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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이모심이 당에 귀의하고자 함

  • 국가
    남조(南詔)
그러나 토번이 부세를 강요하는 것이 매우 많고 그 험한 요충지를 모두 빼앗아 영후(營候)를 세우고 해마다 병력을 차출하여 방비를 돕게 하니, 이모심이 점차 고심하게 되었다. 옛 서노령(西瀘令)주 001
각주 001)
西瀘:『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西瀘縣조에 따르면 서노현은 雟州 소속의 현으로 수주에서는 남서쪽으로 27리 떨어져있다. 唐 天寶 원년(742) 可泉縣을 개칭하여 설치한 것으로, 治所는 지금의 四川 西昌市 西南 佑君鎭이었는데, 후에 南詔에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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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鄭回) 주 002
각주 002)
鄭回: 생졸년은 미상인데, 唐代 相州人으로 玄宗 天寶연간에 明經으로 출사하여, 天寶연간(742~756) 西瀘縣令이 되었다. 757年 安史의 亂이 일어나 南詔가 雟州를 공격하였을 때 鄭回는 포로가 되었다. 閤邏鳳은 그가 儒學에 지식이 있어 심히 중용하여 王室의 教師가 되었다. 異牟尋이 즉위한 후 南詔의 淸平官이 되어 정사를 맡으면서 적극적으로 漢化를 추진하면서, 南詔와 唐과의 友好關系를 회복하려 하였다. 그가〈南詔德化碑〉의 비문을 찬술하는데 관여하기도 하였다. 德宗 貞元연간에 南詔와 唐이 修好하도록 권하였고 정원 10년(794) 唐과 點蒼山 神祠에서 맹약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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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당의 관리이었는데, 이전에 수주(雟州)가 점령될 때 포로가 되었다. 합라봉은 그가 유학에 힘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높이 사서 ‘만리(蠻利)’라 부르고 자제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 때 매질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나중에 청평관으로 삼았다. [정회가] 이모심을 설득하기를, “중국은 예의가 있어서 강제로 요구하는 것이 적습니다. 토번이 탐욕스럽고 모질기가 끝이 없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을 버리고 다시 에 귀의한다면, 멀리 변방수비에 병력을 제공하는 수고가 없을 것이니, 이보다 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모심이 그 말을 좋게 여겨 점차 [당에] 내부할 것을 도모하였으나, 감히 드러내지 못하였다. 마침 절도사 위고(韋皋) 주 003
각주 003)
韋皋(746~806):『舊唐書』에서는 ‘韋皐’로 되어 있다.『舊唐書』卷140 「韋皐傳」에 따르면 代宗 大曆初 建陵挽郞, 華州參軍 등을 거쳐 權知隴州行營留後事가 되었다. 建中 4년(783) 淮西의 李希烈과 그에 이은 朱泚의 반역에 단호이 대처한 공으로 隴州刺史 奉義軍節度가 되었다. 興元 元年(784) 장안이 수복된 후, 그는 左金吾衛將軍, 大將軍을 거쳐 貞元 元年(785) 成都尹 劍南西川節度使가 되었다. 이후 그는 생을 마칠 때까지 약 21년 동안 서천에 재직하면서 토번의 압력으로 인해 단절된 남조의 조공을 부활 시켰고, 여러 차례 토번의 침입을 크게 격퇴하였으며 토번에 의해 침탈당한 雟州를 수복하였다. 또한 수비에만 그치지 않고 정원 17년에는 휘하의 병력을 동원, 토번을 공격하여 그 군사 16만을 격파하고 그 城 7개와 軍鎭 5개를 빼앗는 전공을 올렸는데, 이때 당군은 덕종초 토번에 의해 빼앗긴 維州까지 진격했다 돌아왔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마침내 南康郡王에 봉해졌다. 이후에도 계속 서천에 주둔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후 권신 王叔文, 王伾들과 사이가 나빠 서천절도사이자 大臣으로서의 지위를 근거로 皇太子의 監國을 적극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는데, 이가 바로 헌종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해에 갑자기 질병으로 사망하였으며 太師에 추증되었다. 비록 그가 서천에 재직한 21년 동안 토번, 남조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 대외적으로는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부세를 과중하게 징수하는 바람에 정작 내정에 있어서는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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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여러 만들을 위무하는 것이 위엄과 은혜가 있어, 여러 만들이 두루 이모심의 말을 듣고 위고에게 알리니, 당시가 정원(貞元, 唐 德宗, 784~804) 4년(788)이었다. 위고가 첩자를 통하여 [이모심에게] 서찰을 보내었다. 토번이 의심하여 대신(大臣)의 아들을 볼모로 요구하니 이모심이 더욱 원망하였다. 5년 뒤 정책을 결정하여, 사자 3인을 길을 달리하여 동시에 성도(成都)에 이르게 하였다. 위고에게 백서(帛書)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각주 001)
    西瀘:『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西瀘縣조에 따르면 서노현은 雟州 소속의 현으로 수주에서는 남서쪽으로 27리 떨어져있다. 唐 天寶 원년(742) 可泉縣을 개칭하여 설치한 것으로, 治所는 지금의 四川 西昌市 西南 佑君鎭이었는데, 후에 南詔에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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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鄭回: 생졸년은 미상인데, 唐代 相州人으로 玄宗 天寶연간에 明經으로 출사하여, 天寶연간(742~756) 西瀘縣令이 되었다. 757年 安史의 亂이 일어나 南詔가 雟州를 공격하였을 때 鄭回는 포로가 되었다. 閤邏鳳은 그가 儒學에 지식이 있어 심히 중용하여 王室의 教師가 되었다. 異牟尋이 즉위한 후 南詔의 淸平官이 되어 정사를 맡으면서 적극적으로 漢化를 추진하면서, 南詔와 唐과의 友好關系를 회복하려 하였다. 그가〈南詔德化碑〉의 비문을 찬술하는데 관여하기도 하였다. 德宗 貞元연간에 南詔와 唐이 修好하도록 권하였고 정원 10년(794) 唐과 點蒼山 神祠에서 맹약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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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韋皋(746~806):『舊唐書』에서는 ‘韋皐’로 되어 있다.『舊唐書』卷140 「韋皐傳」에 따르면 代宗 大曆初 建陵挽郞, 華州參軍 등을 거쳐 權知隴州行營留後事가 되었다. 建中 4년(783) 淮西의 李希烈과 그에 이은 朱泚의 반역에 단호이 대처한 공으로 隴州刺史 奉義軍節度가 되었다. 興元 元年(784) 장안이 수복된 후, 그는 左金吾衛將軍, 大將軍을 거쳐 貞元 元年(785) 成都尹 劍南西川節度使가 되었다. 이후 그는 생을 마칠 때까지 약 21년 동안 서천에 재직하면서 토번의 압력으로 인해 단절된 남조의 조공을 부활 시켰고, 여러 차례 토번의 침입을 크게 격퇴하였으며 토번에 의해 침탈당한 雟州를 수복하였다. 또한 수비에만 그치지 않고 정원 17년에는 휘하의 병력을 동원, 토번을 공격하여 그 군사 16만을 격파하고 그 城 7개와 軍鎭 5개를 빼앗는 전공을 올렸는데, 이때 당군은 덕종초 토번에 의해 빼앗긴 維州까지 진격했다 돌아왔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마침내 南康郡王에 봉해졌다. 이후에도 계속 서천에 주둔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후 권신 王叔文, 王伾들과 사이가 나빠 서천절도사이자 大臣으로서의 지위를 근거로 皇太子의 監國을 적극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는데, 이가 바로 헌종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해에 갑자기 질병으로 사망하였으며 太師에 추증되었다. 비록 그가 서천에 재직한 21년 동안 토번, 남조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 대외적으로는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부세를 과중하게 징수하는 바람에 정작 내정에 있어서는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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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이모심, 정회(鄭回), 합라봉, 정회, 이모심, 이모심, 위고(韋皋), 이모심, 위고, 위고, 이모심, 이모심
지명
토번, 수주(雟州), 토번, , 토번, 성도(成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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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심이 당에 귀의하고자 함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