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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라봉의 張虔陀 공격과 토번에 臣屬

  • 국가
    남조(南詔)
선우중통(鮮于仲通) 주 001
각주 001)
鮮于仲通: 이름은 向이며, 漁陽縣 출신으로, 중년에 進士로 出仕하였는데, 劍南節度使 章仇兼瓊과 잘 알아 그를 통해 采訪支使가 되어 그의 심복이 되었다. 天寶초에 章仇兼瓊이 楊貴妃의 친척 오라비인 楊國忠을 추천하여 그의 힘으로 玄宗을 배알하여 득세하였는데, 天寶 9년(750)에 劍南節度使가 되었다. 天寶 10년(751)에 唐과 南詔 간에 天寶戰爭이 발생하였을 때 唐軍의 統帥가 되었다. 그 성과는 겨우 목숨을 건지는 정도가 되었지만, 남조와의 전쟁에서 패배를 감추고 京兆尹까지 승진하였다. 天寶 12년(753) 尙書省門에 ‘銓綜之能碑’를 세워 楊國忠을 칭송하기도 하였지만, 곧 양국충과 함께 실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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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주 002
각주 002)
劍南節度使: 唐 玄宗 開元 7年(719)에 劍南支度營田處置兵馬經略使를 승격시켜 節度使로 삼았으며, 치소는 益州 지금의 四川省 成都市에 두었다. 昆明軍 및 益·彭·蜀·漢·眉·綿·梓·遂·邛·劍·榮·陵·嘉·普·資·緇·黎·戎·維·茂·簡·龍·雅·瀘·合의 25州를 통령하였으며, 대략 현재의 四川省 中部 一帶에 상당하였다. 그 뒤 관할 구역이 점차 확대되어, 앞뒤로 文·扶·姚·奉·壩 等의 州와 保寧都護府를 추가로 통령하게 되었다. 아울러 한번은 山南西道采訪使를 겸령하여, 山南西道로 불리기도 했다. 肅宗 至德 2年(757)에 劍南東川節度使와 劍南西川節度使로 분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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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맡고 있었는데, 성격이 조급하여 성내기를 잘하고 방략은 없었다. 그 전에 남조(南詔)에서 처자와 더불어 도독을 만나러 가다가 운남을 지나게 되었을 때, 태수 장건타(張虔陀)가 사적인 이익을 꾀하여 요구하는 것이 많았는데, 합라봉이 듣지 않았다. 장건타는 여러 차례 욕하며 꾸짖고, 은밀히 합라봉의 죄를 상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원한을 품은 합라봉은 돌아가자 군대를 일으켜 장건타를 공격하여 죽였다.주 003
각주 003)
張虔陀가 南詔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新唐書』卷5, 「玄宗紀」에 따르면 天寶 9載(749)의 일로서 여기에는 ‘雲南蠻’으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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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주(姚州)와 조그만 이족(夷族) 마을 32곳을 차지하였다. 이듬해 중통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융주(戎州) 주 004
각주 004)
戎州:『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戎州조에 따르면 융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의 州이다. 南朝 梁 大同 10년(544)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治所는 지금의 四川 宜賓市 혹은 宜賓縣 安邊鎭에 위치하였다고 하는 焚道縣이었다. 隋 大業 3년(607) 犍爲郡으로 개칭되었다가, 唐 武德 元年(618)에 戎州로 개칭되면서 지금의 宜賓市 동쪽 60里의 李莊鎭에 위치한 南溪縣으로 이동되었다가 貞觀 4년(630) 都督府가 설치되면서 州는 다시 焚道縣으로 이동하였다. 도독부는 동쪽으로 貴州 普安, 興義에 이르고, 북으로는 四川 宜賓과 雷波, 서쪽으로는 怒江에 이르는 雲南의 대부분을 포괄하였다. 23년(649) 폐지되었다가 郎州都督으로 개칭되었다. 永徽 3년(652) 다시 戎州都督이 설치되었는데, 開元年間 雲南의 嵩明, 宜良. 彌勒이동과 盤江이북을 관할하였는데, 天寶시기에는 지금의 四川 宜賓과 雷波, 그리고 雲南 접경지역을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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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주(雟州) 주 005
각주 005)
雟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雟州조에 따르면 수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으로, 隋 開皇 18년(598)에 西寧州를 개칭하여 설치한 것으로, 治所는 지금의 西昌市에 해당하는 越雟縣이었다. 大業 3년(607) 越雟郡으로 개칭되었는데, 唐 武德 元年(618) 다시 雟州가 되었다. 4년(621) 都督府가 되었는데, 지금의 四川 越西 美姑이남과 金沙江 이서 이북으로, 錦屏山과 鹽井河이동지역을 포괄하였다. 天寶 元年(742) 越雟郡으로 개칭되었다가, 至德 二載(757)에 吐蕃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貞元 13年(797)에 다시 수복하였지만 大和 5年(831)에 南詔에 의해 파괴되고, 이듬해 지금의 四川 冕寧縣 남쪽 瀘沽鎭에 위치한 臺登으로 이전하였다가, 咸通 2년(861) 南詔에 의해 장악되고, 唐朝는 建昌府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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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나와 두 개의 길로 나누어 진군하여 곡주(曲州) 주 006
각주 006)
曲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曲州조에 따르면 곡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의 주로 속현은 2현이다. 唐 武德 8년(625)에 恭州를 개칭하여 설치되었는데, 治所는 지금의 雲南 昭通市에 해당하는 朱提縣이었다. 지금의 雲南 昭通 審和 魯甸縣 등을 포괄하였는데, 天寶 후에는 南詔에 편입되고, 州는 지금의 四川 宜賓縣 安邊鎭 西南 70里로 이전하였다가 唐末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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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靖州) 주 007
각주 007)
靖州:『新唐書』卷43下 「地理」7下 靖州조에 따르면 정주는 劒南道 소속의 諸蠻州 92주 가운데 하나로 속현은 2현이다. 唐 武德초에 協州를 나누어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지금의 雲南 昭通市 북부 靖安壩子에 있었던 靖川縣이었다. 雲南 昭通市 북부와 大關縣 서부의 지역을 관할하였다. 天寶후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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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다. 합라봉은 사자를 보내 사죄하며, 포로를 돌려보내 반성할 수 있기를 바라며, 또 요주(姚州)에 성을 쌓겠다고 하였다.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토번(吐蕃)에 귀의하여 명을 받들 것이며, [그러면] 운남당(唐)의 소유가 안 될 것이라 하였다. 선우중통은 노하여 사자를 가두고, 백애성(白厓城) 주 008
각주 008)
白厓城: 서기 3세기에 龍祜那가 축성하였던 것으로 본래는 彩雲城으로 불리다가 후에 白崖城이 되었다고 한다. 南詔가 증축하여 白崖賧의 治所가 되었는데, 지금의 雲南 彌渡縣 서북 22리 紅岩街서쪽에 있었다. 樊綽의『蠻書』卷5에 당시 城의 모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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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진군하여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합라봉은 [당측] 전사자의 남은 뼈를 모아다가 경관(京觀)주 009
각주 009)
京觀: 고대 중국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의 시체와 함께 돌과 흙을 높이 쌓아 戰勝을 자축하고 적에게 위엄을 과시하였던 구조물로서, 때로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희생된 자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左傳』이래 중국의 史書에 계속 그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天寶戰爭후 閤羅鳳이 唐軍의 시체를 거두어 묻고 이를 ‘大唐天寶戰士家’ 혹은 ‘萬人塚’이라고 하고, 이후 계속해서 이를 위로하는 축제를 벌렸다는 사실에서 보면, 이 京觀은 바로 萬人塚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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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쌓고, 마침내는 북쪽으로 토번에 신속(臣屬)하였다. 토번은 동생으로 삼았다. 이족(夷族)은 동생을 ‘종(鍾)’이라 하니, 그런 까닭에 ‘찬보종(贊普鍾)’이라 칭하였다. 금인(金印)을 주었는데, ‘동제(東帝)’라는 명호(名號)가 새겨져 있었다. [합라봉은] 도읍의 성문에 비(碑)를 세워 부득이하여 [중국에] 배반하였음을 밝혔다.주 010
각주 010)
이 때 세운 碑는 소위〈南詔德化碑〉를 말한다. 현재 雲南 大理市내 舊縣城 남쪽으로 7里 떨어진 大和村에 전해져 오는 德化碑를 의미한다. 그 위치는 南詔의 도읍 大和城으로서, 碑文의 내용은 역대 南詔 군왕들의 업적을 정리하면서, 南詔는 중국과 적대적으로 대할 의도가 없지만, 李宓을 비롯한 중국 관원들의 행태 때문에 결국 전쟁으로 이르게 되었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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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대대로 중국을 받들어, 누대로 책봉과 은상을 받았다. 후대에 다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한다. 만약 에서 사자가 오면 이 비(碑)를 가리키면서 내 죄를 씻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이때에 양국충(楊國忠)이 검남절도사로서 국정을 집정하게 되었는데, 천하의 병사 10만을 가려 뽑아 시어사(侍御史) 이복(李宓)으로 하여금 [남조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군량을 끌어오는 자가 없었다. 전지(滇池)에 이르는 도중에 병에 걸려 죽는 자가 길에 줄줄이 이어졌고, 이복대화성에서 패하였고, 죽은 자가 열에 여덟이었다.주 011
각주 011)
『舊唐書』卷9 「玄宗紀」下에 따르면 天寶 13年(754) 6月 乙丑 朔, 侍御史, 劍南留後 李宓이 병력을 이끌고 西洱河에서 雲南蠻을 공격하였으나 군량이 다하는 바람에 군대를 되돌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가 탄 말이 다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閤羅鳳에 의해 사로잡히게 되었고 전군이 모두 붕괴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新唐書』卷5 「玄宗紀」에 따르면 이복이 이 전투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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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침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합라봉은 이를 기화로 수주(雟州)의 회동군(會同軍)주 012
각주 012)
會同軍: 唐 天寶初에 會川縣에 설치되었던 軍으로 雟州에 속하였다. 治所는 지금 四川 會理縣의 북쪽이었다. 南詔에서는 이를 탈취하고 會同邏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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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빼앗았고, 청계관(淸溪關)을 거점으로 하여 월석(越析)을 격파하고 우증(于贈) 주 013
각주 013)
于贈: 六詔의 하나인 越析詔의 王으로, 선왕 波沖의 형의 아들이었다. 波沖이 피살되자, 부락은 영도자를 잃고 모두 南詔에 귀순하였는데, 于贈만은 이를 반대하고 일부의 部衆을 이끌고 瀘水를 건너 龍佉河에 이르러 부락을 건설하였다. 후에 남조가 침입하여 于贈은 전쟁에서 패하여 瀘水에 투신하여 죽고 政權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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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효수하였다. 서쪽으로 나아가 심전(尋傳)과 표(驃) 등의 여러 나라를 항복시켰다.

  • 각주 001)
    鮮于仲通: 이름은 向이며, 漁陽縣 출신으로, 중년에 進士로 出仕하였는데, 劍南節度使 章仇兼瓊과 잘 알아 그를 통해 采訪支使가 되어 그의 심복이 되었다. 天寶초에 章仇兼瓊이 楊貴妃의 친척 오라비인 楊國忠을 추천하여 그의 힘으로 玄宗을 배알하여 득세하였는데, 天寶 9년(750)에 劍南節度使가 되었다. 天寶 10년(751)에 唐과 南詔 간에 天寶戰爭이 발생하였을 때 唐軍의 統帥가 되었다. 그 성과는 겨우 목숨을 건지는 정도가 되었지만, 남조와의 전쟁에서 패배를 감추고 京兆尹까지 승진하였다. 天寶 12년(753) 尙書省門에 ‘銓綜之能碑’를 세워 楊國忠을 칭송하기도 하였지만, 곧 양국충과 함께 실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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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劍南節度使: 唐 玄宗 開元 7年(719)에 劍南支度營田處置兵馬經略使를 승격시켜 節度使로 삼았으며, 치소는 益州 지금의 四川省 成都市에 두었다. 昆明軍 및 益·彭·蜀·漢·眉·綿·梓·遂·邛·劍·榮·陵·嘉·普·資·緇·黎·戎·維·茂·簡·龍·雅·瀘·合의 25州를 통령하였으며, 대략 현재의 四川省 中部 一帶에 상당하였다. 그 뒤 관할 구역이 점차 확대되어, 앞뒤로 文·扶·姚·奉·壩 等의 州와 保寧都護府를 추가로 통령하게 되었다. 아울러 한번은 山南西道采訪使를 겸령하여, 山南西道로 불리기도 했다. 肅宗 至德 2年(757)에 劍南東川節度使와 劍南西川節度使로 분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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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張虔陀가 南詔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新唐書』卷5, 「玄宗紀」에 따르면 天寶 9載(749)의 일로서 여기에는 ‘雲南蠻’으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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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戎州:『元和郡縣圖志』卷31 「劒南道」上 戎州조에 따르면 융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의 州이다. 南朝 梁 大同 10년(544)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治所는 지금의 四川 宜賓市 혹은 宜賓縣 安邊鎭에 위치하였다고 하는 焚道縣이었다. 隋 大業 3년(607) 犍爲郡으로 개칭되었다가, 唐 武德 元年(618)에 戎州로 개칭되면서 지금의 宜賓市 동쪽 60里의 李莊鎭에 위치한 南溪縣으로 이동되었다가 貞觀 4년(630) 都督府가 설치되면서 州는 다시 焚道縣으로 이동하였다. 도독부는 동쪽으로 貴州 普安, 興義에 이르고, 북으로는 四川 宜賓과 雷波, 서쪽으로는 怒江에 이르는 雲南의 대부분을 포괄하였다. 23년(649) 폐지되었다가 郎州都督으로 개칭되었다. 永徽 3년(652) 다시 戎州都督이 설치되었는데, 開元年間 雲南의 嵩明, 宜良. 彌勒이동과 盤江이북을 관할하였는데, 天寶시기에는 지금의 四川 宜賓과 雷波, 그리고 雲南 접경지역을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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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雟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雟州조에 따르면 수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으로, 隋 開皇 18년(598)에 西寧州를 개칭하여 설치한 것으로, 治所는 지금의 西昌市에 해당하는 越雟縣이었다. 大業 3년(607) 越雟郡으로 개칭되었는데, 唐 武德 元年(618) 다시 雟州가 되었다. 4년(621) 都督府가 되었는데, 지금의 四川 越西 美姑이남과 金沙江 이서 이북으로, 錦屏山과 鹽井河이동지역을 포괄하였다. 天寶 元年(742) 越雟郡으로 개칭되었다가, 至德 二載(757)에 吐蕃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貞元 13年(797)에 다시 수복하였지만 大和 5年(831)에 南詔에 의해 파괴되고, 이듬해 지금의 四川 冕寧縣 남쪽 瀘沽鎭에 위치한 臺登으로 이전하였다가, 咸通 2년(861) 南詔에 의해 장악되고, 唐朝는 建昌府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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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曲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 曲州조에 따르면 곡주는 검남서천절도사 소속의 주로 속현은 2현이다. 唐 武德 8년(625)에 恭州를 개칭하여 설치되었는데, 治所는 지금의 雲南 昭通市에 해당하는 朱提縣이었다. 지금의 雲南 昭通 審和 魯甸縣 등을 포괄하였는데, 天寶 후에는 南詔에 편입되고, 州는 지금의 四川 宜賓縣 安邊鎭 西南 70里로 이전하였다가 唐末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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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靖州:『新唐書』卷43下 「地理」7下 靖州조에 따르면 정주는 劒南道 소속의 諸蠻州 92주 가운데 하나로 속현은 2현이다. 唐 武德초에 協州를 나누어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지금의 雲南 昭通市 북부 靖安壩子에 있었던 靖川縣이었다. 雲南 昭通市 북부와 大關縣 서부의 지역을 관할하였다. 天寶후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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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白厓城: 서기 3세기에 龍祜那가 축성하였던 것으로 본래는 彩雲城으로 불리다가 후에 白崖城이 되었다고 한다. 南詔가 증축하여 白崖賧의 治所가 되었는데, 지금의 雲南 彌渡縣 서북 22리 紅岩街서쪽에 있었다. 樊綽의『蠻書』卷5에 당시 城의 모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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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京觀: 고대 중국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의 시체와 함께 돌과 흙을 높이 쌓아 戰勝을 자축하고 적에게 위엄을 과시하였던 구조물로서, 때로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희생된 자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左傳』이래 중국의 史書에 계속 그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天寶戰爭후 閤羅鳳이 唐軍의 시체를 거두어 묻고 이를 ‘大唐天寶戰士家’ 혹은 ‘萬人塚’이라고 하고, 이후 계속해서 이를 위로하는 축제를 벌렸다는 사실에서 보면, 이 京觀은 바로 萬人塚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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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이 때 세운 碑는 소위〈南詔德化碑〉를 말한다. 현재 雲南 大理市내 舊縣城 남쪽으로 7里 떨어진 大和村에 전해져 오는 德化碑를 의미한다. 그 위치는 南詔의 도읍 大和城으로서, 碑文의 내용은 역대 南詔 군왕들의 업적을 정리하면서, 南詔는 중국과 적대적으로 대할 의도가 없지만, 李宓을 비롯한 중국 관원들의 행태 때문에 결국 전쟁으로 이르게 되었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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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舊唐書』卷9 「玄宗紀」下에 따르면 天寶 13年(754) 6月 乙丑 朔, 侍御史, 劍南留後 李宓이 병력을 이끌고 西洱河에서 雲南蠻을 공격하였으나 군량이 다하는 바람에 군대를 되돌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가 탄 말이 다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閤羅鳳에 의해 사로잡히게 되었고 전군이 모두 붕괴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新唐書』卷5 「玄宗紀」에 따르면 이복이 이 전투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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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會同軍: 唐 天寶初에 會川縣에 설치되었던 軍으로 雟州에 속하였다. 治所는 지금 四川 會理縣의 북쪽이었다. 南詔에서는 이를 탈취하고 會同邏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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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于贈: 六詔의 하나인 越析詔의 王으로, 선왕 波沖의 형의 아들이었다. 波沖이 피살되자, 부락은 영도자를 잃고 모두 南詔에 귀순하였는데, 于贈만은 이를 반대하고 일부의 部衆을 이끌고 瀘水를 건너 龍佉河에 이르러 부락을 건설하였다. 후에 남조가 침입하여 于贈은 전쟁에서 패하여 瀘水에 투신하여 죽고 政權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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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선우중통(鮮于仲通), 장건타(張虔陀), 합라봉, 장건타, 합라봉, 장건타, 중통, 합라봉, 선우중통, 합라봉, 합라봉, 양국충(楊國忠), 이복(李宓), 이복, 안록산(安祿山), 합라봉, 우증(于贈)
지명
남조(南詔), 운남, 요주(姚州), 융주(戎州), 수주(雟州), 곡주(曲州), 정주(靖州), 요주(姚州), 토번(吐蕃), 운남, 당(唐), 백애성(白厓城), 토번, 토번, , 남조, 대화성, 수주(雟州), 청계관(淸溪關), 월석(越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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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라봉의 張虔陀 공격과 토번에 臣屬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