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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新唐書 卷222上·中·下 열전 第147上·中·下 남만

중국정사외국전

찬(贊)하여 말한다. 의 치세는 양한(兩漢)을 넘지 못하였으나,주 001
각주 001)
당조는 高祖이래 哀帝까지 약 300년간 지속되었는데 漢의 경우에는 前漢 高祖이래 後漢 獻帝까지 약 400년으로 漢이 유지되는 기간이 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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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삼대보다 넓었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화를 소비하여, 그로 말미암은 화가 생겨났다. 진헌공(晉獻公)은 적자를 죽이고 두 공자를 해쳐서 암군(暗君)이라 불렸다.주 002
각주 002)
晉 獻公의 嫡子란 그의 태자인 申生을 말하며 두 공자는 重耳와 夷吾이다. 이들 삼형제는 모두 어머니는 다르다.『史記』卷39 「晉世家」에 따르면 신생의 어머니는 齊 桓公의 딸이며, 중이는 狐氏의 딸이다. 이오의 어머니는 중이의 어머니인 호씨의 동생이다. 그런데 헌공이 즉위 한지 5년째 되는 해(전672), 진은 驪戎을 정벌하고 거기서 驪姬라는 여자를 얻게 되었다. 헌공은 그녀를 총애하였고 마침내 그녀는 奚齊와 悼子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에 여희는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헌공 21년(전656) 그녀는 신생이 제사를 지내고 헌공에게 올린 음식에 독을 타고는 태자가 음식에 독을 넣어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고 헌공에게 참소하였다. 이에 효성이 지극한 신생은 실상을 고하지 않고 新城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가 자살을 하였다. 여희는 중이와 이오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이들은 각각 국외로 달아났다. 그러나 26년(전651) 헌공이 죽자 신생, 중이, 이오를 받들던 사람들이 진의 大夫인 里克, 邳鄭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奚齊는 즉위도 못해 보고, 이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극등은 여희의 둘째 아들인 悼子마저도 죽이고 이오를 맞이하여 즉위시켰다. 반면 중이는 이후에도 망명 생활을 계속했고, 이오가 죽자[시호는 惠公] 비로소 귀국하여 國君이 될 수 있었다. 망명 생활을 시작한 지 무려 20년만의 일로, 그가 바로 五覇의 하나인 晉 文公이다. 즉 본문의 論贊에서 헌공의 사례를 예로 든 것은 헌공이 멀쩡한 적자를 폐하고 첩의 자식을 세우는 바람에 나라가 혼란해졌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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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황(明皇)은 하루에 세 명의 서인을 죽이니,주 003
각주 003)
明皇은 당의 玄宗을 말한다. 당 현종의 시호는 ‘至道大聖大明孝皇帝’인데, 이를 줄여 후세에는 ‘明皇’이라고 하였다. 세 명의 서인은 황태자 瑛, 鄂王 瑤, 光王 琚를 말한다.『舊唐書』卷107 「玄宗諸子傳」에 따르면 황태자 瑛은 현종의 둘째아들로, 그 어머니는 趙麗妃이며 瑤는 皇甫德儀, 琚는 劉才人인데 모두 현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맞이했던 후궁들이다. 영은 개원 3년(715) 정월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현종이 즉위한 후, 武惠妃를 새로 얻어 총애하게 되면서 원래 맞이했던 여인들과의 관계는 소원하게 되었다. 더욱이 무혜비가 壽王 瑁까지 낳게 되면서 그에 대한 총애가 황태자를 압도할 지경이 되었다. 원래 태자와 악왕, 광왕은 궁중의 같은 거처에서 거주하였고, 서로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와 같은 처지를 한탄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빌미로 무혜비 쪽에서는 태자 등이 편을 갈라 자기 母子를 해치고 천자까지 비방을 한다고 참소하니, 현종은 진노하여 이들을 모두 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재상인 中書令 張九齡은 진 헌공이 애첩의 말에 현혹되는 바람에 태자 신생이 억울하게 죽고 나라가 혼란해진 사례를 필두로, 역대 왕조에서 태자를 폐했다가 나라가 위태롭게 된 사례를 열거하며 극력 간하니, 마침내 그 일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장구령이 물러나고 李林甫가 재상이 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는 무혜비의 지원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그녀의 뜻에 영합하였다. 개원 25년(737) 4월 황태자와 악왕 등이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현종은 이림보에게 이 문제의 처결과 관련한 자문을 구하였다. 이림보는 이는 황제의 집안일이지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답변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현종으로 하여금 그의 뜻대로 일을 처리하게 한 것이었다. 결국 궁중에서 곧바로 조서를 선포하여 황태자와 악왕, 광왕을 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죽였다. 그런데 정작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무혜비는 이후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같은 해 11월에 죽었고, 그녀의 죽음으로 수왕 역시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 수왕의 부인이 楊貴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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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고 가려지는 것이 심하였다. 오호라! 부자가 서로 믿지 못하면서도, 멀리 합라봉의 죄를 다스리는데는 10만의 병사를 죽였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 의종(懿宗)이 임용한 재상들은 사리에 밝지 못했고, 번진(藩鎭)은 누차 배반하였다. [이에] 남조(南詔)는 속으로 [중국을] 업신여기니, 변방의 병사들은 난세를 슬퍼하였다. 방훈(龐勛)이 이것을 틈타 미친 듯이 싸움을 자행하였다.주 004
각주 004)
『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9년(868) 7월 桂林을 수비하기 위해 徐州에서 파견된 병력 500여 명이 糧儲判官 龐勛을 都頭로 추대하여 湘潭, 衡山등의 현을 약탈하였으며 마음대로 근무지를 벗어나 본진[徐州]으로 귀환한 것으로 되어 있다.『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9年 夏 6月조에 따르면 원래 남조가 안남을 함락시켰을 때, 서주와 사주에서 병력 2천을 모집하여 구원하게 했고 이 가운데 8백 명을 분리하여 계주를 지키게 하였다. 원래 복무기간을 3년으로 했는데 6년이 되도록 교대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기간이 1년이 더 연장이 되었다. 이에 서주 출신의 軍校들이 糧料判官 방훈을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고, 마음대로 선박을 이용해 북상하여 서주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여러 망명자와 군도들까지 끌여 들여 반란군의 숫자가 크게 불어났으며 마침내 숙주, 서주를 함락시켰다. 이들은 서주를 근거지로 하여 계속 주변의 여러 주현을 공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사타와 토욕혼의 기병까지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민족 출신의 기병부대를 제외하고는 정작 제도에서 모집한 군대는 계속 패전을 거듭하였다. 방훈의 반란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저주, 호주 등을 함락시키고, 함통 10년(869) 7월에는 사주까지 진격하여 이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패하여 그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더욱이 방훈의 본군이 사주에 집결된 틈을 타, 숙주를 지키던 반란군 장수 張玄稔이 항복하여 관군과 함께 서주를 포위, 마침내 근거지 서주가 함락되었다. 이에 방훈은 도망치다가 관군에게 패하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방훈에 의해 점령된 숙주, 서주를 제외하고도 그의 군대에 의해 약탈과 같은 피해를 입은 지역은 揚, 楚, 廬, 壽, 滁, 和, 兗, 海, 沂, 密, 曹, 濮州 등 11주나 되었다. 이들 지역은 당의 河南道, 淮南道를 망라하였다. 즉 방훈의 반란군은 1년이 넘도록 오늘날 江淮지역의 북부 일대를 휩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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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흉악한 우두머리들을 섬멸하였다 하여도, 전쟁이 계속되어 해결되지 않으니, 은 마침내 이 때문에 망하였다. 『역』에서 말하기를, “소를 소홀히 하여 잃는다”라고 하였다.주 005
각주 005)
『周易』「旅卦」 ‘上九’조의 爻辭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鳥焚其巢.旅人先笑後號咷.喪牛于易.凶”이다. 그 뜻은 ‘새가 그 둥지에 불이 나는 것과 같으니, 나그네는 먼저 웃지만 뒤에는 울부짖는다. 소를 소홀히 하여 잃으니 흉하다’라는 뜻이다. 이 효사를『周易正義』卷6 「旅」 ‘上九’조에 대한 魏晉 王弼과 韓康伯의 「正義」와 唐 孔穎達의 疏를 토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나그네가 높은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그는 처음에는 기뻐하여 웃을 수가 있다. 그러나 객의 처지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나중에는 ‘울부짖는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객을 함께 미워하는 까닭에 자산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소를 잃게 만든다. 즉 소를 잃게 되는 이치가 어떤 위태롭고 힘든 환란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객과 상대하지 않고 그가 위태롭게 되어도 도와주지 않는다. 또한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자산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소를 잃게 만들어도 아무도 이를 알려 주지 않아 끝내 알 수 없다. 끝내 알지 못하니 그로 인한 피해가 엄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흉하다고 한 것이다. 이상『주역정의』의 해석에 따르면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처음에는 즐겁지만 결국 주변의 미움을 받게 된다. 그런대 정작 그 자신은 이 조차도 모르고 있다가 재앙을 당하고 만다고 한 것이다. 새가 높고 위태로운 곳에 둥지를 틀면 밑에서 불이 나도 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불길이 올라오는 것도 모르고 편히 지내다가 화를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새의 처지에 빗대어 자격도 없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을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논찬에서는 이상과 같은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소홀히 함으로 인해 소를 잃는다(喪牛于易)’라고 한 문구 그 자체의 뜻만을 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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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담당한 자들이 서북지역의 근심은 알고 경계하였으나, 우환이 방비가 없는 곳에서 발생할 줄은 몰랐다. 동탁(董卓)에 의해 망하였으나, 그 병화는 기주(冀州)에서 조짐을 보였고,주 006
각주 006)
189년 동탁은 何太后의 소생인 少帝 劉辯을 폐하고 靈帝의 다른 아들인 陳留王 協을 獻帝로 세웠다. 이후 董卓은 하태후와 소제를 시해하고 가혹한 정치를 계속하여 반란군이 일어나도록 하였으며, 初平 元年(190) 2月 장안으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천도에 장애가 되는 중신들을 살해하고, 수도 낙양의 宮廟를 파괴하였으며 역대 황제의 능묘까지 도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하여 한 동안 명목상으로나나 조정은 유지되었지만, 이로 인해 漢朝는 조정의 권위가 완전히 무너지고 지방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지방세력이 할거하게 되었다. 본문에서 동탁에 의해 망하게 되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冀州에서 조짐이 나타났다고 한 것은 바로 황건적의 난을 말한 것이다. 中平 元年 2月 鉅鹿의 張角과 동생 張寶가 황건적으로 수괴로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근거지인 鉅鹿은 冀州 소속이다. 당시 한조는 지방 사대부들의 자발적 지원과 관군의 활약에 힘입어 거의 2년 만에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결국 이일로 조정의 통제력이 상실되어, 董卓의 전횡이 초래되었다고 贊者는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贊者는 董卓의 진횡은 黃巢의 난에, 황건의 난은 방훈의 난에 빗대고 있는데, 龐勛은 근본적으로 南詔의 안남을 함락시키기 위해 차출된 徐州의 군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던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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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黃巢)에 의해 망하였으나, 화의 원인은 계림(桂林)에 있었던 것이다. 『역』의 뜻이 깊기도 하구나!

  • 각주 001)
    당조는 高祖이래 哀帝까지 약 300년간 지속되었는데 漢의 경우에는 前漢 高祖이래 後漢 獻帝까지 약 400년으로 漢이 유지되는 기간이 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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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晉 獻公의 嫡子란 그의 태자인 申生을 말하며 두 공자는 重耳와 夷吾이다. 이들 삼형제는 모두 어머니는 다르다.『史記』卷39 「晉世家」에 따르면 신생의 어머니는 齊 桓公의 딸이며, 중이는 狐氏의 딸이다. 이오의 어머니는 중이의 어머니인 호씨의 동생이다. 그런데 헌공이 즉위 한지 5년째 되는 해(전672), 진은 驪戎을 정벌하고 거기서 驪姬라는 여자를 얻게 되었다. 헌공은 그녀를 총애하였고 마침내 그녀는 奚齊와 悼子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에 여희는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헌공 21년(전656) 그녀는 신생이 제사를 지내고 헌공에게 올린 음식에 독을 타고는 태자가 음식에 독을 넣어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고 헌공에게 참소하였다. 이에 효성이 지극한 신생은 실상을 고하지 않고 新城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가 자살을 하였다. 여희는 중이와 이오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이들은 각각 국외로 달아났다. 그러나 26년(전651) 헌공이 죽자 신생, 중이, 이오를 받들던 사람들이 진의 大夫인 里克, 邳鄭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奚齊는 즉위도 못해 보고, 이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극등은 여희의 둘째 아들인 悼子마저도 죽이고 이오를 맞이하여 즉위시켰다. 반면 중이는 이후에도 망명 생활을 계속했고, 이오가 죽자[시호는 惠公] 비로소 귀국하여 國君이 될 수 있었다. 망명 생활을 시작한 지 무려 20년만의 일로, 그가 바로 五覇의 하나인 晉 文公이다. 즉 본문의 論贊에서 헌공의 사례를 예로 든 것은 헌공이 멀쩡한 적자를 폐하고 첩의 자식을 세우는 바람에 나라가 혼란해졌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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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明皇은 당의 玄宗을 말한다. 당 현종의 시호는 ‘至道大聖大明孝皇帝’인데, 이를 줄여 후세에는 ‘明皇’이라고 하였다. 세 명의 서인은 황태자 瑛, 鄂王 瑤, 光王 琚를 말한다.『舊唐書』卷107 「玄宗諸子傳」에 따르면 황태자 瑛은 현종의 둘째아들로, 그 어머니는 趙麗妃이며 瑤는 皇甫德儀, 琚는 劉才人인데 모두 현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맞이했던 후궁들이다. 영은 개원 3년(715) 정월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현종이 즉위한 후, 武惠妃를 새로 얻어 총애하게 되면서 원래 맞이했던 여인들과의 관계는 소원하게 되었다. 더욱이 무혜비가 壽王 瑁까지 낳게 되면서 그에 대한 총애가 황태자를 압도할 지경이 되었다. 원래 태자와 악왕, 광왕은 궁중의 같은 거처에서 거주하였고, 서로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와 같은 처지를 한탄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빌미로 무혜비 쪽에서는 태자 등이 편을 갈라 자기 母子를 해치고 천자까지 비방을 한다고 참소하니, 현종은 진노하여 이들을 모두 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재상인 中書令 張九齡은 진 헌공이 애첩의 말에 현혹되는 바람에 태자 신생이 억울하게 죽고 나라가 혼란해진 사례를 필두로, 역대 왕조에서 태자를 폐했다가 나라가 위태롭게 된 사례를 열거하며 극력 간하니, 마침내 그 일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장구령이 물러나고 李林甫가 재상이 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는 무혜비의 지원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그녀의 뜻에 영합하였다. 개원 25년(737) 4월 황태자와 악왕 등이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현종은 이림보에게 이 문제의 처결과 관련한 자문을 구하였다. 이림보는 이는 황제의 집안일이지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답변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현종으로 하여금 그의 뜻대로 일을 처리하게 한 것이었다. 결국 궁중에서 곧바로 조서를 선포하여 황태자와 악왕, 광왕을 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죽였다. 그런데 정작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무혜비는 이후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같은 해 11월에 죽었고, 그녀의 죽음으로 수왕 역시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 수왕의 부인이 楊貴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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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9년(868) 7월 桂林을 수비하기 위해 徐州에서 파견된 병력 500여 명이 糧儲判官 龐勛을 都頭로 추대하여 湘潭, 衡山등의 현을 약탈하였으며 마음대로 근무지를 벗어나 본진[徐州]으로 귀환한 것으로 되어 있다.『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9年 夏 6月조에 따르면 원래 남조가 안남을 함락시켰을 때, 서주와 사주에서 병력 2천을 모집하여 구원하게 했고 이 가운데 8백 명을 분리하여 계주를 지키게 하였다. 원래 복무기간을 3년으로 했는데 6년이 되도록 교대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기간이 1년이 더 연장이 되었다. 이에 서주 출신의 軍校들이 糧料判官 방훈을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고, 마음대로 선박을 이용해 북상하여 서주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여러 망명자와 군도들까지 끌여 들여 반란군의 숫자가 크게 불어났으며 마침내 숙주, 서주를 함락시켰다. 이들은 서주를 근거지로 하여 계속 주변의 여러 주현을 공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사타와 토욕혼의 기병까지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민족 출신의 기병부대를 제외하고는 정작 제도에서 모집한 군대는 계속 패전을 거듭하였다. 방훈의 반란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저주, 호주 등을 함락시키고, 함통 10년(869) 7월에는 사주까지 진격하여 이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패하여 그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더욱이 방훈의 본군이 사주에 집결된 틈을 타, 숙주를 지키던 반란군 장수 張玄稔이 항복하여 관군과 함께 서주를 포위, 마침내 근거지 서주가 함락되었다. 이에 방훈은 도망치다가 관군에게 패하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방훈에 의해 점령된 숙주, 서주를 제외하고도 그의 군대에 의해 약탈과 같은 피해를 입은 지역은 揚, 楚, 廬, 壽, 滁, 和, 兗, 海, 沂, 密, 曹, 濮州 등 11주나 되었다. 이들 지역은 당의 河南道, 淮南道를 망라하였다. 즉 방훈의 반란군은 1년이 넘도록 오늘날 江淮지역의 북부 일대를 휩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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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周易』「旅卦」 ‘上九’조의 爻辭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鳥焚其巢.旅人先笑後號咷.喪牛于易.凶”이다. 그 뜻은 ‘새가 그 둥지에 불이 나는 것과 같으니, 나그네는 먼저 웃지만 뒤에는 울부짖는다. 소를 소홀히 하여 잃으니 흉하다’라는 뜻이다. 이 효사를『周易正義』卷6 「旅」 ‘上九’조에 대한 魏晉 王弼과 韓康伯의 「正義」와 唐 孔穎達의 疏를 토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나그네가 높은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그는 처음에는 기뻐하여 웃을 수가 있다. 그러나 객의 처지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나중에는 ‘울부짖는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객을 함께 미워하는 까닭에 자산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소를 잃게 만든다. 즉 소를 잃게 되는 이치가 어떤 위태롭고 힘든 환란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객과 상대하지 않고 그가 위태롭게 되어도 도와주지 않는다. 또한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자산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소를 잃게 만들어도 아무도 이를 알려 주지 않아 끝내 알 수 없다. 끝내 알지 못하니 그로 인한 피해가 엄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흉하다고 한 것이다. 이상『주역정의』의 해석에 따르면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처음에는 즐겁지만 결국 주변의 미움을 받게 된다. 그런대 정작 그 자신은 이 조차도 모르고 있다가 재앙을 당하고 만다고 한 것이다. 새가 높고 위태로운 곳에 둥지를 틀면 밑에서 불이 나도 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불길이 올라오는 것도 모르고 편히 지내다가 화를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새의 처지에 빗대어 자격도 없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을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논찬에서는 이상과 같은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소홀히 함으로 인해 소를 잃는다(喪牛于易)’라고 한 문구 그 자체의 뜻만을 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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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189년 동탁은 何太后의 소생인 少帝 劉辯을 폐하고 靈帝의 다른 아들인 陳留王 協을 獻帝로 세웠다. 이후 董卓은 하태후와 소제를 시해하고 가혹한 정치를 계속하여 반란군이 일어나도록 하였으며, 初平 元年(190) 2月 장안으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천도에 장애가 되는 중신들을 살해하고, 수도 낙양의 宮廟를 파괴하였으며 역대 황제의 능묘까지 도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하여 한 동안 명목상으로나나 조정은 유지되었지만, 이로 인해 漢朝는 조정의 권위가 완전히 무너지고 지방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지방세력이 할거하게 되었다. 본문에서 동탁에 의해 망하게 되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冀州에서 조짐이 나타났다고 한 것은 바로 황건적의 난을 말한 것이다. 中平 元年 2月 鉅鹿의 張角과 동생 張寶가 황건적으로 수괴로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근거지인 鉅鹿은 冀州 소속이다. 당시 한조는 지방 사대부들의 자발적 지원과 관군의 활약에 힘입어 거의 2년 만에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결국 이일로 조정의 통제력이 상실되어, 董卓의 전횡이 초래되었다고 贊者는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贊者는 董卓의 진횡은 黃巢의 난에, 황건의 난은 방훈의 난에 빗대고 있는데, 龐勛은 근본적으로 南詔의 안남을 함락시키기 위해 차출된 徐州의 군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던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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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진헌공(晉獻公), 명황(明皇), 합라봉, 의종(懿宗), 방훈(龐勛), 동탁(董卓), 황소(黃巢)
지명
, 남조(南詔), , , 기주(冀州), , 계림(桂林)
서명
『역』,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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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번호 : jo.k_0017_0222_0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