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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심이 토번과 함께 당을 공격함

  • 국가
    남조(南詔)
이모심이 즉위하자, 무리 20만을 모두 동원하여 침입하는데, 토번과 힘을 합친 것이었다.주 001
각주 001)
異牟尋과 吐蕃의 당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는『舊唐書』卷12 「德宗紀」上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大曆 14年(779) 10月 丁酉 朔에 吐蕃이 남만의 무리와 힘을 합쳐 20만이라 하면서 세 갈래로 쳐들어와 茂州, 扶州, 文州, 黎州 雅州등을 침략하여 郡邑을 연달아 함락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代宗이 붕어하고 德宗이 즉위한 것이 대력 14년 5월의 일로 아직 대종의 장례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토번이 이같이 대거 침략한 것이니 상황이 아주 급박했던 것이다. 한편『舊唐書』卷117 「崔寧傳」에 따르면 토번의 세 갈래 침공로는 다음과 같다. 먼저 一軍은 茂州로 나와 文川, 灌口를 지나고, 다른 一軍은 扶州, 文州로 나와 方維, 白垻를 지났으며 다른 一軍은 黎垻, 雅州를 邛郲關을 통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唐會要』卷99 南詔蠻조에서는 ‘吐蕃率南蠻衆十萬衆來寇’라 하여 당시 토번과 남조의 연합군 규모를 10만으로 적고 있다. 한편『新唐書』卷216下 「吐蕃傳」下에 따르면 德宗이 즉위했을 무렵(779)에 吐蕃이 ‘發兵攻靈州入, 扶·文, 侵灌口’라 하여, 이 사건을 吐蕃의 침입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로 볼 때, 茂州와 灌口는 四川의 中西部에 위치하고 있어, 西南部에 자리 잡고 있는 南詔가 주도적으로 전쟁을 이끌었다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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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리는 무주(茂州) 주 002
각주 002)
茂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茂州조에 따르면 무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의 주로 속현은 4현이다. 지금의 四川 茂縣에 위치하였는데, 唐 貞觀 8년(634) 南會州를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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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취하고 문천(文川) 주 003
각주 003)
汶川:『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汶川縣조에 따르면 문천현은 茂州 소속의 현으로 무주에서 남쪽으로 100리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지금의 四川 汶川縣으로, 北周 保定 4년(564)에 설치되었는데, 汶山郡의 治所였다.『元和郡縣圖志』에 따르면 縣의 서쪽에 汶川이 있어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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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거쳐 관구(灌口) 주 004
각주 004)
灌口城: 灌口鎭城으로, 지금의 四川 都江堰市에 있다.『舊唐書』卷41 「地理」4 導江縣조에 따르면 “舊治灌口城, 武德元年移治今治”라 하여 당 건국이전에는 이곳에 도강현의 치소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導江縣조에 따르면 도강현에서 서쪽으로 26리 떨어진 곳에 灌口鎭이 있다고 하였으니 본문에서 말한 관구성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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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어지럽혔다. 또 한 무리는 부주(扶州),주 005
각주 005)
扶州:『元和郡縣圖志』卷22 「山南道」3 扶州조에 따르면 부주는 山南西道節度使 관할의 주로 속현은 4현이다. 隋 開皇 7년(587)에 鄧州를 扶州로 改置하였다. 治所는 지금의 四川 南坪縣 서북에 위치한 尙安縣이었다. 大業 3년(607) 同昌郡이 되었는데, 이후 同昌과 扶州를 반복하였는데, 廣德 이후에 吐蕃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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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文州) 주 006
각주 006)
文州:『元和郡縣圖志』卷22 「山南道」3 文州조에 따르면 문주는 산남서도절도사 관할의 주로 속현은 2현이며, 오늘날 甘肅 文縣일대를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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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취하고, 방유(方維) 주 007
각주 007)
方維:『舊唐書』卷39 「地理」2 利州조에 따르면 方維縣은 武德 4年(621) 沙州를 설치하면서 景谷縣 과 함께 그 속현이 되었다. 그러나 貞觀 元年(627) 사주를 폐지하면서 景谷은 利州로 그 소속을 바꾸었고 방유현은 경곡현으로 편입되었다. 즉 방유현은 경곡현과 합쳐져서 이주 소속의 경곡현이 된 것이다.『新唐書』卷40 「地理」4 景谷縣조에 대한 본주에 따르면 ‘방유현을 줄여서 鎭으로 만들었다는 것(省方維爲鎭)’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方維’는 덕종대에는 方維縣이 아닌 方維鎭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방유진은 오늘날 四川 靑川縣 沙州鎭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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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白垻) 주 008
각주 008)
白垻:『新唐書』卷40 「地理」4 景谷縣조에 대한 본주에 따르면 景谷縣의 서북에 白垻, 魚老의 두 鎭城이 있다고 하였으니 앞서 말한 ‘方維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白垻는 백파진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백파진은 오늘날 四川 靑川縣 동북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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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약탈하였다. 또 한 무리는 여주(黎州),주 009
각주 009)
黎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黎州조에 따르면 여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의 주로 속현은 2현이며『舊唐書』卷41 「地理」4 雅州조에 따르면 휘하에 54주의 羈縻州가 있다. 지금의 四川 漢源縣 동북인 沈黎縣에 치소를 두고 北周 天和 3년(568) 처음 설치되었다. 隋代 폐지되었다가 唐 大足 원년(701) 다시 설치되었는데, 지금의 四川 漢源縣 북쪽 九襄鎭에 위치한 漢源縣을 治所로 하였다. 이후 置廢가 반복되었는데, 지금의 四川 漢源, 石棉, 甘洛 등의 縣과 瀘定, 越西, 峨邊 등의 부분을 포괄하였다. 貞元 중에 漢源縣을 따라 지금의 縣北 淸溪鄉으로 이전하였는데, 후에 吐蕃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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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牙州) 주 010
각주 010)
牙州:『舊唐書』卷13 「德宗紀」上과 同書 卷117 「崔寧傳」에서는 ‘雅州’로 되어 있으니 본문의 牙州는 雅州로 보아야 한다.『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雅州조에 따르면 아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의 주로 휘하에 11주의 羈縻州와 5현의 속현이 있다. 隋 仁壽 4년(604) 처음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지금의 四川 雅安市 서쪽에 위치한 蒙山縣에 있었다. 역시 臨邛郡과 雅州로 변화가 계속되었는데, 지금의 四川 雅安, 名山, 滎經, 天全, 盧山, 寶興 등의 市縣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후에 吐蕃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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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침입하여 공래관(邛郲關) 주 011
각주 011)
邛郲關: 邛崍關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四川 滎經 서남의 大相岭에 있는 關을 말한다.『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雅州조에 따르면 아주에는 榮經縣이 있고 이 영경현에서 서남쪽으로 邛來鎭이 있다 하였다. 한편『太平寰宇記』卷77 「劍南西道」6 雅州조에 따르면 아주에는 榮經縣이 있으며 이 현에서 서남쪽 70리 되는 지점에 邛崍關이 있다고 하였다. 원래 隋 大業 10년(614)에 이 관문을 설치하였는데 거의가 산으로 되어 있으며 험준한 곳에 위치하였다. 雲南으로 통하는 대로로 蕃夷를 통제하는 요충지였는데 당에서도 이를 그대로 계승했다 한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元和郡縣圖志』에서 말한 ‘邛來鎭’은 바로 ‘邛崍關’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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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공격하였다. [이모심이]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나를 위해 촉지방을 취하여 동부(東府)로 삼으면, 공인(工人) 장인(匠人)과 광대는 모두 나사성(邏娑城) 주 012
각주 012)
邏娑城: 邏些, 邏娑川, 喇薩라고도 쓰는데, 지금의 티벳 라싸를 가리킨다. 티벳어로 “聖地”라는 의미를 갖는데, 唐代 吐蕃의 都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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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보내고, 해마다 합사비단 한 필씩만 걷겠다”라고 하였다.주 013
각주 013)
異牟尋의 명령과 관련하여『舊唐書』卷117 「崔寧傳」에 “[吐蕃]戎酋誡其衆曰, 吾要蜀川爲東府, 凡伎巧之工皆送邏娑, 平歲賦一縑而己”라는 내용이 있다. 내용으로 보아 南詔 군주의 말이라기보다는 吐蕃君主의 말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하다. 아마도 토번의 군주가 명한 말을 남조의 이모심이 그를 대신해 자기의 부하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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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진격하여 성과 취락을 함락시키니, 주민들이 대부분 산으로 달아났다. 덕종(德宗)이 금위(禁衛) 및 유주군(幽州軍)을 동원하여 동천(東川) 주 014
각주 014)
東川: 唐代 東川이라는 지명은 많이 나타나는데, 대체로 “劍南東川”에 대한 簡稱으로, 현재의 四川 東部地區 즉 萬源, 宣漢, 達縣, 渠縣, 武勝, 大足, 榮昌, 江津, 綦江 등의 市縣 이동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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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보내 산남(山南) 주 015
각주 015)
山南: 山南道를 의미하는 것으로, 唐 貞觀 원년(627)에 구획한 十道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의 四川 嘉陵江 유역 이동, 陝西 秦嶺과 甘肅 蟠塚山 이남, 河南 伏牛山 서남과 湖北 湞水 이서로서, 重慶市에서 湖南 岳陽市에 이르는 長江 이북지역이 해당한다. 開元 21년(733) 山南東道와 山南西道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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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대와 합류하도록 하였다. 이모심의 무리를 크게 무찌르니, 참수한 것이 6,000급이며 사로잡고 부상 입힌 자가 매우 많았고, 절벽에서 넘어지고 떨어져 죽은 자가 또 10만이었다.주 016
각주 016)
『唐會要』卷99 南詔蠻조에 따르면 大曆 14年(779) 10월 남조와 토번이 대거 침입하자 禁軍 4천 명과 幽州의 兵馬 5천을 징발하여 함께 이를 토벌, 남조의 군대를 대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舊唐書』卷12 「德宗紀」上에 따르면 대력 14년 10월 병력 4천을 징발하여 촉을 돕게 하였으며 남조, 토번의 군대를 대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10만에서 20만에 이르는 적군의 병력에 대해 단순히 4천의 원군을 보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당회요』에 의거『구당서』에서 말한 4천의 병력은 평범한 군대가 아닌 최고의 정예군인 금군으로 보아야 하며 당시 남조, 토번의 연합군이 10만에서 20만이라는 것도 실은 크게 부풀려진 허위에 불과한 것으로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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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심이 두려워하여 다시 저미성(苴咩城)으로 옮기고 남북으로 15리의 방벽을 쌓게 하였다. 토번은 [이모심을] 일동왕(日東王)으로 봉하였다.주 017
각주 017)
778년 吐蕃과 南詔의 연합군이 唐朝에 크게 패하자, 吐蕃은 南詔에 그 책임을 물러 과거 兄弟之國의 관계에서 君臣關係로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日東王으로 책봉한 것은 양국관계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후 南詔는 다시 唐朝에 더 접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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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異牟尋과 吐蕃의 당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는『舊唐書』卷12 「德宗紀」上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大曆 14年(779) 10月 丁酉 朔에 吐蕃이 남만의 무리와 힘을 합쳐 20만이라 하면서 세 갈래로 쳐들어와 茂州, 扶州, 文州, 黎州 雅州등을 침략하여 郡邑을 연달아 함락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代宗이 붕어하고 德宗이 즉위한 것이 대력 14년 5월의 일로 아직 대종의 장례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토번이 이같이 대거 침략한 것이니 상황이 아주 급박했던 것이다. 한편『舊唐書』卷117 「崔寧傳」에 따르면 토번의 세 갈래 침공로는 다음과 같다. 먼저 一軍은 茂州로 나와 文川, 灌口를 지나고, 다른 一軍은 扶州, 文州로 나와 方維, 白垻를 지났으며 다른 一軍은 黎垻, 雅州를 邛郲關을 통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唐會要』卷99 南詔蠻조에서는 ‘吐蕃率南蠻衆十萬衆來寇’라 하여 당시 토번과 남조의 연합군 규모를 10만으로 적고 있다. 한편『新唐書』卷216下 「吐蕃傳」下에 따르면 德宗이 즉위했을 무렵(779)에 吐蕃이 ‘發兵攻靈州入, 扶·文, 侵灌口’라 하여, 이 사건을 吐蕃의 침입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로 볼 때, 茂州와 灌口는 四川의 中西部에 위치하고 있어, 西南部에 자리 잡고 있는 南詔가 주도적으로 전쟁을 이끌었다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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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茂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茂州조에 따르면 무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의 주로 속현은 4현이다. 지금의 四川 茂縣에 위치하였는데, 唐 貞觀 8년(634) 南會州를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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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汶川:『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汶川縣조에 따르면 문천현은 茂州 소속의 현으로 무주에서 남쪽으로 100리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지금의 四川 汶川縣으로, 北周 保定 4년(564)에 설치되었는데, 汶山郡의 治所였다.『元和郡縣圖志』에 따르면 縣의 서쪽에 汶川이 있어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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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灌口城: 灌口鎭城으로, 지금의 四川 都江堰市에 있다.『舊唐書』卷41 「地理」4 導江縣조에 따르면 “舊治灌口城, 武德元年移治今治”라 하여 당 건국이전에는 이곳에 도강현의 치소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導江縣조에 따르면 도강현에서 서쪽으로 26리 떨어진 곳에 灌口鎭이 있다고 하였으니 본문에서 말한 관구성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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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扶州:『元和郡縣圖志』卷22 「山南道」3 扶州조에 따르면 부주는 山南西道節度使 관할의 주로 속현은 4현이다. 隋 開皇 7년(587)에 鄧州를 扶州로 改置하였다. 治所는 지금의 四川 南坪縣 서북에 위치한 尙安縣이었다. 大業 3년(607) 同昌郡이 되었는데, 이후 同昌과 扶州를 반복하였는데, 廣德 이후에 吐蕃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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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文州:『元和郡縣圖志』卷22 「山南道」3 文州조에 따르면 문주는 산남서도절도사 관할의 주로 속현은 2현이며, 오늘날 甘肅 文縣일대를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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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方維:『舊唐書』卷39 「地理」2 利州조에 따르면 方維縣은 武德 4年(621) 沙州를 설치하면서 景谷縣 과 함께 그 속현이 되었다. 그러나 貞觀 元年(627) 사주를 폐지하면서 景谷은 利州로 그 소속을 바꾸었고 방유현은 경곡현으로 편입되었다. 즉 방유현은 경곡현과 합쳐져서 이주 소속의 경곡현이 된 것이다.『新唐書』卷40 「地理」4 景谷縣조에 대한 본주에 따르면 ‘방유현을 줄여서 鎭으로 만들었다는 것(省方維爲鎭)’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方維’는 덕종대에는 方維縣이 아닌 方維鎭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방유진은 오늘날 四川 靑川縣 沙州鎭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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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白垻:『新唐書』卷40 「地理」4 景谷縣조에 대한 본주에 따르면 景谷縣의 서북에 白垻, 魚老의 두 鎭城이 있다고 하였으니 앞서 말한 ‘方維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白垻는 백파진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백파진은 오늘날 四川 靑川縣 동북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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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黎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黎州조에 따르면 여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의 주로 속현은 2현이며『舊唐書』卷41 「地理」4 雅州조에 따르면 휘하에 54주의 羈縻州가 있다. 지금의 四川 漢源縣 동북인 沈黎縣에 치소를 두고 北周 天和 3년(568) 처음 설치되었다. 隋代 폐지되었다가 唐 大足 원년(701) 다시 설치되었는데, 지금의 四川 漢源縣 북쪽 九襄鎭에 위치한 漢源縣을 治所로 하였다. 이후 置廢가 반복되었는데, 지금의 四川 漢源, 石棉, 甘洛 등의 縣과 瀘定, 越西, 峨邊 등의 부분을 포괄하였다. 貞元 중에 漢源縣을 따라 지금의 縣北 淸溪鄉으로 이전하였는데, 후에 吐蕃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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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牙州:『舊唐書』卷13 「德宗紀」上과 同書 卷117 「崔寧傳」에서는 ‘雅州’로 되어 있으니 본문의 牙州는 雅州로 보아야 한다.『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雅州조에 따르면 아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의 주로 휘하에 11주의 羈縻州와 5현의 속현이 있다. 隋 仁壽 4년(604) 처음 설치되었는데, 치소는 지금의 四川 雅安市 서쪽에 위치한 蒙山縣에 있었다. 역시 臨邛郡과 雅州로 변화가 계속되었는데, 지금의 四川 雅安, 名山, 滎經, 天全, 盧山, 寶興 등의 市縣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후에 吐蕃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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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邛郲關: 邛崍關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四川 滎經 서남의 大相岭에 있는 關을 말한다.『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雅州조에 따르면 아주에는 榮經縣이 있고 이 영경현에서 서남쪽으로 邛來鎭이 있다 하였다. 한편『太平寰宇記』卷77 「劍南西道」6 雅州조에 따르면 아주에는 榮經縣이 있으며 이 현에서 서남쪽 70리 되는 지점에 邛崍關이 있다고 하였다. 원래 隋 大業 10년(614)에 이 관문을 설치하였는데 거의가 산으로 되어 있으며 험준한 곳에 위치하였다. 雲南으로 통하는 대로로 蕃夷를 통제하는 요충지였는데 당에서도 이를 그대로 계승했다 한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元和郡縣圖志』에서 말한 ‘邛來鎭’은 바로 ‘邛崍關’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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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邏娑城: 邏些, 邏娑川, 喇薩라고도 쓰는데, 지금의 티벳 라싸를 가리킨다. 티벳어로 “聖地”라는 의미를 갖는데, 唐代 吐蕃의 都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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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異牟尋의 명령과 관련하여『舊唐書』卷117 「崔寧傳」에 “[吐蕃]戎酋誡其衆曰, 吾要蜀川爲東府, 凡伎巧之工皆送邏娑, 平歲賦一縑而己”라는 내용이 있다. 내용으로 보아 南詔 군주의 말이라기보다는 吐蕃君主의 말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하다. 아마도 토번의 군주가 명한 말을 남조의 이모심이 그를 대신해 자기의 부하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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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川: 唐代 東川이라는 지명은 많이 나타나는데, 대체로 “劍南東川”에 대한 簡稱으로, 현재의 四川 東部地區 즉 萬源, 宣漢, 達縣, 渠縣, 武勝, 大足, 榮昌, 江津, 綦江 등의 市縣 이동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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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南: 山南道를 의미하는 것으로, 唐 貞觀 원년(627)에 구획한 十道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의 四川 嘉陵江 유역 이동, 陝西 秦嶺과 甘肅 蟠塚山 이남, 河南 伏牛山 서남과 湖北 湞水 이서로서, 重慶市에서 湖南 岳陽市에 이르는 長江 이북지역이 해당한다. 開元 21년(733) 山南東道와 山南西道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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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唐會要』卷99 南詔蠻조에 따르면 大曆 14年(779) 10월 남조와 토번이 대거 침입하자 禁軍 4천 명과 幽州의 兵馬 5천을 징발하여 함께 이를 토벌, 남조의 군대를 대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舊唐書』卷12 「德宗紀」上에 따르면 대력 14년 10월 병력 4천을 징발하여 촉을 돕게 하였으며 남조, 토번의 군대를 대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10만에서 20만에 이르는 적군의 병력에 대해 단순히 4천의 원군을 보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당회요』에 의거『구당서』에서 말한 4천의 병력은 평범한 군대가 아닌 최고의 정예군인 금군으로 보아야 하며 당시 남조, 토번의 연합군이 10만에서 20만이라는 것도 실은 크게 부풀려진 허위에 불과한 것으로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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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778년 吐蕃과 南詔의 연합군이 唐朝에 크게 패하자, 吐蕃은 南詔에 그 책임을 물러 과거 兄弟之國의 관계에서 君臣關係로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日東王으로 책봉한 것은 양국관계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후 南詔는 다시 唐朝에 더 접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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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이모심, 이모심, 덕종(德宗), 이모심, 이모심, 이모심
지명
토번, 무주(茂州), 문천(文川), 관구(灌口), 부주(扶州), 문주(文州), 방유(方維), 백파(白垻), 여주(黎州), 아주(牙州), 공래관(邛郲關), 촉지방, 나사성(邏娑城), 동천(東川), 산남(山南), 저미성(苴咩城), 토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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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심이 토번과 함께 당을 공격함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