附하는 것이 매일 천을 헤아렸다. 마침내 그 수괴를 사로잡고, 그 거민들은 내버려두고 돌아왔다. 蠻夷가 은혜에 감복하여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또, 祠部員外郎으로 있던 聖曆 연간(698~699)에는 요주와 수주의 만이 수령들이 궐에 이르러 회고가 초무한 상황을 칭송하여 자신들의 牧守로 삼아주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姚州都督에 제수하였으나, 병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였고, 司封郎中이 되었다고 한다(『舊唐書』卷185下: 4807~4808).『新唐書』「循吏傳」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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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靑娑羅: 청색으로 물들인 木棉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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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당 고종, 고종, 양적수(梁積壽), 무후(武后), 배회고(裴懷古), 동기(董期)
지명
요주(姚州), 영창군(永昌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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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昌蠻의 반란과 內屬, 撲子蠻·望蠻의 습속 자료번호 : jo.k_0017_0222_1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