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和: 왜국에 난이 일어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지』에서는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이라고 하였을 뿐인데, 『후한서』에서는 “桓·靈間”이라고 하였고, 『양서』에서는 처음으로 광화 연간이라고 구체적인 시기를 명시하고 있다. 후대의 사서에서 그 시기가 보다 자세히 기록된 것은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三國志』 〈倭人條〉 참조.
卑彌呼: 히미코(日命, 日尊의 略稱) 또는 히메코(姬子)라고 읽는다. 新井白石은 ‘日御子’로 보아 天皇으로 간주하고 있다(『古史通或問』). 야마타이국이 大和에 있었다는 입장에서는 『日本書紀』에 기재되어 있는 神功皇后, 倭姬命 그리고 崇神天皇의 여동생 倭迹迹日百襲姬命(笠井新也) 등에 비정하고 있다. 한편 九州說에서는 熊襲女酋, 『日本書紀』 神代卷에 보이는 火之戶幡姬兒千千姬命 및 ‘萬幡姬兒玉依姬命 그리고 土蜘蛛田油津媛의 조상 등으로 비정되고 있다. 더불어서 那珂通世와 白鳥庫吉 등의 熊襲 혹은 隼人族의 女酋란 설도 있다(末松保和, 1962: 23∼43; 石原道博, 1985: 49∼50).
共立: 함께 추대하였다는 뜻이다. 『三國志』 「오환선비동이전」에서는 그밖에도 共立이라는 말이 두 차례 더 쓰였다. 〈부여조〉에서 왕인 位宮이 적자가 없었으므로 사후에 諸加들이 孽子인 麻余를 공립하였다는 기사와 〈고구려조〉에서 長子인 拔奇가 불초하므로 國人들이 伊夷模를 공립하였다는 기사이다. 어느 경우나 왕위계승에 있어서 비정상적인 계승이 발생한 경우이다. 한편 國人은 일반 백성이 아니라 왕위의 계승에 관련할 수 있는 지배층 구성원들이라고 볼 수 있다.
鬼道: 일반적으로 ‘惑世誣民하는 術法’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넓게는 중국의 신선사상, 보다 직접적으로는 후한 말에 유행하였던 張魯의 五斗米道와도 일정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三國志』의 張魯傳에서는 漢中地域에서 교세를 떨쳤던 張魯에 대하여, “魯는 漢中에 거점을 두고, 鬼道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스스로 師君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森浩一, 1985: 137). 한편 魏가 여왕에게 하사한 동경은 三角緣神獸鏡인데, 이 거울은 神仙과 상서로운 동물을 배치한 道敎的인 성격의 거울이다. 이전 시대까지 일본열도에서 제기로 사용된 銅鐸을 대신하여 銅鏡이 새로운 祭儀 특히 葬送儀禮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 무렵 일본열도의 수장층들이 신선사상을 수용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親倭王: 『삼국지』에서는 ‘親魏倭王’으로 되어 있다. 魏가 外臣에게 수여하는 작위 중에서 ‘親魏倭王’은 가장 높은 것 중 하나였다. 이보다 10년 전인 太和 3년(229)에 명제는 서쪽의 대국인 大月氏(쿠샨왕국) 국왕 波調를 ‘親魏大月氏王’에 임명하였다. 왜국과 대월지국은 모두 여러 나라가 종속되어 있으므로, 大庭修는 “魏王朝의 外蕃政策은 몇 개의 나라를 통속하고 있는 국왕에게 ‘親魏某王’이라는 왕호를 주어 관계를 맺은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森浩一, 1985: 145).
金印紫綬: 금으로 만든 인장과 자주색의 도장끈을 합한 것을 말하고, 金章紫綬라고도 한다. 秦漢時代에는 丞相, 三公 그리고 列侯 등 高官들이 佩用하였다. 後世에는 帝王들이 이것을 高官으로서 退職하는 자 및 後宮의 妃嬪들에게 하사하였다(徐連達, 1991: 633). 『三國志』 倭人條 참조.
臺與: 『北史』와 宋本 『太平御覽』에서는 臺擧로 기재되어 있으나, 『三國志』에서는 壹與로 되어 있다. 臺與가 옳다고 한다면, 美稱인 ‘토요(豊)’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內藤虎次郞은 崇神天皇의 皇女인 豊鍬入姬命에 비정하고 있지만, 白鳥庫吉과 橋本增吉 등 九州論者는 반대하고 있다(石原道博, 2005: 54).
晉: 東晉(317∼419)을 말한다. 西晉이 멸망한 이후 司馬睿(元帝, 재위 318∼322)가 장강 이남의 땅을 영토로 하여 317년 建業(南京)을 수도를 두고 진왕조를 재건하였는데, 이를 東晉이라 하였다.
贊: 5세기 왜왕의 이름이다. 『宋書』에는 ‘讚’으로 되어 있다. 왜는 5세기 대에 중국 南朝에 조공하였는데 다섯 명의 왜왕의 이름이 보인다. 이를 倭五王이라고 한다. 찬은 첫 번째로 중국 남조에 조공한 왜왕으로, 421년, 425년, 430년 세 차례에 걸쳐서 조공하였다. 『日本書紀』에 보이는 倭王 중에서 제17대 履中, 제16대 仁德, 제 15대 應神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履中으로 보는 견해는 讚이 그의 諱인 ‘이자호와케’의 ‘자’라는 음가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고, 仁德으로 보는 견해는 그의 諱인 ‘오오사사기’의 ‘사’를 나타낸다고 보고, 應神으로 보는 견해는 ‘호무다’의 ‘호무’ 즉 ‘譽’와 의미가 통하는 것으로 본다. 이하 倭五王의 계보 등에 대해서는 『宋書』 倭國傳 참조.
『梁書』에서는 倭王의 계보관계를 중심으로 기술하였으며, 전체 내용으로 보아 武에게 爵號를 내린 것은 武가 사신을 파견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南史』에서는 讚(贊)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하였다.
彌: 倭五王 중 두 번째 왕이다. 『宋書』에는 珍으로 되어 있다. 왜왕 讚의 동생이라고 하며, 『宋書』 本紀에 따르면 438년에 劉宋에 조공하였다고 하였으나, 列傳에서는 사신을 파견한 시기를 명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왜왕의 견사시기에 대해서는 本紀의 내용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反正天皇에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며, 그밖에도 仁德 혹은 履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濟: 劉宋에 조공한 왜의 다섯 왕 중에서 세 번째에 위치하는 왕이다. 443년과 451년, 460년에 각각 劉宋에 조공하였다. 462년에는 世子 興이 뒤를 이어 사신을 파견하였다.
興: 劉宋에 조공한 倭의 五王 중 네 번째 왕이다. 462년에 처음으로 世子 興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지만(『宋書』 卷6 「孝武帝本紀」 大明 6년 3월 壬寅: 129)), 다음 왕인 왜왕 武로 바뀐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478년에 武가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宋書』 卷97 「夷蠻傳」: 2395), 477년의 遣使도 興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宋書』 권10 「順帝本紀」 昇明 원년 11월 기유조: 195).
武: 宋에 조공한 倭의 五王 중 다섯 번째 왕이다. 478년에 처음으로 宋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宋書』 卷97 「夷蠻傳」: 2395), 479년에는 南齊로부터 관작을 받았고(『南齊書』 卷58 「東南夷傳」: 1012), 502년에는 梁으로부터 進號되었다(『梁書』 卷2 武帝 天監 원년 4월 무진조: 36).
持節: 節은 8尺(1.8미터) 길이의 대나무에, 旄牛의 꼬리로 만든 3겹의 장식을 단 것을 말한다. 절을 가졌다는 것은 천자의 명령을 받아 천자를 대행한다는 의미이다. 『宋書』에서는 使持節로 되어 있다.
督: 『宋書』에서는 都督으로 되어 있다. 도독은 중국의 三國時代에 들어서 民政으로부터 軍權이 독립하게 되면서, 諸州諸軍事의 장관을 도독이라고 하였다. 많은 경우 州의 장관인 刺史를 겸임하였으며, 都督府를 두고 長史, 司馬, 參軍과 같은 府官을 두었다.
任那: 加耶諸國 전체 혹은 백제와 신라에 편입되지 않은 한반도 남부의 여러 소국을 가리키는 광의의 용법과 金海의 加羅國만을 가리키는 두 가지 용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김태식, 1993; 22∼25).
『宋書』에 따르면, 왜왕 武는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을 自稱하였으나(『宋書』 卷97 「夷蠻·東夷·倭國」: 2395),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 조정은 이를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즉 도독군사의 범위에서 ‘백제’를 제외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유송대에도 나타나는데, 이에 대하여 김한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 까닭은 이미 백제왕에게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백제왕’으로 책봉해 주었기 때문이며, 신라 등 6국에 대한 왜왕의 도독권을 인정해준 까닭은 신라 등은 아직 유송이 주도하는 막부 체제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송 등 남조의 국가들은 고구려와 백제, 왜 등의 군주에게 그 제도적 서열이 1등급씩 차등이 나는 征東(大)將軍과 鎭東(大)將軍, 安東(大)將軍의 칭호를 각각 부여함으로써 3국의 국제적 위상을 차별화 했다. 남북조 시대 중국의 국가들은 주변 국가들의 군장을 책봉하는 내용, 특히 장군 칭호를 선택하고 도독권의 범위를 조작함으로써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주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김한규, 2005: 179∼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