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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해남(海南) 지역과의 교류

  • 국가
    해남제국(海南諸國)
해남(海南)의 여러 나라는 대체로 보아서 교주(交州)의 남쪽에서 서남쪽 대해(大海)에 미치는 [동남아시아] 대륙부(大陸部) 및 도서(島嶼) 지역에 위치한다. 서로 거리가 가까우면 삼천리에서 오천리, 멀면 이삼만 리에 달하였으며, 그 서편은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와 접(接)하여 있다. 전한 원정 연간(元鼎, 전116∼전111)에 복파장군 노박덕(路博德) 주 001
각주 001)
路博德: 『漢書』에 따르면, 노박덕은 西河郡 平州縣 사람이다. 右北平 태수로써 票騎將軍 곽거병의 흉노정벌에 종군하였고, 그 공으로 邳離侯에 封해졌다. 곽거병의 사후에 노박덕은 衛尉로써 伏波將軍에 임명되었다. 南越을 정벌 공격하여 益封되었다. 그 뒤에 범죄하여 폐봉되었고, 彊弩都尉가 되어 居延에서 둔수하다가 죽었다(『漢書』 卷55 「衛靑霍去病傳」 第25: 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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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백월(百越)[의 땅]을 개척하여 일남군(日南郡) 주 002
각주 002)
日南郡: 남이라고 한다(유인선, 2002: 41). 前漢 元鼎 6년(전111)에 설치하였고, 치소는 西捲縣에 있었으며, 서권현은 현재 베트남 중부의 꽝찌[廣治; Quang Tri] 서북 쪽의 광찌하[廣治河; Quang Tri River]와 깜로하[甘露河; Cam Lo River]가 만나는 지점이다(베트남 다낭Danang 부근이라는 설도 있다). 『水經』 「溫水注」에서는 “區粟建八尺表, 日影度南八寸, 自此影以南在日之南, 故以郡名”이라 하여 그 이름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일남군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베트남 중부로 북쪽은 橫山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으로 大嶺에 이르는 지역이다. 후한대에는 교주에 속하였다. 三國 吳 赤烏 11년(248)에 朱吾縣(베트남 平治天Thua Thien省 美麗 부근)으로 치소를 옮겼다. 西晉 太康 초에 치소를 盧容縣(현재 베트남 平治天省 廣田縣 동쪽 東香江과 蒲江의 합류처)으로 옮겼다가, 나중에 다시 西捲縣으로 치소를 옮겼다. 東晉 永和 연간에 치소를 比景縣(베트남 平治天省 宋河 하류의 高牢下村)으로 옮겼다. 유송 시기에는 서권현에 치소를 두었으며, 남제 시에는 군을 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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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하였다. 일남군의 요(徼)주 003
각주 003)
徼: ‘邊塞’의 의미. 확장하여 ‘邊界’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더 구체적으로는 邊境의 亭鄣을 지칭하기도 한다. 司馬貞은 『史記索隱』에서 張揖의 말을 인용하여 “徼는 塞이다. 木柵과 水로써 蠻夷의 경계를 삼았다.”(『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第57: 3048)라고 하였으며, 또 “徼는 邊境의 亭鄣을 말한다. 徼로 邊陲를 둘러싸고 늘 지킨다.”(『史記』 卷91 「黥布列傳」 第31: 2601)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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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여러 나라들이 [의] 무제(武帝) 이래로 모두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후한환제(桓帝) 주 004
각주 004)
桓帝(132∼167): 이름은 유지(劉志). 後漢 第10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147∼167년이다. 그는 후한 章帝의 曾孫으로 21년간 통치하였다. 146년에 外戚 梁冀가 9세의 質帝를 독살하고, 15세의 유지를 세웠다. 어려서부터 양기의 보정과 전횡에 불만이 많았던 유지는 즉위 후 내내 외척 양씨를 주멸할 방법을 모색하였고, 결국 延熹 2년(159년)에 宦官 單超 等 5人과 모의하여 양기를 비롯한 양씨를 주멸하였다. 다섯 명의 환관은 이 날의 공으로 열후에 봉해져 ‘五侯’라고 불렸다. 이들 ‘오후’는 외척보다도 더 부패하였고, 결국 환제 통치 후기에 유명한 ‘黨錮’사건으로 이어졌다. 諡號는 孝桓皇帝라 하고, 廟號는 威宗이라 하였다. 宣陵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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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대진(大秦) 주 005
각주 005)
大秦: 黎軒과 犁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漢·晉 시기 로마제국에 대한 칭호. 『後漢書 外國傳 譯註』 上 「西域傳」, 2009: 251에 따르면, 대진국은 “일명 犁鞬이라고도 한다. 바다 서쪽에 있는 까닭에 海西國이라고도 부른다. 그 땅의 둘레는 수천 里이며, 400여 개의 성들이 있고 복속하고 있는 소국(小國)들도 수십이다. 돌로 성곽을 짓고 우정(郵亭)을 줄지어 설치했으며, 모두 석회(堊)로 그것을 칠했다”라고 하였다. 永元 9년(97)에 西域都護 班超가 甘英을 사자로 대진에 보냈는데, 條支에 이르고, 바닷가까지 갔다가 돌아 왔다. 延熹 9년(166)에 대진 황제 安敦이 사자를 보내 중국에 왔다. 晉 武帝 太康 연간에 대진이 다시 사자를 보내 中國과 통교하였다. 395년에 로마가 분열하여 둘이 된 뒤로, 대진은 동로마 제국을 지칭하였다. 장-노엘 로베르는 166년 환제의 궁정에 도착한 대진의 사절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安頓은 곧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이고, 그 사신들은 사신을 사칭한 상인들이며, 아마도 로마제국에 속한 중동 지역의 상인들이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장-노엘 로베르, 1998: 17). 대진이 로마제국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설에 대하여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지만, 로마제국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지칭하는가 하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는 듯하다. 羽田明에 따르면, F. Hirth와 白鳥庫吉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 영 동방으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A. Herman은 아라비아 반도 특히 남 아라비아인 Arabia Felix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宮崎市定은 대진은 어디까지나 로마 본국을 지칭한다는 견해를 견지하였다 한다. 또 ‘大秦’의 어원에 대하여는 藤田豊八의 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대진은 이란어에서 서방을 의미하는 다시나(dashina)의 상대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진은 남북조시기에는 확실히 이상화 되어 공상 속의 국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즈음 실재하는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이 拂菻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아시아역사사전』 6: 35a). 『後漢書』 「西域傳」에서는 “그 사람들은 모두 [신체가] 長大하고 [마음은] 평정하여 중원의 나라와 닮은 바가 있으므로 ‘大秦’이라 부르는 것이다.”(『後漢書 外國傳 譯註』 上 「西域傳」, 2009: 251~252)라고 했다. 그리고 『三國志』에 주하면서 裴松之가 인용한 『魏略』 「西戎傳」에서는 “그 俗人들은 長大하고 平正하여 中國人과 유사하나 胡服을 입었다.”(『三國志』: 860)라고 하였다. 대진의 또 다른 이름인 犁鞬에 대하여 F. Hirth는 ‘rekem’의 음역으로, 희랍인들이 말하는 Petra城을 지칭한다고 보았다. 또 白鳥庫吉은 이집트의 都城 Alexandria의 略譯으로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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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天竺) 주 006
각주 006)
天竺: t’ien-tuok. 『史記』에서는 身毒(sien-d’uok)이라고 표기되며, 『漢書』에서는 天竺과 함께 天篤(t’ien-tuok)으로도 표기되는데, 이는 인도를 지칭하던 고대 이란어 Hinduka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身毒 역시 인도식 발음인 Sindhu와 관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말을 직접 音譯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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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 이 길을 통해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손권(孫權) 때에는 선화종사(宣化從事)주 007
각주 007)
宣化從事: 선화종사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직이었는지에 관한 내용은 찾기 어렵다. 25사에서도 선화종사는 『남사』와 『양서』에 위 기사와 같은 내용을 전하는 기사들에 등장할 뿐이다. 아마도 선화종사는 종사의 일종으로 보인다. ‘종사’는 한대 이래로 三公 및 州郡의 장관이 僚屬을 辟召하여 쓸 때 ‘종사’를 칭할 경우가 많았고, 여기에는 특별한 정원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三國志』 「吳書」에 廣州刺史로서 교주를 평정하고 교주자사가 된 呂岱가 從事를 요외로 보내 ‘南宣國化’하게 하였다고 하였고, ‘선화’는 군주의 명을 전하여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이에 걸맞은 임무를 부여받은 從事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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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응(朱應) 주 008
각주 008)
朱應: 주응에 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다만, 『隋書』 「經籍志」에서는 주응이 「扶南異物志」 1卷을 撰하였다고 전하고 있다(『隋書』 卷33 「經籍」: 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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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중랑(中郞) 강태(康泰) 주 009
각주 009)
康泰: 손오 시기 남해 지역으로 사행을 한 관인. 강태에 관한 다른 기록 또한 찾기 어렵다. 강태는 이 사행의 경험을 토대로 『吳時外國傳』(혹은 『吳時外國志』, 『(康泰)扶南記』, 『扶南傳』)을 지었다고 전해지며, 이는 『水經注』, 『藝文類聚』, 『梁書』, 『通典』, 『太平禦覽』 등의 서적에서 인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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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내 통교하였다.주 010
각주 010)
대략 黃武 5년(226) 경, 즉 大秦의 상인 秦論이 교지를 거쳐 건업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는 때에 교주자사 呂岱가 주응과 강태를 해남지역으로 出使하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유인선, 2002: 59). 『三國志』 「吳書」에 광주자사 여대가 교주 사휘 등의 난을 평정하고 구진군을 토벌한 뒤에 “또 從事를 보내 ‘南宣國化’토록 하여, 徼外에 이르러 扶南, 林邑, 堂明의 여러 王이 각기 遣使奉貢하게 하였다. 손권이 그 功을 가상히 여겨, 그 호를 올려 鎭南將軍에 배수하였다.”(『三國志』 卷61 「吳書」: 1385)라고 하였으니, 주응과 강태를 파견한 것은 여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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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지난 곳과 전해들은 것이 백 수십 개국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전(記傳)주 011
각주 011)
記傳: 구체적으로 어떠한 기록들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으나, 앞의 주석문에서 언급하였듯이 朱應이 지었다는 『扶南異物志』와 康泰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吳時外國傳』(『吳時外國志』), 『扶南土俗』(『扶南傳』, 『(康泰)扶南記』) 등을 비롯하여 주응 등이 사자로 가서 통교한 직후 晉代까지 생산된 기록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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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작성하였다. 진대(晉代)에는 중국에 통한 나라가 드물어서 사관이 기록한 것이 없었다. 에 이르러서는 [중국에 사자를] 보내는 나라가 십여 국이나 되었으므로, 비로소 전(傳)을 지었다. 양(梁)이 천명을 받은 이후로, [의] 정삭(正朔)을 받들고 공물(貢物)을 바쳐 직분(職分)을 다하여 해마다 바다를 건너오는 나라[의 수]가 이전 왕조보다 많았다. 지금 그 [나라들의] 풍속의 대략을 수집하여 묶어서 해남전(海南傳)>이라 하였다.

  • 각주 001)
    路博德: 『漢書』에 따르면, 노박덕은 西河郡 平州縣 사람이다. 右北平 태수로써 票騎將軍 곽거병의 흉노정벌에 종군하였고, 그 공으로 邳離侯에 封해졌다. 곽거병의 사후에 노박덕은 衛尉로써 伏波將軍에 임명되었다. 南越을 정벌 공격하여 益封되었다. 그 뒤에 범죄하여 폐봉되었고, 彊弩都尉가 되어 居延에서 둔수하다가 죽었다(『漢書』 卷55 「衛靑霍去病傳」 第25: 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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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日南郡: 남이라고 한다(유인선, 2002: 41). 前漢 元鼎 6년(전111)에 설치하였고, 치소는 西捲縣에 있었으며, 서권현은 현재 베트남 중부의 꽝찌[廣治; Quang Tri] 서북 쪽의 광찌하[廣治河; Quang Tri River]와 깜로하[甘露河; Cam Lo River]가 만나는 지점이다(베트남 다낭Danang 부근이라는 설도 있다). 『水經』 「溫水注」에서는 “區粟建八尺表, 日影度南八寸, 自此影以南在日之南, 故以郡名”이라 하여 그 이름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일남군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베트남 중부로 북쪽은 橫山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으로 大嶺에 이르는 지역이다. 후한대에는 교주에 속하였다. 三國 吳 赤烏 11년(248)에 朱吾縣(베트남 平治天Thua Thien省 美麗 부근)으로 치소를 옮겼다. 西晉 太康 초에 치소를 盧容縣(현재 베트남 平治天省 廣田縣 동쪽 東香江과 蒲江의 합류처)으로 옮겼다가, 나중에 다시 西捲縣으로 치소를 옮겼다. 東晉 永和 연간에 치소를 比景縣(베트남 平治天省 宋河 하류의 高牢下村)으로 옮겼다. 유송 시기에는 서권현에 치소를 두었으며, 남제 시에는 군을 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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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徼: ‘邊塞’의 의미. 확장하여 ‘邊界’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더 구체적으로는 邊境의 亭鄣을 지칭하기도 한다. 司馬貞은 『史記索隱』에서 張揖의 말을 인용하여 “徼는 塞이다. 木柵과 水로써 蠻夷의 경계를 삼았다.”(『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第57: 3048)라고 하였으며, 또 “徼는 邊境의 亭鄣을 말한다. 徼로 邊陲를 둘러싸고 늘 지킨다.”(『史記』 卷91 「黥布列傳」 第31: 2601)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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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桓帝(132∼167): 이름은 유지(劉志). 後漢 第10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147∼167년이다. 그는 후한 章帝의 曾孫으로 21년간 통치하였다. 146년에 外戚 梁冀가 9세의 質帝를 독살하고, 15세의 유지를 세웠다. 어려서부터 양기의 보정과 전횡에 불만이 많았던 유지는 즉위 후 내내 외척 양씨를 주멸할 방법을 모색하였고, 결국 延熹 2년(159년)에 宦官 單超 等 5人과 모의하여 양기를 비롯한 양씨를 주멸하였다. 다섯 명의 환관은 이 날의 공으로 열후에 봉해져 ‘五侯’라고 불렸다. 이들 ‘오후’는 외척보다도 더 부패하였고, 결국 환제 통치 후기에 유명한 ‘黨錮’사건으로 이어졌다. 諡號는 孝桓皇帝라 하고, 廟號는 威宗이라 하였다. 宣陵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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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大秦: 黎軒과 犁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漢·晉 시기 로마제국에 대한 칭호. 『後漢書 外國傳 譯註』 上 「西域傳」, 2009: 251에 따르면, 대진국은 “일명 犁鞬이라고도 한다. 바다 서쪽에 있는 까닭에 海西國이라고도 부른다. 그 땅의 둘레는 수천 里이며, 400여 개의 성들이 있고 복속하고 있는 소국(小國)들도 수십이다. 돌로 성곽을 짓고 우정(郵亭)을 줄지어 설치했으며, 모두 석회(堊)로 그것을 칠했다”라고 하였다. 永元 9년(97)에 西域都護 班超가 甘英을 사자로 대진에 보냈는데, 條支에 이르고, 바닷가까지 갔다가 돌아 왔다. 延熹 9년(166)에 대진 황제 安敦이 사자를 보내 중국에 왔다. 晉 武帝 太康 연간에 대진이 다시 사자를 보내 中國과 통교하였다. 395년에 로마가 분열하여 둘이 된 뒤로, 대진은 동로마 제국을 지칭하였다. 장-노엘 로베르는 166년 환제의 궁정에 도착한 대진의 사절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安頓은 곧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이고, 그 사신들은 사신을 사칭한 상인들이며, 아마도 로마제국에 속한 중동 지역의 상인들이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장-노엘 로베르, 1998: 17). 대진이 로마제국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설에 대하여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지만, 로마제국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지칭하는가 하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는 듯하다. 羽田明에 따르면, F. Hirth와 白鳥庫吉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 영 동방으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A. Herman은 아라비아 반도 특히 남 아라비아인 Arabia Felix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宮崎市定은 대진은 어디까지나 로마 본국을 지칭한다는 견해를 견지하였다 한다. 또 ‘大秦’의 어원에 대하여는 藤田豊八의 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대진은 이란어에서 서방을 의미하는 다시나(dashina)의 상대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진은 남북조시기에는 확실히 이상화 되어 공상 속의 국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즈음 실재하는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이 拂菻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아시아역사사전』 6: 35a). 『後漢書』 「西域傳」에서는 “그 사람들은 모두 [신체가] 長大하고 [마음은] 평정하여 중원의 나라와 닮은 바가 있으므로 ‘大秦’이라 부르는 것이다.”(『後漢書 外國傳 譯註』 上 「西域傳」, 2009: 251~252)라고 했다. 그리고 『三國志』에 주하면서 裴松之가 인용한 『魏略』 「西戎傳」에서는 “그 俗人들은 長大하고 平正하여 中國人과 유사하나 胡服을 입었다.”(『三國志』: 860)라고 하였다. 대진의 또 다른 이름인 犁鞬에 대하여 F. Hirth는 ‘rekem’의 음역으로, 희랍인들이 말하는 Petra城을 지칭한다고 보았다. 또 白鳥庫吉은 이집트의 都城 Alexandria의 略譯으로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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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天竺: t’ien-tuok. 『史記』에서는 身毒(sien-d’uok)이라고 표기되며, 『漢書』에서는 天竺과 함께 天篤(t’ien-tuok)으로도 표기되는데, 이는 인도를 지칭하던 고대 이란어 Hinduka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身毒 역시 인도식 발음인 Sindhu와 관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말을 직접 音譯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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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宣化從事: 선화종사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직이었는지에 관한 내용은 찾기 어렵다. 25사에서도 선화종사는 『남사』와 『양서』에 위 기사와 같은 내용을 전하는 기사들에 등장할 뿐이다. 아마도 선화종사는 종사의 일종으로 보인다. ‘종사’는 한대 이래로 三公 및 州郡의 장관이 僚屬을 辟召하여 쓸 때 ‘종사’를 칭할 경우가 많았고, 여기에는 특별한 정원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三國志』 「吳書」에 廣州刺史로서 교주를 평정하고 교주자사가 된 呂岱가 從事를 요외로 보내 ‘南宣國化’하게 하였다고 하였고, ‘선화’는 군주의 명을 전하여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이에 걸맞은 임무를 부여받은 從事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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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朱應: 주응에 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다만, 『隋書』 「經籍志」에서는 주응이 「扶南異物志」 1卷을 撰하였다고 전하고 있다(『隋書』 卷33 「經籍」: 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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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康泰: 손오 시기 남해 지역으로 사행을 한 관인. 강태에 관한 다른 기록 또한 찾기 어렵다. 강태는 이 사행의 경험을 토대로 『吳時外國傳』(혹은 『吳時外國志』, 『(康泰)扶南記』, 『扶南傳』)을 지었다고 전해지며, 이는 『水經注』, 『藝文類聚』, 『梁書』, 『通典』, 『太平禦覽』 등의 서적에서 인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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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대략 黃武 5년(226) 경, 즉 大秦의 상인 秦論이 교지를 거쳐 건업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는 때에 교주자사 呂岱가 주응과 강태를 해남지역으로 出使하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유인선, 2002: 59). 『三國志』 「吳書」에 광주자사 여대가 교주 사휘 등의 난을 평정하고 구진군을 토벌한 뒤에 “또 從事를 보내 ‘南宣國化’토록 하여, 徼外에 이르러 扶南, 林邑, 堂明의 여러 王이 각기 遣使奉貢하게 하였다. 손권이 그 功을 가상히 여겨, 그 호를 올려 鎭南將軍에 배수하였다.”(『三國志』 卷61 「吳書」: 1385)라고 하였으니, 주응과 강태를 파견한 것은 여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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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記傳: 구체적으로 어떠한 기록들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으나, 앞의 주석문에서 언급하였듯이 朱應이 지었다는 『扶南異物志』와 康泰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吳時外國傳』(『吳時外國志』), 『扶南土俗』(『扶南傳』, 『(康泰)扶南記』) 등을 비롯하여 주응 등이 사자로 가서 통교한 직후 晉代까지 생산된 기록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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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노박덕(路博德), 무제(武帝), 환제(桓帝), 손권(孫權), 주응(朱應), 강태(康泰)
지명
해남(海南), 교주(交州), 동남아시아, 서역(西域), 전한, 백월(百越), 일남군(日南郡), 일남군, , 후한, 대진(大秦), 천축(天竺), , 중국, , , 중국, 양(梁),
서명
해남전(海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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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海南) 지역과의 교류 자료번호 : jo.k_0008_0054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