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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綰洞 수령 李由獨이 蠻에 부속

  • 국가
    남조(南詔)
안남(安南)의 도림인(桃林人)은 임서원(林西原) 주 001
각주 001)
林西原:『資治通鑑』卷249 「唐紀」65 大中 12年(858) 6月조에 따르면 峯州에 林西原이 있다하였고 이에 대해 호삼성은 임서원은 봉주의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봉주는『元和郡縣圖志』卷38 「嶺南道」5에 峯州조에 따르면 안남도호부 소속의 주로 관할 현은 2현이다. 봉주는 오늘날 베트남 永富省 白鶴縣 南風州이며 林西原은 베트남 북부의 永富省 경계, 하노이시 서북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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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거주하였다. 칠관동(七綰洞) 수령 이유독(李由獨)이 그들을 지휘하여, 해마다 변방을 지켰다. 이탁(李琢)안남에 있을 때, 겨울철 수비병주 002
각주 002)
『資治通鑑』卷249 「唐紀」65 大中 12年(858) 6月조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남방의 덥고 습한 병마의 기운은 겨울이 되면 약해지기 때문에 蠻이 이때를 틈타 노략질을 하므로 ‘防冬兵’ 즉 겨울에 대비한 군사를 설치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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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을 파하자고 상주하면서 이유독이면 한 부대를 이루어 만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주 003
각주 003)
『資治通鑑』卷249 「唐紀」65 大中 12年(858) 6月조에 따르면 防冬兵을 혁파하고 이유독에게 그 책무를 맡길 것을 건의한 이는 ‘知峯州者’로 되어 있다.『蠻書』卷4 「名類」4에서도 대중 8년(854) 이래로 ‘안남도호가 멋대로 임서원의 방동병을 혁파하자 동주인 이유독 등 칠관의 수령들이 만의 꾐에 넘어갔다(自大中八年, 安南都護擅罷林西原防冬戍卒, 洞主李由獨等七綰首領被蠻誘引)’고 하였으니 이탁이 防冬兵 혁파를 주청했다는『新唐書』본문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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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의 추장이 딸을 유독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니,주 004
각주 004)
『資治通鑑』卷249 「唐紀」65 大中 12年(858) 6月조에 따르면 남조의 拓東節度使가 글을 보내 이유독을 회유하고 자신의 외조카를 유독의 자식에게 처로 주었으며 그 아들을 탁동의 押牙로 임명하니 유독이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어 남조에 신속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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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관동이 [무리를] 들어서 만에게 부속하였는데, 왕관(王寬)이 제어하지 못하였다. [함통] 3년(862)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 채습(蔡襲)에게 [안남경략초토사] 대신하게 하고 제도(諸道)의 병사 2만을 보내 주둔하여 지키게 하니, 남조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주 005
각주 005)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2月조에 따르면 조정에서는 전호남관찰사인 채습으로 하여금 안남경략사를 대신하게 하고 許州, 滑州, 徐州, 汴州, 荊州, 襄州, 潭州, 卾州 등의 병력 3만을 징발, 이를 채습에게 주어 방어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군의 병력이 점차 증강되니 남조가 마침내 퇴각하였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3년(862) 11월 장군 채습을 보내 금군 3천을 이끌고 제도의 군사들과 조우하여 안남을 구원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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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林西原:『資治通鑑』卷249 「唐紀」65 大中 12年(858) 6月조에 따르면 峯州에 林西原이 있다하였고 이에 대해 호삼성은 임서원은 봉주의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봉주는『元和郡縣圖志』卷38 「嶺南道」5에 峯州조에 따르면 안남도호부 소속의 주로 관할 현은 2현이다. 봉주는 오늘날 베트남 永富省 白鶴縣 南風州이며 林西原은 베트남 북부의 永富省 경계, 하노이시 서북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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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資治通鑑』卷249 「唐紀」65 大中 12年(858) 6月조에 대한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남방의 덥고 습한 병마의 기운은 겨울이 되면 약해지기 때문에 蠻이 이때를 틈타 노략질을 하므로 ‘防冬兵’ 즉 겨울에 대비한 군사를 설치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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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資治通鑑』卷249 「唐紀」65 大中 12年(858) 6月조에 따르면 防冬兵을 혁파하고 이유독에게 그 책무를 맡길 것을 건의한 이는 ‘知峯州者’로 되어 있다.『蠻書』卷4 「名類」4에서도 대중 8년(854) 이래로 ‘안남도호가 멋대로 임서원의 방동병을 혁파하자 동주인 이유독 등 칠관의 수령들이 만의 꾐에 넘어갔다(自大中八年, 安南都護擅罷林西原防冬戍卒, 洞主李由獨等七綰首領被蠻誘引)’고 하였으니 이탁이 防冬兵 혁파를 주청했다는『新唐書』본문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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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資治通鑑』卷249 「唐紀」65 大中 12年(858) 6月조에 따르면 남조의 拓東節度使가 글을 보내 이유독을 회유하고 자신의 외조카를 유독의 자식에게 처로 주었으며 그 아들을 탁동의 押牙로 임명하니 유독이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어 남조에 신속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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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資治通鑑』卷250 「唐紀」66 咸通 3年 2月조에 따르면 조정에서는 전호남관찰사인 채습으로 하여금 안남경략사를 대신하게 하고 許州, 滑州, 徐州, 汴州, 荊州, 襄州, 潭州, 卾州 등의 병력 3만을 징발, 이를 채습에게 주어 방어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군의 병력이 점차 증강되니 남조가 마침내 퇴각하였다. 한편『舊唐書』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3년(862) 11월 장군 채습을 보내 금군 3천을 이끌고 제도의 군사들과 조우하여 안남을 구원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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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이유독(李由獨), 이탁(李琢), 이유독, 유독, 왕관(王寬), 채습(蔡襲)
지명
안남(安南), 임서원(林西原), 안남, 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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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綰洞 수령 李由獨이 蠻에 부속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