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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에 해자와 방어용 건물 등을 만드니 남조가 이를 두려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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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南詔)
안경복이 [성도에] 이르자, 사람들은 동생 경사(慶師)가 만에게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결심이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안경복은] 성도(成都)가 [적에게] 떨어지지 않게 되자, 자신의 공이 가볍다고 생각하여 광계(廣溪) 주 001
각주 001)
廣溪: 中華書局本『新唐書』「南詔傳」中에 대한 校勘記에 따르면『資治通鑑』卷252에서는 ‘勒歸漢州’로 되어 있으며, 당의 漢州는 漢代 廣漢郡 지역에 해당한다고 한『元和郡縣圖志』卷31의 기사를 지적하였다. 또한『新唐書』「南詔傳」上에서 ‘小不勝卽保廣漢’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바로『資治通鑑』과 바로 합치하니 ‘溪’는 ‘漢’이 訛傳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즉 교감기에서는 당대 한주가 한의 광한군에 해당하여 광한을 한주의 별칭으로 볼 수 있으니, 본문의 ‘廣溪’는 실은 ‘廣漢’의 와전이며 이는『資治通鑑』에 의거 漢州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추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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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 한 채, 남은 적을 내버려두니, 사람마다 분하여 이를 갈았다.주 002
각주 002)
안경복의 소극적 대응:『資治通鑑』卷255 「唐紀」68 咸通 11年 2月 庚子조에 따르면 처음 安慶復이 성도를 구원하러 왔을 때, 宋威에게는 綿州와 漢州에 주둔하게 하여 후속군으로 삼았었다. 그런데 송위가 승세를 타고 먼저 성도성 아래에 당도했고, 남조군을 격퇴하는 공적을 많이 쌓게 되었다. 안경복은 이를 질투했기 때문에 송위의 병권을 빼앗고 군대를 지휘하여 한주로 돌아갔다. 원래는 송위의 군대와 성도성 안의 군대가 합류하여 남조군을 공격하고자 했는데 안경복의 조치로 인해 이러한 계획이 무산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추격을 받을 염려가 없어진 남조군은 사흘의 시간을 벌게 되어 그동안 다리를 만들고 후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廣溪’는 실은 ‘漢州’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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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성도에는 해자와 참호가 없었다. 이에 노탐(盧耽)으로 하여금 해자를 준설하게 하였는데, 넓이가 3장(丈)주 003
각주 003)
3丈: 10尺이 1丈이니 그 면적이 30尺의 규모가 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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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또 성벽의 담장에는 방어용 건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좌우에 둔영(屯營)을 늘어놓았는데, 영(營)은 5개의 구(區)로 나누어 구마다 50인의 병졸을 배치하였다. 해자를 끼고 쥐엄나무를 심었는데, 3년이 지나자 둘레가 한 아름이나 되었다. 또한 큰 투석기[大旝]주 004
각주 004)
大旝:『說文解字』旝조에 따르면 旝란 커다란 나무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돌을 설치하고 틀을 이용하여 발사하는데 돌을 던져 적중을 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旝는 투석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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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연발식 쇠뇌[連弩]도 구비하였다.주 005
각주 005)
『資治通鑑』卷255 「唐紀」68 咸通 11年 2月 庚子조에 따르면 안경복이 蜀의 백성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성도성에 壅門城을 만들고 참호를 파서 물을 채우게 하였으며 鹿角을 심고, 營과 鋪를 나누어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胡三省의 주석에 따르면 옹문은 성문밖에 별도로 담장을 쌓아 성문을 가리는 방어시설이며 녹각은 나무를 베어 만든 것으로 성밖에 이를 심어두는데, 이는 적들이 성을 들이 받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營은 성을 둘러싼 목책에 군사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든 가옥이며, 鋪는 성위에 설치한 가옥으로,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여기에 거주하면서 적을 감시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성도성에 방어설비를 구비하도록 노탁에게 지시를 내린 것은 안경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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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남조가 이를 두려워하였다.

  • 각주 001)
    廣溪: 中華書局本『新唐書』「南詔傳」中에 대한 校勘記에 따르면『資治通鑑』卷252에서는 ‘勒歸漢州’로 되어 있으며, 당의 漢州는 漢代 廣漢郡 지역에 해당한다고 한『元和郡縣圖志』卷31의 기사를 지적하였다. 또한『新唐書』「南詔傳」上에서 ‘小不勝卽保廣漢’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바로『資治通鑑』과 바로 합치하니 ‘溪’는 ‘漢’이 訛傳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즉 교감기에서는 당대 한주가 한의 광한군에 해당하여 광한을 한주의 별칭으로 볼 수 있으니, 본문의 ‘廣溪’는 실은 ‘廣漢’의 와전이며 이는『資治通鑑』에 의거 漢州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추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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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안경복의 소극적 대응:『資治通鑑』卷255 「唐紀」68 咸通 11年 2月 庚子조에 따르면 처음 安慶復이 성도를 구원하러 왔을 때, 宋威에게는 綿州와 漢州에 주둔하게 하여 후속군으로 삼았었다. 그런데 송위가 승세를 타고 먼저 성도성 아래에 당도했고, 남조군을 격퇴하는 공적을 많이 쌓게 되었다. 안경복은 이를 질투했기 때문에 송위의 병권을 빼앗고 군대를 지휘하여 한주로 돌아갔다. 원래는 송위의 군대와 성도성 안의 군대가 합류하여 남조군을 공격하고자 했는데 안경복의 조치로 인해 이러한 계획이 무산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추격을 받을 염려가 없어진 남조군은 사흘의 시간을 벌게 되어 그동안 다리를 만들고 후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廣溪’는 실은 ‘漢州’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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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3丈: 10尺이 1丈이니 그 면적이 30尺의 규모가 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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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大旝:『說文解字』旝조에 따르면 旝란 커다란 나무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돌을 설치하고 틀을 이용하여 발사하는데 돌을 던져 적중을 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旝는 투석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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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資治通鑑』卷255 「唐紀」68 咸通 11年 2月 庚子조에 따르면 안경복이 蜀의 백성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성도성에 壅門城을 만들고 참호를 파서 물을 채우게 하였으며 鹿角을 심고, 營과 鋪를 나누어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胡三省의 주석에 따르면 옹문은 성문밖에 별도로 담장을 쌓아 성문을 가리는 방어시설이며 녹각은 나무를 베어 만든 것으로 성밖에 이를 심어두는데, 이는 적들이 성을 들이 받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營은 성을 둘러싼 목책에 군사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든 가옥이며, 鋪는 성위에 설치한 가옥으로,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여기에 거주하면서 적을 감시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성도성에 방어설비를 구비하도록 노탁에게 지시를 내린 것은 안경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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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안경복, 경사(慶師), 안경복, 노탐(盧耽)
지명
성도(成都), 광계(廣溪), 성도, 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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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에 해자와 방어용 건물 등을 만드니 남조가 이를 두려워 함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