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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가 交州 등을 공격함

  • 국가
    남조(南詔)
남조교주(交州)를 공격하여 안남(安南)을 침범하니, 채습이 구원을 청하였다.주 001
각주 001)
『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3년 11월 채습이 금군 3천을 이끌고 諸道의 군대와 회합하여 안남을 구원하러 간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3년 11월 雲南蠻이 안남을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11월조에 따르면 남조가 羣蠻을 이끌고 5만의 병력으로 안남을 침공하니 敕書를 내려 荊南과 湖南 두 道의 병력 2천을 징발하고 桂管에서 모병한 군대 3천을 邕州로 보내어 영남서도절도사 鄭愚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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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湖州) 형주(荊州) 계주(桂州)의 병사 5천을 일으켜 옹주(邕州)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영남위주(韋宙)가 상주하기를, “남조는 반드시 옹관(邕管) 주 002
각주 002)
邕管:『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11월조에서 인용된 韋宙의 상주에서는 ‘蠻寇必向邕州’라 하여 옹주로 되어 있다. 즉 남조의 군대가 옹관경략사의 치소인 옹주로 향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옹주는 오늘날 廣西 南寧市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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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습격할 것입니다. 가까운 곳을 먼저 막지 않고 먼 곳을 도모한다면, 적이 허를 찔러 군량 수송로를 끊고 깊이 침입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채습에게 조를 내려 해문(海門) 주 003
각주 003)
海門: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지만, 福建 龍海市 海門島가 廣州와 가까운 곳으로 가능성이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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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하게 하고,주 004
각주 004)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11월조에 대한『考異』에 따르면 해문에 주둔하라는 것은 교지를 버리고 퇴각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인데, 당시 채습은 남조군에 의해 교주성에서 포위를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작 이같은 명령을 담은 조서는 그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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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鄭愚)에게 조를 내려 군대를 나누어 막게 하였다. 채습이 군대의 증파를 요청하니, 산남동도(山南東道)의 병사주 005
각주 005)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12月조에 따르면 채습이 병력의 증파를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山南東道에 칙서를 내려 궁수 1천명을 징발하고 이를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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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인을 보냈다. 남조의 추장(酋將) 양사참(楊思僭) 마광고(麻光高)는 병사 6천을 거느리고 성에 근접하여 진을 쳤다.주 006
각주 006)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春 正月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 인용된『의종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월 안남경략사 채습이 蠻賊 楊思僭, 羅伏州 扶耶縣令 麻光高가 그 무리 5, 6천 명을 이끌고 성의 서쪽 모퉁이 아래에 주둔했다고 상주하였다.’ 즉 본문에서 말한 양사참, 마광고는 남조의 군대를 구성한 여러 만군가운데 그 일부로 이들은 교주성 서쪽에 주둔한 것이다.『蠻書』에 따르면 이들 군대는 桃花蠻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다만『의종실록』에서는 채습이 이같은 내용을 상주한 시점을 2월이라고 하였으나 사정상 맞지 않는다. 그것은 교주성이 포위된 것은 함통 3년 11월의 일이고 함락은 그 이듬해인 4년 1월의 일이다. 즉 2월에 채습이 양사참등이 쳐들어 왔다고 상주를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아마도『실록』의 날짜 기재에 착오가 있거나 또는 채습의 상주가 장안에 접수된 시점을 기록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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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통(咸通)] 4년(863) 정월 적의 공격이 더욱 거세어지자, 채습이모심의 맹언(盟言)을 베껴서 화살에 매달아 적의 진영으로 날려 보냈으나 응답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은 함락되었고, 채습의 일족으로 죽은 자가 70인이었다.주 007
각주 007)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春 正月조에 대한『考異』에서 인용된『의종실록』에는 嶺南東道節度使 韋宙의 상주가 수록되어 있다. 위주의 상주에 따르면 성이 함락된 것은 1월 7일의 일이며 채습은 오른쪽 어깨에 활을 맞고 전사하였으며 그 일족과 종자 70여 명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한편 同書 同卷 同條에 따르면 채습은 도보로 다니면서 적들과 전투를 치렀고 그 몸에 화살 10발이 박힌 채로 배를 타는 곳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배가 떠났기 때문에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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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료 번작(樊綽) 주 008
각주 008)
樊綽: 구체적인 생평은 미상이다. 다만『新唐書』卷58 「藝文」2 ‘地理類’에 따르면 번작은 咸通 연간(860~874) 嶺南西道節度使 蔡襲의 종사관으로『蠻書』10卷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다.『四庫全書』에서도『蠻書』로 되어 있으나『雲南志』,『南夷志』,『雲南史記』,『南蠻記』,『蠻志』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본서는 明初 이후로 산일되었으나 淸代에『永樂大典』에서 輯錄한 輯本이『사고전서』에 수록되어, 그 집본이 전하게 되었다.『新唐書』「南詔傳」의 남조 先世와 산천, 풍속 및 기타 五詔 관련 기술의 다수가 바로 이『만서』에 의거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만서』는 남조의 역사와 지리를 저자의 체험에 근거하여 전하고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新唐書』「南詔傳」의 오류 수정과 교감에 있어서도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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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습의 인장 을 가지고 강을 건너 탈주하였다. 형남(荊南)의 군사들이 동쪽 성곽에 들어가 고전 끝에 남조의 병사 2,000급을 베었다.주 009
각주 009)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春 正月조에 따르면 荊南, 江西, 鄂岳, 襄州에서 온 병사 400여 명은 성 동쪽의 물가로 도주하였는데, 형남 虞候인 元惟德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배가 없으니 물속에 들어가면 죽을 것이다. 차라리 성으로 돌아가 적들과 전투를 벌여 한 사람당 각자가 蠻 2명을 상대하여 승리를 하는 것이 낫다.” 마침내 성으로 돌아가 교주성의 외성의 동쪽문인 東羅門으로 돌입하여 蠻兵 2000여명을 죽였다. 그러나 그날 밤 만의 장수인 楊思僭(楊思縉)이 내성에서 나와 만군을 구원하니 惟德등은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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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에 만(蠻)은 마침내 성을 도륙내었다.주 010
각주 010)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春 正月조에 따르면 남조가 두 차례 交趾를 함락시켰는데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된 이가 15만 명이었다. 남조는 병력 2만을 남겨두어 楊思僭(楊思縉)으로 하여금 성을 점거하게 하니 谿谷과 동굴에 거주하는 夷, 獠들이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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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를 내려 모든 군대는 영남을 지키게 하고, 다시 진주경략사(秦州經略使)주 011
각주 011)
秦州經略使:『舊唐書』卷38 「地理」1에 따르면 秦州에는 절도사를 두었는데 관할 州는 3주이다. 즉 진주경략사는 진주절도사를 말한다.『元和郡縣圖志』卷39 「隴右道」上에 따르면 진주는 寶應(762, 당 숙종)이후로 토번에 의해 점거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중 3년(849) 다시 수복되었다. 오늘날 甘肅 秦安縣 서북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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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高騈) 주 012
각주 012)
高騈(?~887):『舊唐書』卷182 「高騈傳」에 따르면 그의 선조는 渤海人으로, 대대로 禁軍인 神策軍에서 관직을 하였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문인들과도 교류하여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처음에는 神策都虞候를 역임하였는데 이때 党項羌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 일로 懿宗의 총애를 받아 秦州刺史와 함께 本州의 經略使가 되었다. 이후 그는 安南과 蜀지역에서 남조와 기타 群蠻들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 燕國公에 봉해졌고 揚州大都督府長史, 淮南節度副大使知節度事, 江淮鹽鐵轉運使, 兵馬道統 등의 관직을 수여 받아 江淮지역의 군정과 재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희종의 즉위 이래로 그는 점차 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나 군벌의 경향을 띠게 되었고 黃巢의 난이 발생했을 때는 이를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않은 채 방관하였다. 심지어 황소군에 의해 낙양과 장안이 함락되었음에도 이를 구원하지 않았고 출병하라는 조정의 거듭된 요구도 거절한 채, 자신의 세력을 확충하는데만 열중하였다. 이에 희종은 그의 봉작을 올려주는 대신 그가 부여 받았던 江淮鹽鐵轉運使와 兵馬都統의 직위를 거두어 들였다.『新唐書』卷224하 「高騈傳」에 따르면 이때 그는 渤海郡王에 봉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조치로 그는 강회지역의 병권과 재정권을 장악할 근거를 상실하였고 그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비록 당조는 전국을 통제할 힘은 없었지만 비교적 藩鎭軍의 결속력이 약한 江南의 번진을 통제할 힘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반독립적인 상태로 일부 세력을 유지하면서 당시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참칭한 李熅에 호응, 그로부터 다시 병마도통과 강회염철전운사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직은 어떠한 효력도 없는 것이었고 그의 지위에 대한 공신력만을 더욱 떨어뜨렸다. 그 후 그는 부하장수 畢師鐸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였다.『新唐書』에서는 그가 희종을 구원하지 않고 독립을 꾀한 사실을 들어 황소에 버금가는 逆臣으로 규정, 逆臣傳에 立傳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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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안남도호(安南都護)로 삼았다.주 013
각주 013)
『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4년 2월 秦州經略使 高駢을 安南經略招討使에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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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물자의 수송과 징발(徵發)이 잦아짐을 보고, 나들이를 파하고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는데, 재상 두종(杜悰)이 옳지 않다고 하여 이를 그치도록 하였다.

  • 각주 001)
    『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3년 11월 채습이 금군 3천을 이끌고 諸道의 군대와 회합하여 안남을 구원하러 간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3년 11월 雲南蠻이 안남을 침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11월조에 따르면 남조가 羣蠻을 이끌고 5만의 병력으로 안남을 침공하니 敕書를 내려 荊南과 湖南 두 道의 병력 2천을 징발하고 桂管에서 모병한 군대 3천을 邕州로 보내어 영남서도절도사 鄭愚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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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邕管:『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11월조에서 인용된 韋宙의 상주에서는 ‘蠻寇必向邕州’라 하여 옹주로 되어 있다. 즉 남조의 군대가 옹관경략사의 치소인 옹주로 향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옹주는 오늘날 廣西 南寧市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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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海門: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지만, 福建 龍海市 海門島가 廣州와 가까운 곳으로 가능성이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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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11월조에 대한『考異』에 따르면 해문에 주둔하라는 것은 교지를 버리고 퇴각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인데, 당시 채습은 남조군에 의해 교주성에서 포위를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작 이같은 명령을 담은 조서는 그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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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12月조에 따르면 채습이 병력의 증파를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山南東道에 칙서를 내려 궁수 1천명을 징발하고 이를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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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春 正月조에 대한『資治通鑑考異』에서 인용된『의종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월 안남경략사 채습이 蠻賊 楊思僭, 羅伏州 扶耶縣令 麻光高가 그 무리 5, 6천 명을 이끌고 성의 서쪽 모퉁이 아래에 주둔했다고 상주하였다.’ 즉 본문에서 말한 양사참, 마광고는 남조의 군대를 구성한 여러 만군가운데 그 일부로 이들은 교주성 서쪽에 주둔한 것이다.『蠻書』에 따르면 이들 군대는 桃花蠻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다만『의종실록』에서는 채습이 이같은 내용을 상주한 시점을 2월이라고 하였으나 사정상 맞지 않는다. 그것은 교주성이 포위된 것은 함통 3년 11월의 일이고 함락은 그 이듬해인 4년 1월의 일이다. 즉 2월에 채습이 양사참등이 쳐들어 왔다고 상주를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아마도『실록』의 날짜 기재에 착오가 있거나 또는 채습의 상주가 장안에 접수된 시점을 기록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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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春 正月조에 대한『考異』에서 인용된『의종실록』에는 嶺南東道節度使 韋宙의 상주가 수록되어 있다. 위주의 상주에 따르면 성이 함락된 것은 1월 7일의 일이며 채습은 오른쪽 어깨에 활을 맞고 전사하였으며 그 일족과 종자 70여 명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한편 同書 同卷 同條에 따르면 채습은 도보로 다니면서 적들과 전투를 치렀고 그 몸에 화살 10발이 박힌 채로 배를 타는 곳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배가 떠났기 때문에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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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樊綽: 구체적인 생평은 미상이다. 다만『新唐書』卷58 「藝文」2 ‘地理類’에 따르면 번작은 咸通 연간(860~874) 嶺南西道節度使 蔡襲의 종사관으로『蠻書』10卷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다.『四庫全書』에서도『蠻書』로 되어 있으나『雲南志』,『南夷志』,『雲南史記』,『南蠻記』,『蠻志』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본서는 明初 이후로 산일되었으나 淸代에『永樂大典』에서 輯錄한 輯本이『사고전서』에 수록되어, 그 집본이 전하게 되었다.『新唐書』「南詔傳」의 남조 先世와 산천, 풍속 및 기타 五詔 관련 기술의 다수가 바로 이『만서』에 의거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만서』는 남조의 역사와 지리를 저자의 체험에 근거하여 전하고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新唐書』「南詔傳」의 오류 수정과 교감에 있어서도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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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春 正月조에 따르면 荊南, 江西, 鄂岳, 襄州에서 온 병사 400여 명은 성 동쪽의 물가로 도주하였는데, 형남 虞候인 元惟德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배가 없으니 물속에 들어가면 죽을 것이다. 차라리 성으로 돌아가 적들과 전투를 벌여 한 사람당 각자가 蠻 2명을 상대하여 승리를 하는 것이 낫다.” 마침내 성으로 돌아가 교주성의 외성의 동쪽문인 東羅門으로 돌입하여 蠻兵 2000여명을 죽였다. 그러나 그날 밤 만의 장수인 楊思僭(楊思縉)이 내성에서 나와 만군을 구원하니 惟德등은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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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4年 春 正月조에 따르면 남조가 두 차례 交趾를 함락시켰는데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된 이가 15만 명이었다. 남조는 병력 2만을 남겨두어 楊思僭(楊思縉)으로 하여금 성을 점거하게 하니 谿谷과 동굴에 거주하는 夷, 獠들이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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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秦州經略使:『舊唐書』卷38 「地理」1에 따르면 秦州에는 절도사를 두었는데 관할 州는 3주이다. 즉 진주경략사는 진주절도사를 말한다.『元和郡縣圖志』卷39 「隴右道」上에 따르면 진주는 寶應(762, 당 숙종)이후로 토번에 의해 점거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중 3년(849) 다시 수복되었다. 오늘날 甘肅 秦安縣 서북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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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高騈(?~887):『舊唐書』卷182 「高騈傳」에 따르면 그의 선조는 渤海人으로, 대대로 禁軍인 神策軍에서 관직을 하였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문인들과도 교류하여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처음에는 神策都虞候를 역임하였는데 이때 党項羌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 일로 懿宗의 총애를 받아 秦州刺史와 함께 本州의 經略使가 되었다. 이후 그는 安南과 蜀지역에서 남조와 기타 群蠻들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 燕國公에 봉해졌고 揚州大都督府長史, 淮南節度副大使知節度事, 江淮鹽鐵轉運使, 兵馬道統 등의 관직을 수여 받아 江淮지역의 군정과 재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희종의 즉위 이래로 그는 점차 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나 군벌의 경향을 띠게 되었고 黃巢의 난이 발생했을 때는 이를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않은 채 방관하였다. 심지어 황소군에 의해 낙양과 장안이 함락되었음에도 이를 구원하지 않았고 출병하라는 조정의 거듭된 요구도 거절한 채, 자신의 세력을 확충하는데만 열중하였다. 이에 희종은 그의 봉작을 올려주는 대신 그가 부여 받았던 江淮鹽鐵轉運使와 兵馬都統의 직위를 거두어 들였다.『新唐書』卷224하 「高騈傳」에 따르면 이때 그는 渤海郡王에 봉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조치로 그는 강회지역의 병권과 재정권을 장악할 근거를 상실하였고 그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비록 당조는 전국을 통제할 힘은 없었지만 비교적 藩鎭軍의 결속력이 약한 江南의 번진을 통제할 힘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반독립적인 상태로 일부 세력을 유지하면서 당시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참칭한 李熅에 호응, 그로부터 다시 병마도통과 강회염철전운사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직은 어떠한 효력도 없는 것이었고 그의 지위에 대한 공신력만을 더욱 떨어뜨렸다. 그 후 그는 부하장수 畢師鐸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였다.『新唐書』에서는 그가 희종을 구원하지 않고 독립을 꾀한 사실을 들어 황소에 버금가는 逆臣으로 규정, 逆臣傳에 立傳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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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新唐書』卷9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4년 2월 秦州經略使 高駢을 安南經略招討使에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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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채습, 위주(韋宙), 채습, 정우(鄭愚), 채습, 양사참(楊思僭), 마광고(麻光高), 채습, 이모심, 채습, 번작(樊綽), 채습, 고병(高騈), 두종(杜悰)
지명
남조, 교주(交州), 안남(安南), 호주(湖州), 형주(荊州), 계주(桂州), 옹주(邕州), 영남, 남조, 옹관(邕管), 해문(海門), 남조, 형남(荊南), 남조, 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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