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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개황(開皇) 20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 궁을 찾았으며 남자의 복식은 치마 ∙ 저고리[裙襦]를 입는 등의 풍습이 있었음

  • 국가
    왜국(倭國)
개황(開皇) 20년(600)에 왜왕의 성은 아매(阿每),주 001
각주 001)
왜왕의 칭호를 성·자·호로 나눈 것은 중국적인 발상이다. 왜왕은 성이 없으며, ‘阿每’와 ‘多利思比孤’ 모두 왜왕에 대한 존칭일 뿐이다. ‘아메노타라시히코’는 ‘天足彦’ 혹은 ‘天帶彦’으로 표기할 수 있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존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실제로 7세기 초에는 舒明天皇의 일본식 시호인 息長足日廣額(오키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이나 皇極天皇의 시호인 天豊財中日足姬(아메토요타카라이카시히타라시히메)의 예와 같이 ‘아메’나 ‘타라시’가 들어간 왜왕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景行天皇과 같이 전설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에도 大足彦忍大別(오오타라시히코오시로와케)라는 시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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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는 다리사비고(多利思比孤),주 002
각주 002)
당시의 왜왕은 후에 推古라고 불리는 여왕이었다. 그런데 ‘타라시히코’, 즉 ‘히코’는 남자에 대한 경칭이다. 여성이라면 ‘타라시히메’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隋書』의 이 기사에 보이는 倭王은 推古 다음 왕인 舒明天皇(오키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로 보는 설과, ‘타라시히코’가 왜왕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보아 당시 왜왕은 역시 推古로 보는 설 등이 있다. 다만 왜왕의 처를 ‘키미’라고 하고 많은 수의 부인들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점에서, 이때의 왜왕이 과연 여왕이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聖德太子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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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는 아배계미(阿輩鷄彌) 주 003
각주 003)
오오키미, 즉 大君 혹은 大王으로 한역할 수 있는 용어로 왜왕에 대한 존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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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사신주 004
각주 004)
이때 수나라에 파견된 사신은 小野臣妹子(오노노오미이모코, 중국식 이름은 蘇因高)이다(『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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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어 궁궐에 찾아왔다. 황제는 담당 관사로 하여금 그 풍속을 묻게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왜왕은 하늘을 형으로 여기고, 해를 아우로 여기며, 아직 밝기 전에 나와서 정사를 행하는데 정좌하고[跏趺坐], 해가 뜨면 곧 정무 보는 것을 그만두고 말하기를 나의 아우에게 맡긴다주 005
각주 005)
아우에게 맡긴다는 것은 倭王이 아우로 여긴다는 해[日]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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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다고 하였다. 고조(高祖)는 “그것은 크게 의리(義理)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하고, 가르쳐서 이를 고치게 하였다. 왕의 처는 계미(鷄彌) 주 006
각주 006)
雞彌: 일본어로는 ‘키미’, 즉 君·王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기의 王后는 ‘키사키’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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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며, 후궁에는 여자가 600∼700인이 있고, 태자는 이름하여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 주 007
각주 007)
이것은 ‘리카미타호리’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일본어에서 첫 음으로 ‘라’행은 사용되지 않으므로 의문이 있다. 『翰苑』에서 왕의 장자를 ‘和哥彌多弗利(와카미타호리)’라고 한다고 하였으므로, 和가 利로 잘못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황실의 혈통, 황족을 뜻하는 ‘와칸도호리’의 원형으로 생각된다(『石原道博』, 1985: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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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다. 성곽은 없다.
내관(內官)은 12등급[等]이 있다.주 008
각주 008)
聖德太子가 제정하였다는 관위 12계를 말한다. 원래는 德仁禮信義智의 순서로 배열한 것인데(大德·小德·大仁·小仁·大禮·小禮·大信·小信·大義·小義·大智·小智의 12계)(『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81), 중국이 생각하는 五常의 仁義禮智信이 옳다고 여겨 순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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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를 대덕(大德)이라고 하고, 다음은 소덕(小德), 다음은 대인(大仁), 다음은 소인(小仁), 다음은 대의(大義), 다음은 소의(小義), 다음은 대례(大禮), 다음은 소례(小禮), 다음은 대지(大智), 다음은 소지(小智), 다음은 대신(大信), 다음은 소신(小信)이며, 인원은 정해진 수가 없다.주 009
각주 009)
기술의 순서로 보아서는 600년에 파견된 왜의 사신을 통해서 관위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倭에서 12계 관위가 정해진 것은 그 뒤인 603년의 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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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니(軍尼)주 485
각주 485)
軍尼: ‘구니(國)’의 音寫로 보인다. 그러나 ‘구니’는 일정한 지역, 행정단위를 가리키는 용어이고 원래 행정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 ‘구니’를 지배한 사람은 ‘구니노미야쯔코(國造)’라고 하였다. 『先代舊事本紀』라는 문헌에서는 國造가 144인이 있다고 하였고 실제로 135국의 國造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隋書』의 ‘쿠니’는 國造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鎌田純一, 1960: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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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120인 있는데, 중국의 지방장관[牧宰]과 같은 것이다. 80호에 1이니익(伊尼翼)주 011
각주 011)
伊尼翼: 일본 고대의 지방관직명인 稻置(이나기)의 音寫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翼’은 ‘冀’의 잘못으로 볼 수 있다. 稻置에 대해서는 왕실의 직할령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보는 설과 國의 하위 행정단위인 縣의 관직명으로 보는 설로 나누어져 있다. 『日本書紀』 成務天皇 5년조에 의하면 “國郡에 造長을 세우고, 縣邑에 稻置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나(『日本書紀』 권7 「成務紀」: 319), 이는 후대의 지식에 근거한 윤색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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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두는데, 지금의 이장(里長)과 같은 것이다. 10이니익은 1군니에 속한다.
그 복식은 남자는 치마와 저고리[裙襦]를 입는데, 소매는 작고 짧다. 신발은 나막신 같은 형태인데 그 위에 옻칠을 하고, 다리에 [끈으로] 묶는다. 서민[人庶]은 대부분 맨발이다. 금은을 사용해서 장식할 수 없다. 옛날에는 옷은 옆으로 긴 천[橫幅]을 묶어서 서로 이었으며 바느질하지 않았다. 머리에도 또한 관을 쓰지 않으며, 다만 머리카락을 양쪽 귀 위로 늘어뜨릴 뿐이었다. 수나라 때 이르러, 그 왕이 처음으로 관을 정하였다.주 012
각주 012)
冠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12等의 冠位制를 정한 것을 말한다. 『日本書紀』에서는 “推古 十一年 十二月戊辰朔壬申, 始行冠位. 大德·小德·大仁·小仁·大禮·小禮·大信·小信·大義·小義·大智·小智, 幷十二階. 竝以當色絁縫之. 頂撮總如囊, 而着緣焉. 唯元日著髻花.”라고 하여 大德 이하 12官等을 冠의 색과 재료로 구분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81). 冠은 해당색깔의 비단으로 만드는데 그 꼭대기는 자루를 묶어놓은 것 같으며 테두리를 달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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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놓은 비단이나 비단으로 관을 만들고, 금은으로 꽃을 새겨 장식으로 삼았다.주 013
각주 013)
이 장식을 髻花라고 하며 일본어로는 ‘우즈’, 즉 잔가지·꽃·조화 등으로 만든 장식이라는 뜻이다. 元日에만 부착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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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머리를 뒤로 묶고, 또한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데, 치마에는 모두 가장자리 장식이 있다. 대나무로 빗을 만들고, 풀을 엮어서 깔개를 만든다. 가죽으로 거죽을 만들고, 무늬 있는 가죽으로 가장자리를 만든다. 활, 화살, 칼, 창, 쇠뇌, 작은 창, 도끼가 있으며, 가죽에 옻칠을 해서 갑옷으로 삼고,주 014
각주 014)
가죽으로 만든 갑옷 이외에도 쇠로 만든 갑옷에 칠을 한 경우도 있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埴輪에도 옻칠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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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로 명적[矢鏑]주 015
각주 015)
鏑은 화살촉이라는 뜻과 소리를 내는 우는 살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鏑矢는 곧 명적을 뜻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矢鏑이라 하여 어느 쪽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보통 鳴鏑은 사슴이나 물소 뿔로 가운데를 파내고 만들기 때문에 뼈로 화살촉을 만들었다면 명적일 가능성이 크다. 7세기 단계에서는 이미 쇠 화살촉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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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든다. 무기는 있지만 서로 싸우지는 않는다. 그 왕은 조회 때 반드시 의장을 늘어세우며, 그 나라의 음악을 연주한다. 호수[戶]는 10만 정도이다.

  • 각주 001)
    왜왕의 칭호를 성·자·호로 나눈 것은 중국적인 발상이다. 왜왕은 성이 없으며, ‘阿每’와 ‘多利思比孤’ 모두 왜왕에 대한 존칭일 뿐이다. ‘아메노타라시히코’는 ‘天足彦’ 혹은 ‘天帶彦’으로 표기할 수 있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존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실제로 7세기 초에는 舒明天皇의 일본식 시호인 息長足日廣額(오키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이나 皇極天皇의 시호인 天豊財中日足姬(아메토요타카라이카시히타라시히메)의 예와 같이 ‘아메’나 ‘타라시’가 들어간 왜왕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景行天皇과 같이 전설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에도 大足彦忍大別(오오타라시히코오시로와케)라는 시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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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당시의 왜왕은 후에 推古라고 불리는 여왕이었다. 그런데 ‘타라시히코’, 즉 ‘히코’는 남자에 대한 경칭이다. 여성이라면 ‘타라시히메’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隋書』의 이 기사에 보이는 倭王은 推古 다음 왕인 舒明天皇(오키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로 보는 설과, ‘타라시히코’가 왜왕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보아 당시 왜왕은 역시 推古로 보는 설 등이 있다. 다만 왜왕의 처를 ‘키미’라고 하고 많은 수의 부인들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점에서, 이때의 왜왕이 과연 여왕이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聖德太子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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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오오키미, 즉 大君 혹은 大王으로 한역할 수 있는 용어로 왜왕에 대한 존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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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이때 수나라에 파견된 사신은 小野臣妹子(오노노오미이모코, 중국식 이름은 蘇因高)이다(『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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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아우에게 맡긴다는 것은 倭王이 아우로 여긴다는 해[日]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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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雞彌: 일본어로는 ‘키미’, 즉 君·王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기의 王后는 ‘키사키’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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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이것은 ‘리카미타호리’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일본어에서 첫 음으로 ‘라’행은 사용되지 않으므로 의문이 있다. 『翰苑』에서 왕의 장자를 ‘和哥彌多弗利(와카미타호리)’라고 한다고 하였으므로, 和가 利로 잘못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황실의 혈통, 황족을 뜻하는 ‘와칸도호리’의 원형으로 생각된다(『石原道博』, 1985: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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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聖德太子가 제정하였다는 관위 12계를 말한다. 원래는 德仁禮信義智의 순서로 배열한 것인데(大德·小德·大仁·小仁·大禮·小禮·大信·小信·大義·小義·大智·小智의 12계)(『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81), 중국이 생각하는 五常의 仁義禮智信이 옳다고 여겨 순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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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기술의 순서로 보아서는 600년에 파견된 왜의 사신을 통해서 관위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倭에서 12계 관위가 정해진 것은 그 뒤인 603년의 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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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5)
    軍尼: ‘구니(國)’의 音寫로 보인다. 그러나 ‘구니’는 일정한 지역, 행정단위를 가리키는 용어이고 원래 행정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 ‘구니’를 지배한 사람은 ‘구니노미야쯔코(國造)’라고 하였다. 『先代舊事本紀』라는 문헌에서는 國造가 144인이 있다고 하였고 실제로 135국의 國造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隋書』의 ‘쿠니’는 國造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鎌田純一, 1960: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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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伊尼翼: 일본 고대의 지방관직명인 稻置(이나기)의 音寫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翼’은 ‘冀’의 잘못으로 볼 수 있다. 稻置에 대해서는 왕실의 직할령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보는 설과 國의 하위 행정단위인 縣의 관직명으로 보는 설로 나누어져 있다. 『日本書紀』 成務天皇 5년조에 의하면 “國郡에 造長을 세우고, 縣邑에 稻置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나(『日本書紀』 권7 「成務紀」: 319), 이는 후대의 지식에 근거한 윤색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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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冠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12等의 冠位制를 정한 것을 말한다. 『日本書紀』에서는 “推古 十一年 十二月戊辰朔壬申, 始行冠位. 大德·小德·大仁·小仁·大禮·小禮·大信·小信·大義·小義·大智·小智, 幷十二階. 竝以當色絁縫之. 頂撮總如囊, 而着緣焉. 唯元日著髻花.”라고 하여 大德 이하 12官等을 冠의 색과 재료로 구분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81). 冠은 해당색깔의 비단으로 만드는데 그 꼭대기는 자루를 묶어놓은 것 같으며 테두리를 달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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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이 장식을 髻花라고 하며 일본어로는 ‘우즈’, 즉 잔가지·꽃·조화 등으로 만든 장식이라는 뜻이다. 元日에만 부착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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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가죽으로 만든 갑옷 이외에도 쇠로 만든 갑옷에 칠을 한 경우도 있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埴輪에도 옻칠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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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鏑은 화살촉이라는 뜻과 소리를 내는 우는 살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鏑矢는 곧 명적을 뜻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矢鏑이라 하여 어느 쪽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보통 鳴鏑은 사슴이나 물소 뿔로 가운데를 파내고 만들기 때문에 뼈로 화살촉을 만들었다면 명적일 가능성이 크다. 7세기 단계에서는 이미 쇠 화살촉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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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다리사비고(多利思比孤), 아배계미(阿輩鷄彌), 고조(高祖), 계미(鷄彌),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
지명
중국, 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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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황(開皇) 20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 궁을 찾았으며 남자의 복식은 치마 ∙ 저고리[裙襦]를 입는 등의 풍습이 있었음 자료번호 : jo.k_0013_0081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