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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남조가 다시 蜀에 침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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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南詔)
[함통(咸通)] 14년에 탄작이 다시 에 침입하였다.주 001
각주 001)
『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4年 5月 丁亥조에 따르면 남조가 서천과 검남을 침략하였는데 검남경략사인 秦匡謀는 성을 버리고 荊南으로 도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함통 14년 남조의 서천 침입이라고 하면 바로 이 사건을 제외하고는 본문의 이하에서 언급된 대도하 전투는 확인되지 않는다. 남조군과 당군의 대도하 전투는 함통 14년이 아닌 乾符 元年(874) 11월, 12월의 일이다. 또한『新唐書』와『舊唐書』의 경우, 함통 14년에 남조가 서천을 침략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남조가 대도하 전투를 벌인 후, 회군하는 와중에 진광모를 공격하여 패주시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의 선후와 시점의 기록에 있어 착오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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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연결하여 대도하(大度河)를 건넜는데, 자사 황경복(黃景復)이 이를 공격하여 물리쳤다. [그들] 무리가 대도하를 따라 남하하여, 밤에 상류를 뗏목으로 건넌 군대와 함께 물가의 여러 둔영을 협공하니, 경복이 패주하여 여주(黎州)로 돌아 왔다. 만이 뒤를 밟아 추격하다가 오히려 경복에게 패하였다.주 002
각주 002)
『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874) 11月조에 따르면 남조가 서천을 침략하여 부교를 만든 후 강을 건넌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防河都知兵馬使, 黎州刺史인 黃景復은 남조군이 반쯤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이를 공격하여 남조군을 패주시키고 그 다리를 끊었다. 그러자 남조군은 中軍을 동원하여 旗幟를 많이 벌여 놓고, 당군의 전면을 담당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별도의 군대를 둘로 나눈 후, 대치하고 있는 강에서 20리 정도 되는 상류와 하류의 지점으로 이들을 몰래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밤중에 부교를 만들어 아침이 될 때에는 전군이 강을 건넜다. 이후 당군의 여러 성책을 습격하고 앞서 전면을 담당하게 한 중군과 함께 황경복의 군대를 협공하였다. 황경복이 힘써 싸우기를 3일간이나 하였다. 그가 겉으로 패한 채 달아나니 남조군이 정예군을 모두 동원하여 그를 추격하였다. 경복은 3중으로 매복을 설치해 두었는데, 남조군이 매복한 지점의 3분의 2가량 들어오자 복병을 내보내 이를 공격하니 남조군은 대패하였고 2천여 명을 죽였다. 당군이 이를 추격하여 대도하의 남안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후 대도하를 사이에 두고 남조군과 당군의 대치가 계속되었는데 당조의 원군은 도착하지 않고 남조의 병력은 더욱더 증강되어 결국 황경복은 지탱하지 못하고 그 군대가 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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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만이 [황경복을] 뒤쫓아 오다가 되돌아가 대도하를 공격하였다. [만(蠻)이] 기(旗)를 누이고 북소리를 멈추며 청하여 말하기를, “탄작이 천자에게 글을 올려 억울한 일을 아뢰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둔영의 병사들이 이를 믿고 싸우지 않았다. 다리가 완성되어 [남쪽에 있던 만이 대도하(大度河)를] 건너와, 여주(黎州)가 함락되었으며. [만이] 마침내 아주(雅州)를 공격하여 정변군(定邊軍)을 치니, 사졸들이 붕궤되어 공주(邛州)로 들어갔다.주 003
각주 003)
『舊唐書』卷19下 「僖宗紀」에 따르면 乾符 원년(874) 12월 이해 겨울 南詔蠻이 촉을 침략했다고 하였으며,『新唐書』卷9 「僖宗紀」에 따르면 건부 원년 12월 雲南蠻이 黎州와 雅州를 침략했다고 하였다. 함통 11년(870) 이래『신구당서』에서 남조의 서천 침입이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바로 이상에서 말한 건부 원년(874) 12월이다.『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 12月조에 따르면 남조가 황경복을 패주시킨 승세를 타고 여주를 함락시켰으며 공래관으로 진입, 아주를 공격하였다. 대도하에게 패배한 군졸들은 달아나 공주로 들어오니 성도에서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대대적으로 수비를 갖추어 추룡의 침입때보다도 방어시설을 더욱 엄중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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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으로] 성도가 크게 진동하여, 사람들은 도망하여 옥루관(玉壘關) 주 004
각주 004)
玉壘關:『太平寰宇記』卷73 「劒南西道」2 永康軍조에 따르면 導江縣에는 玉壘山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導江縣조에서도 玉壘山이 있는데 현의 서북 29리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즉 옥루관은 바로 이 옥루산에 위치한 관문을 말한 것으로, 오늘날 사천 都江堰市 玉壘山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 12월조에서도 백성들이 다투어 성도성으로 들어갔고, 혹자는 북쪽의 다른 州로 달아났다고 하였는데 옥루산은『元和郡縣圖志』에 따르면 彭州 소속으로 팽주는 성도의 북쪽에 위치한다. 따라서『통감』에서 말한 북쪽의 다른 州는 바로 이 옥루관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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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들어갔고 병사들은 성벽으로 올라갔다. 탄작이 사자 왕보성(王保城) 등 40인을 보내 표신(驃信)의 서한을 가지고 가서 절도사 우총(牛叢) 주 005
각주 005)
牛叢:『新唐書』卷174 「牛僧孺傳」에 부기된 「牛叢傳」에 따르면, 진사출신으로 당 후기 牛李黨爭의 한 축을 담당했던 우승유의 아들이다. 우총은 선종대에는 간관을 맡았었고 함통 말에 검남서천절도사가 되었으며 바로 이때 남조군의 침입을 겪었다. 이후 황소의 난이 발발하여 희종이 촉으로 피난했을 때는 太僕卿에 제수되었으며 환도이후에는 이부상서가 되었다. 李嗣襄의 난 때, 그는 장안을 떠나 太原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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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전하였는데, 길을 빌려 입조하고자 하니, 촉왕의 옛 궁궐에서 쉬게 해달라는 것이었다.주 006
각주 006)
『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 12月조에는 南詔가 탄작을 시켜 우총에게 서한을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탄작이 우총에게 서한을 보냈다고 한 본문과는 조금 다르다. ‘감히 침략을 하기 위함이 아니오라 입조하여 천자를 뵙고 그 면전에서 지난 수십 년간 참소하는 사람에 의해 이간질을 당한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 하고자 함입니다. 진실로 성은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면 응당 尙書와 함께 돌아가 영원토록 우호를 돈독히 할 것입니다. 이제 貴府[成都府]로부터 길을 빌리는 것은, 蜀王의 청사를 빌려 며칠 간 머문 후에 즉시 장안으로 올라가고자 해서입니다.’ 이에 따르면 우총은 원래 나약하여 이 서한을 받고 진짜 길을 빌려주고자 하였으나 양경복이 만류하여 그만 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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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총이 허락하려 하자, 양경(楊慶) 주 007
각주 007)
楊慶: 中華書局本 校勘記에 따르면,『資治通鑑』卷252에서는 ‘楊慶復’으로 되어 있고, 또 「南詔傳」 본문에서도 ‘故瀘州刺史楊慶復’이라는 문구가 있으므로, 본문의 ‘양경’은 ‘楊慶復’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교감기에서 말한『통감』은 바로『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 12月조에서 나온 ‘楊慶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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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하여 말하기를, “만들은 신의가 없으니, 저들이 예를 낮추고 말을 달콤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속이려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그 사자를 베고, 두 사람만 남겨 서찰을 돌려보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우총이 [만의 사자를] 책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왕의 조상은 육조(六詔) 가운데 가장 작은 이(夷)였다. 천자께서 그 근실함을 기억하시고는 육조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주고, 성도에 부용(附庸)이 되게 하여 ‘국(國)’의 명칭을 붙여 주었다. [게다가] 자제가 태학에 입학하는 것을 허락하여 중화의 풍속을 익히게 하였다. [그런데도] 오늘날 왕명을 스스로 저버렸다. 참새와 뱀, 그리고 개와 말조차도 은덕에 보답할 줄 아는데, 왕은 벌레와 새만도 못하지 아니한가? 근자에 성도가 방비를 미처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너희들로 하여금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너희는] 비교(毗橋), 타강(沱江)에서 패하고, 성 가까이 시체를 쌓아 둔 지 4년도 되지 않아 다시 왔다. 지금 나에게는 10만의 무리가 있고, 그 절반은 놔두고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상태이다. 1,000인으로 군(軍)을 삼고, 열 개의 군으로 부(部)를 삼아, 뛰어난 장수들이 그것을 맡고 있다. 대체로 한 부마다 강노(强弩)를 쓰는 병사가 200 있는데, 박부(鎛斧)가 그것을 보좌하며, 또 경궁(勁弓)을 쓰는 병사가 200이 있고, 월은도(越銀刀)부대가 보좌한다.주 008
각주 008)
强弩, 鎛斧, 勁弓, 越銀刀: 弩, 弓 모두 화살을 쏘는 무기인데 弩의 경우 발사를 보조하기 위한 별도의 장치가 달린 쇠뇌를 말하며, 弓은 이러한 장치가 없는 순수한 활이다. 따라서 强弩는 쇠뇌의 일종이고 勁弓은 활의 일종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鎛斧, 越銀刀는 모두 미상이다. 다만 鎛斧의 ‘斧’는 도끼를 뜻하고 越銀刀의 ‘刀’는 한 쪽으로만 날이 있는 칼을 말하니 각 부대가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무기의 명칭을 가지고 해당 부대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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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과(長戈)를 쓰는 군사가 2백 있는데 철도(掇刀)가 보좌하며, 또 단모(短矛)를 쓰는 병사가 200 있는데, 연추(連鎚)[부대가] 이를 보좌한다.주 009
각주 009)
長戈, 短矛, 連鎚: 長戈는 긴 창을 말하며, 短矛는 짧은 창을 말한다. ‘連鎚’는 ‘流星錘’를 말하니 이는 쇠로 만든 두 개의 추를 끈으로 연결한 투척용 무기이다. 본문에서 말한 ‘連鎚'는 바로 이 유성추를 특기로 하는 부대를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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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군대를 4면(面)으로 나누었는데, 각 면마다 철기(鐵騎)가 5백씩 있다. [그리고 우마를 먹일] 꼴과 땔나무, 미속(米粟), 우마(牛馬), 개, 돼지를 모두 거두어 들여 들판을 비우고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또한 양측의 기병대를 가지고 너희의 땔나무와 채소를 빼앗을 수 있다. 나는 해가 뜨면 1부의 병사를 내보내 너희와 싸울 것인데, 부를 2교대로 나누어 해가 중천에 뜰 때 교대할 것이다. 또 해가 지면, 또 한 부가 이르러 밤새 진칠 것이다. 달이 밝으면 싸우고 어두우면 쉴 것이며, 한밤이 되면 교대할 것이다. 무릇 나의 병사들은 5일에 한 번씩 적을 죽일 것인데, 너희들은 밤낮으로 싸워야 할 것이니, 열흘도 못되어 정신이 흐릿하게 되어 장차 죽게 될 것이다. 주현(州縣)에서는 갑옷을 수선하고 무기를 갈아, 앞뒤 양쪽으로 서로 따르게 할 것이다. 모두 만에게 원한이 깊으니, 비록 여자라도 능히 입을 다물고 이를 갈며 적을 칠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강건한 장부나 열사는 오죽하겠는가? 너희 조상이 일찍이 [서번(西蕃)]에 대해 노비가 되어 섬긴 적이 있으니 너희의 원수가 된다. 지금 도리어 그들에게 신하노릇을 하니, 이 얼마나 원수와 은혜가 어긋난 것인가? 촉왕(蜀王)의 옛 궁궐은 선대의 소중한 궁궐이니, 변방의 만이가 머물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만약 머문다면] 신(臣)이 노하고 사람이 성을 내어 표신(驃信)은 장차 죽을 것이다!” 우총(牛叢)은 오히려 근교의 민가와 누각을 불태우고 군대를 엄중하게 단속하여 굳게 지키는 계책을 썼다. 탄작이 신진(新津)에 이르렀다가 군대를 돌려 검중(黔中)을 침략하였다. 경략사(經略使) 진광모(秦匡謀)는 두려워 형남(荊南)으로 달아났다.주 010
각주 010)
『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4年(873) 5月 丁亥조에 따르면 남조가 서천과 검남을 침략하였는데 검남경략사인 秦匡謀는 성을 버리고 荊南으로 도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당시 형남절도사인 杜悰이 그를 체포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6月 乙未, 칙서를 내려 진광모를 참수하게 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그 친족으로 연좌에 걸리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광모의 패주를 제외한 다른 전투나, 남조의 침입시점은 모두 건부 원년의 일이다. 이와 같은 시점의 착오에 대해『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 12月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錦里耆舊傳』에 따르면, 함통 14년, 11월 15일에 운남만이 대도하를 재침하니 황경복이 이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했으며, 11월 25일 다시 [운남만이] 대도하를 공격했으며, 30일에 만군이 승세를 타고 여주를 공격했다고 하였다. 12월 28일 만이 왔으나 다만 新津까지만 오고, 蜀州의 경계를 전후로 하여 좌우로 물러나는 바람에 끝내 城 아래에는 당도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함통 14년 남조가 서천을 침략한 일에 대해『舊唐書』「本紀」, 同書 「南詔傳」,『唐年補錄』,『唐錄備闕』,『續寶運圖』에는 모두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오직『금리기구전』의 기록만이 아주 상세한데,『新唐書』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취해 「南詔傳」을 지은 것이다.” 즉『고이』에 따르면『新唐書』「南詔傳」의 이같은 착오는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금리기구전』의 기사에만 의거했기 때문으로 지적하였다. 그러나『고이』에서 언급한『당연보록』,『당록비궐』,『속보운도』같은 책은 이미 망실되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또한『고이』에서는 남조의 劒南 침입과 이에 따른 진광모의 패전을 함통 14년의 일로 보고,『통감』에 수록한 이유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없다. 다만 본문에서 진광모가 패주한 후, 마침 희종이 즉위(함통 14년 7월)했다고 하였으니『통감』의 기록처럼 진광모의 패전이 함통 14년의 일인 것임은 분명하다. 아마도『資治通鑑』에서도『新唐書』「南詔傳」의 이같은 기록에 근거하여 함통 14년 조에 진광모의 패전을 수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新唐書』「南詔傳」에서는 진광모의 패주에 뒤이어 금오장군 한중을 보내 사신으로 가게 했다 했고, 남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주를 공격했으며, 경복이 이를 쳐서 패주시켰다고 하였다. 그런데 남조의 여주 공격과 경복의 격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내용인데 이제 그 말미에서 똑같은 사실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사건의 전개에 대해『新唐書』찬술과정에서 심각하게 착오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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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희종(僖宗)이 즉위하여 금오장군(金吾將軍) 한중(韓重)에게 절(節)을 가지고 사자로 가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조가] 여주(黎州)를 공격하였는데, 경복(景復)이 이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건부(乾符) 원년(元年)(874) [만(蠻)은] 수주(雟州)아주(雅州) 사이를 약탈하다가, 여주(黎州)를 깨뜨리고, 공래관(邛崍關)으로 들어와 성도를 약탈하였다. 성도성에서 3일간 문을 걸어 잠그자, 만들은 마침내 가버렸다.

  • 각주 001)
    『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4年 5月 丁亥조에 따르면 남조가 서천과 검남을 침략하였는데 검남경략사인 秦匡謀는 성을 버리고 荊南으로 도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함통 14년 남조의 서천 침입이라고 하면 바로 이 사건을 제외하고는 본문의 이하에서 언급된 대도하 전투는 확인되지 않는다. 남조군과 당군의 대도하 전투는 함통 14년이 아닌 乾符 元年(874) 11월, 12월의 일이다. 또한『新唐書』와『舊唐書』의 경우, 함통 14년에 남조가 서천을 침략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남조가 대도하 전투를 벌인 후, 회군하는 와중에 진광모를 공격하여 패주시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의 선후와 시점의 기록에 있어 착오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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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874) 11月조에 따르면 남조가 서천을 침략하여 부교를 만든 후 강을 건넌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防河都知兵馬使, 黎州刺史인 黃景復은 남조군이 반쯤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이를 공격하여 남조군을 패주시키고 그 다리를 끊었다. 그러자 남조군은 中軍을 동원하여 旗幟를 많이 벌여 놓고, 당군의 전면을 담당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별도의 군대를 둘로 나눈 후, 대치하고 있는 강에서 20리 정도 되는 상류와 하류의 지점으로 이들을 몰래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밤중에 부교를 만들어 아침이 될 때에는 전군이 강을 건넜다. 이후 당군의 여러 성책을 습격하고 앞서 전면을 담당하게 한 중군과 함께 황경복의 군대를 협공하였다. 황경복이 힘써 싸우기를 3일간이나 하였다. 그가 겉으로 패한 채 달아나니 남조군이 정예군을 모두 동원하여 그를 추격하였다. 경복은 3중으로 매복을 설치해 두었는데, 남조군이 매복한 지점의 3분의 2가량 들어오자 복병을 내보내 이를 공격하니 남조군은 대패하였고 2천여 명을 죽였다. 당군이 이를 추격하여 대도하의 남안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후 대도하를 사이에 두고 남조군과 당군의 대치가 계속되었는데 당조의 원군은 도착하지 않고 남조의 병력은 더욱더 증강되어 결국 황경복은 지탱하지 못하고 그 군대가 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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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舊唐書』卷19下 「僖宗紀」에 따르면 乾符 원년(874) 12월 이해 겨울 南詔蠻이 촉을 침략했다고 하였으며,『新唐書』卷9 「僖宗紀」에 따르면 건부 원년 12월 雲南蠻이 黎州와 雅州를 침략했다고 하였다. 함통 11년(870) 이래『신구당서』에서 남조의 서천 침입이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바로 이상에서 말한 건부 원년(874) 12월이다.『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 12月조에 따르면 남조가 황경복을 패주시킨 승세를 타고 여주를 함락시켰으며 공래관으로 진입, 아주를 공격하였다. 대도하에게 패배한 군졸들은 달아나 공주로 들어오니 성도에서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대대적으로 수비를 갖추어 추룡의 침입때보다도 방어시설을 더욱 엄중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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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玉壘關:『太平寰宇記』卷73 「劒南西道」2 永康軍조에 따르면 導江縣에는 玉壘山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導江縣조에서도 玉壘山이 있는데 현의 서북 29리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즉 옥루관은 바로 이 옥루산에 위치한 관문을 말한 것으로, 오늘날 사천 都江堰市 玉壘山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 12월조에서도 백성들이 다투어 성도성으로 들어갔고, 혹자는 북쪽의 다른 州로 달아났다고 하였는데 옥루산은『元和郡縣圖志』에 따르면 彭州 소속으로 팽주는 성도의 북쪽에 위치한다. 따라서『통감』에서 말한 북쪽의 다른 州는 바로 이 옥루관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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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牛叢:『新唐書』卷174 「牛僧孺傳」에 부기된 「牛叢傳」에 따르면, 진사출신으로 당 후기 牛李黨爭의 한 축을 담당했던 우승유의 아들이다. 우총은 선종대에는 간관을 맡았었고 함통 말에 검남서천절도사가 되었으며 바로 이때 남조군의 침입을 겪었다. 이후 황소의 난이 발발하여 희종이 촉으로 피난했을 때는 太僕卿에 제수되었으며 환도이후에는 이부상서가 되었다. 李嗣襄의 난 때, 그는 장안을 떠나 太原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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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 12月조에는 南詔가 탄작을 시켜 우총에게 서한을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탄작이 우총에게 서한을 보냈다고 한 본문과는 조금 다르다. ‘감히 침략을 하기 위함이 아니오라 입조하여 천자를 뵙고 그 면전에서 지난 수십 년간 참소하는 사람에 의해 이간질을 당한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 하고자 함입니다. 진실로 성은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면 응당 尙書와 함께 돌아가 영원토록 우호를 돈독히 할 것입니다. 이제 貴府[成都府]로부터 길을 빌리는 것은, 蜀王의 청사를 빌려 며칠 간 머문 후에 즉시 장안으로 올라가고자 해서입니다.’ 이에 따르면 우총은 원래 나약하여 이 서한을 받고 진짜 길을 빌려주고자 하였으나 양경복이 만류하여 그만 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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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楊慶: 中華書局本 校勘記에 따르면,『資治通鑑』卷252에서는 ‘楊慶復’으로 되어 있고, 또 「南詔傳」 본문에서도 ‘故瀘州刺史楊慶復’이라는 문구가 있으므로, 본문의 ‘양경’은 ‘楊慶復’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교감기에서 말한『통감』은 바로『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 12月조에서 나온 ‘楊慶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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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强弩, 鎛斧, 勁弓, 越銀刀: 弩, 弓 모두 화살을 쏘는 무기인데 弩의 경우 발사를 보조하기 위한 별도의 장치가 달린 쇠뇌를 말하며, 弓은 이러한 장치가 없는 순수한 활이다. 따라서 强弩는 쇠뇌의 일종이고 勁弓은 활의 일종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鎛斧, 越銀刀는 모두 미상이다. 다만 鎛斧의 ‘斧’는 도끼를 뜻하고 越銀刀의 ‘刀’는 한 쪽으로만 날이 있는 칼을 말하니 각 부대가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무기의 명칭을 가지고 해당 부대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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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長戈, 短矛, 連鎚: 長戈는 긴 창을 말하며, 短矛는 짧은 창을 말한다. ‘連鎚’는 ‘流星錘’를 말하니 이는 쇠로 만든 두 개의 추를 끈으로 연결한 투척용 무기이다. 본문에서 말한 ‘連鎚'는 바로 이 유성추를 특기로 하는 부대를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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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4年(873) 5月 丁亥조에 따르면 남조가 서천과 검남을 침략하였는데 검남경략사인 秦匡謀는 성을 버리고 荊南으로 도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당시 형남절도사인 杜悰이 그를 체포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6月 乙未, 칙서를 내려 진광모를 참수하게 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그 친족으로 연좌에 걸리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광모의 패주를 제외한 다른 전투나, 남조의 침입시점은 모두 건부 원년의 일이다. 이와 같은 시점의 착오에 대해『資治通鑑』卷252 「唐紀」68 乾符 元年 12月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錦里耆舊傳』에 따르면, 함통 14년, 11월 15일에 운남만이 대도하를 재침하니 황경복이 이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했으며, 11월 25일 다시 [운남만이] 대도하를 공격했으며, 30일에 만군이 승세를 타고 여주를 공격했다고 하였다. 12월 28일 만이 왔으나 다만 新津까지만 오고, 蜀州의 경계를 전후로 하여 좌우로 물러나는 바람에 끝내 城 아래에는 당도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함통 14년 남조가 서천을 침략한 일에 대해『舊唐書』「本紀」, 同書 「南詔傳」,『唐年補錄』,『唐錄備闕』,『續寶運圖』에는 모두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오직『금리기구전』의 기록만이 아주 상세한데,『新唐書』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취해 「南詔傳」을 지은 것이다.” 즉『고이』에 따르면『新唐書』「南詔傳」의 이같은 착오는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금리기구전』의 기사에만 의거했기 때문으로 지적하였다. 그러나『고이』에서 언급한『당연보록』,『당록비궐』,『속보운도』같은 책은 이미 망실되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또한『고이』에서는 남조의 劒南 침입과 이에 따른 진광모의 패전을 함통 14년의 일로 보고,『통감』에 수록한 이유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없다. 다만 본문에서 진광모가 패주한 후, 마침 희종이 즉위(함통 14년 7월)했다고 하였으니『통감』의 기록처럼 진광모의 패전이 함통 14년의 일인 것임은 분명하다. 아마도『資治通鑑』에서도『新唐書』「南詔傳」의 이같은 기록에 근거하여 함통 14년 조에 진광모의 패전을 수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新唐書』「南詔傳」에서는 진광모의 패주에 뒤이어 금오장군 한중을 보내 사신으로 가게 했다 했고, 남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주를 공격했으며, 경복이 이를 쳐서 패주시켰다고 하였다. 그런데 남조의 여주 공격과 경복의 격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내용인데 이제 그 말미에서 똑같은 사실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사건의 전개에 대해『新唐書』찬술과정에서 심각하게 착오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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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황경복(黃景復), 경복, 경복, 황경복, 왕보성(王保城), 표신(驃信), 우총(牛叢), 촉왕, 우총, 양경(楊慶), 우총, 촉왕(蜀王), 표신(驃信), 우총(牛叢), 진광모(秦匡謀), 희종(僖宗), 한중(韓重), 경복(景復)
지명
, 대도하(大度河), 대도하, 여주(黎州), 대도하, 대도하(大度河), 여주, 아주(雅州), 공주(邛州), 성도, 옥루관(玉壘關), 성도, 성도, 비교(毗橋), 타강(沱江), 신진(新津), 검중(黔中), 형남(荊南), 남조, 여주(黎州), 수주(雟州), 아주(雅州), 여주(黎州), 공래관(邛崍關),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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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가 다시 蜀에 침입함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