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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新唐書 卷222上·中·下 열전 第147上·中·下 남만

중국정사외국전

墮和羅

  • 국가
    타화라(墮和羅)
타화라(墮和羅)독화라(獨和羅)라고도 하는데, 남쪽은 반반(盤盤)과 조금 떨어져 있고, 북쪽은 가라사불(迦邏舍弗)이며,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어지고, 동쪽은 진랍(眞臘)이다. 광주(廣州) 주 001
각주 001)
廣州: 三國 吳 孫權 黃武 5年(226)에 交州를 나누어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廣信縣(廣西省 梧州市)에 두었다.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다. 孫休 永安 7年(264)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治所는 番禺縣(廣東省 廣州市)에 두어졌다. 관할구역은 오늘날의 廣東과 廣西 兩省에서 廣東의 廉江以西와 廣西의 桂江 中上 유역과 容縣·北流以南, 그리고 宜州 西北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상당하였다. 南朝 이후 점차 縮小되었다. 隋 文帝 開皇 12年(592)에 치소를 曲江縣(廣東省 韶關市 南쪽 5km 武水 西岸)으로 옮겼으며, 開皇 연간 末에는 南海縣(현재의 廣州市)으로 옮겼다. 仁壽 1年(601)에 番州로 바꾸었다가, 煬帝 大業 3年(607)에 또 南海郡으로 고쳤다. 唐 高祖 武德 4年(621)에 다시 廣州로 고쳤으며, 나중에 嶺南道의 治所를 두었다. 玄宗 天寶 1年(742)에 南海郡으로 바꾸었다가, 肅宗 乾元 1年(758)에 廣州로 되돌렸으며, 昭宗 乾寧 2年(895)에는 淸海軍으로 바꾸었다. 五代 시기에는 南漢의 國都가 되어, 興王府로 바뀌었다. 北宋 太祖 開寶 4年(971)에 다시 廣州가 되었으며, 南海와 番禺 두 縣(廣州市)을 관할하였다. 太宗 端拱 연간 이후에는 廣南東路의 치소가 되었다. 南宋 衛王 祥興 1年(1278)에 翔龍府로 승격되었으며, 같은 해(至元 15年)에 元朝가 廣州路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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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다섯 달은 가야 이른다. 이 나라에는 아름다운 무소[犀]가 많은데, 세칭 타화라코뿔소라고 한다. 속국(屬國)이 둘 있는데, 담릉(曇陵)타원(陀洹)이다.

  • 각주 001)
    廣州: 三國 吳 孫權 黃武 5年(226)에 交州를 나누어 설치하였으며, 治所는 廣信縣(廣西省 梧州市)에 두었다.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다. 孫休 永安 7年(264)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治所는 番禺縣(廣東省 廣州市)에 두어졌다. 관할구역은 오늘날의 廣東과 廣西 兩省에서 廣東의 廉江以西와 廣西의 桂江 中上 유역과 容縣·北流以南, 그리고 宜州 西北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상당하였다. 南朝 이후 점차 縮小되었다. 隋 文帝 開皇 12年(592)에 치소를 曲江縣(廣東省 韶關市 南쪽 5km 武水 西岸)으로 옮겼으며, 開皇 연간 末에는 南海縣(현재의 廣州市)으로 옮겼다. 仁壽 1年(601)에 番州로 바꾸었다가, 煬帝 大業 3年(607)에 또 南海郡으로 고쳤다. 唐 高祖 武德 4年(621)에 다시 廣州로 고쳤으며, 나중에 嶺南道의 治所를 두었다. 玄宗 天寶 1年(742)에 南海郡으로 바꾸었다가, 肅宗 乾元 1年(758)에 廣州로 되돌렸으며, 昭宗 乾寧 2年(895)에는 淸海軍으로 바꾸었다. 五代 시기에는 南漢의 國都가 되어, 興王府로 바뀌었다. 北宋 太祖 開寶 4年(971)에 다시 廣州가 되었으며, 南海와 番禺 두 縣(廣州市)을 관할하였다. 太宗 端拱 연간 이후에는 廣南東路의 치소가 되었다. 南宋 衛王 祥興 1年(1278)에 翔龍府로 승격되었으며, 같은 해(至元 15年)에 元朝가 廣州路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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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지명
타화라(墮和羅), 독화라(獨和羅), 반반(盤盤), 가라사불(迦邏舍弗), 진랍(眞臘), 광주(廣州), 담릉(曇陵), 타원(陀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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