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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광무(漢光武) 때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고 나라가 혼란하여 여러 해 군주가 없다가 여왕 ∙ 남왕을 수시로 세웠음

 
  • 국가왜국(倭國)
한 광무제 때(25∼57),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였는데, 스스로 대부라고 칭하였다. 안제 때(106∼125)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왜노국(倭奴國)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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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에서는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이라고 하였다. 光武帝 建武中元 2년에 사신을 파견한 주체는 倭奴國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때 사신을 보낸 것은 倭國王 帥升이라고 하였으므로 차이가 있다. 倭國王은 일본열도 세력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볼 수도 있다.

이라고 하였다. 영제 광화 연간(178∼184)에, 그 나라가 혼란해져서 서로 교대로 공격하고 치니,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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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國亂: 180년대를 중심으로 일본열도의 九州地域부터 關東地域에 걸쳐서 발생하였던 大亂을 말한다. 이 대란의 흔적을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北部九州 내부에서 전쟁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고, 北部九州에서 東部九州를 잇는 지역에서 봉수대를 포함하는 高地性 集落이 조성되었다. 이는 동쪽 즉 畿內와 瀨戶內 등으로부터의 군사적 압박에 대하여 北部九州가 대비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瀨戶內 연안부에서도 바다에 면한 高地性 集落이 조성된 예가 많다. 또한 2세기 말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奈良縣 櫻井市의 纏向遺跡에서는 동쪽으로는 關東으로부터 서쪽으로는 北部九州에서 반입된 토기가 전체 토기의 15%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 유적이 이 시기에 九州에서 關東에 이르는 인적·물적 교류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유적 주변에는 前方後圓墳의 祖形으로 간주되는 纏向石塚 및 호케노야마고분 그리고 가장 오래된 전방후원분으로 추정되는 箸墓古墳 등이 위치하고 있다.이에 대해서 濃尾平野를 중심으로 한 일본 中部(東海) 地域은 彌生時代 중기까지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1세기 말에 銅鐸(말 방울과 같은 실용적인 도구에서 기원한 청동기)이 급격하게 대형화되고 祭器로서 사용된다. 그러한 銅鐸에는 近畿식과 三遠式이 있는데 東海 地域은 三遠式 동탁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2세기 말이 되면 三遠式 銅鐸은 사라지고, 이 지역에서 銅鐸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畿內式 銅鐸의 생산조직에 흡수되고 近畿式 銅鐸만 제작된다. 이는 中部地域의 자립성이 畿內勢力에 의하면 부정되었음을 상징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彌生時代 후기에 關東地域의 개발이 활발해지고, 각지에서 환호집락이 격증한다. 이러한 집락에서는 東海系 土器가 대량으로 출토되는데, 이는 關東地域의 개발에 東海地域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깊이 관여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시기에 關東地域의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되었던 사실도 확인된다.이처럼 2세기 말엽에 해당하는 彌生時代 후기 왜인 사회에서는 관동에서 북부 구주에 걸친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國立歷史民俗博物館編, 1996: 180∼181).

여러 해 동안 군주가 없었다. 비미호(卑彌呼)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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卑彌呼: 히미코[日命, 日尊] 또는 히메코[姬子]라고 읽는다. 新井白石은 ‘日御子’로서 天皇으로 간주하고 있다(『古史通或問』). 야마대국이 大和에 있었다는 입장에서는 『日本書紀』에 기재되어 있는 神功皇后, 倭姬命 그리고 崇神天皇의 여동생 倭迹迹日百襲姬命(笠井新也) 등에 비정하고 있고, 九州說에서는 熊襲女酋, 『日本書紀』 神代卷에 보이는 火之戶幡姬兒千千姬命 및 萬幡姬兒玉依姬命 그리고 土蜘蛛田油津媛의 조상 등으로 비정하고 있다. 더불어서 那珂通世와 白鳥庫吉 등의 지지를 받은 熊襲 혹은 隼人族의 女酋란 설도 있다(末松保和, 1962: 23∼43 및 石原道博, 1985: 49∼50).

라는 여자가 있어서, 능히 귀도(鬼道)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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鬼道: 일반적으로 ‘惑世誣民하는 術法’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신선사상, 보다 직접적으로는 후한 말에 유행하였던 張魯의 五斗米道와도 일정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三國志』의 張魯傳에서는 漢中地域에서 교세를 떨쳤던 張魯에 대하여, “魯는 漢中에 거점을 두고, 鬼道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스스로 師君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森浩一, 1985: 137). 한편 魏가 여왕에게 하사한 동경은 三角緣神獸鏡인데, 이 거울은 神仙과 상서로운 동물을 배치한 道敎的인 성격의 거울이다. 이전 시대까지 일본열도에서 제기로 사용된 銅鐸을 대신하여 銅鏡이 새로운 祭儀 특히 葬送儀禮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 무렵 일본열도의 수장층들이 신선사상을 수용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로 무리를 현혹시켰다. 나라사람들이 함께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남편이 없고, 두 남자가 있어서, 왕에게 음식을 바치고, 말을 전하여 통하게 하였다. 왕은 궁실과 누관, 성책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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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柵: 성은 흙을 版築法으로 쌓아 견고하게 만든 것이고 책은 나무로 빽빽하게 만든 울타리를 말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일본열도에는 城은 없었다. 현재 발굴된 유적을 통해서도 木柵과 구덩이만 확인될 뿐이다. 부여나 진한의 경우도 성책은 토벽을 두른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柵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있으며, 모두 무기를 들고 지켰으며, 법을 행하는 것이 아주 엄격하였다. 위나라 경초(景初) 3년(239), [주006]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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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 권30 「倭傳」에서는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이라고 하였고, 『三國志』 권3 「明帝紀」에서는 “公孫淵被殺, 在景初二年八月.”이라고 하였다. 만약 왜의 사신이 淵이 죽은 다음에 처음으로 찾아왔다면, 곧 『三國志』 「倭傳」의 景初 2년은 景初 3년의 잘못일 것으로 보고 있다.

공손문의(公孫文懿) [주007]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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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孫文懿: 公孫淵을 가리킨다.

가 주살(誅殺)된 후, 비미호(卑彌呼)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의 황제(魏主)는 임시로 금인자수(金印紫綬) [주008]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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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印紫綬: 금으로 만든 인장[金印]과 자주색의 도장끈[紫綬]을 합한 것을 말하고, 金章紫綬라고도 한다. 秦漢時代에는 丞相, 三公 그리고 列侯 등 高官들이 佩用하였다. 後世에는 帝王들이 이것을 高官으로서 退職하는 자 및 後宮의 妃嬪들에게 하사하였다(徐連達, 1991: 633). 한편 1784년 현재의 福岡市 志賀島에서 백성인 甚兵衛라는 사람이 ‘漢委奴國王’이라는 印文을 가진 금인을 발견하였다. 이는 ‘漢의 倭(委) 奴國王’이라는 뜻으로, 후한 광무제가 57년에 조공해 온 왜노국에게 내린 인수로 보고 있다. 『후한서』에서는 印綬를 주었다고만 기록하였고, 도장의 재질에나 수실의 색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金印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奴國王에게도 ‘金印紫綬’가 하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인의 크기는 한 변이 2.34cm이며, 높이는 2.23cm이다. 한 변의 길이는 당시 한 대의 1寸에 대응하는 것이다.후한의 황제가 이민족에게 金印紫綬를 내린 사례는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먼 곳에 있는 나라가 조공한 경우, ② 한에 귀순한 경우, ③ 군사적인 측면에서 공로가 있는 경우, ④ 많은 군사를 이끌고 항복한 경우. 실제 사례로 보면 122년 西羌王 麻奴가 부족 3,000여 호를 이끌고 한에 항복하였을 때 금인자수를 내렸다. 이 경우는 4의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 먼곳에 있는 나라가 조공한 경우로는 버어마의 撣國, 스리랑카로 추정되는 葉調國의 예를 들 수 있다. 한편 금인의 손잡이부분[鈕]는 蛇鈕 즉 뱀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晉이 주변의 이민족들에게 준 인장에는 虺鈕가 있는데, 이는 남쪽 지역에 뱀이 많기 때문에 그 지역적인 특징을 살려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雲南省 昆明市 晉寧縣 石寨山古墳에서 蛇鈕金印이 출토되어 蛇鈕가 남쪽의 이민족에게 사여된 것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인문은 ‘滇王之印’이었다. 그 밖에도 蛇鈕銅印의 예로는 京都 有鄰館이 소장하고 있는 ‘蠻夷里長’ 및 ‘晉蠻夷率善仟長’ 동인과 大谷大學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晉蠻夷率善邑長’ 및 ‘晉蠻夷率善佰長’ 銅印 등이 있다. 漢·魏·晉代의 인장으로는 ‘廣陵王璽’라는 인문을 가진 龜鈕金印(江蘇省 邗江縣 甘泉 2호분, 한 대), ‘魏率善氐仟長’이라는 인문을 가진 駝鈕銅印(陝西省 扶豊縣), ‘晉歸義羌侯’라는 인문을 가진 羊鈕金印 등이 있는데, 여러 가지 동물을 손잡이부분에 표현하였다. 氐는 낙타와 양, 羌은 양에 대응시키고 있다. 낙타는 그 밖에도 흉노, 선비, 오환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평양의 정백리에서 발굴된 전한 말의 토광묘에서 나온 ‘夫租薉君’의 銀印도 역시 낙타뉴이다. 같은 東夷이면서도 濊는 낙타, 倭는 뱀으로 대응시킨 점을 흥미롭다.

를 주었다. 정시 연간(240∼249)에, 비미호가 죽고, 다시 남왕(男王)을 세웠으나 나라 안이 따르지 않고, 다시 서로 쳐서 죽이니, 다시 비미호의 종녀(宗女)인 대여(臺與) [주009]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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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與: 卑彌呼의 뒤를 이은 倭의 여왕. 『三國志』에서는 壹與로, 『양서』와 『북사』에는 臺與로 표기되어 있다. 그래서 그 음에 대해서도 ‘토요’, ‘도요’, ‘타이요’, ‘이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후 다시 남왕을 세우니, 모두 중국의 작명(爵命)을 받았다. 강동(江左)진(晉), 송(宋), 제(齊), 양(梁)이 있던 시대에, 조빙(朝聘)을 끊이지 않았다. [주485]
각주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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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書』 등에 倭王이 安東將軍 倭國王 등의 작호를 요청한 기사들이 나타난다.



 

주 001
『後漢書』에서는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이라고 하였다. 光武帝 建武中元 2년에 사신을 파견한 주체는 倭奴國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때 사신을 보낸 것은 倭國王 帥升이라고 하였으므로 차이가 있다. 倭國王은 일본열도 세력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볼 수도 있다.
주 002
倭國亂: 180년대를 중심으로 일본열도의 九州地域부터 關東地域에 걸쳐서 발생하였던 大亂을 말한다. 이 대란의 흔적을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北部九州 내부에서 전쟁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고, 北部九州에서 東部九州를 잇는 지역에서 봉수대를 포함하는 高地性 集落이 조성되었다. 이는 동쪽 즉 畿內와 瀨戶內 등으로부터의 군사적 압박에 대하여 北部九州가 대비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瀨戶內 연안부에서도 바다에 면한 高地性 集落이 조성된 예가 많다. 또한 2세기 말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奈良縣 櫻井市의 纏向遺跡에서는 동쪽으로는 關東으로부터 서쪽으로는 北部九州에서 반입된 토기가 전체 토기의 15%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 유적이 이 시기에 九州에서 關東에 이르는 인적·물적 교류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유적 주변에는 前方後圓墳의 祖形으로 간주되는 纏向石塚 및 호케노야마고분 그리고 가장 오래된 전방후원분으로 추정되는 箸墓古墳 등이 위치하고 있다.이에 대해서 濃尾平野를 중심으로 한 일본 中部(東海) 地域은 彌生時代 중기까지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1세기 말에 銅鐸(말 방울과 같은 실용적인 도구에서 기원한 청동기)이 급격하게 대형화되고 祭器로서 사용된다. 그러한 銅鐸에는 近畿식과 三遠式이 있는데 東海 地域은 三遠式 동탁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2세기 말이 되면 三遠式 銅鐸은 사라지고, 이 지역에서 銅鐸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畿內式 銅鐸의 생산조직에 흡수되고 近畿式 銅鐸만 제작된다. 이는 中部地域의 자립성이 畿內勢力에 의하면 부정되었음을 상징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彌生時代 후기에 關東地域의 개발이 활발해지고, 각지에서 환호집락이 격증한다. 이러한 집락에서는 東海系 土器가 대량으로 출토되는데, 이는 關東地域의 개발에 東海地域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깊이 관여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시기에 關東地域의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되었던 사실도 확인된다.이처럼 2세기 말엽에 해당하는 彌生時代 후기 왜인 사회에서는 관동에서 북부 구주에 걸친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國立歷史民俗博物館編, 1996: 180∼181).
주 003
卑彌呼: 히미코[日命, 日尊] 또는 히메코[姬子]라고 읽는다. 新井白石은 ‘日御子’로서 天皇으로 간주하고 있다(『古史通或問』). 야마대국이 大和에 있었다는 입장에서는 『日本書紀』에 기재되어 있는 神功皇后, 倭姬命 그리고 崇神天皇의 여동생 倭迹迹日百襲姬命(笠井新也) 등에 비정하고 있고, 九州說에서는 熊襲女酋, 『日本書紀』 神代卷에 보이는 火之戶幡姬兒千千姬命 및 萬幡姬兒玉依姬命 그리고 土蜘蛛田油津媛의 조상 등으로 비정하고 있다. 더불어서 那珂通世와 白鳥庫吉 등의 지지를 받은 熊襲 혹은 隼人族의 女酋란 설도 있다(末松保和, 1962: 23∼43 및 石原道博, 1985: 49∼50).
주 004
鬼道: 일반적으로 ‘惑世誣民하는 術法’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신선사상, 보다 직접적으로는 후한 말에 유행하였던 張魯의 五斗米道와도 일정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三國志』의 張魯傳에서는 漢中地域에서 교세를 떨쳤던 張魯에 대하여, “魯는 漢中에 거점을 두고, 鬼道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스스로 師君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森浩一, 1985: 137). 한편 魏가 여왕에게 하사한 동경은 三角緣神獸鏡인데, 이 거울은 神仙과 상서로운 동물을 배치한 道敎的인 성격의 거울이다. 이전 시대까지 일본열도에서 제기로 사용된 銅鐸을 대신하여 銅鏡이 새로운 祭儀 특히 葬送儀禮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 무렵 일본열도의 수장층들이 신선사상을 수용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주 005
城柵: 성은 흙을 版築法으로 쌓아 견고하게 만든 것이고 책은 나무로 빽빽하게 만든 울타리를 말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일본열도에는 城은 없었다. 현재 발굴된 유적을 통해서도 木柵과 구덩이만 확인될 뿐이다. 부여나 진한의 경우도 성책은 토벽을 두른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柵인 것으로 추측된다.
주 006
『三國志』 권30 「倭傳」에서는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이라고 하였고, 『三國志』 권3 「明帝紀」에서는 “公孫淵被殺, 在景初二年八月.”이라고 하였다. 만약 왜의 사신이 淵이 죽은 다음에 처음으로 찾아왔다면, 곧 『三國志』 「倭傳」의 景初 2년은 景初 3년의 잘못일 것으로 보고 있다.
주 007
公孫文懿: 公孫淵을 가리킨다.
주 008
金印紫綬: 금으로 만든 인장[金印]과 자주색의 도장끈[紫綬]을 합한 것을 말하고, 金章紫綬라고도 한다. 秦漢時代에는 丞相, 三公 그리고 列侯 등 高官들이 佩用하였다. 後世에는 帝王들이 이것을 高官으로서 退職하는 자 및 後宮의 妃嬪들에게 하사하였다(徐連達, 1991: 633). 한편 1784년 현재의 福岡市 志賀島에서 백성인 甚兵衛라는 사람이 ‘漢委奴國王’이라는 印文을 가진 금인을 발견하였다. 이는 ‘漢의 倭(委) 奴國王’이라는 뜻으로, 후한 광무제가 57년에 조공해 온 왜노국에게 내린 인수로 보고 있다. 『후한서』에서는 印綬를 주었다고만 기록하였고, 도장의 재질에나 수실의 색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金印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奴國王에게도 ‘金印紫綬’가 하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인의 크기는 한 변이 2.34cm이며, 높이는 2.23cm이다. 한 변의 길이는 당시 한 대의 1寸에 대응하는 것이다.후한의 황제가 이민족에게 金印紫綬를 내린 사례는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먼 곳에 있는 나라가 조공한 경우, ② 한에 귀순한 경우, ③ 군사적인 측면에서 공로가 있는 경우, ④ 많은 군사를 이끌고 항복한 경우. 실제 사례로 보면 122년 西羌王 麻奴가 부족 3,000여 호를 이끌고 한에 항복하였을 때 금인자수를 내렸다. 이 경우는 4의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 먼곳에 있는 나라가 조공한 경우로는 버어마의 撣國, 스리랑카로 추정되는 葉調國의 예를 들 수 있다. 한편 금인의 손잡이부분[鈕]는 蛇鈕 즉 뱀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晉이 주변의 이민족들에게 준 인장에는 虺鈕가 있는데, 이는 남쪽 지역에 뱀이 많기 때문에 그 지역적인 특징을 살려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雲南省 昆明市 晉寧縣 石寨山古墳에서 蛇鈕金印이 출토되어 蛇鈕가 남쪽의 이민족에게 사여된 것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인문은 ‘滇王之印’이었다. 그 밖에도 蛇鈕銅印의 예로는 京都 有鄰館이 소장하고 있는 ‘蠻夷里長’ 및 ‘晉蠻夷率善仟長’ 동인과 大谷大學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晉蠻夷率善邑長’ 및 ‘晉蠻夷率善佰長’ 銅印 등이 있다. 漢·魏·晉代의 인장으로는 ‘廣陵王璽’라는 인문을 가진 龜鈕金印(江蘇省 邗江縣 甘泉 2호분, 한 대), ‘魏率善氐仟長’이라는 인문을 가진 駝鈕銅印(陝西省 扶豊縣), ‘晉歸義羌侯’라는 인문을 가진 羊鈕金印 등이 있는데, 여러 가지 동물을 손잡이부분에 표현하였다. 氐는 낙타와 양, 羌은 양에 대응시키고 있다. 낙타는 그 밖에도 흉노, 선비, 오환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평양의 정백리에서 발굴된 전한 말의 토광묘에서 나온 ‘夫租薉君’의 銀印도 역시 낙타뉴이다. 같은 東夷이면서도 濊는 낙타, 倭는 뱀으로 대응시킨 점을 흥미롭다.
주 009
臺與: 卑彌呼의 뒤를 이은 倭의 여왕. 『三國志』에서는 壹與로, 『양서』와 『북사』에는 臺與로 표기되어 있다. 그래서 그 음에 대해서도 ‘토요’, ‘도요’, ‘타이요’, ‘이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주 485
『宋書』 등에 倭王이 安東將軍 倭國王 등의 작호를 요청한 기사들이 나타난다.
 
이름
한 광무제 , 안제 , 영제 , 비미호(卑彌呼) , 공손문의(公孫文懿) , 비미호(卑彌呼) , 비미호 , 비미호 , 대여(臺與)
지명
왜노국(倭奴國) , 위나라 , , 강동(江左) , 진(晉) , 송(宋) , 제(齊) , 양(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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