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경과 채습의 반목
마침 조를 내려 좌서자(左庶子) 채경(蔡京)에게 영남의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주 001
채경은 [채습이] 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하여, 그가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방해하여 좌절시켰다. 그리고 말하기를, “남방은 본래 걱정이 없었는데, 무인들이 공을 바라고 병사를 많이 모아 군량을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변방의 병사를 돌려보내 재용을 아끼십시오.”라고 하였다.주 002
채습은 [이에 대한] 불가함을 고집하고, 5천의 군사를 남길 것을 원하였으나, 여러 번 표를 올려도 답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남조가 틈을 엿본 지 오래되었음을 세세히 아뢰고, 필사적으로 상(狀)을 올리길 10차례나 하였다.주 003[그러나] 조정이 어리석고 기강이 없어서 이를 살피지 못하였다. 채경이 돌아와 상주하였는데, 황제의 신임을 얻은 바가 커서, 다시 조를 내려 선위안무사(宣慰安撫使)로 삼았다.주 004
각주 004)
곧이어 광주(廣州)를 떼어내어 따로 세워 영남동도(嶺南東道)로 삼았다. 그리고 옹주(邕州)는 서도(西道)로 하여, 공주(龔州)
주 005
상주(象州)
주 006『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3月조에 따르면 채경이 영남의 일을 처리한 후 장안으로 돌아와 관련된 사안을 아뢰었는데 그것이 황제의 뜻에 부합하여 그를 權知太僕卿에 삼고 荊襄以南의 선위안무사로 보임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채경이 장안으로 돌아가 선위안무사에 임명된 것은 영남의 군대를 철수 시킬 것을 건의한 동 5월 이전의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해 채경은 3월에 선위안무사에 임명되어 다시 영남에 왔고 거기서 5월에 영남의 군대 철수와 관련한 건의를 올린 것이다. 본문의 채경 관련기록이 선후가 뒤바뀌었다.
각주 006)
등주(藤州)
주 007
암주(巖州)
주 008를 소속 주(州)로 하였다.주 009이에 채경을 서도절도사(西道節度使)로 임명하였다.주 010象州: 隋 開皇 11년(591)에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지금의 廣西 象州縣 東南 上古城村인 桂林縣이었다.『新唐書』「地理志」에 의하면 象山이라는 이름 때문에 붙여진 州名으로서 大業 2년(606)에 폐지되었다가 武德 4년(621) 다시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武德縣으로 지금의 象州縣 서북 30리에 위치하였다. 貞觀 13년(639)에 지금 象州縣 동북에 있었던 武化縣으로 옮겼다. 천보 원년(742) 象山郡이 되었다가 乾元 원년(758) 다시 象州가 되어 지금의 廣西 象州와 武宣 등의 縣地를 통할하였다. 大曆 11년(776)에 陽壽縣으로 치소가 옮겼는데, 지금의 象州縣이다. 桂管經略使 관할이었다.
각주 010)
채경은 속이 좁고 고집이 세며 탐욕이 많은 사람으로 법령의 조문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포훈고착법(炮熏刳斮法)주 011을 만들어 시행하니 아랫사람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였다. [결국 그 곳] 군사들에 의해 쫓겨나 등주(藤州)로 달아났다.주 012황제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 공토사인(攻討使印)주 013을 만들고, 향병과 주변 도(道)의 군대를 불러 모아 옹주(邕州)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기지 못하고 군대는 궤멸하였으며, [채경은] 강등당해 애주(崖州)
주 014에서 죽었다.주 015계관관찰사(桂管觀察使)주 016
정우(鄭愚)로 하여금 절도사를 대신하게 하였다.『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3년(862) 5월 嶺南東道와 西道가 분리될 당시 영남동도절도사에 임명된 이는 鄭愚였고 영남서도절도사는 宋戎이었다. 그런데『新唐書』卷9 「懿宗紀」에서는 함통 3년 9월 채경이 영남서도 군인들의 반란에 의해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5월조에 따르면 칙서를 내려 영남절도사 위주를 동도절도사에, 채경을 서도절도사에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는『資治通鑑考異』나 호삼성의 주에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채경이 함통 3년 5월에서 9월 사이 영남서도절도사에 재직했던 것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象州: 隋 開皇 11년(591)에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지금의 廣西 象州縣 東南 上古城村인 桂林縣이었다.『新唐書』「地理志」에 의하면 象山이라는 이름 때문에 붙여진 州名으로서 大業 2년(606)에 폐지되었다가 武德 4년(621) 다시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武德縣으로 지금의 象州縣 서북 30리에 위치하였다. 貞觀 13년(639)에 지금 象州縣 동북에 있었던 武化縣으로 옮겼다. 천보 원년(742) 象山郡이 되었다가 乾元 원년(758) 다시 象州가 되어 지금의 廣西 象州와 武宣 등의 縣地를 통할하였다. 大曆 11년(776)에 陽壽縣으로 치소가 옮겼는데, 지금의 象州縣이다. 桂管經略使 관할이었다.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3년(862) 5월 嶺南東道와 西道가 분리될 당시 영남동도절도사에 임명된 이는 鄭愚였고 영남서도절도사는 宋戎이었다. 그런데『新唐書』卷9 「懿宗紀」에서는 함통 3년 9월 채경이 영남서도 군인들의 반란에 의해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5월조에 따르면 칙서를 내려 영남절도사 위주를 동도절도사에, 채경을 서도절도사에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는『資治通鑑考異』나 호삼성의 주에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채경이 함통 3년 5월에서 9월 사이 영남서도절도사에 재직했던 것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색인어
- 이름
- 채경(蔡京), 채경, 채습, 채습, 채경, 채경, 채경, 정우(鄭愚)
- 지명
- 영남, 남조, 광주(廣州), 옹주(邕州), 공주(龔州), 상주(象州), 등주(藤州), 암주(巖州), 등주(藤州), 옹주(邕州), 애주(崖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