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洱河蠻의 당에 입조
서이하만(西洱河蠻)은 하만(河蠻)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으로 통하는] 길은 낭주(郞州)로부터 3000리를 달린다. [양]건방이 기병(奇兵)을 보내 수주(嶲州)로부터 1500리를 가서 기습하게 하였다. 그 우두머리 양성이 크게 놀라 도망치려 하였으나, 사자가 좋은 말로 항복을 약(約)하게 하니, 이에 수령 10인을 보내 군문(軍門)에서 정성을 바쳐 복종을 표시하였다. 건방은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왔다. [당 태종 정관] 22년(648) 서이하의 대수령 양동외(楊同外)와 동이하(東洱河)의 대수령 양렴(楊斂)과 송외(松外)의 수령 몽우(蒙羽)가 모두 입조하여서, 관질을 주었다. [당 고종] 현경(顯慶) 원년(656) 서이하의 대수령 양동부현(楊棟附顯)과 화만(和蠻)의 대수령 왕라기(王羅祁) 그리고 낭·공·리·반(郞·昆·梨·盤) 4주(州)의 대수령 왕가충(王伽衝)이 부락(部落) 4천 인을 이끌고 귀부(歸附)하고, 입조하여 방물을 바쳤다. 그 후 융주(戎州) 서남쪽에 안융성(安戎城)
주 001을 쌓아 토번과 만(蠻)이 통하는 길을 끊었는데, 생강(生羌)주 002이 토번의 향도가 되어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군대를 늘려 지키니, 서이하의 제만(諸蠻)은 모두 토번에 신속하였다. [당 현종] 개원(開元) 연간에 수령이 비로소 입조하니, 자사에 임명하였다. 마침 남조(南詔)의 몽귀의(蒙歸義)가 대화성(大和城)
주 003
각주 003)
을 함락시키니, 이에 북쪽으로 옮겨갔고, 다시 낭궁조(浪穹詔)주 004大和城:『蠻書』卷5 「六瞼」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大和城과 大釐城 그리고 陽苴哶城은 본디 모두 河蠻이 거주하던 땅이다. 開元 25년(737)에 蒙歸義가 河蠻을 축출하고, 그 땅을 빼앗아 大和城을 점거하였다. …… 大和城은 북쪽으로 陽苴哶城과 15里 떨어져 있다. 巷陌이 모두 돌을 쌓아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1丈 남짓으로 계속 이어져 몇 리를 가도 끊기지 않는다. 城 안에 큰 碑가 있는데, 閣羅鳳이 淸平官 鄭蠻利에게 적게한 글이다. 皇化로부터 멀어지고 끊어진 이유와 西戎의 통제를 받게된 경위를 논하였다.”(『雲南志補注』卷5: 70~71). 성안에 있는 大碑는 南詔德化碑를 지칭한다. 남조덕화비는 지금 大理古城의 남쪽으로 약 7km 떨어진 太和村에 조성된 ‘남조덕화비 공원’ 안에 남아 있다.
각주 004)
에 기제(羈制)되었다. 낭궁조가 격파된 뒤에는 또 운남(雲南)의 자성(柘城)
주 005으로 옮겨졌다.浪穹詔:『蠻書』卷3 「六詔」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넷째, 浪穹이 一詔이다. 詔主는 豐時와 豐哶 兄弟인데, 모두 浪穹에 살았다. 나중에 豐哶가 邆賧을 습격하여 거기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각기 一詔가 되었다. 豐時가 죽자, 아들 時羅鐸이 섰다. 時羅鐸이 죽고, 아들 羅望이 서서 浪穹州刺史가 되었다. 南詔와의 전쟁에서 敗하여, 部落을 劍川으로 물려 지켰다. 때문에 劍浪이라 칭하였다. 羅望이 죽고 아들 望偏이 섰다. 望偏이 죽고, 그 아들 偏羅矣가 섰다. 偏羅矣가 죽고, 그 아들 矣羅君이 섰다. 貞元 10年(794)에 南詔가 劍川을 격파하였고, 矣羅君을 사로잡아, 永昌으로 옮겼다. 무릇 浪穹, 邆賧, 施浪 모두를 일컬어 浪人이라 하는 까닭에, 三浪詔라 말하기도 한다.”(『雲南志補注』卷3: 33). 方國瑜는 浪穹詔의 위치를 雲南省 洱源縣으로 비정하였다(方國瑜, 1987: 366).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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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大和城:『蠻書』卷5 「六瞼」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大和城과 大釐城 그리고 陽苴哶城은 본디 모두 河蠻이 거주하던 땅이다. 開元 25년(737)에 蒙歸義가 河蠻을 축출하고, 그 땅을 빼앗아 大和城을 점거하였다. …… 大和城은 북쪽으로 陽苴哶城과 15里 떨어져 있다. 巷陌이 모두 돌을 쌓아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1丈 남짓으로 계속 이어져 몇 리를 가도 끊기지 않는다. 城 안에 큰 碑가 있는데, 閣羅鳳이 淸平官 鄭蠻利에게 적게한 글이다. 皇化로부터 멀어지고 끊어진 이유와 西戎의 통제를 받게된 경위를 논하였다.”(『雲南志補注』卷5: 70~71). 성안에 있는 大碑는 南詔德化碑를 지칭한다. 남조덕화비는 지금 大理古城의 남쪽으로 약 7km 떨어진 太和村에 조성된 ‘남조덕화비 공원’ 안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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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浪穹詔:『蠻書』卷3 「六詔」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넷째, 浪穹이 一詔이다. 詔主는 豐時와 豐哶 兄弟인데, 모두 浪穹에 살았다. 나중에 豐哶가 邆賧을 습격하여 거기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각기 一詔가 되었다. 豐時가 죽자, 아들 時羅鐸이 섰다. 時羅鐸이 죽고, 아들 羅望이 서서 浪穹州刺史가 되었다. 南詔와의 전쟁에서 敗하여, 部落을 劍川으로 물려 지켰다. 때문에 劍浪이라 칭하였다. 羅望이 죽고 아들 望偏이 섰다. 望偏이 죽고, 그 아들 偏羅矣가 섰다. 偏羅矣가 죽고, 그 아들 矣羅君이 섰다. 貞元 10年(794)에 南詔가 劍川을 격파하였고, 矣羅君을 사로잡아, 永昌으로 옮겼다. 무릇 浪穹, 邆賧, 施浪 모두를 일컬어 浪人이라 하는 까닭에, 三浪詔라 말하기도 한다.”(『雲南志補注』卷3: 33). 方國瑜는 浪穹詔의 위치를 雲南省 洱源縣으로 비정하였다(方國瑜, 1987: 366).
- 각주 005)
색인어
- 이름
- [양]건방, 양성, 건방, 당 태종, 양동외(楊同外), 양렴(楊斂), 몽우(蒙羽), 당 고종, 양동부현(楊棟附顯), 왕라기(王羅祁), 왕가충(王伽衝), 당 현종, 몽귀의(蒙歸義)
- 지명
- 낭주(郞州), 수주(嶲州), 서이하, 동이하(東洱河), 서이하, 낭, 공, 리, 반, 郞, 昆, 梨, 盤, 융주(戎州), 안융성(安戎城), 토번, 토번, 서이하, 토번, 남조(南詔), 대화성(大和城), 운남(雲南), 자성(柘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