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가 安南을 함락함
남조가 점차 옹주를 핍박하니,주 001
정우(鄭愚)는 스스로 장수의 재능이 없다고 다른 사람을 택하여 바꾸어 주기를 원하였다.주 002때마침 강승훈(康承訓)
주 003
각주 003)
이 의성(義成)으로부터 돌아와서 입조(入朝)하였다.주 004康承訓:『新唐書』卷148 「康日知傳」에 부기된 「康承訓傳」에 따르면 집안의 공덕으로 인해 여러 관직을 거쳐 左神武軍將軍이 되었다. 선종 때 天德軍防禦使로 발탁되었는데 그 지역의 党項에 대해 위용을 떨쳐 그 공로로 義武軍節度使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남서도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남조의 침략을 격퇴할 것을 명받았으나 이때에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다만 그의 裨將이 사적으로 군사 300명을 모집하여 남조군을 급습, 500명을 목 베니 이에 남조군이 그 기세를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그런데 강승훈은 마치 이를 두고 적을 대파한 것처럼 조정에 보고하여 檢校尙書右僕射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실상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하여 右武威大將軍으로 자리를 옮겨 낙양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남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桂州에 잔류시킨 武寧軍의 군졸들이 복무기간이 길어짐에 불만을 품고 龐勛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기세가 대단하여 한때 徐州, 下邳 같은 江北의 대주현을 함락시키니 조정에서는 강승훈 등으로 하여금 唐軍과 沙陀의 기병부대 20만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토벌전에서 적극적으로 전투를 수행한 것은 沙陀軍이었고 그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단지 그는 반란군의 패배가 확실하게 되고 난 이후에야, 그 잔당의 추격에 나섰다. 반란이 평정된 후, 그는 檢校左僕射, 同中書門下平章事의 관직을 받았고 河東節度使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과 같은 행적으로 인해 탄핵을 받았고, 그 결과 여러 차례 강등을 거쳐 恩州司馬로 좌천되었다. 그러다가 熙宗이 즉위한 이후 그에게 左千牛衛將軍의 직위를 수여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66세로 죽었다.
각주 004)
이에 영남서도절도사(嶺南西道節度使)로 임명하고, 형주(荊州),주 005
양주(襄州),주 006
홍주(洪州),주 007
악주(鄂州)
주 008의 병사 10,000명을 징발하여 그를 따르게 하였다. 강승훈이 병사가 적다고 거절하니, 마침내 여러 도에서 병사를 크게 일으켜 5만을 보냈다. [함통 4년] 6월, 해문(海門)에 임시로 교주(交州)를 설치하여 도호부로 승격시키고,주 009
산동(山東)에서 병사 만 명을 징발하여 수비를 증강하였다. 그리고 용관경략사(容管經略使) 장인(張茵)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어서 안남을 경략하도록 명하였으나 장인이 해문에 머무르면서 감히 나가지 못하였다. 안남이 함락되었을 때, 장리(將吏)와 유민이 대부분 골짜기와 계곡에 의지하여 숨었다. 소재 지역에 조를 내려 [이들을] 불러모아 구휼하게 하고, 안남의 부세를 2년 동안 면제하여 주었다.주 010
본문에서는 강승훈이 義成에서 입조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3月조에 따르면 조정에서 義武節度使 강승훈을 장안으로 소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조서를 내려 軍校 여러 명, 사졸 수백 인을 선발하여 이들을 거느리게 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胡三省은 군교와 사졸은 義武軍에서 선발한 것이라고 하였다.『舊唐書』卷38 「지리」1에 따르면 의성군절도사의 치소는 滑州 즉 오늘날 河南 滑縣이며 의무군절도사의 치소는 定州 지금의 河北 定州이다. 따라서 ‘義成’과 ‘義武’가 같은 지역을 말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新唐書』卷148 「康日知傳」에 부기된 「康承訓傳」에 따르면 會稽縣男으로 봉해짐과 동시에 義武節度로 임용되었다 한 것을 보면『통감』에 따라 강승훈은 이 당시 의무군절도사의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義成’이라고 한『新唐書』「南詔傳」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康承訓:『新唐書』卷148 「康日知傳」에 부기된 「康承訓傳」에 따르면 집안의 공덕으로 인해 여러 관직을 거쳐 左神武軍將軍이 되었다. 선종 때 天德軍防禦使로 발탁되었는데 그 지역의 党項에 대해 위용을 떨쳐 그 공로로 義武軍節度使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남서도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남조의 침략을 격퇴할 것을 명받았으나 이때에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다만 그의 裨將이 사적으로 군사 300명을 모집하여 남조군을 급습, 500명을 목 베니 이에 남조군이 그 기세를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그런데 강승훈은 마치 이를 두고 적을 대파한 것처럼 조정에 보고하여 檢校尙書右僕射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실상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하여 右武威大將軍으로 자리를 옮겨 낙양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남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桂州에 잔류시킨 武寧軍의 군졸들이 복무기간이 길어짐에 불만을 품고 龐勛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기세가 대단하여 한때 徐州, 下邳 같은 江北의 대주현을 함락시키니 조정에서는 강승훈 등으로 하여금 唐軍과 沙陀의 기병부대 20만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토벌전에서 적극적으로 전투를 수행한 것은 沙陀軍이었고 그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단지 그는 반란군의 패배가 확실하게 되고 난 이후에야, 그 잔당의 추격에 나섰다. 반란이 평정된 후, 그는 檢校左僕射, 同中書門下平章事의 관직을 받았고 河東節度使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과 같은 행적으로 인해 탄핵을 받았고, 그 결과 여러 차례 강등을 거쳐 恩州司馬로 좌천되었다. 그러다가 熙宗이 즉위한 이후 그에게 左千牛衛將軍의 직위를 수여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66세로 죽었다.
-
각주 004)
본문에서는 강승훈이 義成에서 입조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3月조에 따르면 조정에서 義武節度使 강승훈을 장안으로 소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조서를 내려 軍校 여러 명, 사졸 수백 인을 선발하여 이들을 거느리게 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胡三省은 군교와 사졸은 義武軍에서 선발한 것이라고 하였다.『舊唐書』卷38 「지리」1에 따르면 의성군절도사의 치소는 滑州 즉 오늘날 河南 滑縣이며 의무군절도사의 치소는 定州 지금의 河北 定州이다. 따라서 ‘義成’과 ‘義武’가 같은 지역을 말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新唐書』卷148 「康日知傳」에 부기된 「康承訓傳」에 따르면 會稽縣男으로 봉해짐과 동시에 義武節度로 임용되었다 한 것을 보면『통감』에 따라 강승훈은 이 당시 의무군절도사의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義成’이라고 한『新唐書』「南詔傳」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색인어
- 이름
- 정우(鄭愚), 강승훈(康承訓), 강승훈, 장인(張茵), 장인
- 지명
- 남조, 옹주, 의성(義成), 형주(荊州), 양주(襄州), 홍주(洪州), 악주(鄂州), 해문(海門), 교주(交州), 산동(山東), 안남, 안남, 안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