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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의 출자와 지리적 위치

  • 국가
    남조(南詔)
남조(南詔)학척(鶴拓),주 001
각주 001)
鶴拓: 南詔의 별칭으로 그 기원은 불분명하다. 唐代 胡曾이〈代高騈回雲南牒〉이라는 글에서 “鶴拓은 알지 못하고 오직 苴咩만 알고 南詔의 멋스러운 이름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어찌 大朝의 아름다운 호칭이 드러나겠는가?”(不知鶴拓, 唯認苴咩, 尙呼南詔之佳名, 豈見大朝之美號.)라고 하는 것에서 보듯, 唐代에도 이미 별로 알려지지 않은 명칭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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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미(龍尾),주 002
각주 002)
龍尾: 南詔를 龍尾라고 부르는 것은 南詔에서 축성하였던 龍尾城에 기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龍尾城은 지금의 雲南 大理市 下關으로서 西洱河의 北岸에 있었다. 唐 樊綽의『蠻書』卷5에서 閣羅鳳이 축성한 것으로 城門이 洱水에 임하여 있어 河上橋의 길이가 100여 보가 되며, 다리를 지나서 곧바로 남쪽으로 향하면 蒙舍路, 서쪽으로 향하면 永昌路, 동쪽으로 향하면 崖城路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山과 江에 면해 있어서 南詔와 大理의 도성인 陽苴咩城의 남방 요충지라고 설명하였다. 後代 이곳은 下關, 玉龍關이라고도 불리는 龍尾關이 설치되었는데, 淸 康熙『大理府志』卷5, 「太和縣」의〈關哨條〉에서는 蒼山에 의지하여 陽峰麓을 돌면서 洱河의 꼬리부분을 막고 있으며, 山勢가 거꾸로 도는 형세를 하고 있어서, 마치 龍이 놀면서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라고 하여 龍尾關이라고 불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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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미(苴咩),주 003
각주 003)
苴咩: 南詔의 都城 羊苴咩城에서 기원한 호칭으로 보인다. 苴咩城은 南詔王 異牟尋이 축성한 것으로, 지금의 雲南 大理市의 大理古城과 그 서쪽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 城은 원래 河蠻이라고 불리던 종족에 의해 축성되었는데, 南詔가 六詔를 통일하고, 唐 大曆 14年(779) 南詔王 閣羅鳳이 죽고 異牟尋이 재위할 때 太和城에서 羊苴咩城으로 천도하면서 크게 수축되었다. 이후 902年 南詔國이 鄭氏에 장악되어 國號가 長和로, 후에 또 趙氏에 장악되자 天興으로, 다시 楊氏에 의해서 義寧으로 바뀌기도 하였는데, 937年 段氏가 장악하고 국호를 大理라고 하면서 羊苴咩城도 大理城으로 불리게 되었다. 元代 至元 11年(1274) 雲南行省이 지금의 昆明인 中慶에 설치되고, 羊苴咩城에는 大理路 軍民總管府가 자리잡으면서, 이 지역의 정치중심지로서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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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검(陽劍) 주 004
각주 004)
陽劍: 이러한 칭호에 대해 다른 史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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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도 불리는데, 본래 애뢰이(哀牢夷)주 005
각주 005)
哀牢夷: 後漢代 지금의 雲南 전지역과 四川의 서남부에 분포하는 종족세력을 지칭하는 명칭으로,『後漢書』「南蠻西南夷列傳」에 그 기원과 분포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明帝 永平 12년(69) 哀牢王이 귀순하자, 그 지역에 哀牢 博南 2현을 설치하고, 익주군 西部都尉가 거느린 6현을 떼어 永昌郡으로 삼았다. 당시 이 지역에는 哀牢, 儋耳, 僬僥, 槃木, 白狼, 動黏 등의 종족 등이 언급되는데, 후한 이후의 史書에 哀牢는 지명으로만 나타나고 종족으로서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후한 이전의 哀牢夷에 대해 方國瑜는 지금의 雲南 保山지역에 거주하는 嶲唐과 騰衝지역에 거주하는 滇越이 哀牢夷의 거주지역과 겹친다고 비정하면서, 雟가 哀牢夷의 일종이며, 그 주체민족은 옛 ‘濮人’으로 오늘날의 蒲曼族, 崩龍族, 佤族의 공통 선민이라고 하였다(方國瑜, 1987). 唐代 南詔 즉 蒙舍詔와 烏蠻은 哀牢夷와의 관련성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포괄관계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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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후예로서 오만(烏蠻)주 006
각주 006)
烏蠻: 隋代 史書에서 처음 나타나는 종족명으로서, 唐代에는 雲南, 四川南部, 貴州西部에 분포한다. 東爨, 六詔, 東蠻 등의 주요한 居民으로서, 부락이 잡다하였다. 후에 白蠻 등과 함께 南詔國을 건립하였는데, 왕족은 烏蠻이고 귀족 대성은 百蠻이었다. 그 대부분은 지금 彝族의 조상이고, 부분적으로 傈僳, 拉祜, 哈尼族과 그 연원에 관련성이 있다. 元明시기에는 黑爨 혹은 羅羅로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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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별종이다. 이족(夷族)의 말에 왕을 ‘조(詔)’라고 한다. 그 선조에 거수(渠帥)가 6명이 있어, 스스로를 ‘육조(六詔)’라고 하였는데, 몽수조(蒙雟詔)주 007
각주 007)
蒙巂詔: 蒙巂는 지금의 雲南 巍山縣 북부 漾濞彝族自治縣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唐代 陽瓜州가 설치되어 蒙巂詔王이 陽瓜州刺史를 세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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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석조(越析詔)주 008
각주 008)
越析詔: 越析은 지금의 雲南 賓川縣을 가리키는 지역으로, 戰國時代 葉楡에 속하였던 이후 益州郡, 永昌郡, 雲南郡에 속하였다가 隋 開皇 5年(585)에 越析州가 설치되었는데, 天寶 후에 폐지되고 姚州가 되었다. 이곳에 있는 종족세력들이 開元年間 南詔와 함께 六詔를 이루었는데, 후에 南詔에 의해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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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궁조(浪穹詔)주 009
각주 009)
浪穹詔: 浪穹은 지금의 雲南省 洱源縣의 일부지역으로, 이곳은 漢代 葉楡縣에 속하였다가 唐代 仁德 元年(664) 洱源縣 소속으로 浪穹州가 설치되었다가 南詔로 통합되고, 元代에는 浪穹千戶所로 大理萬戶府에 예속되었다가, 至元 11년(1274) 雲南行省이 설치되었을 때는 浪穹縣으로 大理路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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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섬조(邆睒詔)주 010
각주 010)
邆睒詔: 邆川赕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雲南省 洱源縣 남쪽으로 36里에 있었던 鄧川鎭 東北郊 德源城遺址에 있었던 邆川城을 중심지로 하고 있다. 당대에 이곳에 鄧川州가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후에 大理에 예속되었다가 元 憲宗때 중국에 귀속되어 내부하여 德原千戶로서 大理上萬戶에 예속되었다. 이후 邆川縣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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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랑조(施浪詔)주 011
각주 011)
施浪詔: 唐代 六詔의 하나로서 지금의 雲南省 洱源縣 東南部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開元中 南詔에 의해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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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사조(蒙舍詔)주 012
각주 012)
蒙舍詔: 六詔의 하나로서 지금의 雲南省 巍山彝族回族自治縣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위치가 다른 五詔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南詔’라고도 하였다. 그 중심지는 巍山縣 西北 30里로서 巄屽城의 遗址가 있다. 唐初 이곳에 沙壺州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則天시기에 蒙舍州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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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칭한다. 군사력이 엇비슷하여 서로에게 왕노릇 할 수 없었다. 촉한제갈량(諸葛亮)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주 013
각주 013)
諸葛亮 南征: 諸葛亮의 南蠻정벌을 말하는데, 三國 蜀漢의 丞相 諸葛亮에 의해서 建興 3년(225)에 진행된 현재의 雲南, 貴州와 四川 서남부 일대 蠻을 평정한 사건을 말한다. 蜀漢 章武 3년(223) 劉備가 죽고 劉禪이 제위에 올랐을 때, 越嶲夷王 高定이 越嶲에서, 漢族 豪强인 雍闓가 建寧에서, 牂牁太守 朱褒가 牂牁에서 일제히 기병하여 蜀에 저항하였다. 이에 대해 諸葛亮은 초기에 招撫정책을 취하였지만, 鄧芝를 孫吳에 파견하여 修好관계를 확보하자, 建興 3년(225) 봄 庲降都督 李恢와 門下督 馬忠을 이끌고 직접 南征에 나서 이 일대의 南蠻지역을 평정하였다. 그 결과 당시 益州郡을 建寧郡으로, 建寧을 나누어 永昌郡과 함께 雲南郡으로, 또 建寧 일부와 牂柯를 합하여 興古郡을 설치하였는데, 諸葛亮은 이 과정에서 소위 七縱七擒의 전략으로 만족세력을 회유하여 이후 北伐의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사상 漢族에 의한 중원세력이 현재의 국경까지 진격하여 일대의 소수민족을 성공적으로 통제한 첫 사례로서, 전통적으로 蠻으로 불리는 남방민족이 중원왕조의 직접적인 통치권으로 편입되는 구체적인 사례로서 역사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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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사조는 여러 부족들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어 ‘남조(南詔)’라고 칭하였다. 영창(永昌) 주 014
각주 014)
永昌: 後漢 永平 2년(69) 哀牢夷가 내속하자, 그 땅과 益州郡 서부 6縣을 합하여 설치한 郡으로, 현재 雲南省 雲龍縣 서부 35km 漕澗鎭에 있는 籬唐縣에 치소를 두었다. 그 치소는 중간에 변하기는 하였지만, 남조 梁代까지 이어지다가, 梁末에 폐지되었다. 唐代에는 이곳에 永昌이라는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데, 垂拱 4년(688) 洛水神이 그 성스러움을 드러내었다고 하여, 洛水지역에 永昌縣을 설치하였는데, 雲南 哀牢夷지역과는 다른 곳이다. 이전의 명칭을 관습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구당서』에서는 “在漢永昌故郡東, 姚州之西”라고 하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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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주(姚州) 주 015
각주 015)
姚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에 따르면 요주는 劒南西川節度使 관내의 26州 가운데 하나로 관할 縣은 3현이었다. 唐 武德 4년(621)에 설치되었는데, 治所는 지금의 雲南省 姚安縣 西北 17里에 있는 舊城에 자리잡고 있었던 姚城縣으로 그 범위는 지금의 姚安縣과 동일하다. 姚州都督府에 의해 통치되었다. 唐代 安撫大使 李英에 의해 개척되었는데, 州內의 사람 대부분이 姚氏여서 姚州라 하였다. 당시 西南邊疆의 重鎭이었는데, 天寶연간 都督府가 폐지되었다. 南詔에서 弄棟節度로 하여금 주둔케 하였는데, 宋代 大理國에서는 姚府로 개칭하였다. 姚州都督府는 역시 唐 武德 4年(621)에 설치되어, 지금의 雲南 西北部를 관할하였는데, 麟德(664~665, 唐 高宗)이후 더욱 확대되어 동쪽으로는 지금의 昆明, 남쪽으로는 曲江, 서쪽으로는 怒江까지를 관할하였지만, 天寶 13年(754) 滇 西北部가 吐蕃에 점령되면서 天寶이후에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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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이, 철교(鐵橋) 주 016
각주 016)
鐵橋: 鐵橋城을 의미하는데, 지금의 雲南省 甫維西傈傈族自治縣 동북지역으로 金沙江 西岸의 塔城부근이다. 隋唐代 吐藩과 南詔의 경계지역으로 金沙江을 건너는 철교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吐藩에서 여기에 城을 쌓고 鐵橋節度使를 이곳에 주둔토록 하였다. 吐蕃 16城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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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동으로 찬국(爨國) 주 017
각주 017)
爨國: 爨은 본래 蜀漢시기 南中 즉 지금의 雲南 貴州일대 大姓의 하나로서, 東晉시기 爨氏가 대대로 南中에서 지방할거하면서, ‘爨’은 姓氏에서 점차 民族泛稱으로 변해가 ‘爨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隋唐시기 爨蠻은 東·西爨으로 분리하였는데, 東爨은 지금의 雲南省 昭通, 瀘西, 尋甸, 嵩明, 建水 및 貴州 威寧일대를 가리키는데, 주체민족은 ‘烏蠻’이라고 하고, 西爨은 지금의 曲靖, 馬龍, 昆明, 晉寧, 澄江, 安寧, 祿豊일대에 가리키는데 그 민족은 ‘白蠻’이라고 한다. 이들은 지금의 彝族과 白族 등의 선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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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고, 동남으로는 교지(交趾) 주 018
각주 018)
交趾: 秦代 이래 현재의 베트남 북부에 두어진 郡名으로, ‘南交’라고도 한다. 지역적으로 현재의 五嶺 이남의 지역 혹은 安南과 越南에 대한 별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중국 문헌에서는『禮記』「王制」의 ‘南方曰蠻 雕題交趾 有不火食者矣(남방을 만이라 하니 살갗에 문신을 하고 발을 교차하며 불로 익혀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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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마가타(摩伽陀)주 019
각주 019)
摩伽陀: 인도 고대 16대국 중의 하나로서 파리어로 Magadha를 가리킨다. 고대 중국의 기록으로 ‘摩竭’, ‘摩揭’, ‘摩诃陀’, ‘默竭陀’, ‘摩伽陀’, ‘墨竭提’, ‘摩揭陀’ 등으로 음역되기도 하고, 의미에 따라 ‘無害’, ‘無惱害’, ‘不惡處’, ‘致甘露處’, ‘善勝’, ‘聰慧’, ‘天羅’ 등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지금 인도 비하르주의 Patna와 Gaya지역에 존재하였다. 전 7세기부터 존재하면서 몇 차례 왕조가 바뀌기도 하였다. 당조에 와서 직접 교류가 시작되었는데, 玄藏이 이 곳을 방문한지 얼마 안되어 貞觀 15년(641) 屍羅逸多(戒日王)이 摩伽陀王을 자칭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였고 唐太宗은 雲騎尉 梁懷璥을 파견하여 보답한 것이 처음이었다. 貞觀 22년(648)에 太宗은 다시 王玄策과 蔣師仁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王玄策은 많은 불교유적지를 방문하고 摩訶菩提寺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중국 製糖法이 이시기 摩揭陀國으로부터 전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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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으며, 서북으로는 토번(吐蕃)과 접하고, 남쪽은 여왕국(女王國),주 020
각주 020)
女王國: 女王이 지배하는 국가라는 의미로 보면, 당시 이와 관련된 국가는 일부 확인된다. 첫째는 여왕 卑彌呼 때문에 일본 邢馬台國을 가리키기도 하고, 일본 밖에 존재한다는 女人國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는『隋書』에서 ‘女國’으로 표현된 국가로서 蔥嶺 즉 파미르고원 남쪽에 위치한 국가이다. 天竺과 黨項과의 전쟁에 개입되어 있다고 하는 것으로 티베트 고원에 있던 고대 민족, 즉 6世紀 중엽에 靑藏高原에 존재하였으며, 모계씨족사회을 유지하였다는 국가를 말한다.『신당서』에서는 ‘서산여왕(西山女王)’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셋째는『구당서』「남만서남이열전」에 나타난 것으로 西海중의 女國과 구별하기 위해 칭하였다는 東女國이다. 서해중의 女國은 바로『隋書』에 나오는 티베트의 女國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구분되는 東女國은 西羌의 別種으로 동쪽으로 茂州 黨項과 접하여 있고, 東南으로 雅州와 접하여 있으며, 그 경계가 羅女蠻과 白狼夷와 사이를 두고 이웃하여 있다고 한다. 현재 사천성 서부 산악지역에 위치한 국가를 말한다. 이 女國과 東女國은 동일한 근원을 갖는 것으로 파악되기도 하는데, 본『신당서』에서 南詔의 남쪽에 접하고 있다고 기술된 女王國과는 지리위치가 부합되지 않는다.
한편『蠻書』에서는 女王國은 蠻界로서 鎮南節度에서 30여일 일정이고, 驩州에서 10일 일정 떨어져 있어 종종 驩州 백성들과 교역한다고 되어 있다. 당대 驩州가 현재 베트남 경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나 동남연해를 있는 어느 국가를 의미한다.『신당서』南詔와 관련한 기록은『蠻書』를 많이 참조하였던 사실에서 보거나,『신당서』南詔와 관련된 女王國은 서쪽에 票國을 두고 南詔의 남부에 존재한다고 하는 지리위치상의 특징에서 보거나『蠻書』의 女王國를 의미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이 어느 국가를 가리키는지 확실하게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동남아시아에 존재하는 국가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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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쪽에는 표국(驃國)주 021
각주 021)
驃國: B.C. 1세기부터 A.D. 9세기까지 지금의 미얀마 경내에 위치한 도시국가로서, ‘驃人’ 굽타시기의 팔리문자어 기록으로는 Pyu, Pyuu, Pyū로 표기되는 종족에 의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魏晉時期의『西南異方誌』나『南中八郡志』등의 서적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데, “位於永昌西南三千里, 君臣父子, 長幼有序”라고 기술되어 있다. 때로는 ‘剽’, ‘僄’, ‘縹’, ‘漂越’ 등으로 기술되기도 하였는데,『大唐西域記』에서는 ‘室利差呾羅’로 표기되어 있는데, 팔리문자로 표기되어 있는 Sri Kshetra정권을 음역한 것으로, 驃國은 5세기 이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新唐書』에서는 ‘朱波’, ‘突羅朱’, ‘徒里掘’ 등의 이칭으로 불렸다. 그 수도는 이라와디강 하류에 있는 현재의 Prome으로, 이지역에는 현재 九座의 6내지 9세기에 조성된 佛塔과 驃國의 舊皇宮城의 담장이 남아있다. 당시 9개의 城鎭과 18개의 屬國, 그리고 298개의 部落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唐 大和 6년(832) 驃國은 南詔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로 쇠락하여 Bagan왕국(849~1287)의 지배하에 들어가 그 민족은 미얀마인으로 동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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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으며, 북으로는 익주(益州)에 막혀있고, 동북으로는 검(黔) 주 022
각주 022)
黔: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지금의 貴州省 지역을 의미하는데, 일설에는 경내에 黔靈山과 黔靈河가 있어서 이 일대를 “黔”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행정적으로 秦代 黔中郡이 唐代에는 黔中道가 설치되었는데, 元初에 정식으로 貴州가 설치되어 이곳의 지명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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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巫) 주 023
각주 023)
巫: 지금의 四川省 巫山縣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縣 동남부에 巫山이라는 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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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인접하고 있다. 왕도는 양저미성(羊苴咩城) 주 024
각주 024)
羊苴咩城:『蠻書』卷6 「貝僉」에서는 ‘陽苴咩城’으로 되어 있다. 줄여서 苴咩城으로 부르기도 한다.『蠻書』에 따르면 ‘貝僉’은 州郡의 名號를 의미한다. 지금의 雲南 大理市 西北 舊大理에 위치하였는데, 779년 南詔 異牟尋이 이곳에 천도하여 築城하여, 南詔와 大理國의 도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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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별도(別都)는 선천부(善闡府) 주 025
각주 025)
善闡府: 南詔의 別都로서 ‘上都’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蠻書』에서는 ‘善闡拓東城’ ‘拓東節度城’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鳳假異가 중축하여 拓東城이라 하였는데, 南詔 말기 6세손인 勸豐祐가 善闡城으로 개명하였다. 실제 別都의 역할은 6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雲南 昆明市에 있는 善闡城에 위치하였다. 大理國시기에 陪都가 되어 八府중에 하나였는데, 지금의 昆明市와 易門, 祿豐, 嵩明縣이 포함된다. 蒙古 憲宗 五년(1255) 萬戶府로 개칭되면서 범위가 축소되었다가, 至元 7년(1270) 善闡路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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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칭하였다.

  • 각주 001)
    鶴拓: 南詔의 별칭으로 그 기원은 불분명하다. 唐代 胡曾이〈代高騈回雲南牒〉이라는 글에서 “鶴拓은 알지 못하고 오직 苴咩만 알고 南詔의 멋스러운 이름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어찌 大朝의 아름다운 호칭이 드러나겠는가?”(不知鶴拓, 唯認苴咩, 尙呼南詔之佳名, 豈見大朝之美號.)라고 하는 것에서 보듯, 唐代에도 이미 별로 알려지지 않은 명칭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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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龍尾: 南詔를 龍尾라고 부르는 것은 南詔에서 축성하였던 龍尾城에 기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龍尾城은 지금의 雲南 大理市 下關으로서 西洱河의 北岸에 있었다. 唐 樊綽의『蠻書』卷5에서 閣羅鳳이 축성한 것으로 城門이 洱水에 임하여 있어 河上橋의 길이가 100여 보가 되며, 다리를 지나서 곧바로 남쪽으로 향하면 蒙舍路, 서쪽으로 향하면 永昌路, 동쪽으로 향하면 崖城路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山과 江에 면해 있어서 南詔와 大理의 도성인 陽苴咩城의 남방 요충지라고 설명하였다. 後代 이곳은 下關, 玉龍關이라고도 불리는 龍尾關이 설치되었는데, 淸 康熙『大理府志』卷5, 「太和縣」의〈關哨條〉에서는 蒼山에 의지하여 陽峰麓을 돌면서 洱河의 꼬리부분을 막고 있으며, 山勢가 거꾸로 도는 형세를 하고 있어서, 마치 龍이 놀면서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라고 하여 龍尾關이라고 불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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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苴咩: 南詔의 都城 羊苴咩城에서 기원한 호칭으로 보인다. 苴咩城은 南詔王 異牟尋이 축성한 것으로, 지금의 雲南 大理市의 大理古城과 그 서쪽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 城은 원래 河蠻이라고 불리던 종족에 의해 축성되었는데, 南詔가 六詔를 통일하고, 唐 大曆 14年(779) 南詔王 閣羅鳳이 죽고 異牟尋이 재위할 때 太和城에서 羊苴咩城으로 천도하면서 크게 수축되었다. 이후 902年 南詔國이 鄭氏에 장악되어 國號가 長和로, 후에 또 趙氏에 장악되자 天興으로, 다시 楊氏에 의해서 義寧으로 바뀌기도 하였는데, 937年 段氏가 장악하고 국호를 大理라고 하면서 羊苴咩城도 大理城으로 불리게 되었다. 元代 至元 11年(1274) 雲南行省이 지금의 昆明인 中慶에 설치되고, 羊苴咩城에는 大理路 軍民總管府가 자리잡으면서, 이 지역의 정치중심지로서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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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陽劍: 이러한 칭호에 대해 다른 史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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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哀牢夷: 後漢代 지금의 雲南 전지역과 四川의 서남부에 분포하는 종족세력을 지칭하는 명칭으로,『後漢書』「南蠻西南夷列傳」에 그 기원과 분포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明帝 永平 12년(69) 哀牢王이 귀순하자, 그 지역에 哀牢 博南 2현을 설치하고, 익주군 西部都尉가 거느린 6현을 떼어 永昌郡으로 삼았다. 당시 이 지역에는 哀牢, 儋耳, 僬僥, 槃木, 白狼, 動黏 등의 종족 등이 언급되는데, 후한 이후의 史書에 哀牢는 지명으로만 나타나고 종족으로서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후한 이전의 哀牢夷에 대해 方國瑜는 지금의 雲南 保山지역에 거주하는 嶲唐과 騰衝지역에 거주하는 滇越이 哀牢夷의 거주지역과 겹친다고 비정하면서, 雟가 哀牢夷의 일종이며, 그 주체민족은 옛 ‘濮人’으로 오늘날의 蒲曼族, 崩龍族, 佤族의 공통 선민이라고 하였다(方國瑜, 1987). 唐代 南詔 즉 蒙舍詔와 烏蠻은 哀牢夷와의 관련성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포괄관계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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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烏蠻: 隋代 史書에서 처음 나타나는 종족명으로서, 唐代에는 雲南, 四川南部, 貴州西部에 분포한다. 東爨, 六詔, 東蠻 등의 주요한 居民으로서, 부락이 잡다하였다. 후에 白蠻 등과 함께 南詔國을 건립하였는데, 왕족은 烏蠻이고 귀족 대성은 百蠻이었다. 그 대부분은 지금 彝族의 조상이고, 부분적으로 傈僳, 拉祜, 哈尼族과 그 연원에 관련성이 있다. 元明시기에는 黑爨 혹은 羅羅로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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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蒙巂詔: 蒙巂는 지금의 雲南 巍山縣 북부 漾濞彝族自治縣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唐代 陽瓜州가 설치되어 蒙巂詔王이 陽瓜州刺史를 세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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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越析詔: 越析은 지금의 雲南 賓川縣을 가리키는 지역으로, 戰國時代 葉楡에 속하였던 이후 益州郡, 永昌郡, 雲南郡에 속하였다가 隋 開皇 5年(585)에 越析州가 설치되었는데, 天寶 후에 폐지되고 姚州가 되었다. 이곳에 있는 종족세력들이 開元年間 南詔와 함께 六詔를 이루었는데, 후에 南詔에 의해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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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浪穹詔: 浪穹은 지금의 雲南省 洱源縣의 일부지역으로, 이곳은 漢代 葉楡縣에 속하였다가 唐代 仁德 元年(664) 洱源縣 소속으로 浪穹州가 설치되었다가 南詔로 통합되고, 元代에는 浪穹千戶所로 大理萬戶府에 예속되었다가, 至元 11년(1274) 雲南行省이 설치되었을 때는 浪穹縣으로 大理路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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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邆睒詔: 邆川赕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雲南省 洱源縣 남쪽으로 36里에 있었던 鄧川鎭 東北郊 德源城遺址에 있었던 邆川城을 중심지로 하고 있다. 당대에 이곳에 鄧川州가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후에 大理에 예속되었다가 元 憲宗때 중국에 귀속되어 내부하여 德原千戶로서 大理上萬戶에 예속되었다. 이후 邆川縣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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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施浪詔: 唐代 六詔의 하나로서 지금의 雲南省 洱源縣 東南部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開元中 南詔에 의해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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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蒙舍詔: 六詔의 하나로서 지금의 雲南省 巍山彝族回族自治縣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위치가 다른 五詔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南詔’라고도 하였다. 그 중심지는 巍山縣 西北 30里로서 巄屽城의 遗址가 있다. 唐初 이곳에 沙壺州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則天시기에 蒙舍州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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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諸葛亮 南征: 諸葛亮의 南蠻정벌을 말하는데, 三國 蜀漢의 丞相 諸葛亮에 의해서 建興 3년(225)에 진행된 현재의 雲南, 貴州와 四川 서남부 일대 蠻을 평정한 사건을 말한다. 蜀漢 章武 3년(223) 劉備가 죽고 劉禪이 제위에 올랐을 때, 越嶲夷王 高定이 越嶲에서, 漢族 豪强인 雍闓가 建寧에서, 牂牁太守 朱褒가 牂牁에서 일제히 기병하여 蜀에 저항하였다. 이에 대해 諸葛亮은 초기에 招撫정책을 취하였지만, 鄧芝를 孫吳에 파견하여 修好관계를 확보하자, 建興 3년(225) 봄 庲降都督 李恢와 門下督 馬忠을 이끌고 직접 南征에 나서 이 일대의 南蠻지역을 평정하였다. 그 결과 당시 益州郡을 建寧郡으로, 建寧을 나누어 永昌郡과 함께 雲南郡으로, 또 建寧 일부와 牂柯를 합하여 興古郡을 설치하였는데, 諸葛亮은 이 과정에서 소위 七縱七擒의 전략으로 만족세력을 회유하여 이후 北伐의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사상 漢族에 의한 중원세력이 현재의 국경까지 진격하여 일대의 소수민족을 성공적으로 통제한 첫 사례로서, 전통적으로 蠻으로 불리는 남방민족이 중원왕조의 직접적인 통치권으로 편입되는 구체적인 사례로서 역사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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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永昌: 後漢 永平 2년(69) 哀牢夷가 내속하자, 그 땅과 益州郡 서부 6縣을 합하여 설치한 郡으로, 현재 雲南省 雲龍縣 서부 35km 漕澗鎭에 있는 籬唐縣에 치소를 두었다. 그 치소는 중간에 변하기는 하였지만, 남조 梁代까지 이어지다가, 梁末에 폐지되었다. 唐代에는 이곳에 永昌이라는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데, 垂拱 4년(688) 洛水神이 그 성스러움을 드러내었다고 하여, 洛水지역에 永昌縣을 설치하였는데, 雲南 哀牢夷지역과는 다른 곳이다. 이전의 명칭을 관습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구당서』에서는 “在漢永昌故郡東, 姚州之西”라고 하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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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姚州:『元和郡縣圖志』卷32 「劒南道」中에 따르면 요주는 劒南西川節度使 관내의 26州 가운데 하나로 관할 縣은 3현이었다. 唐 武德 4년(621)에 설치되었는데, 治所는 지금의 雲南省 姚安縣 西北 17里에 있는 舊城에 자리잡고 있었던 姚城縣으로 그 범위는 지금의 姚安縣과 동일하다. 姚州都督府에 의해 통치되었다. 唐代 安撫大使 李英에 의해 개척되었는데, 州內의 사람 대부분이 姚氏여서 姚州라 하였다. 당시 西南邊疆의 重鎭이었는데, 天寶연간 都督府가 폐지되었다. 南詔에서 弄棟節度로 하여금 주둔케 하였는데, 宋代 大理國에서는 姚府로 개칭하였다. 姚州都督府는 역시 唐 武德 4年(621)에 설치되어, 지금의 雲南 西北部를 관할하였는데, 麟德(664~665, 唐 高宗)이후 더욱 확대되어 동쪽으로는 지금의 昆明, 남쪽으로는 曲江, 서쪽으로는 怒江까지를 관할하였지만, 天寶 13年(754) 滇 西北部가 吐蕃에 점령되면서 天寶이후에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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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鐵橋: 鐵橋城을 의미하는데, 지금의 雲南省 甫維西傈傈族自治縣 동북지역으로 金沙江 西岸의 塔城부근이다. 隋唐代 吐藩과 南詔의 경계지역으로 金沙江을 건너는 철교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吐藩에서 여기에 城을 쌓고 鐵橋節度使를 이곳에 주둔토록 하였다. 吐蕃 16城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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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爨國: 爨은 본래 蜀漢시기 南中 즉 지금의 雲南 貴州일대 大姓의 하나로서, 東晉시기 爨氏가 대대로 南中에서 지방할거하면서, ‘爨’은 姓氏에서 점차 民族泛稱으로 변해가 ‘爨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隋唐시기 爨蠻은 東·西爨으로 분리하였는데, 東爨은 지금의 雲南省 昭通, 瀘西, 尋甸, 嵩明, 建水 및 貴州 威寧일대를 가리키는데, 주체민족은 ‘烏蠻’이라고 하고, 西爨은 지금의 曲靖, 馬龍, 昆明, 晉寧, 澄江, 安寧, 祿豊일대에 가리키는데 그 민족은 ‘白蠻’이라고 한다. 이들은 지금의 彝族과 白族 등의 선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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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交趾: 秦代 이래 현재의 베트남 북부에 두어진 郡名으로, ‘南交’라고도 한다. 지역적으로 현재의 五嶺 이남의 지역 혹은 安南과 越南에 대한 별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중국 문헌에서는『禮記』「王制」의 ‘南方曰蠻 雕題交趾 有不火食者矣(남방을 만이라 하니 살갗에 문신을 하고 발을 교차하며 불로 익혀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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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摩伽陀: 인도 고대 16대국 중의 하나로서 파리어로 Magadha를 가리킨다. 고대 중국의 기록으로 ‘摩竭’, ‘摩揭’, ‘摩诃陀’, ‘默竭陀’, ‘摩伽陀’, ‘墨竭提’, ‘摩揭陀’ 등으로 음역되기도 하고, 의미에 따라 ‘無害’, ‘無惱害’, ‘不惡處’, ‘致甘露處’, ‘善勝’, ‘聰慧’, ‘天羅’ 등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지금 인도 비하르주의 Patna와 Gaya지역에 존재하였다. 전 7세기부터 존재하면서 몇 차례 왕조가 바뀌기도 하였다. 당조에 와서 직접 교류가 시작되었는데, 玄藏이 이 곳을 방문한지 얼마 안되어 貞觀 15년(641) 屍羅逸多(戒日王)이 摩伽陀王을 자칭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였고 唐太宗은 雲騎尉 梁懷璥을 파견하여 보답한 것이 처음이었다. 貞觀 22년(648)에 太宗은 다시 王玄策과 蔣師仁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王玄策은 많은 불교유적지를 방문하고 摩訶菩提寺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중국 製糖法이 이시기 摩揭陀國으로부터 전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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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女王國: 女王이 지배하는 국가라는 의미로 보면, 당시 이와 관련된 국가는 일부 확인된다. 첫째는 여왕 卑彌呼 때문에 일본 邢馬台國을 가리키기도 하고, 일본 밖에 존재한다는 女人國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는『隋書』에서 ‘女國’으로 표현된 국가로서 蔥嶺 즉 파미르고원 남쪽에 위치한 국가이다. 天竺과 黨項과의 전쟁에 개입되어 있다고 하는 것으로 티베트 고원에 있던 고대 민족, 즉 6世紀 중엽에 靑藏高原에 존재하였으며, 모계씨족사회을 유지하였다는 국가를 말한다.『신당서』에서는 ‘서산여왕(西山女王)’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셋째는『구당서』「남만서남이열전」에 나타난 것으로 西海중의 女國과 구별하기 위해 칭하였다는 東女國이다. 서해중의 女國은 바로『隋書』에 나오는 티베트의 女國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구분되는 東女國은 西羌의 別種으로 동쪽으로 茂州 黨項과 접하여 있고, 東南으로 雅州와 접하여 있으며, 그 경계가 羅女蠻과 白狼夷와 사이를 두고 이웃하여 있다고 한다. 현재 사천성 서부 산악지역에 위치한 국가를 말한다. 이 女國과 東女國은 동일한 근원을 갖는 것으로 파악되기도 하는데, 본『신당서』에서 南詔의 남쪽에 접하고 있다고 기술된 女王國과는 지리위치가 부합되지 않는다.
    한편『蠻書』에서는 女王國은 蠻界로서 鎮南節度에서 30여일 일정이고, 驩州에서 10일 일정 떨어져 있어 종종 驩州 백성들과 교역한다고 되어 있다. 당대 驩州가 현재 베트남 경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나 동남연해를 있는 어느 국가를 의미한다.『신당서』南詔와 관련한 기록은『蠻書』를 많이 참조하였던 사실에서 보거나,『신당서』南詔와 관련된 女王國은 서쪽에 票國을 두고 南詔의 남부에 존재한다고 하는 지리위치상의 특징에서 보거나『蠻書』의 女王國를 의미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이 어느 국가를 가리키는지 확실하게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동남아시아에 존재하는 국가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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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驃國: B.C. 1세기부터 A.D. 9세기까지 지금의 미얀마 경내에 위치한 도시국가로서, ‘驃人’ 굽타시기의 팔리문자어 기록으로는 Pyu, Pyuu, Pyū로 표기되는 종족에 의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魏晉時期의『西南異方誌』나『南中八郡志』등의 서적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데, “位於永昌西南三千里, 君臣父子, 長幼有序”라고 기술되어 있다. 때로는 ‘剽’, ‘僄’, ‘縹’, ‘漂越’ 등으로 기술되기도 하였는데,『大唐西域記』에서는 ‘室利差呾羅’로 표기되어 있는데, 팔리문자로 표기되어 있는 Sri Kshetra정권을 음역한 것으로, 驃國은 5세기 이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新唐書』에서는 ‘朱波’, ‘突羅朱’, ‘徒里掘’ 등의 이칭으로 불렸다. 그 수도는 이라와디강 하류에 있는 현재의 Prome으로, 이지역에는 현재 九座의 6내지 9세기에 조성된 佛塔과 驃國의 舊皇宮城의 담장이 남아있다. 당시 9개의 城鎭과 18개의 屬國, 그리고 298개의 部落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唐 大和 6년(832) 驃國은 南詔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로 쇠락하여 Bagan왕국(849~1287)의 지배하에 들어가 그 민족은 미얀마인으로 동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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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黔: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지금의 貴州省 지역을 의미하는데, 일설에는 경내에 黔靈山과 黔靈河가 있어서 이 일대를 “黔”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행정적으로 秦代 黔中郡이 唐代에는 黔中道가 설치되었는데, 元初에 정식으로 貴州가 설치되어 이곳의 지명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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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巫: 지금의 四川省 巫山縣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縣 동남부에 巫山이라는 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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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羊苴咩城:『蠻書』卷6 「貝僉」에서는 ‘陽苴咩城’으로 되어 있다. 줄여서 苴咩城으로 부르기도 한다.『蠻書』에 따르면 ‘貝僉’은 州郡의 名號를 의미한다. 지금의 雲南 大理市 西北 舊大理에 위치하였는데, 779년 南詔 異牟尋이 이곳에 천도하여 築城하여, 南詔와 大理國의 도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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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善闡府: 南詔의 別都로서 ‘上都’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蠻書』에서는 ‘善闡拓東城’ ‘拓東節度城’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鳳假異가 중축하여 拓東城이라 하였는데, 南詔 말기 6세손인 勸豐祐가 善闡城으로 개명하였다. 실제 別都의 역할은 6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雲南 昆明市에 있는 善闡城에 위치하였다. 大理國시기에 陪都가 되어 八府중에 하나였는데, 지금의 昆明市와 易門, 祿豐, 嵩明縣이 포함된다. 蒙古 憲宗 五년(1255) 萬戶府로 개칭되면서 범위가 축소되었다가, 至元 7년(1270) 善闡路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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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제갈량(諸葛亮)
지명
남조(南詔), 학척(鶴拓), 용미(龍尾), 저미(苴咩), 양검(陽劍), 촉한, 남조(南詔), 영창(永昌), 요주(姚州), 철교(鐵橋), 찬국(爨國), 교지(交趾), 토번(吐蕃), 여왕국(女王國), 표국(驃國), 익주(益州), 검(黔), 무(巫), 양저미성(羊苴咩城), 선천부(善闡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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