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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활국(滑國)의 공헌(貢獻)

  • 국가
    활국(滑國)
활국(滑國)거사(車師)의 별종이다. 후한(後漢) 영건(永建) 원년(126)에 팔활(八滑)반용(班勇) 주 001
각주 001)
班勇: 東漢의 將領. 字는 宜僚이다. 그의 집안은 扶風 安陵(陝西省 鹹陽縣 東北部) 출신이다. 班超의 아들이며, 서역에서 나고 자랐다. 후한 和帝 永元 13년(101)에 班超는 班勇을 보내 安息國의 使者를 수행하여 入朝하도록 하였다. 安帝 永初 元年(107)에 西域에서 叛亂이 일어나자, 班勇을 軍司馬로 삼아 敦煌에 나아가 都護 및 西域의 군졸을 맞이하여 귀환하도록 하였다. 元初 6년(119)에 敦煌太守 曹宗이 行長史 索班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伊吾(新疆 哈密 일대)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北匈奴와 車師後部(新疆 吉木薩爾 일대)가 공동으로 공격하여 索班을 살해하였다. 鄯善(新疆 若羌 一帶)이 漢에 위급을 고하였고, 和熹 鄧皇后는 班勇을 불러 공경과 대책을 의논하게 하였다. 班勇은 마땅히 돈황에 護西域副校尉를 두고, 敦煌의 營兵 300人을 회복해야 하며, 따로 西域長史를 파견하여 500人을 거느리고 樓蘭(新疆 羅布泊 西北岸)에 주둔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등황후는 그 건의를 좇았으나, 長史를 파견하여 주둔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延光 2년(123)에 비로소 班勇을 西域長史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나가 주둔하게 하였다. 3년에 班勇이 길을 열어 龜茲(新疆 庫車 一帶)와 姑墨(新疆 阿克蘇 一帶) 等의 國을 이끌고 降附하도록 하였다. 뒤를 이어 반용은 다시 군대를 일으켜 車師前部(新疆 吐魯番 일대)에 이르러 北匈奴를 쳐서 패주시켰으며, 아울러 柳中(新疆 鄯善 西南의 魯克沁 附近)에 屯田하였다. 4년에 班勇은 車師後部를 大破하고 그 왕 軍就를 참하여 索班의 치욕을 갚았다. 順帝 永建 元年(126)에 班勇이 諸國의 군대를 징발하여 北匈奴 呼衍王을 쳐서, 呼衍王이 멀리 도망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車師前後部가 안정을 얻었다. 2년에 班勇은 敦煌太守 張朗와 함께 焉耆를 토벌하였는데, 동시에 만날 기한을 약정하였으나, 장랑이 홀로 공을 세울 욕심으로 기한에 앞서 언기를 해치웠고, 언기가 항복하였다. 班勇은 도리어 기한에 늦었다는 죄를 얻어 하옥된 뒤 免官되었고, 나중에 집에서 죽었다. 후한 시기 西域은 세 번 통하고, 세 번 끊어졌는데, 班勇이 長史로써 西域을 두 번 평정한 뒤로 마침내 다시 끊겼다. 반용은 安帝 末에 西域의 일을 찬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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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좇아 북노(北虜)를 치는 데 공을 세워, 반용이 상표하여 팔활을 후부친한후(後部親漢侯)로 삼았다. 위(魏)·진(晉) 이래로 중국과 교통하지 않았다. 천감(天監) 15년(516)에 이르러 그 왕 염대이률타(厭帶夷栗陀)가 비로소 사자를 보내 그 나라의 특산물을 바쳤다. 보통(普通) 원년(520)에 또 사자를 보내, 누런 사자와 흰 담비갖옷 그리고 페르시아 비단[波斯錦] 등의 물품을 바쳤다. 7년(526)에 다시 표를 받들고 공헌(貢獻)하였다.

  • 각주 001)
    班勇: 東漢의 將領. 字는 宜僚이다. 그의 집안은 扶風 安陵(陝西省 鹹陽縣 東北部) 출신이다. 班超의 아들이며, 서역에서 나고 자랐다. 후한 和帝 永元 13년(101)에 班超는 班勇을 보내 安息國의 使者를 수행하여 入朝하도록 하였다. 安帝 永初 元年(107)에 西域에서 叛亂이 일어나자, 班勇을 軍司馬로 삼아 敦煌에 나아가 都護 및 西域의 군졸을 맞이하여 귀환하도록 하였다. 元初 6년(119)에 敦煌太守 曹宗이 行長史 索班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伊吾(新疆 哈密 일대)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北匈奴와 車師後部(新疆 吉木薩爾 일대)가 공동으로 공격하여 索班을 살해하였다. 鄯善(新疆 若羌 一帶)이 漢에 위급을 고하였고, 和熹 鄧皇后는 班勇을 불러 공경과 대책을 의논하게 하였다. 班勇은 마땅히 돈황에 護西域副校尉를 두고, 敦煌의 營兵 300人을 회복해야 하며, 따로 西域長史를 파견하여 500人을 거느리고 樓蘭(新疆 羅布泊 西北岸)에 주둔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등황후는 그 건의를 좇았으나, 長史를 파견하여 주둔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延光 2년(123)에 비로소 班勇을 西域長史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나가 주둔하게 하였다. 3년에 班勇이 길을 열어 龜茲(新疆 庫車 一帶)와 姑墨(新疆 阿克蘇 一帶) 等의 國을 이끌고 降附하도록 하였다. 뒤를 이어 반용은 다시 군대를 일으켜 車師前部(新疆 吐魯番 일대)에 이르러 北匈奴를 쳐서 패주시켰으며, 아울러 柳中(新疆 鄯善 西南의 魯克沁 附近)에 屯田하였다. 4년에 班勇은 車師後部를 大破하고 그 왕 軍就를 참하여 索班의 치욕을 갚았다. 順帝 永建 元年(126)에 班勇이 諸國의 군대를 징발하여 北匈奴 呼衍王을 쳐서, 呼衍王이 멀리 도망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車師前後部가 안정을 얻었다. 2년에 班勇은 敦煌太守 張朗와 함께 焉耆를 토벌하였는데, 동시에 만날 기한을 약정하였으나, 장랑이 홀로 공을 세울 욕심으로 기한에 앞서 언기를 해치웠고, 언기가 항복하였다. 班勇은 도리어 기한에 늦었다는 죄를 얻어 하옥된 뒤 免官되었고, 나중에 집에서 죽었다. 후한 시기 西域은 세 번 통하고, 세 번 끊어졌는데, 班勇이 長史로써 西域을 두 번 평정한 뒤로 마침내 다시 끊겼다. 반용은 安帝 末에 西域의 일을 찬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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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팔활(八滑), 반용(班勇), 반용, 팔활, 염대이률타(厭帶夷栗陀)
지명
활국(滑國), 거사(車師), 후한(後漢), 위(魏), 진(晉), 중국, 페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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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국(滑國)의 공헌(貢獻) 자료번호 : jo.k_0008_0054_02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