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의 추룡이 사자의 일로 침입함
추룡은 그 사자를 죽인 것을 원망하여 [함통(咸通)] 10년(869) 마침내 침입하였다. [그는] 군대를 청계관(靑溪關)
주 001에 남겨둔 채로, 은밀히 무리를 모아 나무를 베고 길을 열어, 눈덮인 고개를 넘었다. 한 여름주 002
각주 002)
인데도 얼어 죽은 병졸이 2천이나 되었다. 목원(沐源)
주 003쪽으로 나와 가주(嘉州)
주 004를 넘보며, [조정에] 복속한 만주 005을 깨뜨리고, 마침내 목원에 이르렀다. 두방(竇滂)은 연해(兗海)
주 006의 병사 5백을 파견하여 가서 싸우게 하였는데, 모든 군대가 무너졌다.주 007
추룡은 이에 몸소 장군이 되어 무리 5만을 거느리고 수주에 침입하여, 청계관을 공격하였다. 둔장(屯將) 두재영(杜再榮)이 대도하(大度河)를 버리고 달아나자, 모든 둔이 퇴각하여 북쪽 강변을 지켰다.주 008『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10년(869) 12월 임자 운남만이 가주를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고,『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10년 11월 南詔蠻 驃信 坦綽 酋龍이 2만을 이끌고 수주를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남조의 서천침입은 11월에서 12월 겨울의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盛夏’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착오이다. 한편『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10년 冬 10월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도 張雲의『咸通解圍錄』에서 함통 10년 10월 남조가 董舂烏部落을 공격하고 沐源川으로 나와 마침내 嘉州에 임박하게 되었다고 한 점, 그리고 앞서 말한『舊唐書』와『新唐書』본기의 기사를 근거로『新唐書』「南詔傳」의 ‘盛夏’라는 기록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각주 008)
만이 여주(黎州)를 공격하였는데, 거짓으로 한인(漢人)의 복색을 하고 강주 009을 건너 건위(犍爲)
주 010를 습격, 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능주(陵州)
주 011와 영주(榮州)
주 012사이를 오가며 건물을 불태우고 식량과 가축을 약탈하였다. [남조군이] 가주(嘉州)에 임박하자, 자사 양민(楊忞)은 남조와 강을 사이에 두고 진영을 설치하였다. 병사들이 화살을 집중하여 날리니, 만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에] 몰래 상류에서 강을 건너 배후에서 조정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충무장(忠武將) 안경사(顔慶師)를 죽이니, 양민은 달아났고, 가주는 함락되었다.주 013『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10년 11월조에 따르면 定邊都頭인 安再榮이 청계관을 수비하다 남조가 공격하자 재영은 후퇴하여 대도하의 북쪽에 주둔했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화살을 쏘아대기를 98일간 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역시 함통 10년 11월 定邊軍節度都頭 安再榮이 청계관을 수비하였는데 남조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재영은 후퇴하여 대도하를 지켰다. 청계관과 주둔지와의 거리는 200리였는데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화살을 쏘아대기를 98일간이나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본문의 ‘杜再榮’이『資治通鑑』과『舊唐書』에서는 ‘安再榮’으로 되어 있으니 본문의 ‘杜再榮’은 ‘安再榮’의 오기임이 분명하다. 또한 본문에서는 두재영이 대도하를 버리고 도주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역시『舊唐書』本紀,『資治通鑑』에 따르면 그는 청계관에서 후퇴한 것일 뿐, 도주한 것은 아니다.
각주 013)
이듬해 정월 두재영을 공격하자, 두방이 스스로 군대를 독려하여 싸움에 나섰다. 추룡이 사자 십여 명을 보내 강화를 청하니, 두방이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회담이 반도 진행되기 전에 만의 뗏목들이 이쪽 강기슭으로 다투어 몰려와 소리를 지르며 진격하니, 두방이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자살하려 하였다. 무령장(武寧將) 묘전서(苗全緖)가 그를 말리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니, 만이 조금씩 물러났다. 이 틈을 타서 두방이 도망쳤고, 전서는 나중에서야 뒤따라갔다.주 014『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10年 12月 丁酉조에 따르면 남조군이 능주와 영주일대를 약탈한 지, 여러 날 후에 陵雲寺에 대대적으로 결집하여 가주와 연안을 마주하게 되었다. 자사 楊忞은 定邊監軍 張允瓊과 함께 군사를 독려하여 항거하였다. 그러자 남조군은 몰래 복병을 보내 동쪽 나루터에서 강을 건너 앞뒤로 관군을 협공, 忠武都將 安慶師를 살해하니 나머지 군대는 모두 붕궤되고 양민, 장윤경은 몸만 빠져나왔다. 결국 壬子에 가주가 함락되었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능운사는 가주의 남산에 위치하는데 개원연간 승려 海通이 瀆江, 沫水, 濛水 三江이 모이며 지류가 드세고 물결이 세찬 물가의 산을 깎아 彌勒大像을 조성하였다. 그 높이가 360척이며 7층의 누각을 세워 이 불상을 덮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四川 樂山市 凌雲山에 위치한 樂山大佛을 말한 것이다.
각주 014)
여주가 함락되자, 사람들은 산과 골짜기로 달아나 숨었으며 만이 약탈한 금과 비단은 지고 가지 못할 정도였다. [남조의 군대가 또] 공래관(邛崍關)으로부터 들어와 아주(雅州)를 에워싸고, 마침내 공주(邛州)를 공격하였다.주 015이해 겨울 두방은 공주성을 버리고 도강(導江)
주 016『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10年 12月조에 따르면 苗全緖와 安再榮, 忠武의 장수 3인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나아가 싸우니 두방은 이틈을 타서 單騎로 밤중에 도망을 쳤다. 그러자 이들 세 장수는 야밤에 남조군을 급습하여 소란해진 틈을 타, 포위를 벗어나기로 하였다. 마침내 이들이 밤중에 남조군의 진영으로 돌진하여 궁노를 마구 쏘아대니 남조군이 크게 놀라게 되었고 세 장수는 이틈을 타 전군을 이끌고 퇴각하였다.『舊唐書』卷19上 「懿宗紀」 咸通 10年 12月조에 따르면 이들 세 장수는 全緒, 再榮, 弘節이니『통감』에서 말한 ‘충무의 장수’는 바로 弘節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전서가 나중에야 갔다’고 한 것은 바로 전서, 재영, 홍절 세 장수가, 두방이 도망친 후 포위를 풀고 후퇴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각주 016)
에 방벽을 쳤는데, 쌓아 두었던 물자와 병장기는 모두 잃고 말았다.導江: 오늘날 四川 중부의 岷江이다. 또는 導江縣을 말하기도 한다.『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彭州조에 따르면 도강현은 팽주 소속의 현이다. 원래의 명칭은 灌寧縣이었는데 무덕 2년(619) 도강현으로 고쳤다. ‘導江’이란 명칭은『尙書』「禹貢」의 ‘岷山으로 강물을 통하게 하다(岷山導江)’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취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도강은 도강현을 지나는 하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두방이 도강에 방벽을 쳤다’라고 한 본문의 언급으로 볼 때, 도강현의 縣城에 또 방벽은 쌓았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아마도 도강의 江岸을 배경으로 하여 방벽을 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도강은 도강현이 아닌 하천 도강으로 보는 것이 옳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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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10년(869) 12월 임자 운남만이 가주를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고,『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10년 11월 南詔蠻 驃信 坦綽 酋龍이 2만을 이끌고 수주를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남조의 서천침입은 11월에서 12월 겨울의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盛夏’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착오이다. 한편『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10년 冬 10월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도 張雲의『咸通解圍錄』에서 함통 10년 10월 남조가 董舂烏部落을 공격하고 沐源川으로 나와 마침내 嘉州에 임박하게 되었다고 한 점, 그리고 앞서 말한『舊唐書』와『新唐書』본기의 기사를 근거로『新唐書』「南詔傳」의 ‘盛夏’라는 기록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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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10년 11월조에 따르면 定邊都頭인 安再榮이 청계관을 수비하다 남조가 공격하자 재영은 후퇴하여 대도하의 북쪽에 주둔했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화살을 쏘아대기를 98일간 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역시 함통 10년 11월 定邊軍節度都頭 安再榮이 청계관을 수비하였는데 남조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재영은 후퇴하여 대도하를 지켰다. 청계관과 주둔지와의 거리는 200리였는데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화살을 쏘아대기를 98일간이나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본문의 ‘杜再榮’이『資治通鑑』과『舊唐書』에서는 ‘安再榮’으로 되어 있으니 본문의 ‘杜再榮’은 ‘安再榮’의 오기임이 분명하다. 또한 본문에서는 두재영이 대도하를 버리고 도주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역시『舊唐書』本紀,『資治通鑑』에 따르면 그는 청계관에서 후퇴한 것일 뿐, 도주한 것은 아니다.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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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3)
『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10年 12月 丁酉조에 따르면 남조군이 능주와 영주일대를 약탈한 지, 여러 날 후에 陵雲寺에 대대적으로 결집하여 가주와 연안을 마주하게 되었다. 자사 楊忞은 定邊監軍 張允瓊과 함께 군사를 독려하여 항거하였다. 그러자 남조군은 몰래 복병을 보내 동쪽 나루터에서 강을 건너 앞뒤로 관군을 협공, 忠武都將 安慶師를 살해하니 나머지 군대는 모두 붕궤되고 양민, 장윤경은 몸만 빠져나왔다. 결국 壬子에 가주가 함락되었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능운사는 가주의 남산에 위치하는데 개원연간 승려 海通이 瀆江, 沫水, 濛水 三江이 모이며 지류가 드세고 물결이 세찬 물가의 산을 깎아 彌勒大像을 조성하였다. 그 높이가 360척이며 7층의 누각을 세워 이 불상을 덮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四川 樂山市 凌雲山에 위치한 樂山大佛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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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資治通鑑』卷251 「唐紀」67 咸通 10年 12月조에 따르면 苗全緖와 安再榮, 忠武의 장수 3인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나아가 싸우니 두방은 이틈을 타서 單騎로 밤중에 도망을 쳤다. 그러자 이들 세 장수는 야밤에 남조군을 급습하여 소란해진 틈을 타, 포위를 벗어나기로 하였다. 마침내 이들이 밤중에 남조군의 진영으로 돌진하여 궁노를 마구 쏘아대니 남조군이 크게 놀라게 되었고 세 장수는 이틈을 타 전군을 이끌고 퇴각하였다.『舊唐書』卷19上 「懿宗紀」 咸通 10年 12月조에 따르면 이들 세 장수는 全緒, 再榮, 弘節이니『통감』에서 말한 ‘충무의 장수’는 바로 弘節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전서가 나중에야 갔다’고 한 것은 바로 전서, 재영, 홍절 세 장수가, 두방이 도망친 후 포위를 풀고 후퇴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 각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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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6)
導江: 오늘날 四川 중부의 岷江이다. 또는 導江縣을 말하기도 한다.『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彭州조에 따르면 도강현은 팽주 소속의 현이다. 원래의 명칭은 灌寧縣이었는데 무덕 2년(619) 도강현으로 고쳤다. ‘導江’이란 명칭은『尙書』「禹貢」의 ‘岷山으로 강물을 통하게 하다(岷山導江)’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취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도강은 도강현을 지나는 하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두방이 도강에 방벽을 쳤다’라고 한 본문의 언급으로 볼 때, 도강현의 縣城에 또 방벽은 쌓았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아마도 도강의 江岸을 배경으로 하여 방벽을 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도강은 도강현이 아닌 하천 도강으로 보는 것이 옳다.
색인어
- 이름
- 추룡, 두방(竇滂), 추룡, 두재영(杜再榮), 양민(楊忞), 안경사(顔慶師), 양민, 두재영, 두방, 추룡, 두방, 두방, 묘전서(苗全緖), 두방, 전서, 두방
- 지명
- 청계관(靑溪關), 목원(沐源), 가주(嘉州), 목원, 연해(兗海), 수주, 청계관, 대도하(大度河), 여주(黎州), 건위(犍爲), 능주(陵州), 영주(榮州), 가주(嘉州), 남조, 가주, 여주, 남조, 공래관(邛崍關), 아주(雅州), 공주(邛州), 도강(導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