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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이 안남을 평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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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南詔)
위주(韋宙)가 병사 나누어 용주(容州)등주(藤州)에 주둔시켜 만의 세력을 분산시키기를 청하였다.주 001
각주 001)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8월조에 따르면 남조군이 반드시 옹주로 진격할 것이니 군대를 나누어 용주와 등주에 주둔시킬 것으로 건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용주, 등주 사이의 거리는 270리라고 하였다. 옹주는 옹관경략사의 치소이며 용주와 등주는 용관경략사 소속으로 옹주와 근접한다. 이러한 조치는 남조가 옹주로 침입할 경우, 이에 재빨리 대응하여 옹주를 지원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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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통(咸通)] 5년(864) 남조가 군대를 돌려 수주(雟州)를 약탈하여 서남지역을 흔들어 놓았다.주 002
각주 002)
『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5년 정월 운남만이 雟州를 침략하고 3월에는 옹주를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春 正月 丙午조에 따르면 남조가 수주를 침략하자 당시 자사인 喩士珍이 이를 격파하고 1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조서를 내려 右神策兵 5천명과 諸道의 병력을 징발하여 수주를 수비하게 하였다. 그런데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이는 유사진이 허위로 과장한 첩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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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소업(蕭鄴) 주 003
각주 003)
蕭鄴:『新唐書』卷182 「蕭鄴傳」에 따르면 소업은 進士출신으로, 監察御史, 翰林學士 등을 거쳐 선종 대중연간에는 재상급인 工部尙書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의종 초에는 劍南西川절도사가 되었는데 당시 남조가 침공하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檢校右僕射, 山南西道觀察使로 좌천당했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따르면 당시 서천절도사가 兩林의 鬼主가 남조만을 맞아 싸워 이를 패배시키고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무리가 심히 많다고 상주한 것으로 되어있다. 兩林은 오늘날 四川 洛縣일대에 해당한다. 귀주는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양림은 東蠻國을 말하는데 이들은 君長을 추대하여 이를 ‘大鬼主’라고 불렀다 한다. 즉 귀주는 만인들이 자신들의 추장을 부르는 말이다. 同書 함통 5년 2월조에 따르면 蕭鄴대신 형부상서, 염철전운사 李福을 동평장사로 삼는 동시에 서천절도사에 보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남조군을 격퇴시킨 주체는 남조에 종속되지 않고 당조에 귀순한 兩林蠻이며 이를 관할한 서천절도사는 소업이 아닌 이복이었던 것이다. 즉『新唐書』「南詔傳」에서 ‘蕭鄴’이라고 하는 것은 ‘李福’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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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신에게 딸린 만이의 귀주(鬼主)를 이끌고 대도하(大度河)에서 남조를 맞이하여 패배시켰다. 이듬해 [남조가] 다시 공격하여 왔다. 마침 자사(刺史) 유사진(喩士珍)이 탐욕스럽고 교활하여 은밀히 양림(兩林)지역의 동만(東蠻) 사람들을 약탈하여 모두 내다 팔아 만의 금과 바꾸었다. 그러므로 [양림의 동만이] 문을 열어 항복하였고, 남조는 수졸(戍卒)을 모두 죽였다. 유사진은 마침내 만의 신하가 되었다. 안남에 주둔한지 오래되자 양하(兩河)의 용사 가운데 장독(瘴毒) 때문에 죽은 자가 열에 일곱이나 되니 재상 양수(楊收) 주 004
각주 004)
楊收:『舊唐書』卷177 「楊收傳」에 따르면 同州 馮翊 출신으로 開成연간에 진사로 급제하였는데 재상 杜悰이 揚州節度使가 되자 그 막료로 임용되었다. 이후 監察御使, 太常博士등의 관직을 거쳤다. 재상인 杜悰, 夏候孜는 그를 執政으로 천거하여 翰林學士, 中書舍人에 임명되었고 左軍中尉인 楊玄价는 양수가 자신과 같은 종족이라하여 그를 더욱 지원, 마침내 同平章事가 되어 재상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양현개는 환관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이후 그는 안남지역의 군량 조달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晉陽縣男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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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북쪽에서 파견한 군대를 파하자고 건의하였다. 대신 강서군(江西軍)을 진남군(鎭南軍)주 005
각주 005)
鎭南軍:『新唐書』卷184 「楊收傳」에 따르면 豫章에서 군사 3만을 모집하여 진남군을 설치하고 만군에 대비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舊唐書』卷177 「양수전」에 따르면 진남군을 洪州에 설치했다고 하였다.『舊唐書』卷40 「地理」3 洪州上都督府조에 따르면 홍주상도독부는 隋代의 豫章郡이라고 하였으니 홍주는 곧 예장을 말한다.『元和郡縣圖志』卷28 「江南道」4에 따르면 홍주는 예장으로 江南西道觀察使의 치소라고 하였다. 홍주는 오늘날 江西 南昌市에 해당한다. 따라서 ‘강서군을 진남군으로 삼았다’고 한 본문의 기록은 江南西道의 홍주에 주둔한 군단을 진남군으로 삼아 지키게 하면서 안남도호부를 지원하게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즉 江西軍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안남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군대를 모집해 안남에서의 전쟁에 대비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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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고 강노(强弩) 2만을 모집하여 절도(節度)주 006
각주 006)
節度:『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年 夏 4月 壬寅조에 따르면 계관관찰사 嚴譔을 진남절도사에 삼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에서 절도를 삼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新唐書』와『舊唐書』「楊收傳」에 따르면 양수는 바로 이때 엄선을 진남절도사로 임용한 대가로 100만의 뇌물을 받았고 이로 인해 나중에 그는 몰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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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세우면, 또 지역이 가까워서 징발하여 보내기도 쉽다고 하였다. 조를 내려 허락하였다. 하후자(夏侯孜) 주 007
각주 007)
夏侯孜:『舊唐書』卷177 「夏侯孜傳」에 따르면 譙 출신으로, 寶曆 2년(826) 진사에 급제하여 諫議大夫, 給事中, 朝議大夫등의 관직을 거쳐 의종이 즉위하자 同平章事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이 무렵 楊收 등과 함께 보정을 담당했으면 함통 8년(867)에는 方鎭으로 나가 劒南西川節度使, 河中晉絳節度使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 무렵 그의 임지로 남조의 군대가 여러 차례 침략하였으나 그는 이를 제지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함통 9년(868) 소환되어 太子少保의 관작을 내리고 낙양에서 근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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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張茵)이 나약하여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그 병력을 모두 고병(高騈)에게 주었다.주 008
각주 008)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따르면 張茵이 오랫동안 군대를 진격시켜 안남을 수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후자가 효위장군 고병을 천거하여 그를 대신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고병은 안남도호, 경략사가 되었다. 동서 함통 5년 정월조에 따르면 용관경략사 장인에게 교주의 일을 함께 처리하게 하면서 임시 교주인 海門에 병력 2만 5천을 증원하고 안남을 수복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장인은 이와 같은 조정의 조처에도 불구, 안남의 수복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하후자가 재상의 직에서 물러난 것은 함통 5년 11월의 일이며『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冬 11月조에서도『新唐書』와 마찬가지로 하후자를 하동절도사에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하후자는 이미 함통 5년(864) 11월 재상의 직에서 물러나 방진에 나가게 되었으므로 그가 장인 대신 고병을 천거하여 그 직무와 병권을 부여한 시점은 함통 5년 11월 이전의 일이다. 그런데『新唐書』「南詔傳」에서는 마치 이 일이 함통 6년의 일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오기이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5년 4월 고병으로 하여금 금군 5천을 인솔하여 諸道의 군사들과 만나 옹관을 수비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는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補國史』에서 장인이 임시 교주인 해문에 주둔한 지가 1년이라고 하였으니 그 재직 기간은 함통 5년 정월부터 그해 말까지가 된다. 즉 장인이 해문에 주둔한 지 넉 달밖에 안 된 시점에 고병이 장인을 대행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안남도호 장인에서 고병으로의 교체시점은 함통 5년 10월의 일이 맞다. 또한 함통 5년 4월 고병이 금군 5천을 인솔했다는『舊唐書』「懿宗紀」의 기록은 아마 고병으로 하여금 옹관을 수비하기 위한 지원군으로 파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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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이 병사 5천을 뽑아 강을 건너 옹주에서 임읍(林邑)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용주둔(龍州屯)주 009
각주 009)
龍州屯:『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년 9월조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龍州는 곧 龍編縣으로 安南의 관내라고 하였다.『元和郡縣圖志』卷38 「嶺南道」5 安南都護府조에 따르면 용편현은 원래 무덕 4년(621)에는 龍州였고 안남도호부의 치소인 交州의 속현이라 하였으니 호삼성의 주석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용편현은 오늘날 베트남 河北省 仙游縣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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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남조를 공격하니, 만의 추장이 재물과 가축을 불사르고 달아났다.주 010
각주 010)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년 9월조에 따르면 고병이 병사 5천으로 해문을 나와 강을 건너 남정에 이르렀는데, 마침 봉주의 만인 5만여 명이 밭에서 수확을 하고 있었다. 이에 고병이 이들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들이 수확하고 있던 곡식을 확보하여 군량으로 삼았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서는 함통 6년(865) 5월 고병이 옹관에서 임읍만을 대패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林邑은 국호를 環王으로 바꾼 상태였고 중국과도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갑자가 임읍만이 출현했다는 것은 역사적 상황에 맞지 않는다. 다만 峯州는 오늘날 베트남의 북부로 임읍과 가까우니『舊唐書』에서는 봉주의 만을 임읍의 만으로 이해하여 기록한 것이며『新唐書』「南詔傳」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년 9월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도 이상과 같은『舊唐書』,『新唐書』의 착오를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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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국왕(大禮國王), 즉 남조의] 추룡(酋龍)양집사(楊緝思)를 보내 추천(酋遷)을 도와 함께 안남을 지키게 하고, 범녜사(范胒些)를 안남도통(安南都統), 조락미(趙諾眉)를 부야도통(扶邪都統)으로 삼았다.주 011
각주 011)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年(866) 6月조에 따르면 남조의 추룡이 善闡節度使 楊緝을 보내 안남절도사 단추천을 도와 교지를 지키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資治通鑑』에서는『新唐書』의 ‘楊緝思’가 ‘楊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善闡府는 남조의 別都로 교지의 서북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실록』즉『의종실록』에 따르면 부야현은 羅伏州의 소속으로 남조에서 설치한 현이라고 한다. 선천부는 오늘날 雲南 昆明市에 해당하며 부야현은 雲南 祿豊縣 동북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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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866) 6월 고병교주에 이르러, 전투를 벌여 여러 차례 승리했고, 병사들이 적극적으로 싸워 적장 장전(張詮)을 베었다.주 012
각주 012)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년 6월조에 따르면 당시 고병의 군대를 감찰하기 위해 파견된 환관 李維周는 고병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해문에 있으면서 고병이 보내온 승전 보고를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고병이 무능하다 여겨 右武衛將軍 王晏權으로 하여금 고병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고병은 진격을 계속하여 남조군을 대파하고 같은 달 마침내 交州城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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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의] 이차룡(李溠龍)은 무리 만명을 데리고 항복하였으며, 파풍(波風) 주 013
각주 013)
波風: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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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세 방벽을 점령하였다. 양집사(楊緝思)가 나와 싸웠으나 패하여 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에] 병사들이 그 기세를 타고 성의 담장을 넘어 들어가, 추천(酋遷), 녜사(胒些), 낙미(諾眉)를 베고 적의 수급 3만을 바치니, 안남이 평정되었다.주 014
각주 014)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年 冬 10月조에 따르면 고병이 교주성을 포위한 지 10여일 만에 성을 거의 함락시킬 뻔 하였다. 그런데 마침 王晏權으로 직무를 대행하게 한다는 조정의 명령이 당도하여 고병은 병권을 넘기고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부관인 曾袞이 보낸 승전보가 李維周를 거치지 않고 조정에 전달되어 고병의 승전보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고병을 다시 복직시키니, 고병은 해문까지 갔다가 명령을 받고 다시 돌아와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고병이 다시 와보니 이유주와 신임 경략사 왕안권이 포위를 느슨하게 했던 바람에 남조군의 태반이 도망친 상태였다. 고병은 다시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단추천과 토만으로 남조군의 향도가 된 朱道古를 목 베었다. 남조군이 달아나자 고병이 다시 土蠻으로 남조에 복속한 두 洞을 격파하고 그 추창들을 죽이니 토만으로 귀부한 자들이 1만 7천이었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서는 함통 7년(866) 10월 고병이 안남을 평정했다고 상주한 것으로 되어 있고,『新唐書』卷9 「懿宗紀」에서는 함통 7년 10월 고병이 안남을 수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고병의 안남평정은『新唐書』「南詔傳」에서 말한 것처럼 함통 7년 6월의 일이 아닌 10월의 일인 것이다. 이에 대해『資治通鑑考異』에서도『新唐書』「南詔傳」은 단지 6월까지만 기록하고 이후의 날짜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年 11월조에 따르면 조서를 내려 안남, 옹주, 서천 제군은 각각의 관할 지역을 수비하게 하고 더 이상 나아가 남조를 공격하지 말게 하였다. 서천절도사 유동에게는 남조를 회유하게 하고 만일 이전의 우호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 동안의 행적은 일체 불문에 부치라고 하였다. 아울러 안남에 靜海軍을 설치하고 고병을 그 군의 절도사로 삼았으니 이탁의 탐욕과 부정으로 안남이 소란해진 이후로 10년만에야 비로소 안남이 평정되었다. 안남이 처음 남조의 침략에 노출된 것은 대중 12년(858)의 일이다. 고병은 안남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둘레가 3천步이며 성에 설치한 가옥의 규모는 40여만 間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宋朝에 이르기까지 안남은 정해군절도사의 主鎭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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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8월조에 따르면 남조군이 반드시 옹주로 진격할 것이니 군대를 나누어 용주와 등주에 주둔시킬 것으로 건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용주, 등주 사이의 거리는 270리라고 하였다. 옹주는 옹관경략사의 치소이며 용주와 등주는 용관경략사 소속으로 옹주와 근접한다. 이러한 조치는 남조가 옹주로 침입할 경우, 이에 재빨리 대응하여 옹주를 지원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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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5년 정월 운남만이 雟州를 침략하고 3월에는 옹주를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春 正月 丙午조에 따르면 남조가 수주를 침략하자 당시 자사인 喩士珍이 이를 격파하고 1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조서를 내려 右神策兵 5천명과 諸道의 병력을 징발하여 수주를 수비하게 하였다. 그런데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이는 유사진이 허위로 과장한 첩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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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蕭鄴:『新唐書』卷182 「蕭鄴傳」에 따르면 소업은 進士출신으로, 監察御史, 翰林學士 등을 거쳐 선종 대중연간에는 재상급인 工部尙書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의종 초에는 劍南西川절도사가 되었는데 당시 남조가 침공하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檢校右僕射, 山南西道觀察使로 좌천당했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따르면 당시 서천절도사가 兩林의 鬼主가 남조만을 맞아 싸워 이를 패배시키고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무리가 심히 많다고 상주한 것으로 되어있다. 兩林은 오늘날 四川 洛縣일대에 해당한다. 귀주는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양림은 東蠻國을 말하는데 이들은 君長을 추대하여 이를 ‘大鬼主’라고 불렀다 한다. 즉 귀주는 만인들이 자신들의 추장을 부르는 말이다. 同書 함통 5년 2월조에 따르면 蕭鄴대신 형부상서, 염철전운사 李福을 동평장사로 삼는 동시에 서천절도사에 보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남조군을 격퇴시킨 주체는 남조에 종속되지 않고 당조에 귀순한 兩林蠻이며 이를 관할한 서천절도사는 소업이 아닌 이복이었던 것이다. 즉『新唐書』「南詔傳」에서 ‘蕭鄴’이라고 하는 것은 ‘李福’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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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楊收:『舊唐書』卷177 「楊收傳」에 따르면 同州 馮翊 출신으로 開成연간에 진사로 급제하였는데 재상 杜悰이 揚州節度使가 되자 그 막료로 임용되었다. 이후 監察御使, 太常博士등의 관직을 거쳤다. 재상인 杜悰, 夏候孜는 그를 執政으로 천거하여 翰林學士, 中書舍人에 임명되었고 左軍中尉인 楊玄价는 양수가 자신과 같은 종족이라하여 그를 더욱 지원, 마침내 同平章事가 되어 재상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양현개는 환관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이후 그는 안남지역의 군량 조달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晉陽縣男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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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鎭南軍:『新唐書』卷184 「楊收傳」에 따르면 豫章에서 군사 3만을 모집하여 진남군을 설치하고 만군에 대비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舊唐書』卷177 「양수전」에 따르면 진남군을 洪州에 설치했다고 하였다.『舊唐書』卷40 「地理」3 洪州上都督府조에 따르면 홍주상도독부는 隋代의 豫章郡이라고 하였으니 홍주는 곧 예장을 말한다.『元和郡縣圖志』卷28 「江南道」4에 따르면 홍주는 예장으로 江南西道觀察使의 치소라고 하였다. 홍주는 오늘날 江西 南昌市에 해당한다. 따라서 ‘강서군을 진남군으로 삼았다’고 한 본문의 기록은 江南西道의 홍주에 주둔한 군단을 진남군으로 삼아 지키게 하면서 안남도호부를 지원하게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즉 江西軍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안남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군대를 모집해 안남에서의 전쟁에 대비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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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節度:『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年 夏 4月 壬寅조에 따르면 계관관찰사 嚴譔을 진남절도사에 삼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에서 절도를 삼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新唐書』와『舊唐書』「楊收傳」에 따르면 양수는 바로 이때 엄선을 진남절도사로 임용한 대가로 100만의 뇌물을 받았고 이로 인해 나중에 그는 몰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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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夏侯孜:『舊唐書』卷177 「夏侯孜傳」에 따르면 譙 출신으로, 寶曆 2년(826) 진사에 급제하여 諫議大夫, 給事中, 朝議大夫등의 관직을 거쳐 의종이 즉위하자 同平章事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이 무렵 楊收 등과 함께 보정을 담당했으면 함통 8년(867)에는 方鎭으로 나가 劒南西川節度使, 河中晉絳節度使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 무렵 그의 임지로 남조의 군대가 여러 차례 침략하였으나 그는 이를 제지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함통 9년(868) 소환되어 太子少保의 관작을 내리고 낙양에서 근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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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따르면 張茵이 오랫동안 군대를 진격시켜 안남을 수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후자가 효위장군 고병을 천거하여 그를 대신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고병은 안남도호, 경략사가 되었다. 동서 함통 5년 정월조에 따르면 용관경략사 장인에게 교주의 일을 함께 처리하게 하면서 임시 교주인 海門에 병력 2만 5천을 증원하고 안남을 수복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장인은 이와 같은 조정의 조처에도 불구, 안남의 수복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하후자가 재상의 직에서 물러난 것은 함통 5년 11월의 일이며『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冬 11月조에서도『新唐書』와 마찬가지로 하후자를 하동절도사에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하후자는 이미 함통 5년(864) 11월 재상의 직에서 물러나 방진에 나가게 되었으므로 그가 장인 대신 고병을 천거하여 그 직무와 병권을 부여한 시점은 함통 5년 11월 이전의 일이다. 그런데『新唐書』「南詔傳」에서는 마치 이 일이 함통 6년의 일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오기이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5년 4월 고병으로 하여금 금군 5천을 인솔하여 諸道의 군사들과 만나 옹관을 수비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는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補國史』에서 장인이 임시 교주인 해문에 주둔한 지가 1년이라고 하였으니 그 재직 기간은 함통 5년 정월부터 그해 말까지가 된다. 즉 장인이 해문에 주둔한 지 넉 달밖에 안 된 시점에 고병이 장인을 대행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안남도호 장인에서 고병으로의 교체시점은 함통 5년 10월의 일이 맞다. 또한 함통 5년 4월 고병이 금군 5천을 인솔했다는『舊唐書』「懿宗紀」의 기록은 아마 고병으로 하여금 옹관을 수비하기 위한 지원군으로 파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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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龍州屯:『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년 9월조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龍州는 곧 龍編縣으로 安南의 관내라고 하였다.『元和郡縣圖志』卷38 「嶺南道」5 安南都護府조에 따르면 용편현은 원래 무덕 4년(621)에는 龍州였고 안남도호부의 치소인 交州의 속현이라 하였으니 호삼성의 주석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용편현은 오늘날 베트남 河北省 仙游縣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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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년 9월조에 따르면 고병이 병사 5천으로 해문을 나와 강을 건너 남정에 이르렀는데, 마침 봉주의 만인 5만여 명이 밭에서 수확을 하고 있었다. 이에 고병이 이들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들이 수확하고 있던 곡식을 확보하여 군량으로 삼았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서는 함통 6년(865) 5월 고병이 옹관에서 임읍만을 대패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林邑은 국호를 環王으로 바꾼 상태였고 중국과도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갑자가 임읍만이 출현했다는 것은 역사적 상황에 맞지 않는다. 다만 峯州는 오늘날 베트남의 북부로 임읍과 가까우니『舊唐書』에서는 봉주의 만을 임읍의 만으로 이해하여 기록한 것이며『新唐書』「南詔傳」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년 9월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도 이상과 같은『舊唐書』,『新唐書』의 착오를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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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年(866) 6月조에 따르면 남조의 추룡이 善闡節度使 楊緝을 보내 안남절도사 단추천을 도와 교지를 지키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資治通鑑』에서는『新唐書』의 ‘楊緝思’가 ‘楊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善闡府는 남조의 別都로 교지의 서북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실록』즉『의종실록』에 따르면 부야현은 羅伏州의 소속으로 남조에서 설치한 현이라고 한다. 선천부는 오늘날 雲南 昆明市에 해당하며 부야현은 雲南 祿豊縣 동북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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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년 6월조에 따르면 당시 고병의 군대를 감찰하기 위해 파견된 환관 李維周는 고병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해문에 있으면서 고병이 보내온 승전 보고를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고병이 무능하다 여겨 右武衛將軍 王晏權으로 하여금 고병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고병은 진격을 계속하여 남조군을 대파하고 같은 달 마침내 交州城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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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波風: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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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年 冬 10月조에 따르면 고병이 교주성을 포위한 지 10여일 만에 성을 거의 함락시킬 뻔 하였다. 그런데 마침 王晏權으로 직무를 대행하게 한다는 조정의 명령이 당도하여 고병은 병권을 넘기고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부관인 曾袞이 보낸 승전보가 李維周를 거치지 않고 조정에 전달되어 고병의 승전보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고병을 다시 복직시키니, 고병은 해문까지 갔다가 명령을 받고 다시 돌아와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고병이 다시 와보니 이유주와 신임 경략사 왕안권이 포위를 느슨하게 했던 바람에 남조군의 태반이 도망친 상태였다. 고병은 다시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단추천과 토만으로 남조군의 향도가 된 朱道古를 목 베었다. 남조군이 달아나자 고병이 다시 土蠻으로 남조에 복속한 두 洞을 격파하고 그 추창들을 죽이니 토만으로 귀부한 자들이 1만 7천이었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서는 함통 7년(866) 10월 고병이 안남을 평정했다고 상주한 것으로 되어 있고,『新唐書』卷9 「懿宗紀」에서는 함통 7년 10월 고병이 안남을 수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고병의 안남평정은『新唐書』「南詔傳」에서 말한 것처럼 함통 7년 6월의 일이 아닌 10월의 일인 것이다. 이에 대해『資治通鑑考異』에서도『新唐書』「南詔傳」은 단지 6월까지만 기록하고 이후의 날짜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年 11월조에 따르면 조서를 내려 안남, 옹주, 서천 제군은 각각의 관할 지역을 수비하게 하고 더 이상 나아가 남조를 공격하지 말게 하였다. 서천절도사 유동에게는 남조를 회유하게 하고 만일 이전의 우호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 동안의 행적은 일체 불문에 부치라고 하였다. 아울러 안남에 靜海軍을 설치하고 고병을 그 군의 절도사로 삼았으니 이탁의 탐욕과 부정으로 안남이 소란해진 이후로 10년만에야 비로소 안남이 평정되었다. 안남이 처음 남조의 침략에 노출된 것은 대중 12년(858)의 일이다. 고병은 안남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둘레가 3천步이며 성에 설치한 가옥의 규모는 40여만 間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宋朝에 이르기까지 안남은 정해군절도사의 主鎭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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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위주(韋宙), 소업(蕭鄴), 유사진(喩士珍), 유사진, 양수(楊收), 하후자(夏侯孜), 장인(張茵), 고병(高騈), 고병, 추룡(酋龍), 양집사(楊緝思), 추천(酋遷), 범녜사(范胒些), 조락미(趙諾眉), 고병, 장전(張詮), 이차룡(李溠龍), 양집사(楊緝思), 추천(酋遷), 녜사(胒些), 낙미(諾眉)
지명
용주(容州), 등주(藤州), 남조, 수주(雟州), 대도하(大度河), 남조, 남조, 남조, 안남, 임읍(林邑), 남조, 남조, 안남, 교주, 남조, 파풍(波風), 안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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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이 안남을 평정함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