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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新唐書 卷222上·中·下 열전 第147上·中·下 남만

중국정사외국전

施浪詔

  • 국가
    시랑조(施浪詔)
시랑조(施浪詔)는 그 왕 시망흠(施望欠)의저화성(矣苴和城) 주 001
각주 001)
矣苴和城: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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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살았다. 시각피(施各皮)라는 자가 있었는데, 또한 팔조(八詔)의 후예로 석화성(石和城) 주 002
각주 002)
石和城: 오늘날 雲南 大理市 鳳儀鎭 西郊에 해당한다.『蠻書』卷5 「貝僉」 渠斂趙조에 따르면 거렴조의 서쪽 바위에 석화성이 있는데, 이는 烏蠻의 언어로 ‘비탈진 곳에 위치한 土山(土山坡陀)’이란 뜻이다. 이와 같이 이름을 붙인 것은 실제로 이 성이 비탈진 산의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안에는 나무를 심어 길을 내었고, 이러한 가로수 길이 서로 교차하게 하였다. 성안의 가옥들은 계속 이어져 기와를 맞대고 있고, 도랑과 밭둑은 멀리서도 다 보일 정도로 많았다고 하니, 이는 이 성이 대단히 번성한 곳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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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점거하고 있었다. 합라봉이 [시각피를] 공격하여 사로잡자, 시망흠이 고립되었다. 그리하여 미나피(咩羅皮)와 연합하여 귀의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귀의가 군대로 위협하여 그 부족을 항복시키자, 시망흠은 그 부족을 이끌고 영창으로 달아났다. [시망흠이] 그 딸 유남(遺南)주 003
각주 003)
遺南:『蠻書』卷3 「六詔」에 따르면 歸義가 강의 입구에서 군대를 진격시켜 그 부락을 위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施望欠의 군대는 무너졌다. 간신히 가족을 데리고 서쪽 영창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귀의가 또 난창강의 동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가 일단 군대를 움직이면 반드시 영창을 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살 길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계책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遺南이라는 이름을 가진 딸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귀의에게 사자를 보내 유남을 받아달라고 청하니 귀의가 허락하였다. 즉 이상과 같은『만서』의 내용으로 볼 때, 본문의 원문에서 말한 ‘遺南’은 사람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中華書局本『新唐書』의 「南詔傳」 校勘記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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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에 바치고 강화를 비니, 귀의가 허락하였다. 시망흠난강(蘭江) 주 004
각주 004)
蘭江:『蠻書』卷3 「六詔」에 따르면 望欠이 마침내 瀾滄江을 건너갔고, 몽사에 죽었다고 하였다. 즉 본문에서 말한 蘭江은 瀾滄江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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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건너고 죽었다. 동생 망천(望千)토번(吐蕃)으로 달아났는데, 토번이 [그를] 세워 조(詔)로 삼아 검천으로 들여보내니, 무리가 수만이었다. 망천이 죽자,주 005
각주 005)
望千의 사후:『蠻書』卷3 「六詔」에 따르면 望千은 千傍을 낳았고, 千傍은 傍羅顚을 낳았다고 하였다. 즉『만서』에서는 망천, 천방, 방라전의 순으로 그 세대를 말했고,『新唐書』에서는 ‘천방’과 ‘방라전’을 합쳐 하나의 인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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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천방나전(千旁羅顚)이 즉위하였다. 남조검천을 깨뜨리자, 천방나전노수의 북쪽으로 달아났다. 삼랑(三浪)이 모두 멸망하여, 오직 천방나전의천나식(矣川羅識)의 자손이 토번에 있을 뿐이다.

  • 각주 001)
    矣苴和城: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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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石和城: 오늘날 雲南 大理市 鳳儀鎭 西郊에 해당한다.『蠻書』卷5 「貝僉」 渠斂趙조에 따르면 거렴조의 서쪽 바위에 석화성이 있는데, 이는 烏蠻의 언어로 ‘비탈진 곳에 위치한 土山(土山坡陀)’이란 뜻이다. 이와 같이 이름을 붙인 것은 실제로 이 성이 비탈진 산의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안에는 나무를 심어 길을 내었고, 이러한 가로수 길이 서로 교차하게 하였다. 성안의 가옥들은 계속 이어져 기와를 맞대고 있고, 도랑과 밭둑은 멀리서도 다 보일 정도로 많았다고 하니, 이는 이 성이 대단히 번성한 곳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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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遺南:『蠻書』卷3 「六詔」에 따르면 歸義가 강의 입구에서 군대를 진격시켜 그 부락을 위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施望欠의 군대는 무너졌다. 간신히 가족을 데리고 서쪽 영창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귀의가 또 난창강의 동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가 일단 군대를 움직이면 반드시 영창을 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살 길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계책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遺南이라는 이름을 가진 딸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귀의에게 사자를 보내 유남을 받아달라고 청하니 귀의가 허락하였다. 즉 이상과 같은『만서』의 내용으로 볼 때, 본문의 원문에서 말한 ‘遺南’은 사람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中華書局本『新唐書』의 「南詔傳」 校勘記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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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蘭江:『蠻書』卷3 「六詔」에 따르면 望欠이 마침내 瀾滄江을 건너갔고, 몽사에 죽었다고 하였다. 즉 본문에서 말한 蘭江은 瀾滄江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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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望千의 사후:『蠻書』卷3 「六詔」에 따르면 望千은 千傍을 낳았고, 千傍은 傍羅顚을 낳았다고 하였다. 즉『만서』에서는 망천, 천방, 방라전의 순으로 그 세대를 말했고,『新唐書』에서는 ‘천방’과 ‘방라전’을 합쳐 하나의 인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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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시망흠(施望欠), 시각피(施各皮), 합라봉, 시각피, 시망흠, 미나피(咩羅皮), 귀의, 귀의, 시망흠, 시망흠, 귀의, 시망흠, 망천(望千), 망천, 천방나전(千旁羅顚), 천방나전, 천방나전, 의천나식(矣川羅識)
지명
의저화성(矣苴和城), 석화성(石和城), 영창, 남조, 난강(蘭江), 토번(吐蕃), 토번, 검천, 남조, 검천, 노수, 토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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施浪詔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