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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爨歸王을 남영주도독으로 삼음

  • 국가
    양찬만(兩爨蠻)
찬홍달(爨弘達)이 이미 죽은 뒤에, 찬귀왕(爨歸王)을 남영주도독(南寧州都督)주 001
각주 001)
南寧州都督府: 본문에서 찬귀왕이 도독을 맡을 당시의 남영주도독부는 물론 羈縻都督府이다. 남영주도독부는 唐 武德 7年(624)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南寧州에 두어졌다. 오늘날 雲南 曲靖市 北쪽 7km 지점의 三岔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北쪽으로 滇東北 지역을 포함하였고, 동쪽으로는 貴州의 普安·興義 2현을 포함하였으며, 西쪽으로는 怒江에 이르렀고, 南쪽으로는 盤江과 曲江에 이르렀다. 貞觀 6年(632)에 폐지되었다. 開元 연간 初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당시의 관할구역은 滇東 지역과 貴州省 西쪽 변경에 국한되었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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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았다.주 002
각주 002)
爨弘達과 爨歸王 사이의 계보와 관련하여『爨守忠墓誌』에 대한 이해가 유용하다. 관련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曾祖 榮宗은 皇朝의 左監門衛大將軍으로 南寧郡王에 封해졌다. 謀猷가 뛰어나고(間出) 德義가 온전하고 높아서 種落의 侯王이 되었으며, 本朝의 爪士가 되었다. 하사품(錫賚)이 산처럼 쌓였고, 渥恩이 바다처럼 깊었다. 功이 언덕 위의 삼(邛苴)처럼 아름다워서, 그 초상(影)이 麟閣에서 빛났다. 大父 引弘은 皇帝의 特進으로 南寧郡王을 襲封하였다. 片玉같이 堅剛하고 渾金같이 溫潤하였으며, 마음속에 象魏를 걸고 있는 듯이 행동하였다. 昆明을 虎視하였다. 烈考 歸王은 皇帝의 左金吾衛大將軍으로, (南寧郡王을) 紹封하였다. 길고 멀리 計算하면서도, 움직여 나아가면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 閣鳳이 세를 믿고 능멸함에 이르러, 東落을 保寧하였다. 雪霜으로 인해 松柏의 志操를 알고, 濁亂 중에 忠良之心이 드러나는 법이다. 桀驁가 변경을 엿보는 와중에 蜂蠆가 毒을 놓아, 우리 國寶를 죽였다. 皇上이 震惊하여 누가 그를 이을 것인가라고 하였다.”(『南中大姓與爨氏家族硏究』, 2002: 18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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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성(石城) 주 003
각주 003)
石城: 현재의 雲南城 曲靖市 西北 7km 지점의 三岔區에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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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거주하였는데, 동찬(東爨)의 수령 개빙(蓋聘)과 그 아들 개계(蓋啓) 주 004
각주 004)
『蠻書』에서는 蓋聘과 그 아들 蓋啓를 升麻川의 孟聘·孟啓 父子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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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습격하여 죽이고, 공범천(共範川)으로 옮겼다.

  • 각주 001)
    南寧州都督府: 본문에서 찬귀왕이 도독을 맡을 당시의 남영주도독부는 물론 羈縻都督府이다. 남영주도독부는 唐 武德 7年(624)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南寧州에 두어졌다. 오늘날 雲南 曲靖市 北쪽 7km 지점의 三岔區에 해당한다. 관할구역은 北쪽으로 滇東北 지역을 포함하였고, 동쪽으로는 貴州의 普安·興義 2현을 포함하였으며, 西쪽으로는 怒江에 이르렀고, 南쪽으로는 盤江과 曲江에 이르렀다. 貞觀 6年(632)에 폐지되었다. 開元 연간 初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당시의 관할구역은 滇東 지역과 貴州省 西쪽 변경에 국한되었다. 天寶 연간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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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爨弘達과 爨歸王 사이의 계보와 관련하여『爨守忠墓誌』에 대한 이해가 유용하다. 관련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曾祖 榮宗은 皇朝의 左監門衛大將軍으로 南寧郡王에 封해졌다. 謀猷가 뛰어나고(間出) 德義가 온전하고 높아서 種落의 侯王이 되었으며, 本朝의 爪士가 되었다. 하사품(錫賚)이 산처럼 쌓였고, 渥恩이 바다처럼 깊었다. 功이 언덕 위의 삼(邛苴)처럼 아름다워서, 그 초상(影)이 麟閣에서 빛났다. 大父 引弘은 皇帝의 特進으로 南寧郡王을 襲封하였다. 片玉같이 堅剛하고 渾金같이 溫潤하였으며, 마음속에 象魏를 걸고 있는 듯이 행동하였다. 昆明을 虎視하였다. 烈考 歸王은 皇帝의 左金吾衛大將軍으로, (南寧郡王을) 紹封하였다. 길고 멀리 計算하면서도, 움직여 나아가면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 閣鳳이 세를 믿고 능멸함에 이르러, 東落을 保寧하였다. 雪霜으로 인해 松柏의 志操를 알고, 濁亂 중에 忠良之心이 드러나는 법이다. 桀驁가 변경을 엿보는 와중에 蜂蠆가 毒을 놓아, 우리 國寶를 죽였다. 皇上이 震惊하여 누가 그를 이을 것인가라고 하였다.”(『南中大姓與爨氏家族硏究』, 2002: 18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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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石城: 현재의 雲南城 曲靖市 西北 7km 지점의 三岔區에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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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蠻書』에서는 蓋聘과 그 아들 蓋啓를 升麻川의 孟聘·孟啓 父子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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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찬홍달(爨弘達), 찬귀왕(爨歸王), 개빙(蓋聘), 개계(蓋啓)
지명
석성(石城), 공범천(共範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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爨歸王을 남영주도독으로 삼음 자료번호 : jo.k_0017_0222_1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