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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牂柯國 추장의 당 입조와 官 제수

  • 국가
    장가국(牂柯國)
[당 현종] 개원(開元) 연간에 장가의 추장 사원제(謝元齊)가 죽자, 손자인 가예(嘉藝)가 관직을 이었는데, 그 후사가 막히자,주 001
각주 001)
이 부분은 표점을 바꾸어 ‘손자인 嘉藝가 官職과 封爵을 이었다. 그 후 이에 趙氏를 酋長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舊唐書』에도 ‘開元 10년 閏5월 大酋長 謝元齊가 죽자, 詔를 내려 그 嫡孫 嘉藝를 세워 그 官職과 封爵을 잇게 하였다.’(『舊唐書』卷197: 5297)라고 되어 있는 것과도 잘 맞는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 ‘乃以趙氏爲酋長’에서 ‘乃’의 존재이다. ‘乃’는 ‘이에’ 내지는 ‘그래서’ 정도의 뜻으로 앞에 기술된 어떤 이유나 원인을 받는 뉘앙스를 가진다. 그런데 앞과 같이 해석하면 갑자기 酋長이 謝氏에서 趙氏로 바뀌는 이유가 빠지게 되고 ‘乃’의 해석도 어색해진다. 그래서 ‘封其後’라는 표현이 걸리지만, 위와 같이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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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조씨(趙氏)를 추장으로 삼았다. 25년(737)에 [추장] 조군도(趙君道)가 내조(來朝)하였다. 그 후예 가운데 조국진(趙國珍)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전공이 있었다. 각라봉(閤邏鳳)이 이반하였을 때, 재상(宰相) 양국충(楊國忠) 주 002
각주 002)
楊國忠(?~756): 唐 玄宗 時期의 權臣이다. 本名은 楊釗이고, 蒲州 永樂縣(山西省 芮城) 사람이다. 楊貴妃와는 같은 曾祖父를 가진 堂兄이었다. 741年, 楊貴妃의 추천으로 任官하였고, 天寶 9년(750)에 玄宗으로부터 ‘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楊國忠은 처음에 李林甫와 연합하여 舊世族을 공격하여, 현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이후 이임보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天寶 11년(752) 이임보의 사후에 재상이 되어 집권하였다. 집권 기간 중에 두 차례에 걸쳐 南詔를 정벌하는 戰爭을 벌였다. 우선 天寶 10년(751)에는 6만의 병사를 잃고, 남조가 토번과 결탁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天寶 13년(754) 六月에는 李宓에게 명령하여 南詔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결과는 참패로 끝났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20만의 병력을 잃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閤羅鳳의 반란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755년에 양국충 주벌을 명분으로 하는 안록산의 난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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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검남절도사(黔南節度使)를 겸령하였는데, 국진이 방략이 있다하여 검중도독(黔中都督)주 003
각주 003)
黔中: 唐의 方鎭名이다. 開元 26年(738)에 五溪諸州經略使를 黔州(四川 彭水 苗族土家族自治縣)에 설치하였는데, 天寶 연간에 이미 그 관할구역을 黔中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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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임명하였다. 누차 남조(南詔)를 패퇴시키고 오계(五溪)를 지킨 것이 십여 년이었다. 바야흐로 천하가 어지러워졌는데도, 그 부(部)만은 홀로 평안하였다.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죽었다. [당 덕종] 정원(貞元) 연간에 그 추장 조주속(趙主俗)에게 관직을 주었는데, 역시 조공이 끊이지 않음을 포상한 것이다. [정원] 18년(802)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당 헌종] 원화(元和) 2년(807)에 검남관찰사(黔南觀察使)에게 조를 내려 항상 본도(本道)의 장수(將帥)로 압령장가·곤명등사(押領牂柯·昆明等使)를 삼게 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는데, 혹은 정월에 조알하기도 하였으며, [문종] 개성(開成) 연간(836~839)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았다. 고사(故事)에 따르면, 융이(戎夷)가 조공할 때, 장차 도성(都城)에 이르기까지 중관(中官)이 교외에 나아가 역(驛)에서 위로하고, 관(館)에 든 이후에는 은총과 예우가 더욱 두터웠다고 한다.

  • 각주 001)
    이 부분은 표점을 바꾸어 ‘손자인 嘉藝가 官職과 封爵을 이었다. 그 후 이에 趙氏를 酋長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舊唐書』에도 ‘開元 10년 閏5월 大酋長 謝元齊가 죽자, 詔를 내려 그 嫡孫 嘉藝를 세워 그 官職과 封爵을 잇게 하였다.’(『舊唐書』卷197: 5297)라고 되어 있는 것과도 잘 맞는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 ‘乃以趙氏爲酋長’에서 ‘乃’의 존재이다. ‘乃’는 ‘이에’ 내지는 ‘그래서’ 정도의 뜻으로 앞에 기술된 어떤 이유나 원인을 받는 뉘앙스를 가진다. 그런데 앞과 같이 해석하면 갑자기 酋長이 謝氏에서 趙氏로 바뀌는 이유가 빠지게 되고 ‘乃’의 해석도 어색해진다. 그래서 ‘封其後’라는 표현이 걸리지만, 위와 같이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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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楊國忠(?~756): 唐 玄宗 時期의 權臣이다. 本名은 楊釗이고, 蒲州 永樂縣(山西省 芮城) 사람이다. 楊貴妃와는 같은 曾祖父를 가진 堂兄이었다. 741年, 楊貴妃의 추천으로 任官하였고, 天寶 9년(750)에 玄宗으로부터 ‘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楊國忠은 처음에 李林甫와 연합하여 舊世族을 공격하여, 현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이후 이임보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天寶 11년(752) 이임보의 사후에 재상이 되어 집권하였다. 집권 기간 중에 두 차례에 걸쳐 南詔를 정벌하는 戰爭을 벌였다. 우선 天寶 10년(751)에는 6만의 병사를 잃고, 남조가 토번과 결탁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天寶 13년(754) 六月에는 李宓에게 명령하여 南詔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결과는 참패로 끝났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20만의 병력을 잃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閤羅鳳의 반란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755년에 양국충 주벌을 명분으로 하는 안록산의 난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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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黔中: 唐의 方鎭名이다. 開元 26年(738)에 五溪諸州經略使를 黔州(四川 彭水 苗族土家族自治縣)에 설치하였는데, 天寶 연간에 이미 그 관할구역을 黔中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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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당 현종, 사원제(謝元齊), 가예(嘉藝), 조군도(趙君道), 조국진(趙國珍), 각라봉(閤邏鳳), 양국충(楊國忠), 국진, 당 덕종, 조주속(趙主俗), 당 헌종, 문종
지명
남조(南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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牂柯國 추장의 당 입조와 官 제수 자료번호 : jo.k_0017_0222_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