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의 추룡이 물러남
이때 황제가 동천절도사(東川節度使) 안경복(顔慶復)을 대도하제치(大渡河制置) 검남절도사(劍南應接使)로 삼아 보냈다.주 001
각주 001)
원병이 신도(新都)
주 002에 이르렀고, 박야(博野)
주 003의 장수 증원유(曾元裕)가 만의 군대를 깨뜨리고 2천 급을 베었다. 남조의 기병 수만이 새벽에 관군을 압박하고 활개를 쳤는데, 대장 송위(宋威)가 충무병(忠武兵)을 이끌고 싸워 5천을 참수하고 말 4백 마리를 노획하였다. 남조가 물러나 성숙산(星宿山)
주 004에 주둔하자, 송위가 진격을 하여 타강(沱江)
주 005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추룡이 추망(酋望)을 지상이 있는 곳에 보내 강화를 요청하자, 지상이 말하기를, “지금 늘어선 성들이 굳게 지키고, 북에서 온 군대가 전공을 바라고 있으니 [그대는] 그대의 군주에게 돌아가 스스로 살 방도를 살펴보라고 하라”라고 하였다.주 006
노탐이 정예장수들을 보내니, 만의 방벽에 이르러 공격용 도구들을 불사르고 2천인을 죽였으나, 남조에게 뒤를 밟혀서 퇴각하다가 궤멸하였다. 만이 봉상(鳳翔)과 산남(山南)의 군대가 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비교(毗橋)에서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타강(沱江)쪽으로 가다가 복병의 공격을 받아 또 패하였다. 성안에서 돌장(突將)을 내보내, 밤에 만의 진영에 불을 놓게 하니, 추룡과 탄작이 몸소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 3일 뒤에 조정의 군사 승천량(昇遷梁)을 탈취하니 만이 크게 패하였다.주 007『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10년(869) 12월, 조정에서는 안경복을 大渡河制置, 劍南應接使등으로 임명하고 宋威을 行營都知兵馬使로 삼아 병력 수만을 이끌고 서천에 원래 주둔하고 있던 忠武, 武寧軍과 합세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11년 2월 甲午 劍南東川節度使顏 안경복이 雲南蠻과 신도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1年 2月조에 따르면 조정에서는 안경복을 동천절도사로 삼아 촉의 諸軍을 구원하게 하고 모든 군대는 그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癸巳에 안경복은 新都에 도착했고 甲午에 남조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안경복의 임명은 함통 10년 12월에 이루어졌고 그가 서천에 실제로 파견되어 전투를 수행한 것은 함통 11년(870) 2월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각주 007)
[만이] 밤을 틈타 정(亭)과 역(驛)에 불을 놓고 불길이 향하는 곳을 따라 조정의 군사에게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댔다. 송위는 군대를 나누어 가도록 하고 화살이 발사되는 곳을 향하여 집중 사격하게 하였다. 양군이 결판을 내지 못하자, 각자 진영을 해산하고 가버렸다. 추룡이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밤에 진영을 거두어 남쪽으로 달아났다. 쌍류(雙流)에 이르렀는데, 강에 다리가 없었다.주 008대책이 없게 되어 장차 물에 뛰어 들어 죽으려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북군이 성도의 군대와 합류하였습니다. 만약 추격하여 온다면, 우리는 대적할 방법이 없습니다. 거짓으로 강화를 하여 위급한 상황을 완화시키는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자가] 와서 [강화를] 청하였다. 3일이 지나 다리가 완성되자 [강을] 건넜고, 그 즉시 다리를 끊었다. 그리고 대오를 정돈하여 천천히 행군하였다. [이때] 여주(黎州)자사 엄사본(嚴師本)이 흩어진 병졸을 모아 공주(邛州)를 지키고 있었는데 추룡은 이를 두려워하여 이틀 동안 포위를 했다가 떠났다. 만들이 한인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귀와 코를 베고 놓아주었다. 이미 거주민 가운데 나무를 깎아서 귀와 코를 만들어 붙인 자가 열에 여덟은 되었다.『資治通鑑』卷255 「唐紀」68 咸通 11年 2月 庚子조에 따르면 관군이 성도성 아래에 당도하여 남조군과 교전을 벌이고 升遷橋를 탈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升遷橋는 升僊橋라고도 하는데 秦나라때 李冰이 만든 것으로 원래의 명칭은 七星橋라 한다.『太平寰宇記』卷72 「劒南西道」1 益州조에 따르면 昇遷橋는 성도현에서 북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위치한다고 하여 본문과 같이 ‘昇遷’으로 되어 있다.『資治通鑑』에 따르면 승천교를 탈취한 바로 그날 저녁, 남조군은 공성용 기구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는데 관군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이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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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10년(869) 12월, 조정에서는 안경복을 大渡河制置, 劍南應接使등으로 임명하고 宋威을 行營都知兵馬使로 삼아 병력 수만을 이끌고 서천에 원래 주둔하고 있던 忠武, 武寧軍과 합세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11년 2월 甲午 劍南東川節度使顏 안경복이 雲南蠻과 신도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資治通鑑』卷252 「唐紀」68 咸通 11年 2月조에 따르면 조정에서는 안경복을 동천절도사로 삼아 촉의 諸軍을 구원하게 하고 모든 군대는 그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癸巳에 안경복은 新都에 도착했고 甲午에 남조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안경복의 임명은 함통 10년 12월에 이루어졌고 그가 서천에 실제로 파견되어 전투를 수행한 것은 함통 11년(870) 2월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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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資治通鑑』卷255 「唐紀」68 咸通 11年 2月 庚子조에 따르면 관군이 성도성 아래에 당도하여 남조군과 교전을 벌이고 升遷橋를 탈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升遷橋는 升僊橋라고도 하는데 秦나라때 李冰이 만든 것으로 원래의 명칭은 七星橋라 한다.『太平寰宇記』卷72 「劒南西道」1 益州조에 따르면 昇遷橋는 성도현에서 북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위치한다고 하여 본문과 같이 ‘昇遷’으로 되어 있다.『資治通鑑』에 따르면 승천교를 탈취한 바로 그날 저녁, 남조군은 공성용 기구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는데 관군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이를 알게 되었다.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안경복(顔慶復), 증원유(曾元裕), 송위(宋威), 송위, 추룡, 추망(酋望), 지상, 지상, 노탐, 추룡, 송위, 추룡, 쌍류(雙流), 엄사본(嚴師本), 추룡
- 지명
- 신도(新都), 박야(博野), 남조, 남조, 성숙산(星宿山), 타강(沱江), 남조, 봉상(鳳翔), 산남(山南), 비교(毗橋), 타강(沱江), 성도, 공주(邛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