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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국(師子國)의 옥불상 공헌(貢獻)

  • 국가
    사자국(師子國)
동진(東晉) 의희 연간(義熙, 405∼418) 초에 비로소 사자를 보내 옥으로 만든 불상을 공헌하였는데, 10년을 걸려서야 겨우 도착하였다. 옥불상의 높이는 4척 2촌(寸)이었는데, 옥의 색이 깨끗하고, 윤기가 있고 만든 모양이 특수하여, 아마도 인공이 아닌 듯 했다. 이 옥불상은 동진유송 양대를 거쳐 와관사(瓦官寺)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 사원에는 이미 징사(徵士)주 001
각주 001)
徵士: 조정의 부름을 거부한 隐士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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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도(戴安道) 주 002
각주 002)
戴安道(?∼396): 戴逵. 東晉시기의 학자이자 조각가 및 화가. 字는 安道. 譙郡 銍縣(安徽省 宿縣) 사람으로 나중에 회계의 剡縣(현재의 浙江省 嵊縣 서남)으로 옮겼다. 일찍이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반대하여 『釋疑論』을 지어, 명승 慧遠과 변론하였다. 인물화와 산수화 달리는 짐승을 잘 그렸으며, 또 종교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불상을 주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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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손으로 제작한 불상 5구(軀)와 고장강(顧長康) 주 003
각주 003)
顧長康: 고장강. 중국 東晉의 화가. 초상화와 옛 인물을 잘 그려 중국회화사상 인물화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자는 長康·虎頭이고, 江蘇省 無錫에서 태어났다. 생몰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義熙 연간(405∼418) 초기에 散騎常侍가 된 얼마 후 62세로 죽은 듯하다. 364년(興寧 2) 建康(南京)에 있는 瓦官寺 벽면에 維摩像을 그려 처음으로 화가로서 이름을 나타내었다. 초상화와 옛 인물을 잘 그려 중국회화사상 인물화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한편 『論畵』, 『畵雲臺山記』 등의 畵論이 전한다. 宋나라의 陸探微, 梁나라의 張僧繇와 함께 六朝의 3大家라 일컬어지며, 唐나라 張彦遠이 지은 『歷代名畵記』 등에서도 세 사람이 함께 거론된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있는 『女史箴圖』는 옛날부터 고장강의 眞蹟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당나라 때의 模作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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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린 유마힐(維摩詰) 거사주 004
각주 004)
維摩詰: 梵文 Vimaiakirti의 音譯, 維摩羅詰과 毗摩羅詰로 음역되기도 하며, 略稱하여 維摩 혹은 維摩詰이라고 한다. 뜻을 풀면, ‘淨名’, ‘無垢稱詰’이고, 그 의미는 정결하여 흠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재가(在家)의 大乘佛敎 居士로 저명한 재가 菩薩(bodhisattva)이다. 『維摩詰經』의 설명에 따르면, 維摩詰은 옛 인도 바이샬리(Vesali, 毗舍離) 지방의 부호로 萬貫 재산과 수많은 노예를 소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부지런히 열심을 다해 공부하고, 경건 성실하게 수행하여 ‘相’에 처하나 ‘상’에 住하지 않으며, 현실세계(塵境)를 마주대하지만, 그것을 내지는 않는 경지에 도달하여 보살로 칭양받았다. 그리고 辯才에 거침이 없었고, 몸을 세속에 맡겨(출가하지 않고) 佛祖들의 교화를 보조하였다. 일찍이 만주쉬리(文殊尊者利) 및 샤리푸트라(舍利弗) 등에게 大乘의 심오한 이치를 강술하였고, 『維摩詰經』을 남겨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中國에서는 維摩詰이 士大夫 사이에 큰 영향을 미쳤고, 불교의 회화, 조각, 문학 등 작품 가운데도 인기 있는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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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상이 있었는데, 세인들은 이들 세 작품을 일러 삼절(三絕)이라 하였다. 제(齊)의 동혼후(東昏侯) 대에 이르러 마침내 옥불상을 훼손하였는데, 먼저 옥상의 팔을 끊고, 다음에는 그 몸을 취하여 애첩 반귀비(潘貴妃)를 위하여 비녀와 팔찌를 만들어 주었다. 송(宋) 원가(元嘉) 6년(429)과 12년(435)에 그 왕 찰리마가(剎利摩訶)가 사자를 보내어 공헌하였다.

  • 각주 001)
    徵士: 조정의 부름을 거부한 隐士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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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戴安道(?∼396): 戴逵. 東晉시기의 학자이자 조각가 및 화가. 字는 安道. 譙郡 銍縣(安徽省 宿縣) 사람으로 나중에 회계의 剡縣(현재의 浙江省 嵊縣 서남)으로 옮겼다. 일찍이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반대하여 『釋疑論』을 지어, 명승 慧遠과 변론하였다. 인물화와 산수화 달리는 짐승을 잘 그렸으며, 또 종교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불상을 주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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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顧長康: 고장강. 중국 東晉의 화가. 초상화와 옛 인물을 잘 그려 중국회화사상 인물화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자는 長康·虎頭이고, 江蘇省 無錫에서 태어났다. 생몰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義熙 연간(405∼418) 초기에 散騎常侍가 된 얼마 후 62세로 죽은 듯하다. 364년(興寧 2) 建康(南京)에 있는 瓦官寺 벽면에 維摩像을 그려 처음으로 화가로서 이름을 나타내었다. 초상화와 옛 인물을 잘 그려 중국회화사상 인물화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한편 『論畵』, 『畵雲臺山記』 등의 畵論이 전한다. 宋나라의 陸探微, 梁나라의 張僧繇와 함께 六朝의 3大家라 일컬어지며, 唐나라 張彦遠이 지은 『歷代名畵記』 등에서도 세 사람이 함께 거론된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있는 『女史箴圖』는 옛날부터 고장강의 眞蹟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당나라 때의 模作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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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維摩詰: 梵文 Vimaiakirti의 音譯, 維摩羅詰과 毗摩羅詰로 음역되기도 하며, 略稱하여 維摩 혹은 維摩詰이라고 한다. 뜻을 풀면, ‘淨名’, ‘無垢稱詰’이고, 그 의미는 정결하여 흠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재가(在家)의 大乘佛敎 居士로 저명한 재가 菩薩(bodhisattva)이다. 『維摩詰經』의 설명에 따르면, 維摩詰은 옛 인도 바이샬리(Vesali, 毗舍離) 지방의 부호로 萬貫 재산과 수많은 노예를 소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부지런히 열심을 다해 공부하고, 경건 성실하게 수행하여 ‘相’에 처하나 ‘상’에 住하지 않으며, 현실세계(塵境)를 마주대하지만, 그것을 내지는 않는 경지에 도달하여 보살로 칭양받았다. 그리고 辯才에 거침이 없었고, 몸을 세속에 맡겨(출가하지 않고) 佛祖들의 교화를 보조하였다. 일찍이 만주쉬리(文殊尊者利) 및 샤리푸트라(舍利弗) 등에게 大乘의 심오한 이치를 강술하였고, 『維摩詰經』을 남겨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中國에서는 維摩詰이 士大夫 사이에 큰 영향을 미쳤고, 불교의 회화, 조각, 문학 등 작품 가운데도 인기 있는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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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대안도(戴安道), 고장강(顧長康), 유마힐(維摩詰), 반귀비(潘貴妃), 찰리마가(剎利摩訶)
지명
동진(東晉), 동진, 유송, 제(齊), 송(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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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국(師子國)의 옥불상 공헌(貢獻) 자료번호 : jo.k_0008_0054_01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