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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금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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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박국(諸薄國)
처음에 고회(高悝)가 불상을 얻은 뒤에 서역(西域)의 호승(胡僧)주 001
각주 001)
胡僧: 古代에 西域과 北地 혹은 外來의 僧人을 범칭하여 호승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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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사람이 고회에게 와서 이르기를, “옛날에 천축에서 아육왕이 만든 불상을 얻어왔는데, 오다가 업하(鄴下) 주 002
각주 002)
鄴: 옛 都邑 명. 춘추시 齊 桓公이 처음으로 수축하였으며, 전국 시에는 魏文侯가 도읍으로 정하였다. 秦代에 縣으로 삼았고, 漢은 나중에 魏郡의 治所로 삼았다. 후한 말년에는 연이어 冀州와 相州의 治所가 되었다. 建安 18년(213)에 曹操가 魏王이 되면서 도읍으로 삼았다. 晉代에는 愍帝[司馬鄴]을 피휘하여 臨漳으로 개명하였다. 十六國 시에는 後趙와 前秦이, 북조시대에는 東魏와 北齊가 모두 이곳에 도읍하였다. 城이 두 개 있다. 북성은 曹魏가 옛 성을 증축한 것으로 둘레가 20여 리 정도 되고, 북쪽으로 漳水에 임하여 있다. 그 유지는 현재의 河北省 臨漳縣 서남쪽에 있다. 남성은 동위 초기에 북성보다 크게 수축하였으며, 河南省 安陽縣 경내에 있다. 隋 開皇 10년(590)에 이름을 업으로 회복하였으나, 宋 熙寧 6년(1073)에 臨漳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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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호란(胡亂)을 만나 상을 황하 가에 묻었다가, 지금 찾아보았으나 유실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섯 사람이 일찍이 한 밤에 함께 꿈에서 그 상을 만났는데 말하기를, “이미 강 동쪽으로 나와 고회라는 이에게 발견되었다.”라고 하였다고 했다. 이에 고회가 이 다섯 승려를 사원에 데려다 주었다. [승려들이] 상을 보자마자 흐느껴 울며 눈물을 흘리니, 상이 바로 빛을 발하여 전당을 밝혔다. 또 와관사(瓦官寺)주 003
각주 003)
瓦官寺: 江蘇省 南京의 鳳凰台에 있다. 東晉 興寧 2년(364)에 慧力이라는 승려의 奏請에 따라 詔令에 의해 창건되었다. 땅을 파다가 옛 와관(瓦棺)을 얻은 까닭에 瓦官寺라 칭하였다. 오래지 않아 慧力이 다시 탑 하나를 세웠으며, 竺法汰가 이 사원에 거주할 때에, 더욱 넓혀서 전당을 세우고 重門을 일으켜세웠으며, 아울러 ‘放光般若經’을 설강하여 승려의 무리가 운집하여 마침내 유명한 가람이 되었다. 竺僧敷와 竺道一 등 또한 이곳에 거주하면서 설법하였다. 太元 21년(396), 화재로 인하여 법당과 탑등이 전소되었는데, 황제가 칙령을 내려 다시 복구하였다. 사원 안에는 戴安道(戴逵)가 만든 불상 5尊과 顧長樂이 그린 維摩像 및 師子國에서 바친 玉像이 안치되었다. 劉宋대 이후에는 慧果·慧璩·慧重·僧導·求那跋摩·寶意 等이 모두 서로 이어 여기에 거주하면서 혹은 불경을 강론하고, 혹은 범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여 가르쳤다. 梁대에는 瓦官閣을 증건하였다. 五代 南唐 升元 연간에 이름을 바꾸어 升元寺라고 하였다. 宋 太平興國 연간(976∼983)에 칙명을 내려 이름을 ‘崇勝寺’라고 하였다. 明初에 사원이 철폐되어 그 사원의 반은 徐魏公의 정원이 되었고, 나머지 반은 驍騎의 衛倉으로 편입되었다. 嘉靖 연간에 徐公園 옆에 積慶庵을 세우고 이름을 붙이기를 古瓦官寺하였으나, 옛 터는 아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와관사도 후대인들이 이름만 가져다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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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수(慧邃)가 금상의 형상을 [밀랍으로 떠서] 모사(模寫) 하고자 하였는데, 사원의 주지인 승상(僧尙)이 금상의 금칠이 훼손될까 염려하여 혜수에게 말하기를, “만약 금상이 빛을 내고,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하게 할 수 있다면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혜수가 금상에 대하여 간절히 절하며 청하니, 그날 밤에 금상이 바로 돌려 앉으며 빛을 발하였고,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하였다. 다음날 아침 바로 본뜨는 것을 허락하였다. 금상의 부좌 부분에 외국어로 된 글이 있었는데, 일찍이 읽을 줄 아는 자가 없었다. 나중에 삼장(三藏)주 004
각주 004)
三藏: 트리피타카(Tripitaka). 전승에 따르면, 붓다가 죽은 직후 500명의 아라하트가 카사파 Kassapa(迦葉)의 주도 하에 라자가하 Rajagaha(王舍城)에서 雨期의 安居를 했는데, 이때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함께 암송하였고, 이것이 삼장 곧 트리피타카로 집결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붓다의 가르침이 일찍부터 口碑傳承으로 확립되어 되풀이되어 암송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 모임에서 지금의 트리피타카 내용이 암송되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극히 희박하다. 구비전승이 문헌의 형태를 취하여 파리어 正典으로 확립된 것은 아마도 수세기가 지난 후의 일일 것이다. 그렇게 문헌으로 기록되면서 삼장 즉 ‘비나야 피타카(Vinaya Pitaka)’ 곧 律藏(교단의 규칙), ‘숫타(산스크리트어로는 ‘수트라’ Sutra) 피타카(Sutta Pitaka)’ 곧 經藏(주로 대화 형식으로 된 붓다가 직접 설했다고 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늦게 형성된 ‘아비담마(Abhidhamma,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비다르마’ Abhidharma)’ 곧 論藏(제자나 후대 사람이 경의 뜻을 해석한 것)으로 (J. B. 노스, 1986: 682∼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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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法師)] 염구발마(求跋摩)가 그것을 읽었다. 이르기를, 이는 아육왕(阿育王)이 넷째 딸을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대동연간(大同, 535∼546)에 이르러, 옛 탑의 사리를 꺼내고, 칙령을 내려 사원 옆 수백 가(家)의 택지를 사들여 사원의 부지를 넓혔다. 그리고 여러 당전(堂殿)과 아울러 서상(瑞像)을 세우고 빙 둘러 측실을 짓는 등, 사원의 크고 넓고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였다. 그 여러 경변(經變)주 005
각주 005)
經變: 곧 變相이다. 교의를 전도하기 위해 쓰이는 佛經의 故事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繪畫, 雕刻 혹은 說唱文學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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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한 그림은 모두 오(吳) 출신 사람인 장요(張繇) 주 006
각주 006)
張繇: 양대의 이름난 화가였던 張僧繇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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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손을 놀려 그렸다. 장요는 화공(畵工)으로 당대 최고였다.

  • 각주 001)
    胡僧: 古代에 西域과 北地 혹은 外來의 僧人을 범칭하여 호승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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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鄴: 옛 都邑 명. 춘추시 齊 桓公이 처음으로 수축하였으며, 전국 시에는 魏文侯가 도읍으로 정하였다. 秦代에 縣으로 삼았고, 漢은 나중에 魏郡의 治所로 삼았다. 후한 말년에는 연이어 冀州와 相州의 治所가 되었다. 建安 18년(213)에 曹操가 魏王이 되면서 도읍으로 삼았다. 晉代에는 愍帝[司馬鄴]을 피휘하여 臨漳으로 개명하였다. 十六國 시에는 後趙와 前秦이, 북조시대에는 東魏와 北齊가 모두 이곳에 도읍하였다. 城이 두 개 있다. 북성은 曹魏가 옛 성을 증축한 것으로 둘레가 20여 리 정도 되고, 북쪽으로 漳水에 임하여 있다. 그 유지는 현재의 河北省 臨漳縣 서남쪽에 있다. 남성은 동위 초기에 북성보다 크게 수축하였으며, 河南省 安陽縣 경내에 있다. 隋 開皇 10년(590)에 이름을 업으로 회복하였으나, 宋 熙寧 6년(1073)에 臨漳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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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瓦官寺: 江蘇省 南京의 鳳凰台에 있다. 東晉 興寧 2년(364)에 慧力이라는 승려의 奏請에 따라 詔令에 의해 창건되었다. 땅을 파다가 옛 와관(瓦棺)을 얻은 까닭에 瓦官寺라 칭하였다. 오래지 않아 慧力이 다시 탑 하나를 세웠으며, 竺法汰가 이 사원에 거주할 때에, 더욱 넓혀서 전당을 세우고 重門을 일으켜세웠으며, 아울러 ‘放光般若經’을 설강하여 승려의 무리가 운집하여 마침내 유명한 가람이 되었다. 竺僧敷와 竺道一 등 또한 이곳에 거주하면서 설법하였다. 太元 21년(396), 화재로 인하여 법당과 탑등이 전소되었는데, 황제가 칙령을 내려 다시 복구하였다. 사원 안에는 戴安道(戴逵)가 만든 불상 5尊과 顧長樂이 그린 維摩像 및 師子國에서 바친 玉像이 안치되었다. 劉宋대 이후에는 慧果·慧璩·慧重·僧導·求那跋摩·寶意 等이 모두 서로 이어 여기에 거주하면서 혹은 불경을 강론하고, 혹은 범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여 가르쳤다. 梁대에는 瓦官閣을 증건하였다. 五代 南唐 升元 연간에 이름을 바꾸어 升元寺라고 하였다. 宋 太平興國 연간(976∼983)에 칙명을 내려 이름을 ‘崇勝寺’라고 하였다. 明初에 사원이 철폐되어 그 사원의 반은 徐魏公의 정원이 되었고, 나머지 반은 驍騎의 衛倉으로 편입되었다. 嘉靖 연간에 徐公園 옆에 積慶庵을 세우고 이름을 붙이기를 古瓦官寺하였으나, 옛 터는 아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와관사도 후대인들이 이름만 가져다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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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三藏: 트리피타카(Tripitaka). 전승에 따르면, 붓다가 죽은 직후 500명의 아라하트가 카사파 Kassapa(迦葉)의 주도 하에 라자가하 Rajagaha(王舍城)에서 雨期의 安居를 했는데, 이때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함께 암송하였고, 이것이 삼장 곧 트리피타카로 집결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붓다의 가르침이 일찍부터 口碑傳承으로 확립되어 되풀이되어 암송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 모임에서 지금의 트리피타카 내용이 암송되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극히 희박하다. 구비전승이 문헌의 형태를 취하여 파리어 正典으로 확립된 것은 아마도 수세기가 지난 후의 일일 것이다. 그렇게 문헌으로 기록되면서 삼장 즉 ‘비나야 피타카(Vinaya Pitaka)’ 곧 律藏(교단의 규칙), ‘숫타(산스크리트어로는 ‘수트라’ Sutra) 피타카(Sutta Pitaka)’ 곧 經藏(주로 대화 형식으로 된 붓다가 직접 설했다고 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늦게 형성된 ‘아비담마(Abhidhamma,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비다르마’ Abhidharma)’ 곧 論藏(제자나 후대 사람이 경의 뜻을 해석한 것)으로 (J. B. 노스, 1986: 682∼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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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經變: 곧 變相이다. 교의를 전도하기 위해 쓰이는 佛經의 故事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繪畫, 雕刻 혹은 說唱文學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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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張繇: 양대의 이름난 화가였던 張僧繇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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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고회(高悝), 고회, 아육왕, 고회, 고회, 혜수(慧邃), 승상(僧尙), 혜수, 혜수, 염구발마(求跋摩), 아육왕(阿育王), 장요(張繇), 장요
지명
서역(西域), 천축, 업하(鄴下), 황하, 오(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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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불상 자료번호 : jo.k_0008_0054_0060_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