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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추룡의 아들 法이 옹주절도사 신당의 사자를 만남

  • 국가
    남조(南詔)
신당은 막료 서운건(徐雲虔)을 보내 사자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여 [적들의 실정을] 엿보게 하였다.주 001
각주 001)
『資治通鑑』卷254 「唐紀」69 乾符 6年 春 正月조에 따르면 앞서 신당이 건부 5년(878) 12월에 남조에 사신으로 보낸 賈宏 등이 남조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당시 신당은 다리에 병을 앓고 있었는데, 攝巡官 서운건을 불러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길, ‘제가 이미 조정에는 남조에 사신을 들여보냈다고 상주하였는데, 사자들이 연달아 계속하여 죽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그대가 벼슬을 하고나서 나라에 목숨을 바칠 것을 생각해왔으니 이를 위해 사행을 가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다리의 병 때문에 절을 할 수 없는 것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목이 메인채로 눈물을 흘렸다. 이에 서운건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士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법입니다. 明公께서 저를 등용해주셨는데도 그 덕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한스러워 했으니,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마침내 서운건이 사신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후 서운건은 무사히 귀국했고 다시 남조에 한 차례 더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는 이처럼 남조를 오가는 과정에서 수집한 견문을 정리,『南詔錄』3卷을 남겼다.『新唐書』卷58 「藝文」2에서 ‘徐雲虔 南詔錄三卷’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南詔錄』은 현재는 散逸되어 그 佚文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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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부(善闡府)에 이르러,주 002
각주 002)
『資治通鑑』卷254 「唐紀」69 乾符 6年 2月 丙寅에 서운전은 선천성에 당도했다. 여기서 남조의 표신은 그를 대등한 예로 만나보았고, 大使 서운전을 제외한 副使이하는 관리들은 표신에게 절을 하였다. 같은 달 己巳에 표신이 慈雙羽, 楊宗으로 하여금 서운건이 머물고 있는 官에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貴府[영남서도 절도부]에서 보낸 첩에 따르면 표신으로 하여금 稱臣케 하고, 표문을 올려 방물을 바치길 원합니다. 그러나 표신이 이미 사람을 보내어 서천으로부터 당에 들어와 당과 형제가 되던지 아니면 舅甥이 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무릇 형제와 구생의 사이에서는 서한과 폐백만 보낼 뿐이지 어찌 표문과 조공이 있단 말입니까?” 서운건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표신이 이미 아우가 되고 조카가 되려 하는데 표신은 景莊의 아드님이십니다. 景莊에게 아마도 형제는 없을 것이지만, 표신에게 諸父가 되는 인물이 있다면, 표신이 이제 군주가 된 이상 제부들은 모두 稱臣을 해야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아우와 조카의 경우야 어떻겠습니까? 또한 표신의 선조는 大唐의 命을 통해 6詔를 합쳐 통일할 수 있었고, 은덕을 심히 두터이 하였으며, 중간의 소소한 분쟁은 그 책임이 우리의 변방에 있습니다. 이제 표신이 과거의 우호를 회복하고자 하면서 어찌 祖宗의 故事를 어길 수 있단 말입니까? 祖考를 따르는 것이 孝요, 大國을 섬기는 것이 義요, 戰爭을 그치는 것이 仁이요, 名分을 살피는 것이 禮입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훌륭한 덕이니 이를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 서운건의 논의에 따르면 당의 황제는 천하의 군주가 된다. 따라서 아무리 그의 아우나 조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는 그의 신하가 된다. 그러므로 남조가 설령 아우나 조카의 관계를 맺는다해도 남조의 칭신은 합당하다는 것이다. 남조에서는 서운건을 두텁게 예우했고, 그는 선천에서 17일간 머물다 귀국하였다. 표신은 서운건에게 두 통의 문서를 주었는데, 하나는 중서문하성에 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남서도부에 보내는 牒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표문을 올린다거나 조공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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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 수십을 만났는데, 긴 창을 끌고 진홍빛 옷을 입은 소년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소년은 붉은 비단으로 머리를 묶은 채였다. 전객(典客) 가타추(伽陀酋) 손경(孫慶)이 말하기를, “이 분이 표신(驃信)이십니다”라고 하였다. [표신은] 천자의 안부를 묻고 말에서 내려 객에게 읍을 하였다. 패도(佩刀)를 가져다 사자에게 보이게 하고, 직접 좌우에 찬 인끈을 풀어 보여주었다. 이어서 주변을 정리한 뒤에 세 장(丈)쯤 되는 나무판을 일정한 거리에 세워두고, 좌우로 하여금 말을 달리며 활을 쏘도록 명을 내렸다. 한 사람이 쏠 때마다, 법(法)은 말을 몰아 [활을 쏘는 기병을] 좇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수십 발을 쏜 뒤에야 그쳤다. 사자들을 이끌고 막사에 들어갔는데, 동자(童子)들이 [술]병과 사발을 받들었고, 네 명의 여자가 시중을 들며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술을 마셨는데, 밤이 되어서야 끝냈다. 또한 사람을 보내 객(사자)에게 『춘추(春秋)』의 대의를 물었으며, 사자가 돌아가는 것을 배웅하였다.

  • 각주 001)
    『資治通鑑』卷254 「唐紀」69 乾符 6年 春 正月조에 따르면 앞서 신당이 건부 5년(878) 12월에 남조에 사신으로 보낸 賈宏 등이 남조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당시 신당은 다리에 병을 앓고 있었는데, 攝巡官 서운건을 불러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길, ‘제가 이미 조정에는 남조에 사신을 들여보냈다고 상주하였는데, 사자들이 연달아 계속하여 죽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그대가 벼슬을 하고나서 나라에 목숨을 바칠 것을 생각해왔으니 이를 위해 사행을 가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다리의 병 때문에 절을 할 수 없는 것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목이 메인채로 눈물을 흘렸다. 이에 서운건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士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법입니다. 明公께서 저를 등용해주셨는데도 그 덕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한스러워 했으니,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마침내 서운건이 사신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후 서운건은 무사히 귀국했고 다시 남조에 한 차례 더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는 이처럼 남조를 오가는 과정에서 수집한 견문을 정리,『南詔錄』3卷을 남겼다.『新唐書』卷58 「藝文」2에서 ‘徐雲虔 南詔錄三卷’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南詔錄』은 현재는 散逸되어 그 佚文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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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資治通鑑』卷254 「唐紀」69 乾符 6年 2月 丙寅에 서운전은 선천성에 당도했다. 여기서 남조의 표신은 그를 대등한 예로 만나보았고, 大使 서운전을 제외한 副使이하는 관리들은 표신에게 절을 하였다. 같은 달 己巳에 표신이 慈雙羽, 楊宗으로 하여금 서운건이 머물고 있는 官에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貴府[영남서도 절도부]에서 보낸 첩에 따르면 표신으로 하여금 稱臣케 하고, 표문을 올려 방물을 바치길 원합니다. 그러나 표신이 이미 사람을 보내어 서천으로부터 당에 들어와 당과 형제가 되던지 아니면 舅甥이 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무릇 형제와 구생의 사이에서는 서한과 폐백만 보낼 뿐이지 어찌 표문과 조공이 있단 말입니까?” 서운건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표신이 이미 아우가 되고 조카가 되려 하는데 표신은 景莊의 아드님이십니다. 景莊에게 아마도 형제는 없을 것이지만, 표신에게 諸父가 되는 인물이 있다면, 표신이 이제 군주가 된 이상 제부들은 모두 稱臣을 해야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아우와 조카의 경우야 어떻겠습니까? 또한 표신의 선조는 大唐의 命을 통해 6詔를 합쳐 통일할 수 있었고, 은덕을 심히 두터이 하였으며, 중간의 소소한 분쟁은 그 책임이 우리의 변방에 있습니다. 이제 표신이 과거의 우호를 회복하고자 하면서 어찌 祖宗의 故事를 어길 수 있단 말입니까? 祖考를 따르는 것이 孝요, 大國을 섬기는 것이 義요, 戰爭을 그치는 것이 仁이요, 名分을 살피는 것이 禮입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훌륭한 덕이니 이를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 서운건의 논의에 따르면 당의 황제는 천하의 군주가 된다. 따라서 아무리 그의 아우나 조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는 그의 신하가 된다. 그러므로 남조가 설령 아우나 조카의 관계를 맺는다해도 남조의 칭신은 합당하다는 것이다. 남조에서는 서운건을 두텁게 예우했고, 그는 선천에서 17일간 머물다 귀국하였다. 표신은 서운건에게 두 통의 문서를 주었는데, 하나는 중서문하성에 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남서도부에 보내는 牒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표문을 올린다거나 조공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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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신당, 서운건(徐雲虔), 손경(孫慶), 표신(驃信), 법(法)
지명
선천부(善闡府)
서명
『춘추(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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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룡의 아들 法이 옹주절도사 신당의 사자를 만남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