戎州 주변의 蠻의 당 內屬
융주(戎州) 관내에는 훈(馴)
빙(騁)
주 001
낭(浪)
주 002세 주(州)의 대귀주 동가경(董嘉慶)이 있는데, 누대로 내부(內附)하였다. 그 충근함을 칭하여 귀의군왕(歸義郡王)에 책봉하였다. [당 덕종] 정원(貞元) 연간에 낭만(狼蠻) 또한 내부하기를 청하여서, 수령 낭사(浪沙)를 자사에 임명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검남서천절도사 위고가 가경에게 편지를 보내 아울러 낭만을 감독[狎]하게 하였다. 또 노망(魯望) 등의 부락이 있었는데, 융주
마안산(馬鞍山)
주 003에 이주하여 살았다. 위고는 그들이 변방의 경계에서 멀다는 이유로, 호마다 미(米) 2곡(斛)과 소금 다섯 근씩을 지급하였다. 융주(戎州) 북쪽에는 또 낭계만(浪稽蠻)과 나가곡만(羅哥谷蠻)이 있다. 동쪽에는 파추만(婆秋蠻)과 오피만(烏皮蠻)이 있다. 남쪽에는 이동만(離東蠻)과 과좌만(鍋銼蠻)이 있다. 서쪽에는 마사만(麽些蠻)이 있는데, 남조(南詔) 월석(越析)과 서로 사돈 동서지간이다. 낭계만으로부터 이하는 옛날 전왕(滇王)주 004
각주 004)
과 애뢰(哀牢)의 잡종으로, 그 땅이 토번과 붙어 있다. 또 저강(姐羌)이 있는데, 옛 백마저(白馬氐)주 005滇: ‘滇’은 國名이자 邑名이며 部落名이다. 현재는 운남성을 지칭하는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며, 운남성을 지칭하는 별칭으로 사용된 것은 明淸代 이후의 일이다. 漢代 滇池縣은 滇國의 도읍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方國瑜는 그 위치를 운남성 晉寧縣의 晉城區 및 呈貢縣 지역으로 비정하였고(方國瑜, 1987: 61), 張增祺는 문헌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지하여 전국 도성의 위치를 晉寧縣 晉城鎭으로 비정하였다(張增祺, 1997: 3~10). 滇國의 강역, 즉 滇을 비롯한 ‘靡莫之屬’ 10여 君長의 강역은 대체로 後漢代의 益州郡, 즉 前漢代 益州郡에서 西部都尉 관할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滇池 주변의 平壩地區로부터 曲靖의 평패지구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한다. 張增祺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 즉 滇文化 유물의 분포 범위를 기초로 하여 전국의 강역을 비정하였는데, 서쪽 경계는 安寧縣 太極山 古墓群(晉寧 石寨山 유지로부터 70km 거리), 동쪽 경계는 지금의 路南에서 瀘西에 이르는 선, 남쪽 경계를 新平·元江에서 个舊에 이르는 선, 북쪽 경계는 曲靖·東川 이북의 會澤·昭通 일대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전국의 영역을 현재의 昆明市와 東川市 전부, 曲靖과 玉溪지구 대부분, 紅河州·楚雄州와 文山州의 일부분을 포괄하는 지역으로 비정하였다(張增祺, 1997: 10~12). 滇國의 주민에 관하여는, 靡莫과 僰을 동일한 계통으로 보고, 그 주체 민족을 氐羌系로 인정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尤中, 1994: 37~39; 馬曜, 1983: 8~10). 또 ‘僰’으로 보지만, 氐羌系가 아니라 토착의 濮系로 보는 시각도 있다(童恩正, 1998: 98). 이에 비하여 최근에 이르러 ‘滇’과 ‘僰’을 분리하여 滇人을 백월계통에 속하는 민족군체로 정리하거나(王文光, 1997: 249~251; 王文光·龍曉燕·陳斌, 2005: 95~105), 滇國의 주체 민족을 ‘越人’으로 보는 시각도(張增祺, 1997: 32~52) 늘어나고 있다. 장증기의 경우 滇國에는 주체민족인 ‘월인’ 이외에도 ‘濮人’, ‘昆明人’, ‘羌人’, ‘叟人’, ‘漢人’ 등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을 논증하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史記 外國傳 譯註』의 해당 주 참조(『史記 外國傳 譯註』, 2009: 214).
각주 005)
의 후예이다.白馬:『史記索隱』에서는, “살피건대, 夷邑의 이름이고, 곧 白馬氐이다.”라고 하였고,『史記正義』에서는 “『括地志』에 이르기를, ‘隴右의 成州와 ·武州는 모두 白馬氐이며, 그 豪族 楊氏는 成州의 仇池山 위에 居한다’라고 하였다.” 司馬遷은 白馬를 ‘氐類’라고 하였고, 馬長壽도 이를 좇아 백마를 氐族의 전형으로 보았다(馬長壽, 1984: 10). 王文光은 ‘白馬羌’이라 하여 羌의 일종으로 보았으며, 그 주요 분포 지역을 後漢 시기의 蜀郡 北部都尉·廣漢屬國 경내 즉 오늘날 四川省 綿陽지구 북부와 甘肅省 武都지구 남부의 감숙성과 사천성의 경계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따라서 ‘廣漢羌’이라 칭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또 백마강의 일부분은 나중에 발전하여 오늘날 四川省 平武 등지의 白馬藏人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王文光, 1997: 241~242). 보다 자세한 내용은『史記 外國傳 譯註』의 해당 주 참조(『史記 外國傳 譯註』, 2009: 219).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滇: ‘滇’은 國名이자 邑名이며 部落名이다. 현재는 운남성을 지칭하는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며, 운남성을 지칭하는 별칭으로 사용된 것은 明淸代 이후의 일이다. 漢代 滇池縣은 滇國의 도읍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方國瑜는 그 위치를 운남성 晉寧縣의 晉城區 및 呈貢縣 지역으로 비정하였고(方國瑜, 1987: 61), 張增祺는 문헌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지하여 전국 도성의 위치를 晉寧縣 晉城鎭으로 비정하였다(張增祺, 1997: 3~10). 滇國의 강역, 즉 滇을 비롯한 ‘靡莫之屬’ 10여 君長의 강역은 대체로 後漢代의 益州郡, 즉 前漢代 益州郡에서 西部都尉 관할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 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滇池 주변의 平壩地區로부터 曲靖의 평패지구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한다. 張增祺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 즉 滇文化 유물의 분포 범위를 기초로 하여 전국의 강역을 비정하였는데, 서쪽 경계는 安寧縣 太極山 古墓群(晉寧 石寨山 유지로부터 70km 거리), 동쪽 경계는 지금의 路南에서 瀘西에 이르는 선, 남쪽 경계를 新平·元江에서 个舊에 이르는 선, 북쪽 경계는 曲靖·東川 이북의 會澤·昭通 일대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전국의 영역을 현재의 昆明市와 東川市 전부, 曲靖과 玉溪지구 대부분, 紅河州·楚雄州와 文山州의 일부분을 포괄하는 지역으로 비정하였다(張增祺, 1997: 10~12). 滇國의 주민에 관하여는, 靡莫과 僰을 동일한 계통으로 보고, 그 주체 민족을 氐羌系로 인정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尤中, 1994: 37~39; 馬曜, 1983: 8~10). 또 ‘僰’으로 보지만, 氐羌系가 아니라 토착의 濮系로 보는 시각도 있다(童恩正, 1998: 98). 이에 비하여 최근에 이르러 ‘滇’과 ‘僰’을 분리하여 滇人을 백월계통에 속하는 민족군체로 정리하거나(王文光, 1997: 249~251; 王文光·龍曉燕·陳斌, 2005: 95~105), 滇國의 주체 민족을 ‘越人’으로 보는 시각도(張增祺, 1997: 32~52) 늘어나고 있다. 장증기의 경우 滇國에는 주체민족인 ‘월인’ 이외에도 ‘濮人’, ‘昆明人’, ‘羌人’, ‘叟人’, ‘漢人’ 등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을 논증하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史記 外國傳 譯註』의 해당 주 참조(『史記 外國傳 譯註』, 2009: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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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白馬:『史記索隱』에서는, “살피건대, 夷邑의 이름이고, 곧 白馬氐이다.”라고 하였고,『史記正義』에서는 “『括地志』에 이르기를, ‘隴右의 成州와 ·武州는 모두 白馬氐이며, 그 豪族 楊氏는 成州의 仇池山 위에 居한다’라고 하였다.” 司馬遷은 白馬를 ‘氐類’라고 하였고, 馬長壽도 이를 좇아 백마를 氐族의 전형으로 보았다(馬長壽, 1984: 10). 王文光은 ‘白馬羌’이라 하여 羌의 일종으로 보았으며, 그 주요 분포 지역을 後漢 시기의 蜀郡 北部都尉·廣漢屬國 경내 즉 오늘날 四川省 綿陽지구 북부와 甘肅省 武都지구 남부의 감숙성과 사천성의 경계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따라서 ‘廣漢羌’이라 칭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또 백마강의 일부분은 나중에 발전하여 오늘날 四川省 平武 등지의 白馬藏人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王文光, 1997: 241~242). 보다 자세한 내용은『史記 外國傳 譯註』의 해당 주 참조(『史記 外國傳 譯註』, 2009: 219).
색인어
- 이름
- 동가경(董嘉慶), 당 덕종, 낭사(浪沙), 위고, 가경, 위고
- 지명
- 융주(戎州), 훈(馴), 빙(騁), 낭(浪), 융주, 마안산(馬鞍山), 남조(南詔), 토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