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황(開皇) 20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 궁을 찾았으며 남자의 복식은 치마 ∙ 저고리[裙襦]를 입는 등의 풍습이 있었음
개황(開皇) 20년(600)에 왜왕의 성은 아매(阿每),주 001
내관(內官)은 12등급[等]이 있다.주 008첫 번째를 대덕(大德)이라고 하고, 다음은 소덕(小德), 다음은 대인(大仁), 다음은 소인(小仁), 다음은 대의(大義), 다음은 소의(小義), 다음은 대례(大禮), 다음은 소례(小禮), 다음은 대지(大智), 다음은 소지(小智), 다음은 대신(大信), 다음은 소신(小信)이며, 인원은 정해진 수가 없다.주 009군니(軍尼)주 485가 120인 있는데, 중국의 지방장관[牧宰]과 같은 것이다. 80호에 1이니익(伊尼翼)주 011을 두는데, 지금의 이장(里長)과 같은 것이다. 10이니익은 1군니에 속한다.
그 복식은 남자는 치마와 저고리[裙襦]를 입는데, 소매는 작고 짧다. 신발은 나막신 같은 형태인데 그 위에 옻칠을 하고, 다리에 [끈으로] 묶는다. 서민[人庶]은 대부분 맨발이다. 금은을 사용해서 장식할 수 없다. 옛날에는 옷은 옆으로 긴 천[橫幅]을 묶어서 서로 이었으며 바느질하지 않았다. 머리에도 또한 관을 쓰지 않으며, 다만 머리카락을 양쪽 귀 위로 늘어뜨릴 뿐이었다. 수나라 때 이르러, 그 왕이 처음으로 관을 정하였다.주 012수놓은 비단이나 비단으로 관을 만들고, 금은으로 꽃을 새겨 장식으로 삼았다.주 013부인은 머리를 뒤로 묶고, 또한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데, 치마에는 모두 가장자리 장식이 있다. 대나무로 빗을 만들고, 풀을 엮어서 깔개를 만든다. 가죽으로 거죽을 만들고, 무늬 있는 가죽으로 가장자리를 만든다. 활, 화살, 칼, 창, 쇠뇌, 작은 창, 도끼가 있으며, 가죽에 옻칠을 해서 갑옷으로 삼고,주 014뼈로 명적[矢鏑]주 015을 만든다. 무기는 있지만 서로 싸우지는 않는다. 그 왕은 조회 때 반드시 의장을 늘어세우며, 그 나라의 음악을 연주한다. 호수[戶]는 10만 정도이다.
각주 001)
자(字)는 다리사비고(多利思比孤),주 002왜왕의 칭호를 성·자·호로 나눈 것은 중국적인 발상이다. 왜왕은 성이 없으며, ‘阿每’와 ‘多利思比孤’ 모두 왜왕에 대한 존칭일 뿐이다. ‘아메노타라시히코’는 ‘天足彦’ 혹은 ‘天帶彦’으로 표기할 수 있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존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실제로 7세기 초에는 舒明天皇의 일본식 시호인 息長足日廣額(오키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이나 皇極天皇의 시호인 天豊財中日足姬(아메토요타카라이카시히타라시히메)의 예와 같이 ‘아메’나 ‘타라시’가 들어간 왜왕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景行天皇과 같이 전설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에도 大足彦忍大別(오오타라시히코오시로와케)라는 시호를 가지고 있다.
각주 002)
호(號)는 아배계미(阿輩鷄彌)
주 003인데 사신주 004을 보내어 궁궐에 찾아왔다. 황제는 담당 관사로 하여금 그 풍속을 묻게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왜왕은 하늘을 형으로 여기고, 해를 아우로 여기며, 아직 밝기 전에 나와서 정사를 행하는데 정좌하고[跏趺坐], 해가 뜨면 곧 정무 보는 것을 그만두고 말하기를 나의 아우에게 맡긴다주 005고 한다고 하였다. 고조(高祖)는 “그것은 크게 의리(義理)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하고, 가르쳐서 이를 고치게 하였다. 왕의 처는 계미(鷄彌)
주 006라고 하며, 후궁에는 여자가 600∼700인이 있고, 태자는 이름하여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
주 007라고 한다. 성곽은 없다.당시의 왜왕은 후에 推古라고 불리는 여왕이었다. 그런데 ‘타라시히코’, 즉 ‘히코’는 남자에 대한 경칭이다. 여성이라면 ‘타라시히메’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隋書』의 이 기사에 보이는 倭王은 推古 다음 왕인 舒明天皇(오키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로 보는 설과, ‘타라시히코’가 왜왕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보아 당시 왜왕은 역시 推古로 보는 설 등이 있다. 다만 왜왕의 처를 ‘키미’라고 하고 많은 수의 부인들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점에서, 이때의 왜왕이 과연 여왕이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聖德太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내관(內官)은 12등급[等]이 있다.주 008첫 번째를 대덕(大德)이라고 하고, 다음은 소덕(小德), 다음은 대인(大仁), 다음은 소인(小仁), 다음은 대의(大義), 다음은 소의(小義), 다음은 대례(大禮), 다음은 소례(小禮), 다음은 대지(大智), 다음은 소지(小智), 다음은 대신(大信), 다음은 소신(小信)이며, 인원은 정해진 수가 없다.주 009군니(軍尼)주 485가 120인 있는데, 중국의 지방장관[牧宰]과 같은 것이다. 80호에 1이니익(伊尼翼)주 011을 두는데, 지금의 이장(里長)과 같은 것이다. 10이니익은 1군니에 속한다.
그 복식은 남자는 치마와 저고리[裙襦]를 입는데, 소매는 작고 짧다. 신발은 나막신 같은 형태인데 그 위에 옻칠을 하고, 다리에 [끈으로] 묶는다. 서민[人庶]은 대부분 맨발이다. 금은을 사용해서 장식할 수 없다. 옛날에는 옷은 옆으로 긴 천[橫幅]을 묶어서 서로 이었으며 바느질하지 않았다. 머리에도 또한 관을 쓰지 않으며, 다만 머리카락을 양쪽 귀 위로 늘어뜨릴 뿐이었다. 수나라 때 이르러, 그 왕이 처음으로 관을 정하였다.주 012수놓은 비단이나 비단으로 관을 만들고, 금은으로 꽃을 새겨 장식으로 삼았다.주 013부인은 머리를 뒤로 묶고, 또한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데, 치마에는 모두 가장자리 장식이 있다. 대나무로 빗을 만들고, 풀을 엮어서 깔개를 만든다. 가죽으로 거죽을 만들고, 무늬 있는 가죽으로 가장자리를 만든다. 활, 화살, 칼, 창, 쇠뇌, 작은 창, 도끼가 있으며, 가죽에 옻칠을 해서 갑옷으로 삼고,주 014뼈로 명적[矢鏑]주 015을 만든다. 무기는 있지만 서로 싸우지는 않는다. 그 왕은 조회 때 반드시 의장을 늘어세우며, 그 나라의 음악을 연주한다. 호수[戶]는 10만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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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왜왕의 칭호를 성·자·호로 나눈 것은 중국적인 발상이다. 왜왕은 성이 없으며, ‘阿每’와 ‘多利思比孤’ 모두 왜왕에 대한 존칭일 뿐이다. ‘아메노타라시히코’는 ‘天足彦’ 혹은 ‘天帶彦’으로 표기할 수 있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존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실제로 7세기 초에는 舒明天皇의 일본식 시호인 息長足日廣額(오키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이나 皇極天皇의 시호인 天豊財中日足姬(아메토요타카라이카시히타라시히메)의 예와 같이 ‘아메’나 ‘타라시’가 들어간 왜왕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景行天皇과 같이 전설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에도 大足彦忍大別(오오타라시히코오시로와케)라는 시호를 가지고 있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485)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색인어
- 이름
- 다리사비고(多利思比孤), 아배계미(阿輩鷄彌), 고조(高祖), 계미(鷄彌),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
- 지명
- 중국, 수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