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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가 安南을 함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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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南詔)
남조가 점차 옹주를 핍박하니,주 001
각주 001)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3月조에 따르면 南蠻 즉 南詔軍이 左江과 右江을 약탈하고 邕州에 근접한 것으로 되어 있다. 左江은 左溪라고도 하는데 오늘날 廣西 서남부 郁江 상류의 수원가운데 하나이다. 右江은 우계라고도 하며 역시 광서 서남부를 흐르는 욱강 상류의 수원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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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鄭愚)는 스스로 장수의 재능이 없다고 다른 사람을 택하여 바꾸어 주기를 원하였다.주 002
각주 002)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3月조에 따르면 정우는 자신이 문관이기 때문에 장수로서의 方略이 없으니 자기 대신 무관을 임용할 것을 요청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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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강승훈(康承訓) 주 003
각주 003)
康承訓:『新唐書』卷148 「康日知傳」에 부기된 「康承訓傳」에 따르면 집안의 공덕으로 인해 여러 관직을 거쳐 左神武軍將軍이 되었다. 선종 때 天德軍防禦使로 발탁되었는데 그 지역의 党項에 대해 위용을 떨쳐 그 공로로 義武軍節度使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남서도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남조의 침략을 격퇴할 것을 명받았으나 이때에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다만 그의 裨將이 사적으로 군사 300명을 모집하여 남조군을 급습, 500명을 목 베니 이에 남조군이 그 기세를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그런데 강승훈은 마치 이를 두고 적을 대파한 것처럼 조정에 보고하여 檢校尙書右僕射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실상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하여 右武威大將軍으로 자리를 옮겨 낙양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남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桂州에 잔류시킨 武寧軍의 군졸들이 복무기간이 길어짐에 불만을 품고 龐勛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기세가 대단하여 한때 徐州, 下邳 같은 江北의 대주현을 함락시키니 조정에서는 강승훈 등으로 하여금 唐軍과 沙陀의 기병부대 20만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토벌전에서 적극적으로 전투를 수행한 것은 沙陀軍이었고 그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단지 그는 반란군의 패배가 확실하게 되고 난 이후에야, 그 잔당의 추격에 나섰다. 반란이 평정된 후, 그는 檢校左僕射, 同中書門下平章事의 관직을 받았고 河東節度使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과 같은 행적으로 인해 탄핵을 받았고, 그 결과 여러 차례 강등을 거쳐 恩州司馬로 좌천되었다. 그러다가 熙宗이 즉위한 이후 그에게 左千牛衛將軍의 직위를 수여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66세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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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義成)으로부터 돌아와서 입조(入朝)하였다.주 004
각주 004)
본문에서는 강승훈이 義成에서 입조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3月조에 따르면 조정에서 義武節度使 강승훈을 장안으로 소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조서를 내려 軍校 여러 명, 사졸 수백 인을 선발하여 이들을 거느리게 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胡三省은 군교와 사졸은 義武軍에서 선발한 것이라고 하였다.『舊唐書』卷38 「지리」1에 따르면 의성군절도사의 치소는 滑州 즉 오늘날 河南 滑縣이며 의무군절도사의 치소는 定州 지금의 河北 定州이다. 따라서 ‘義成’과 ‘義武’가 같은 지역을 말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新唐書』卷148 「康日知傳」에 부기된 「康承訓傳」에 따르면 會稽縣男으로 봉해짐과 동시에 義武節度로 임용되었다 한 것을 보면『통감』에 따라 강승훈은 이 당시 의무군절도사의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義成’이라고 한『新唐書』「南詔傳」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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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영남서도절도사(嶺南西道節度使)로 임명하고, 형주(荊州),주 005
각주 005)
荊州:『舊唐書』卷39 「山南東道」 荊州조에 따르면 형주는 荊州 江陵府로 속현은 7현이다. 오늘날 湖北 松滋에서 石首에 이르는 장강의 북부 유역과 荊門, 當陽등이 그 관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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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襄州),주 006
각주 006)
襄州:『元和郡縣圖志』卷21 「山南道」 襄州조에 따르면 양주는 襄陽節度使의 치소로 속현은 7현이다. 오늘날 湖北 襄樊市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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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洪州),주 007
각주 007)
洪州:『元和郡縣圖志』卷28 「江南道」4 洪州조에 따르면 악주는 江西觀察使의 치소로 속현은 7현이다. 오늘날 江西 南昌市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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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주(鄂州) 주 008
각주 008)
鄂州:『元和郡縣圖志』卷27 「江南道」3 鄂州조에 따르면 악주는 鄂岳觀察使의 치소이다. 오늘날 湖北 武漢市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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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병사 10,000명을 징발하여 그를 따르게 하였다. 강승훈이 병사가 적다고 거절하니, 마침내 여러 도에서 병사를 크게 일으켜 5만을 보냈다. [함통 4년] 6월, 해문(海門)에 임시로 교주(交州)를 설치하여 도호부로 승격시키고,주 009
각주 009)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6월조에 따르면 조정에서 안남도호부를 폐지하고 海門鎭에 行交州, 즉 임시로 교주를 설치하였으며 右監門將軍 宋戎을 行交州刺史에, 강승훈은 安南과 諸道에서 징발한 군의 行營을 삼았다고 하였다. 즉 송융을 교주자사로 임명하여 행정을 맡기고 강승훈에게는 병력의 지휘, 작권권을 부여한 것이다. 한편 7月조에 따르면 行交州에 다시 안남도호부를 설치하고 송융을 안남경략사로 임명하였으며 산동의 병력 1만을 징발하여 이곳을 지키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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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山東)에서 병사 만 명을 징발하여 수비를 증강하였다. 그리고 용관경략사(容管經略使) 장인(張茵)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어서 안남을 경략하도록 명하였으나 장인이 해문에 머무르면서 감히 나가지 못하였다. 안남이 함락되었을 때, 장리(將吏)와 유민이 대부분 골짜기와 계곡에 의지하여 숨었다. 소재 지역에 조를 내려 [이들을] 불러모아 구휼하게 하고, 안남의 부세를 2년 동안 면제하여 주었다.주 010
각주 010)
『舊唐書』卷19상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4년 7월 초하루에 制書 즉 詔書를 내려 안남관내로 蠻賊들에 의해 피해를 입은 곳에 대해서는 本戶의 兩稅와 丁錢 2년치를 면제하였다.『舊唐書』의 경우 이와 관련한 조서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으나『新唐書』卷9 「懿宗紀」에서는 단순히 戶稅와 丁錢만을 면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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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3月조에 따르면 南蠻 즉 南詔軍이 左江과 右江을 약탈하고 邕州에 근접한 것으로 되어 있다. 左江은 左溪라고도 하는데 오늘날 廣西 서남부 郁江 상류의 수원가운데 하나이다. 右江은 우계라고도 하며 역시 광서 서남부를 흐르는 욱강 상류의 수원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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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3月조에 따르면 정우는 자신이 문관이기 때문에 장수로서의 方略이 없으니 자기 대신 무관을 임용할 것을 요청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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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康承訓:『新唐書』卷148 「康日知傳」에 부기된 「康承訓傳」에 따르면 집안의 공덕으로 인해 여러 관직을 거쳐 左神武軍將軍이 되었다. 선종 때 天德軍防禦使로 발탁되었는데 그 지역의 党項에 대해 위용을 떨쳐 그 공로로 義武軍節度使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남서도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남조의 침략을 격퇴할 것을 명받았으나 이때에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다만 그의 裨將이 사적으로 군사 300명을 모집하여 남조군을 급습, 500명을 목 베니 이에 남조군이 그 기세를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그런데 강승훈은 마치 이를 두고 적을 대파한 것처럼 조정에 보고하여 檢校尙書右僕射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실상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하여 右武威大將軍으로 자리를 옮겨 낙양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남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桂州에 잔류시킨 武寧軍의 군졸들이 복무기간이 길어짐에 불만을 품고 龐勛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기세가 대단하여 한때 徐州, 下邳 같은 江北의 대주현을 함락시키니 조정에서는 강승훈 등으로 하여금 唐軍과 沙陀의 기병부대 20만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토벌전에서 적극적으로 전투를 수행한 것은 沙陀軍이었고 그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단지 그는 반란군의 패배가 확실하게 되고 난 이후에야, 그 잔당의 추격에 나섰다. 반란이 평정된 후, 그는 檢校左僕射, 同中書門下平章事의 관직을 받았고 河東節度使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과 같은 행적으로 인해 탄핵을 받았고, 그 결과 여러 차례 강등을 거쳐 恩州司馬로 좌천되었다. 그러다가 熙宗이 즉위한 이후 그에게 左千牛衛將軍의 직위를 수여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66세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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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본문에서는 강승훈이 義成에서 입조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3月조에 따르면 조정에서 義武節度使 강승훈을 장안으로 소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조서를 내려 軍校 여러 명, 사졸 수백 인을 선발하여 이들을 거느리게 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胡三省은 군교와 사졸은 義武軍에서 선발한 것이라고 하였다.『舊唐書』卷38 「지리」1에 따르면 의성군절도사의 치소는 滑州 즉 오늘날 河南 滑縣이며 의무군절도사의 치소는 定州 지금의 河北 定州이다. 따라서 ‘義成’과 ‘義武’가 같은 지역을 말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新唐書』卷148 「康日知傳」에 부기된 「康承訓傳」에 따르면 會稽縣男으로 봉해짐과 동시에 義武節度로 임용되었다 한 것을 보면『통감』에 따라 강승훈은 이 당시 의무군절도사의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義成’이라고 한『新唐書』「南詔傳」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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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荊州:『舊唐書』卷39 「山南東道」 荊州조에 따르면 형주는 荊州 江陵府로 속현은 7현이다. 오늘날 湖北 松滋에서 石首에 이르는 장강의 북부 유역과 荊門, 當陽등이 그 관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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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襄州:『元和郡縣圖志』卷21 「山南道」 襄州조에 따르면 양주는 襄陽節度使의 치소로 속현은 7현이다. 오늘날 湖北 襄樊市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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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洪州:『元和郡縣圖志』卷28 「江南道」4 洪州조에 따르면 악주는 江西觀察使의 치소로 속현은 7현이다. 오늘날 江西 南昌市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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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鄂州:『元和郡縣圖志』卷27 「江南道」3 鄂州조에 따르면 악주는 鄂岳觀察使의 치소이다. 오늘날 湖北 武漢市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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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6월조에 따르면 조정에서 안남도호부를 폐지하고 海門鎭에 行交州, 즉 임시로 교주를 설치하였으며 右監門將軍 宋戎을 行交州刺史에, 강승훈은 安南과 諸道에서 징발한 군의 行營을 삼았다고 하였다. 즉 송융을 교주자사로 임명하여 행정을 맡기고 강승훈에게는 병력의 지휘, 작권권을 부여한 것이다. 한편 7月조에 따르면 行交州에 다시 안남도호부를 설치하고 송융을 안남경략사로 임명하였으며 산동의 병력 1만을 징발하여 이곳을 지키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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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舊唐書』卷19상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4년 7월 초하루에 制書 즉 詔書를 내려 안남관내로 蠻賊들에 의해 피해를 입은 곳에 대해서는 本戶의 兩稅와 丁錢 2년치를 면제하였다.『舊唐書』의 경우 이와 관련한 조서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으나『新唐書』卷9 「懿宗紀」에서는 단순히 戶稅와 丁錢만을 면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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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정우(鄭愚), 강승훈(康承訓), 강승훈, 장인(張茵), 장인
지명
남조, 옹주, 의성(義成), 형주(荊州), 양주(襄州), 홍주(洪州), 악주(鄂州), 해문(海門), 교주(交州), 산동(山東), 안남, 안남, 안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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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가 安南을 함락함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