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이 이모심을 남조왕으로 책봉함
이듬해(794) 여름 6월에 이모심을 책봉하여 남조왕(南詔王)으로 삼았다.주 001사부낭중(祠部郞中) 원자(袁滋)로 하여금 지절(持節)을 갖고 이를 맡도록 하고, 성도소윤(成都少尹) 방기(龐頎)를 부사(副使)로, 최좌시를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구문진(俱文珍)이 선위사(宣慰使)를 맡고, 유유암(劉幽巖)이 판관이 되었다. 황금인(黃金印)을 내렸는데, ‘정원책남조인(貞元冊南詔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원자가 대화성(大和城)에 이르자, 이모심은 형 몽세라물(蒙細羅勿) 등을 보내어 좋은 말 60필을 이끌고 맞이하게 하였다. 말들은 금으로 만든 굴레와 옥으로 된 굴레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병사들은 창을 들고 길 양쪽으로 늘어 서 있었다. 이모심은 황금 갑옷에 호피(虎皮)를 걸치고 쌍탁초(雙鐸韒)를 잡고 있었다. 창을 들고 있는 자 1,000 명이 호위하였는데, 대상(大象) 12마리를 앞에 끌어다 놓았고, 이어서 기병과 보병이 차례로 도열하였다. 이른 아침 책봉을 수여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모심은 관리들을 이끌고 북면(北面)하여 서고, 선위사(宣慰使)주 002
각주 002)
는 동쪽을 향하여 서니, 책봉하는 사신이 남쪽을 향하여 서서, 책봉을 내리는 조서를 읽었다. 의례를 돕는 자가 이모심을 이끌어 그 자리를 나아가 꿇어 앉아 책인을 받게 하니,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내려준 의복과 의례용품을 받았다. [이모심이] 물러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연간에 증조와 조부가 모두 책봉을 받아 왕작을 이었는데, 이로부터 50년이 되었습니다. 정원황제(貞元皇帝)
주 003께서 상처를 씻고 공을 인정하여 다시 작명(爵名)을 내리시니, 자자손손 영원히 당의 신하가 될 것입니다” 이어서 그 아래에서 커다란 연회를 베풀고 사신들을 접대하면서, 은평탈마두반(銀平脫馬頭盤) 두 개를 들고 와서 원자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천보(天寶)시 선군(先君)이 홍려소경(鴻臚少卿)으로 숙위할 때 황제가 내린 것입니다”고 하였다. 또 피리 부는 사람과 노래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모두 머리가 희끗 희끗 하였다. 이들을 원자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들은 선군이 귀국할 때 황제가 내려주신 호부(胡部)와 구자악(龜玆樂)을 연주하는 두 악대(樂隊)주 004宣慰使: 唐代 官名으로, 憲宗 平淄靑節度留後 李師道가 그 땅을 三鎭으로 나누어, 淄靑十二州宣慰使를 증설하였는데, 고정된 제도가 아니었다. 元代는 宣慰使司를 두었는데, ‘宣慰司都元帥府’, ‘宣慰司兼管軍萬戶府’라고 하면서 軍民事務를 관장하는데, 道로 나누어 郡縣을 관리하였다. 郡縣의 요구사항을 行省에 전달하고, 行省의 政令을 郡縣에 전달하는 등 行省과 郡縣사이의 연락을 맡았다. 만약 변경지구에 군사활동이 있으면 都元帥府, 元帥府 혹은 軍萬戶府를 겸하였다. 少數民族地區에서는 土官을 주로 썼는데, 明淸시기 宣慰는 모두 西南海 少數地區 土司世襲官職에 사용되었다.
각주 004)
였는데, 지금은 다 죽어서 없어지고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았습니다”고 하였다. 술이 돌자 이모심이 앉은 채로 원자 앞에 술잔을 올렸다. 원자가 술잔을 받으며, “남조는 마땅히 조상이 이룬 업적을 깊이 새겨 충성을 다하고, 영원히 서남의 번병(藩屛)이 되어야 할 것으로, 후사에 이르러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모심이 절을 올리며 말하기를, “감히 사자께서 명하신 바를 받들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원자가 돌아갈 때 다시 청평관 윤보추(尹輔酋) 등 7인을 딸려 보내 천자에게 사례하게 하고, 탁초(鐸鞘),주 005낭검(浪劍),주 006울인(鬱刃), 생금(生金),주 007슬슬(瑟瑟), 우황(牛黃), 호박(琥珀), 첨(氎), 방사(紡絲), 코끼리, 무소, 월섬(越睒)의 통윤마(統倫馬)주 008를 바쳤다.주 009탁초라는 것은 모양이 [부러지고] 남은 칼날[殘刃]과 같은데, 구멍이 있어서 옆으로 이을 수 있다. 여수(麗水)에서 나며 금으로 장식하였는데, 내려치면 뚫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족 사람들이 특별히 보배로 여기는데, 달마다 희생의 피를 바쳐 제사지낸다. 울인은 주조할 때 독약을 함께 섞어 단련하는데, 이를 만들 때 별처럼 빛이 나게 되는데, 무릇 10년은 걸려야 완성된다. 말의 피로 담금질하고 단단한 무소뿔로 창 머리를 장식하는데, 사람을 찌르면 즉사한다. 낭인(浪人)이 주조하는 까닭에 낭검(浪劍)이라 이름하였는데, 왕이 패용하는 검은 7대를 전하여 온 것이다.『隋書』卷15 「音樂志」下에 따르면 隋 文帝 開皇(581~600) 초에 처음으로 令을 정하여 七部樂을 두었는데 첫 번째가 國伎, 두 번째가 淸商伎, 세 번째가 高麗伎, 네 번째가 天竺伎, 다섯 번째가 安國伎, 여섯 번째가 龜茲伎, 일곱 번째가 文康伎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煬帝 大業 연간에 비로소 淸樂, 西涼, 龜茲, 天竺, 康國, 疎勒, 安國, 高麗, 禮畢을 정하여 九部를 편성했다고 한다. 이 아홉 가지 가운데 淸樂, 禮畢은 중원의 음악이고 나머지는 四夷의 음악을 채용한 것이다. 한편『通典』卷146 「樂」6 讌樂조에 따르면 연악의 경우 武德初에는 이를 개정할 겨를이 없어 매번 연회를 베풀 때마다 수나라의 舊制를 답습하여 구부악을 연주하였는데 첫 번째가 讌樂, 두 번째가 淸商, 세 번째가 西涼, 네 번째가 扶南, 다섯 번째가 高麗, 여섯 번째가 龜玆, 일곱 번째가 安國, 여덟 번째가 疎勒, 아홉 번째가 康國이었다고 한다.『唐會要』卷33 讌樂조도『통전』의 기술과 같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龜玆音聲’은 바로 唐 九部樂의 하나인 龜玆樂을 연주하는 악대를 말한다. 한편『新唐書』卷29 「音樂」2에 따르면 新聲이 河西에서 전해졌는데 胡音聲이라고 불렀으며 龜玆樂, 散樂과 함께 당시에는 중시되었으나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胡部는 바로 이 胡音聲을 연주하는 樂隊를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 각주 001)
-
각주 002)
宣慰使: 唐代 官名으로, 憲宗 平淄靑節度留後 李師道가 그 땅을 三鎭으로 나누어, 淄靑十二州宣慰使를 증설하였는데, 고정된 제도가 아니었다. 元代는 宣慰使司를 두었는데, ‘宣慰司都元帥府’, ‘宣慰司兼管軍萬戶府’라고 하면서 軍民事務를 관장하는데, 道로 나누어 郡縣을 관리하였다. 郡縣의 요구사항을 行省에 전달하고, 行省의 政令을 郡縣에 전달하는 등 行省과 郡縣사이의 연락을 맡았다. 만약 변경지구에 군사활동이 있으면 都元帥府, 元帥府 혹은 軍萬戶府를 겸하였다. 少數民族地區에서는 土官을 주로 썼는데, 明淸시기 宣慰는 모두 西南海 少數地區 土司世襲官職에 사용되었다.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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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隋書』卷15 「音樂志」下에 따르면 隋 文帝 開皇(581~600) 초에 처음으로 令을 정하여 七部樂을 두었는데 첫 번째가 國伎, 두 번째가 淸商伎, 세 번째가 高麗伎, 네 번째가 天竺伎, 다섯 번째가 安國伎, 여섯 번째가 龜茲伎, 일곱 번째가 文康伎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煬帝 大業 연간에 비로소 淸樂, 西涼, 龜茲, 天竺, 康國, 疎勒, 安國, 高麗, 禮畢을 정하여 九部를 편성했다고 한다. 이 아홉 가지 가운데 淸樂, 禮畢은 중원의 음악이고 나머지는 四夷의 음악을 채용한 것이다. 한편『通典』卷146 「樂」6 讌樂조에 따르면 연악의 경우 武德初에는 이를 개정할 겨를이 없어 매번 연회를 베풀 때마다 수나라의 舊制를 답습하여 구부악을 연주하였는데 첫 번째가 讌樂, 두 번째가 淸商, 세 번째가 西涼, 네 번째가 扶南, 다섯 번째가 高麗, 여섯 번째가 龜玆, 일곱 번째가 安國, 여덟 번째가 疎勒, 아홉 번째가 康國이었다고 한다.『唐會要』卷33 讌樂조도『통전』의 기술과 같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龜玆音聲’은 바로 唐 九部樂의 하나인 龜玆樂을 연주하는 악대를 말한다. 한편『新唐書』卷29 「音樂」2에 따르면 新聲이 河西에서 전해졌는데 胡音聲이라고 불렀으며 龜玆樂, 散樂과 함께 당시에는 중시되었으나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胡部는 바로 이 胡音聲을 연주하는 樂隊를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색인어
- 이름
- 이모심, 원자(袁滋), 방기(龐頎), 최좌시, 구문진(俱文珍), 유유암(劉幽巖), 원자, 이모심, 몽세라물(蒙細羅勿), 이모심, 이모심, 이모심, 이모심, 정원황제(貞元皇帝), 원자, 원자, 이모심, 원자, 원자, 이모심, 원자, 윤보추(尹輔酋)
- 지명
- 대화성(大和城), 당, 남조, 여수(麗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