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임읍국(林邑國)의 공헌(貢獻)과 약탈

  • 국가
    임읍국(林邑國)
원가 연간(元嘉, 424∼453) 초에 [임읍국의] 양매(陽邁)일남군구덕군 등 여러 군을 침범하여 약탈하였을 때, 교주자사 두홍문(杜弘文) 주 001
각주 001)
杜弘文: 도 호앙 반(Do Hoang Van). 아버지 도 뚜에 도[杜慧度, Do Tue Do]가 423년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당시 끄우 쩐[九眞] 태수였던 아들 두홍문이 교주 자사직을 승계하였다(유인선, 2002: 63). 『宋書』에 따르면, 송고조는 두혜도의 장자 員外散騎侍郞 弘文을 振威將軍이자 交州刺史로 삼았다. 두혜도의 사망 이전 송의 高祖 劉毅가 북으로 關·洛 지역 정벌에 나섰을 때, 두혜도는 弘文을 假板하여 鷹揚將軍에 流民督護로 삼고, 3천의 군사를 딸려 북으로 대군을 지원하게 하였다. 군대가 廣州에 이르렀을 때 關·洛이 이미 평정되어 귀환하였다. 교주의 統府인 ‘都督交廣二州諸軍事’를 겸임한 광주자사는 두홍문에게 行九眞太守의 직을 주었다. 아비를 이어 刺史가 된 뒤에도 寬和하여 무리를 얻었으며, 襲爵하여 龍編侯가 되었다. 太祖 元嘉 4년(427)에 廷尉 王徽를 交州刺史로 삼고, 弘文을 徵召하였다. 마침 병이 중하였으나, 고집스럽게 경사로 향하다가 광주에 이르러 사망하였다(『宋書』 卷92 「良吏傳」: 2265).
닫기
이 군기(軍旗)를 세우고[建牙]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곧 자신이 교체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쳤다. [원가] 8년(431)에 다시 [양매가] 구덕군에 침범하여 사회포(四會浦)의 입구에 들어왔을 때, 교주자사 완미지(阮彌之) 주 002
각주 002)
阮彌之: 『宋書』와 『南史』의 같은 사건을 기록한 기사에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닫기
가 대주(隊主) 상도생(相道生)을 파견하여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치도록 하였는데, 구율성(區栗城) 주 003
각주 003)
區栗城: 쿠 뚝(Khu Tuc). 오늘날의 바 돈(Ba Don) 근처.
닫기
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결국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 뒤로 [임읍국은] 매해 사자를 보내 공헌(貢獻)하였으나, 침범하여 약탈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원가] 23년(446)에 교주자사 단화지(檀和之) 주 004
각주 004)
檀和之(?∼456): 劉宋時 高平 金鄕(山東 金鄕 북부) 사람이다. 宋에 출사하여, 官이 龍驤將軍·交州刺史에 이르렀다. 元嘉 23년에 임읍을 정벌한 뒤 雍·豫·南兗諸州의 刺史를 역임하였다. 『宋書』 「夷蠻傳」에 따르면, 檀和之는 豫章에서 胡誕世 等의 반란을 토벌한 공과 위 임읍 토벌의 공을 합하여 雲杜縣子에 봉해졌으며, 400戶의 食邑을 받았다. 『宋書』에 입전되지는 않았으나, 「夷蠻傳」에서 그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檀憑의 子이다. 단빙은 단빙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劉裕를 따라 宋朝의 창업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태조 원가 27년(450) 太子左衛率로부터 훗날 효무제가 되는 文帝의 3子 劉駿 막부의 鎭軍司馬 輔國將軍 彭城太守로 전임되었다. 문제의 태자로 元嘉 30년(453)에 巫蠱의 사건으로 인해 동생 劉浚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 위에 오른 劉劭에 의해 西中郎將, 雍州刺史로 임명되었다. 효무제가 의병을 일으켜 유소를 토벌하면서, 단화지에게 보국장군을 더해주고 豫州戍事를 통솔케 하니, 유준에게 귀순하였다. 세조(효무제)가 즉위하자 그를 右衛將軍으로 임명하였다. 孝建 2년(455) 보국장군 예주자사로 임명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시 右衛將軍에 散騎常侍가 덧붙여졌다. 효건 3년 南兗州刺史로 출진하였으나, 술을 즐기고 뇌물을 탐하며 옥중의 여자를 안으로 불러들인 죄를 범하여, 관직을 박탈당하고 禁錮 형에 처해졌다. 이 해에 세상을 떠나니 左將軍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襄子’로 하였다고 한다. 『宋書』 本紀에는 남연주자사에 임명된 것이 효건 2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닫기
와 진무장군(振武將軍) 종각(宗慤)에게 치도록 하였다. 단화지는 사마(司馬) 소경헌(蕭景憲)을 보내어 선봉으로 삼았다. 양매가 그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금 1만 근과 은 10만 근을 바치고, 약탈하여 간 일남의 민호를 돌려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대신(大臣) 독승달(僧達)이 간하여 그치게 하고, 대수(大帥) 범부룡(范扶龍)을 보내 그 북쪽 경계의 구율성을 지키게 하였다. 소경헌이 성을 공격하여 이겼는데, 범부룡의 머리를 베었으며, 금은과 기타 잡물을 획득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소경헌은] 승기를 잡자 지름길로 달려가 바로 임읍을 점령하였다.주 005
각주 005)
임읍의 수도는 현재 베트남의 쨔 끼에우 지방이라고 한다. 단화지의 정벌 이후 임읍은 쇠약해져 북쪽을 침략할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유인선, 2002: 64).
닫기
양매 부자는 함께 몸을 빼어 달아났다. 진기한 물건들을 노획하였는데, 모두 이름조차 듣지 못한 보물이었다. 또 그 금인을 녹여 황금 수십 만 근을 얻었다. [단]화지는 나중에 병사하였는데, 호신(胡神)으로 숭상되었다.

  • 각주 001)
    杜弘文: 도 호앙 반(Do Hoang Van). 아버지 도 뚜에 도[杜慧度, Do Tue Do]가 423년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당시 끄우 쩐[九眞] 태수였던 아들 두홍문이 교주 자사직을 승계하였다(유인선, 2002: 63). 『宋書』에 따르면, 송고조는 두혜도의 장자 員外散騎侍郞 弘文을 振威將軍이자 交州刺史로 삼았다. 두혜도의 사망 이전 송의 高祖 劉毅가 북으로 關·洛 지역 정벌에 나섰을 때, 두혜도는 弘文을 假板하여 鷹揚將軍에 流民督護로 삼고, 3천의 군사를 딸려 북으로 대군을 지원하게 하였다. 군대가 廣州에 이르렀을 때 關·洛이 이미 평정되어 귀환하였다. 교주의 統府인 ‘都督交廣二州諸軍事’를 겸임한 광주자사는 두홍문에게 行九眞太守의 직을 주었다. 아비를 이어 刺史가 된 뒤에도 寬和하여 무리를 얻었으며, 襲爵하여 龍編侯가 되었다. 太祖 元嘉 4년(427)에 廷尉 王徽를 交州刺史로 삼고, 弘文을 徵召하였다. 마침 병이 중하였으나, 고집스럽게 경사로 향하다가 광주에 이르러 사망하였다(『宋書』 卷92 「良吏傳」: 2265).
     바로가기
  • 각주 002)
    阮彌之: 『宋書』와 『南史』의 같은 사건을 기록한 기사에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區栗城: 쿠 뚝(Khu Tuc). 오늘날의 바 돈(Ba Don) 근처.
     바로가기
  • 각주 004)
    檀和之(?∼456): 劉宋時 高平 金鄕(山東 金鄕 북부) 사람이다. 宋에 출사하여, 官이 龍驤將軍·交州刺史에 이르렀다. 元嘉 23년에 임읍을 정벌한 뒤 雍·豫·南兗諸州의 刺史를 역임하였다. 『宋書』 「夷蠻傳」에 따르면, 檀和之는 豫章에서 胡誕世 等의 반란을 토벌한 공과 위 임읍 토벌의 공을 합하여 雲杜縣子에 봉해졌으며, 400戶의 食邑을 받았다. 『宋書』에 입전되지는 않았으나, 「夷蠻傳」에서 그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檀憑의 子이다. 단빙은 단빙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劉裕를 따라 宋朝의 창업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태조 원가 27년(450) 太子左衛率로부터 훗날 효무제가 되는 文帝의 3子 劉駿 막부의 鎭軍司馬 輔國將軍 彭城太守로 전임되었다. 문제의 태자로 元嘉 30년(453)에 巫蠱의 사건으로 인해 동생 劉浚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 위에 오른 劉劭에 의해 西中郎將, 雍州刺史로 임명되었다. 효무제가 의병을 일으켜 유소를 토벌하면서, 단화지에게 보국장군을 더해주고 豫州戍事를 통솔케 하니, 유준에게 귀순하였다. 세조(효무제)가 즉위하자 그를 右衛將軍으로 임명하였다. 孝建 2년(455) 보국장군 예주자사로 임명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시 右衛將軍에 散騎常侍가 덧붙여졌다. 효건 3년 南兗州刺史로 출진하였으나, 술을 즐기고 뇌물을 탐하며 옥중의 여자를 안으로 불러들인 죄를 범하여, 관직을 박탈당하고 禁錮 형에 처해졌다. 이 해에 세상을 떠나니 左將軍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襄子’로 하였다고 한다. 『宋書』 本紀에는 남연주자사에 임명된 것이 효건 2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임읍의 수도는 현재 베트남의 쨔 끼에우 지방이라고 한다. 단화지의 정벌 이후 임읍은 쇠약해져 북쪽을 침략할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유인선, 2002: 64).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양매(陽邁), 두홍문(杜弘文), 양매, 완미지(阮彌之), 상도생(相道生), 단화지(檀和之), 종각(宗慤), 단화지, 소경헌(蕭景憲), 양매, 독승달(僧達), 범부룡(范扶龍), 소경헌, 범부룡, 소경헌, 양매, [단]화지
지명
임읍국, 일남군, 구덕군, 구덕군, 사회포(四會浦), 구율성(區栗城), 임읍국, 일남, 구율성, 임읍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임읍국(林邑國)의 공헌(貢獻)과 약탈 자료번호 : jo.k_0008_0054_00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