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이 안남을 평정함
위주(韋宙)가 병사 나누어 용주(容州)와 등주(藤州)에 주둔시켜 만의 세력을 분산시키기를 청하였다.주 001[함통(咸通)] 5년(864) 남조가 군대를 돌려 수주(雟州)를 약탈하여 서남지역을 흔들어 놓았다.주 002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소업(蕭鄴)
주 003
각주 003)
이 자신에게 딸린 만이의 귀주(鬼主)를 이끌고 대도하(大度河)에서 남조를 맞이하여 패배시켰다. 이듬해 [남조가] 다시 공격하여 왔다. 마침 자사(刺史) 유사진(喩士珍)이 탐욕스럽고 교활하여 은밀히 양림(兩林)지역의 동만(東蠻) 사람들을 약탈하여 모두 내다 팔아 만의 금과 바꾸었다. 그러므로 [양림의 동만이] 문을 열어 항복하였고, 남조는 수졸(戍卒)을 모두 죽였다. 유사진은 마침내 만의 신하가 되었다. 안남에 주둔한지 오래되자 양하(兩河)의 용사 가운데 장독(瘴毒) 때문에 죽은 자가 열에 일곱이나 되니 재상 양수(楊收)
주 004가 북쪽에서 파견한 군대를 파하자고 건의하였다. 대신 강서군(江西軍)을 진남군(鎭南軍)주 005蕭鄴:『新唐書』卷182 「蕭鄴傳」에 따르면 소업은 進士출신으로, 監察御史, 翰林學士 등을 거쳐 선종 대중연간에는 재상급인 工部尙書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의종 초에는 劍南西川절도사가 되었는데 당시 남조가 침공하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檢校右僕射, 山南西道觀察使로 좌천당했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따르면 당시 서천절도사가 兩林의 鬼主가 남조만을 맞아 싸워 이를 패배시키고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무리가 심히 많다고 상주한 것으로 되어있다. 兩林은 오늘날 四川 洛縣일대에 해당한다. 귀주는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양림은 東蠻國을 말하는데 이들은 君長을 추대하여 이를 ‘大鬼主’라고 불렀다 한다. 즉 귀주는 만인들이 자신들의 추장을 부르는 말이다. 同書 함통 5년 2월조에 따르면 蕭鄴대신 형부상서, 염철전운사 李福을 동평장사로 삼는 동시에 서천절도사에 보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남조군을 격퇴시킨 주체는 남조에 종속되지 않고 당조에 귀순한 兩林蠻이며 이를 관할한 서천절도사는 소업이 아닌 이복이었던 것이다. 즉『新唐書』「南詔傳」에서 ‘蕭鄴’이라고 하는 것은 ‘李福’이 맞다.
각주 005)
으로 삼고 강노(强弩) 2만을 모집하여 절도(節度)주 006를 세우면, 또 지역이 가까워서 징발하여 보내기도 쉽다고 하였다. 조를 내려 허락하였다. 하후자(夏侯孜)
주 007는 장인(張茵)이 나약하여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그 병력을 모두 고병(高騈)에게 주었다.주 008鎭南軍:『新唐書』卷184 「楊收傳」에 따르면 豫章에서 군사 3만을 모집하여 진남군을 설치하고 만군에 대비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舊唐書』卷177 「양수전」에 따르면 진남군을 洪州에 설치했다고 하였다.『舊唐書』卷40 「地理」3 洪州上都督府조에 따르면 홍주상도독부는 隋代의 豫章郡이라고 하였으니 홍주는 곧 예장을 말한다.『元和郡縣圖志』卷28 「江南道」4에 따르면 홍주는 예장으로 江南西道觀察使의 치소라고 하였다. 홍주는 오늘날 江西 南昌市에 해당한다. 따라서 ‘강서군을 진남군으로 삼았다’고 한 본문의 기록은 江南西道의 홍주에 주둔한 군단을 진남군으로 삼아 지키게 하면서 안남도호부를 지원하게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즉 江西軍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안남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군대를 모집해 안남에서의 전쟁에 대비하게 한 것이다.
각주 008)
고병이 병사 5천을 뽑아 강을 건너 옹주에서 임읍(林邑)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용주둔(龍州屯)주 009에서 남조를 공격하니, 만의 추장이 재물과 가축을 불사르고 달아났다.주 010『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따르면 張茵이 오랫동안 군대를 진격시켜 안남을 수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후자가 효위장군 고병을 천거하여 그를 대신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고병은 안남도호, 경략사가 되었다. 동서 함통 5년 정월조에 따르면 용관경략사 장인에게 교주의 일을 함께 처리하게 하면서 임시 교주인 海門에 병력 2만 5천을 증원하고 안남을 수복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장인은 이와 같은 조정의 조처에도 불구, 안남의 수복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하후자가 재상의 직에서 물러난 것은 함통 5년 11월의 일이며『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冬 11月조에서도『新唐書』와 마찬가지로 하후자를 하동절도사에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하후자는 이미 함통 5년(864) 11월 재상의 직에서 물러나 방진에 나가게 되었으므로 그가 장인 대신 고병을 천거하여 그 직무와 병권을 부여한 시점은 함통 5년 11월 이전의 일이다. 그런데『新唐書』「南詔傳」에서는 마치 이 일이 함통 6년의 일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오기이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5년 4월 고병으로 하여금 금군 5천을 인솔하여 諸道의 군사들과 만나 옹관을 수비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는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補國史』에서 장인이 임시 교주인 해문에 주둔한 지가 1년이라고 하였으니 그 재직 기간은 함통 5년 정월부터 그해 말까지가 된다. 즉 장인이 해문에 주둔한 지 넉 달밖에 안 된 시점에 고병이 장인을 대행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안남도호 장인에서 고병으로의 교체시점은 함통 5년 10월의 일이 맞다. 또한 함통 5년 4월 고병이 금군 5천을 인솔했다는『舊唐書』「懿宗紀」의 기록은 아마 고병으로 하여금 옹관을 수비하기 위한 지원군으로 파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각주 010)
[대례국왕(大禮國王), 즉 남조의] 추룡(酋龍)이 양집사(楊緝思)를 보내 추천(酋遷)을 도와 함께 안남을 지키게 하고, 범녜사(范胒些)를 안남도통(安南都統), 조락미(趙諾眉)를 부야도통(扶邪都統)으로 삼았다.주 0117년(866) 6월 고병이 교주에 이르러, 전투를 벌여 여러 차례 승리했고, 병사들이 적극적으로 싸워 적장 장전(張詮)을 베었다.주 012[남조의] 이차룡(李溠龍)은 무리 만명을 데리고 항복하였으며, 파풍(波風)
주 013의 세 방벽을 점령하였다. 양집사(楊緝思)가 나와 싸웠으나 패하여 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에] 병사들이 그 기세를 타고 성의 담장을 넘어 들어가, 추천(酋遷), 녜사(胒些), 낙미(諾眉)를 베고 적의 수급 3만을 바치니, 안남이 평정되었다.주 014『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년 9월조에 따르면 고병이 병사 5천으로 해문을 나와 강을 건너 남정에 이르렀는데, 마침 봉주의 만인 5만여 명이 밭에서 수확을 하고 있었다. 이에 고병이 이들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들이 수확하고 있던 곡식을 확보하여 군량으로 삼았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서는 함통 6년(865) 5월 고병이 옹관에서 임읍만을 대패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林邑은 국호를 環王으로 바꾼 상태였고 중국과도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갑자가 임읍만이 출현했다는 것은 역사적 상황에 맞지 않는다. 다만 峯州는 오늘날 베트남의 북부로 임읍과 가까우니『舊唐書』에서는 봉주의 만을 임읍의 만으로 이해하여 기록한 것이며『新唐書』「南詔傳」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년 9월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도 이상과 같은『舊唐書』,『新唐書』의 착오를 지적하였다.
각주 014)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年 冬 10月조에 따르면 고병이 교주성을 포위한 지 10여일 만에 성을 거의 함락시킬 뻔 하였다. 그런데 마침 王晏權으로 직무를 대행하게 한다는 조정의 명령이 당도하여 고병은 병권을 넘기고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부관인 曾袞이 보낸 승전보가 李維周를 거치지 않고 조정에 전달되어 고병의 승전보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고병을 다시 복직시키니, 고병은 해문까지 갔다가 명령을 받고 다시 돌아와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고병이 다시 와보니 이유주와 신임 경략사 왕안권이 포위를 느슨하게 했던 바람에 남조군의 태반이 도망친 상태였다. 고병은 다시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단추천과 토만으로 남조군의 향도가 된 朱道古를 목 베었다. 남조군이 달아나자 고병이 다시 土蠻으로 남조에 복속한 두 洞을 격파하고 그 추창들을 죽이니 토만으로 귀부한 자들이 1만 7천이었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서는 함통 7년(866) 10월 고병이 안남을 평정했다고 상주한 것으로 되어 있고,『新唐書』卷9 「懿宗紀」에서는 함통 7년 10월 고병이 안남을 수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고병의 안남평정은『新唐書』「南詔傳」에서 말한 것처럼 함통 7년 6월의 일이 아닌 10월의 일인 것이다. 이에 대해『資治通鑑考異』에서도『新唐書』「南詔傳」은 단지 6월까지만 기록하고 이후의 날짜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年 11월조에 따르면 조서를 내려 안남, 옹주, 서천 제군은 각각의 관할 지역을 수비하게 하고 더 이상 나아가 남조를 공격하지 말게 하였다. 서천절도사 유동에게는 남조를 회유하게 하고 만일 이전의 우호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 동안의 행적은 일체 불문에 부치라고 하였다. 아울러 안남에 靜海軍을 설치하고 고병을 그 군의 절도사로 삼았으니 이탁의 탐욕과 부정으로 안남이 소란해진 이후로 10년만에야 비로소 안남이 평정되었다. 안남이 처음 남조의 침략에 노출된 것은 대중 12년(858)의 일이다. 고병은 안남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둘레가 3천步이며 성에 설치한 가옥의 규모는 40여만 間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宋朝에 이르기까지 안남은 정해군절도사의 主鎭이 되었다고 한다.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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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蕭鄴:『新唐書』卷182 「蕭鄴傳」에 따르면 소업은 進士출신으로, 監察御史, 翰林學士 등을 거쳐 선종 대중연간에는 재상급인 工部尙書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의종 초에는 劍南西川절도사가 되었는데 당시 남조가 침공하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檢校右僕射, 山南西道觀察使로 좌천당했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따르면 당시 서천절도사가 兩林의 鬼主가 남조만을 맞아 싸워 이를 패배시키고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무리가 심히 많다고 상주한 것으로 되어있다. 兩林은 오늘날 四川 洛縣일대에 해당한다. 귀주는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양림은 東蠻國을 말하는데 이들은 君長을 추대하여 이를 ‘大鬼主’라고 불렀다 한다. 즉 귀주는 만인들이 자신들의 추장을 부르는 말이다. 同書 함통 5년 2월조에 따르면 蕭鄴대신 형부상서, 염철전운사 李福을 동평장사로 삼는 동시에 서천절도사에 보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남조군을 격퇴시킨 주체는 남조에 종속되지 않고 당조에 귀순한 兩林蠻이며 이를 관할한 서천절도사는 소업이 아닌 이복이었던 것이다. 즉『新唐書』「南詔傳」에서 ‘蕭鄴’이라고 하는 것은 ‘李福’이 맞다.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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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鎭南軍:『新唐書』卷184 「楊收傳」에 따르면 豫章에서 군사 3만을 모집하여 진남군을 설치하고 만군에 대비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舊唐書』卷177 「양수전」에 따르면 진남군을 洪州에 설치했다고 하였다.『舊唐書』卷40 「地理」3 洪州上都督府조에 따르면 홍주상도독부는 隋代의 豫章郡이라고 하였으니 홍주는 곧 예장을 말한다.『元和郡縣圖志』卷28 「江南道」4에 따르면 홍주는 예장으로 江南西道觀察使의 치소라고 하였다. 홍주는 오늘날 江西 南昌市에 해당한다. 따라서 ‘강서군을 진남군으로 삼았다’고 한 본문의 기록은 江南西道의 홍주에 주둔한 군단을 진남군으로 삼아 지키게 하면서 안남도호부를 지원하게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즉 江西軍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안남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군대를 모집해 안남에서의 전쟁에 대비하게 한 것이다.
- 각주 006)
-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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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따르면 張茵이 오랫동안 군대를 진격시켜 안남을 수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후자가 효위장군 고병을 천거하여 그를 대신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고병은 안남도호, 경략사가 되었다. 동서 함통 5년 정월조에 따르면 용관경략사 장인에게 교주의 일을 함께 처리하게 하면서 임시 교주인 海門에 병력 2만 5천을 증원하고 안남을 수복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장인은 이와 같은 조정의 조처에도 불구, 안남의 수복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하후자가 재상의 직에서 물러난 것은 함통 5년 11월의 일이며『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冬 11月조에서도『新唐書』와 마찬가지로 하후자를 하동절도사에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하후자는 이미 함통 5년(864) 11월 재상의 직에서 물러나 방진에 나가게 되었으므로 그가 장인 대신 고병을 천거하여 그 직무와 병권을 부여한 시점은 함통 5년 11월 이전의 일이다. 그런데『新唐書』「南詔傳」에서는 마치 이 일이 함통 6년의 일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오기이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5년 4월 고병으로 하여금 금군 5천을 인솔하여 諸道의 군사들과 만나 옹관을 수비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5年 秋 7月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는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補國史』에서 장인이 임시 교주인 해문에 주둔한 지가 1년이라고 하였으니 그 재직 기간은 함통 5년 정월부터 그해 말까지가 된다. 즉 장인이 해문에 주둔한 지 넉 달밖에 안 된 시점에 고병이 장인을 대행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안남도호 장인에서 고병으로의 교체시점은 함통 5년 10월의 일이 맞다. 또한 함통 5년 4월 고병이 금군 5천을 인솔했다는『舊唐書』「懿宗紀」의 기록은 아마 고병으로 하여금 옹관을 수비하기 위한 지원군으로 파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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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0)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년 9월조에 따르면 고병이 병사 5천으로 해문을 나와 강을 건너 남정에 이르렀는데, 마침 봉주의 만인 5만여 명이 밭에서 수확을 하고 있었다. 이에 고병이 이들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들이 수확하고 있던 곡식을 확보하여 군량으로 삼았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서는 함통 6년(865) 5월 고병이 옹관에서 임읍만을 대패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林邑은 국호를 環王으로 바꾼 상태였고 중국과도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갑자가 임읍만이 출현했다는 것은 역사적 상황에 맞지 않는다. 다만 峯州는 오늘날 베트남의 북부로 임읍과 가까우니『舊唐書』에서는 봉주의 만을 임읍의 만으로 이해하여 기록한 것이며『新唐書』「南詔傳」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6년 9월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도 이상과 같은『舊唐書』,『新唐書』의 착오를 지적하였다.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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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年 冬 10月조에 따르면 고병이 교주성을 포위한 지 10여일 만에 성을 거의 함락시킬 뻔 하였다. 그런데 마침 王晏權으로 직무를 대행하게 한다는 조정의 명령이 당도하여 고병은 병권을 넘기고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부관인 曾袞이 보낸 승전보가 李維周를 거치지 않고 조정에 전달되어 고병의 승전보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고병을 다시 복직시키니, 고병은 해문까지 갔다가 명령을 받고 다시 돌아와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고병이 다시 와보니 이유주와 신임 경략사 왕안권이 포위를 느슨하게 했던 바람에 남조군의 태반이 도망친 상태였다. 고병은 다시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단추천과 토만으로 남조군의 향도가 된 朱道古를 목 베었다. 남조군이 달아나자 고병이 다시 土蠻으로 남조에 복속한 두 洞을 격파하고 그 추창들을 죽이니 토만으로 귀부한 자들이 1만 7천이었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서는 함통 7년(866) 10월 고병이 안남을 평정했다고 상주한 것으로 되어 있고,『新唐書』卷9 「懿宗紀」에서는 함통 7년 10월 고병이 안남을 수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고병의 안남평정은『新唐書』「南詔傳」에서 말한 것처럼 함통 7년 6월의 일이 아닌 10월의 일인 것이다. 이에 대해『資治通鑑考異』에서도『新唐書』「南詔傳」은 단지 6월까지만 기록하고 이후의 날짜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7年 11월조에 따르면 조서를 내려 안남, 옹주, 서천 제군은 각각의 관할 지역을 수비하게 하고 더 이상 나아가 남조를 공격하지 말게 하였다. 서천절도사 유동에게는 남조를 회유하게 하고 만일 이전의 우호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 동안의 행적은 일체 불문에 부치라고 하였다. 아울러 안남에 靜海軍을 설치하고 고병을 그 군의 절도사로 삼았으니 이탁의 탐욕과 부정으로 안남이 소란해진 이후로 10년만에야 비로소 안남이 평정되었다. 안남이 처음 남조의 침략에 노출된 것은 대중 12년(858)의 일이다. 고병은 안남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둘레가 3천步이며 성에 설치한 가옥의 규모는 40여만 間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宋朝에 이르기까지 안남은 정해군절도사의 主鎭이 되었다고 한다.
색인어
- 이름
- 위주(韋宙), 소업(蕭鄴), 유사진(喩士珍), 유사진, 양수(楊收), 하후자(夏侯孜), 장인(張茵), 고병(高騈), 고병, 추룡(酋龍), 양집사(楊緝思), 추천(酋遷), 범녜사(范胒些), 조락미(趙諾眉), 고병, 장전(張詮), 이차룡(李溠龍), 양집사(楊緝思), 추천(酋遷), 녜사(胒些), 낙미(諾眉)
- 지명
- 용주(容州), 등주(藤州), 남조, 수주(雟州), 대도하(大度河), 남조, 남조, 남조, 안남, 임읍(林邑), 남조, 남조, 안남, 교주, 남조, 파풍(波風), 안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