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趙孝祖가 서남이를 평정함
영휘(永徽) 연간(650~655) 초에 대발롱(大勃弄)의 양승전(楊承顚)이 제멋대로 장수(將帥)를 임명하고 마주(麻州)
주 001를 노략질하였다. 도독(都督) 임회옥(林懷玉)이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고종(高宗)이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조효조(趙孝祖)를 낭주도행군총관(郞州道行軍總管)으로 삼아, 임회옥과 함께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나오후산(羅仵侯山)
주 002에 이르러, 그 추장 독마포(禿磨蒲)와 대귀주(大鬼主) 도간(都干)이 무리를 거느리고 천구(菁口)
주 003를 막아섰지만, 조효조가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이인(夷人)은 귀신을 숭상하는데, [귀신에 대한] 제사(祭祀)를 주관하는 자를 귀주(鬼主)라고 한다. 해마다 매 호(戶)가 소 한 마리 혹은 양 한 마리를 내어 그 가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귀신을 보내고 귀신을 맞는 의식을 거행할 때는 반드시 무기를 지니는데, 이를 틈타 원수를 갚는다고들 한다. 효조가 군대를 주둔시키자, 대부분이 성(城)을 버리고 달아났다. 달아나는 것을 뒤쫓다가 주기수(周近水)
주 004에 이르니, 대추장 검미우(儉彌于)와 귀주(鬼主) 동박(董朴)이 물가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경기(輕騎)를 거느리고 맞아 싸우러 나왔다. 조효조가 쳐서 미우(彌于)와 독마포(禿磨蒲) 그리고 귀주(鬼主) 십여 급을 베었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손발이 얼어 터지거나 얼어 죽는 자가 거의 다였다. 효조가 상언(上言)하기를, “소발롱과 대발롱은 늘 농동(弄棟)을 꾀어서 이반하니, 지금 백수만을 격파한 김에 서쪽을 두루 토벌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허락하는 조(詔)가 내렸다. 조효조의 군대가 들어가자, 이인(夷人)이 모두 험한 곳으로 달아났다. 소발롱의 추장 몰성(歿盛)이 백기성(白旗城)에 주둔하였는데, 만기(萬騎)를 거느리고 싸우다 패하여 베임을 당했다. 진군하여 대발롱에 이르자, 양승전(楊承顚)이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기만 하였다. 효조가 회유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군대를 지휘하여 진격하여 승전을 사로잡았고, 나머지 둔영(屯營)도 큰 것은 수만(數萬) 작은 것은 수천(數千)이었으나 모두 격파되거나 항복하였다. 마침내 서남이(西南夷)가 평정되었다. 낭주도독부(郞州都督府)를 파(罷)하고, 다시 융주도독부(戎州都督府)
주 005
각주 005)
를 두었다.戎州都督府: 唐 貞觀 6年(632)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戎州(四川 宜賓市)에 두어졌다. 관할구역은 東쪽으로 貴州省 普安縣과 興義縣으로부터, 北쪽으로 四川省의 宜賓과 雷波까지, 西쪽으로는 怒江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雲南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에 상당하였다. 23年(649)에 폐지되고, 郎州都督으로 고쳐 설치되었다. 永徽 3年(652)에 다시 戎州都督이 설치되었으며, 開元 연간의 관할구역은 雲南 안에서 嵩明·宜良·彌勒 以東, 盤江 以北의 部分에만 상당하였다. 天寶 이후의 관할구역은 四川省의 宜賓과 雷波 및 雲南의 東北 변경지역만 포함하였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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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戎州都督府: 唐 貞觀 6年(632)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戎州(四川 宜賓市)에 두어졌다. 관할구역은 東쪽으로 貴州省 普安縣과 興義縣으로부터, 北쪽으로 四川省의 宜賓과 雷波까지, 西쪽으로는 怒江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雲南 대부분을 포함하는 지역에 상당하였다. 23年(649)에 폐지되고, 郎州都督으로 고쳐 설치되었다. 永徽 3年(652)에 다시 戎州都督이 설치되었으며, 開元 연간의 관할구역은 雲南 안에서 嵩明·宜良·彌勒 以東, 盤江 以北의 部分에만 상당하였다. 天寶 이후의 관할구역은 四川省의 宜賓과 雷波 및 雲南의 東北 변경지역만 포함하였다.
색인어
- 이름
- 양승전(楊承顚), 임회옥(林懷玉), 고종(高宗), 조효조(趙孝祖), 임회옥, 독마포(禿磨蒲), 도간(都干), 조효조, 효조, 검미우(儉彌于), 동박(董朴), 조효조, 미우(彌于), 독마포(禿磨蒲), 효조, 조효조, 몰성(歿盛), 양승전(楊承顚), 효조, 승전
- 지명
- 마주(麻州), 나오후산(羅仵侯山), 천구(菁口), 주기수(周近水), 농동(弄棟), 백기성(白旗城), 낭주도독부(郞州都督府), 융주도독부(戎州都督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