施浪詔
시랑조(施浪詔)는 그 왕 시망흠(施望欠)이 의저화성(矣苴和城)
주 001에 살았다. 시각피(施各皮)라는 자가 있었는데, 또한 팔조(八詔)의 후예로 석화성(石和城)
주 002
각주 002)
을 점거하고 있었다. 합라봉이 [시각피를] 공격하여 사로잡자, 시망흠이 고립되었다. 그리하여 미나피(咩羅皮)와 연합하여 귀의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귀의가 군대로 위협하여 그 부족을 항복시키자, 시망흠은 그 부족을 이끌고 영창으로 달아났다. [시망흠이] 그 딸 유남(遺南)주 003石和城: 오늘날 雲南 大理市 鳳儀鎭 西郊에 해당한다.『蠻書』卷5 「貝僉」 渠斂趙조에 따르면 거렴조의 서쪽 바위에 석화성이 있는데, 이는 烏蠻의 언어로 ‘비탈진 곳에 위치한 土山(土山坡陀)’이란 뜻이다. 이와 같이 이름을 붙인 것은 실제로 이 성이 비탈진 산의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안에는 나무를 심어 길을 내었고, 이러한 가로수 길이 서로 교차하게 하였다. 성안의 가옥들은 계속 이어져 기와를 맞대고 있고, 도랑과 밭둑은 멀리서도 다 보일 정도로 많았다고 하니, 이는 이 성이 대단히 번성한 곳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각주 003)
을 남조에 바치고 강화를 비니, 귀의가 허락하였다. 시망흠은 난강(蘭江)
주 004을 건너고 죽었다. 동생 망천(望千)이 토번(吐蕃)으로 달아났는데, 토번이 [그를] 세워 조(詔)로 삼아 검천으로 들여보내니, 무리가 수만이었다. 망천이 죽자,주 005아들 천방나전(千旁羅顚)이 즉위하였다. 남조가 검천을 깨뜨리자, 천방나전은 노수의 북쪽으로 달아났다. 삼랑(三浪)이 모두 멸망하여, 오직 천방나전과 의천나식(矣川羅識)의 자손이 토번에 있을 뿐이다.遺南:『蠻書』卷3 「六詔」에 따르면 歸義가 강의 입구에서 군대를 진격시켜 그 부락을 위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施望欠의 군대는 무너졌다. 간신히 가족을 데리고 서쪽 영창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귀의가 또 난창강의 동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가 일단 군대를 움직이면 반드시 영창을 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살 길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계책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遺南이라는 이름을 가진 딸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귀의에게 사자를 보내 유남을 받아달라고 청하니 귀의가 허락하였다. 즉 이상과 같은『만서』의 내용으로 볼 때, 본문의 원문에서 말한 ‘遺南’은 사람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中華書局本『新唐書』의 「南詔傳」 校勘記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遺南:『蠻書』卷3 「六詔」에 따르면 歸義가 강의 입구에서 군대를 진격시켜 그 부락을 위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施望欠의 군대는 무너졌다. 간신히 가족을 데리고 서쪽 영창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귀의가 또 난창강의 동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가 일단 군대를 움직이면 반드시 영창을 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살 길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계책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遺南이라는 이름을 가진 딸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귀의에게 사자를 보내 유남을 받아달라고 청하니 귀의가 허락하였다. 즉 이상과 같은『만서』의 내용으로 볼 때, 본문의 원문에서 말한 ‘遺南’은 사람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中華書局本『新唐書』의 「南詔傳」 校勘記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 각주 004)
- 각주 005)
색인어
- 이름
- 시망흠(施望欠), 시각피(施各皮), 합라봉, 시각피, 시망흠, 미나피(咩羅皮), 귀의, 귀의, 시망흠, 시망흠, 귀의, 시망흠, 망천(望千), 망천, 천방나전(千旁羅顚), 천방나전, 천방나전, 의천나식(矣川羅識)
- 지명
- 의저화성(矣苴和城), 석화성(石和城), 영창, 남조, 난강(蘭江), 토번(吐蕃), 토번, 검천, 남조, 검천, 노수, 토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