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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인(氐人)의 기원과 풍속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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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융(西戎)
[배송지주] 『위략(魏略)주 001
각주 001)
『魏略』은 陝西 京兆 출신으로 魏의 郎中을 역임했던 魚豢이 편찬한 魏나라의 역사서이다. 『舊唐書』 「經籍志」는 『魏略』이 38卷으로 되어 있다고 했고, 『新唐書』 「藝文志」는 『魏略』이 모두 50卷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는 散佚되어 그 구체적인 내용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陳壽의 『三國志』에 裴松之가 붙인 注, 『史記索隱』, 『前·後漢書』의 注, 『文選』의 注, 『北堂書鈔』·『藝文類聚』·『太平御覽』 등에 그 佚文이 보이며, 일찍이 張鵬一은 이들 기사를 수집하여 『魏略輯本』 25卷(1924年刊)을 편찬하였다.
唐代의 저명한 史家 劉知幾(661~721)는 『史通』에서 “과거 魏나라 때에 京兆사람 魚豢이 『魏略』을 私撰했는데, 그 내용은 [魏] 明帝(227~239)에서 끝난다.”라고 적고, 『魏略』의 찬술 연대를 明帝 末年인 239년부터 魏가 망하는 265년 사이에 저작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魏略』의 기사들 가운데에는 高貴鄕公의 즉위(254)에 관한 기사 및 甘露2년(257)의 기사는 물론, 魏나라 최후의 황제인 陳留王 奐의 晩年에 일어난 기사도 포함되어 있어, 실제 찬술된 연대는 晉 武帝 太康(280~89) 年間일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魏略』은 그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魏나라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지만, 내용은 三國시대의 魏에만 한정되지 않고 曹操가 활동을 시작한 後漢 靈帝(167~189) 말년까지 소급되고 있고, 실제로 魏 건국 이전에 관한 기록이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후한말 曹操와 관련이 깊던 인물은 물론, 그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들에 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隋書』 「經籍志」는 魚豢의 저술로서 『典略』이라는 책이 언급되어 있고 그것이 89卷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여, 38卷 혹은 50卷本의 『魏略』이 사실은 『典略』 속에 포함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 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伊藤德男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全海宗도 『魏略』과 『典略』이라는 이름으로 잔존한 기사들을 상세히 비교 검토한 결과 양자가 서로 다른 것으로 추정했다.
현존하는 『魏略』의 기사들 가운데 아래에서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부분은 『三國志』 「魏書」에 裴松之가 注를 붙이면서 『魏略』 「西戎傳」을 상당 부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를 『魏略』을 일견해 보면 과거 『史記』나 『漢書』에 보이는 西域에 관한 묘사와 유사한 부분도 많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정보와 사실들이 기록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大秦에 관한 기사는 전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으며, 『後漢書』 「西域傳」의 大秦에 관한 묘사와 字句까지 일치하는 부분이 보인다. 余太山과 같은 학자는 이 점에 주목하여 裴松之(372~451)와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范曄(398~445)이 『後漢書』 「西域傳」을 집필하면서 魚豢의 『魏略』 가운데 大秦에 관한 기사를 인용·보충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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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융전(西戎傳)」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인(氐人)주 002
각주 002)
氐: 고대 종족명. 殷周시대에서 남북조에 이르는 동안 지금의 섬서, 감숙, 사천 交界에 거주했다. 전한 초가에 이들은 각자 수령을 갖고 있었는데, 한무제 元鼎6년(전111) 氐王을 죽이고 武都郡을 설치한 것이 이들에 대한 군현지배의 시작이었다. 그 뒤 元封3년(전108) 일부 氐人들이 주천 방면으로 이주했고, 漢 獻帝 建安24년(219) 5만명에 달하는 氐人들이 扶風·天水 등지에서 한인들과 잡거하게 되었다. 남북조 시대에 들어가 氐人 苻堅이 前秦을 세우고, 呂氏가 後凉을 세우고, 楊氏가 九池國을 세우면서, 많은 수의 저인들이 한족문화를 받아들이고 한족의 언어와 의복을 채용하기도 했다. 농업을 위주로 하지만 목축도 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氐族의 기원과 형성 및 분포에 대해서는 黃烈 1987: 114~16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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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왕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기원은 오래 되었다. 한나라익주(益州) 주 003
각주 003)
益州: 전109년 한무제에 의해서 두어진 郡으로서, 治所는 滇池였다. 오늘날 雲南 晉寧 동쪽에 위치. 益州郡과 益州는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후자는 한무제가 전106년에 전국에 설치한 13개 刺史部 가운데 하나로서 四川지역을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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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개척하고 무도군(武都郡) 주 004
각주 004)
武都郡: 전118년 한무제에 의해서 설치된 郡으로서, 치소는 甘肅지방의 街州 成縣의 서쪽 80리 되는 지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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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하며 그 종족 사람들을 밀어내자, 그들은 흩어져 산의 계곡 사이로 숨어들어가, 혹은 복록(福祿) 주 005
각주 005)
福祿: 감숙지방 肅州에 두어졌던 酒泉郡 휘하의 縣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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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혹은 견(汧) 주 006
각주 006)
汧: 汧縣은 隴州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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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隴) 주 007
각주 007)
隴: 漢代에 두어졌으며 후한대에는 凉州刺史의 치소가 위치. 晉代에 폐지되었다. 故城은 현재 감숙 淸水縣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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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동서 지역에 분포하게 되었다. 그 종족은 하나가 아니며 반호(槃瓠)주 008
각주 008)
槃瓠: 盤護라고도 불리우는 신화 속의 인물. 應劭의 『風俗通』에 처음 기재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상고시대에 高辛氏의 딸이 槃瓠라는 개(犬)와 혼인하여 6남6녀를 출생하였고, 이들 자기들끼리 婚配되어 자손이 번성하게 되어 마침내 “長沙·武陵의 蠻”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後漢書』 卷86 「南蠻西南夷列傳」에는 『魏略』을 인용하여 “高辛氏에게는 늙은 부인이 하나 있었는데 王室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녀가 귀가 아파서 귀를 후벼보니 크기가 누에고치만한 물건이 나왔다. 부인은 그것을 표주박(瓠) 속에 넣어두고 사발(槃)로 그것을 덮었는데, 얼마 안있어 개(犬)로 변하였고 그 무늬가 五色을 띄었다. 그런 연유로 반호(槃瓠)라고 이름하였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漢族이 盤古神話를 믿는 것처럼 중국 서남방의 소수민족들도 이와 유사한 신화를 갖고 있는데, 瑤族이나 畬族은 모두 槃瓠를 자기들의 始祖로 여긴다. 이러한 신화가 과거 이들의 토템신앙과 유관하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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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후예라고 칭한다. 혹은 청저(青氐), 혹은 백저(白氐), 혹은 염저(蚺氐)주 009
각주 009)
青氐·白氐·蚺氐: 이는 氐族을 집단별로 어떤 색깔의 옷을 즐겨입는가를 기준으로 붙인 이름이다. 다만 蚺은 큰 뱀의 일종인데 (唐 劉恂의 『嶺表錄異』 卷下에는 “蚺蛇. 큰 것은 五六丈이고 둘레가 四五尺이다. 그 다음으로 큰 것 역시 三四丈보다 더 작지는 않으며 둘레도 그러하다. 몸에 반점이 있어 마치 비단으로 무늬를 놓은 것 같다.”라는 설명이 보인다), 이는 柔然을 蠕蠕이라 부른 것처럼 고대 중국인들이 주변의 민족들을 비하하기 위하여 사용한 글자에 불과하다. 黃烈(1987: 133~134)은 이 글자가 원래는 冉이었을 것이고, 冉은 丹의 誤字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즉 蚺氐는 원래 丹氐를 지칭한 것이었고, 이들은 赤色의 의복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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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불린다. 이들은 대저 벌레와 유사한 무리인데 중국에 거처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 복색(服色)에 따라서 이름을 지어준 것이고, 자기들끼리는 ‘합치(盍稚)’라고 부른다. 각자 왕과 제후를 갖고 있고 중국에서 책봉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근자에는 건안(建安) 연간(196~220)에 흥국저(興國氐)주 100
각주 100)
興國氐: “興國의 氐”라는 의미. 興國은 감숙 秦安縣 東北의 지명. 後漢 初平연간(190~193)에 陝西 略陽의 氐族 수령인 阿貴가 ‘興國氐王’을 자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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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왕 아귀(阿貴)와 백항저(白項氐)주 011
각주 011)
白項氐: “白項의 氐”라는 의미이겠지만, 白項이라는 지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역시 앞에서 언급된 氐族들 가운데 白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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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왕 천만(千萬)이 각자 부락민 만여 명을 이끌고 16년(211)까지 마초(馬超) 주 012
각주 012)
馬超 (?~222): 字는 孟起, 扶風 茂陵人. 初平 3년(192) 그의 부친 馬騰이 征西將軍으로 봉해져 郿縣에 주둔하였다. 후일 馬騰은 長安을 습격하였지만 패배하여 西涼으로 도주하였다. 建安 16년(211) 曹操가 漢中의 張魯를 토벌하러 군대를 동원하자 關西의 諸將들이 曹操의 의도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고, 마침내 馬超와 韓遂 등이 起兵하여 저항하였다. 양측 군대가 潼關을 두고 대치했지만 曹操의 이간책이 성공하여 關西軍이 大敗하고 馬超는 涼州로 도주하였다. 馬超는 패전후 전열을 다시 정비하여 隴西 일대를 공격한 뒤 張魯에게 투항하였다. 曹操는 建安17년(212) 그의 부친 馬騰을 살해하고 三族을 멸하다. 따라서 『三國志演義』에서 曹操가 먼저 馬騰을 죽였기 때문에 馬超가 起兵하여 부친의 복수를 한 것처럼 묘사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建安19년(214) 張魯의 部將 楊昂의 참소로 인하여 馬超는 다시 劉備에게 투항하였는데, 마침 成都를 공략할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는 先鋒이 될 것을 자청하였다. 劉備가 稱帝한 뒤 馬超를 驃騎將軍으로 배수하고 涼州를 관할토록 하였으며, 斄鄉侯로 進封하였다. 蜀漢 章武2년(222) 馬超는 향년 47세의 나이로 病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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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따라 난리를 일으켰다. 마초가 파멸된 뒤 아귀하후연(夏侯淵) 주 013
각주 013)
夏侯淵 (?~219): 後漢末 沛國 譙縣 (현재 安徽 亳州)人. 曹操가 기병할 때 그를 도와 陳留·潁川太守가 되었고, 官渡之戰 당시 軍糧의 수송에 공을 세웠다. 建安11년(206) 叛將 昌狶를 擊殺하여 공을 세우고 護軍將軍과 博昌亭侯로 봉해졌다. 19년(214) 馬超와 韓遂 등이 이끄는 羌氐部落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20년(215) 曹操가 漢中의 張魯를 격파한 뒤, 夏侯淵은 征西將軍·留守漢中으로 봉하였다. 劉備의 군대와 맞서 싸우다가 24년(219) 黃忠에 의해 定軍山(현재 섬서 勉縣 동남)에서 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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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공격당하여 멸망했고, 천만은 서남쪽으로 에 들어갔는데 그 부락민들이 따라갈 수 없어서 모두 항복했다. 나라에서는 그 같은 상황 속에서 양쪽 눈치를 보던 자들을 나누어 이주시켜서 부풍(扶風) [군] 주 014
각주 014)
扶風: 郡名. 원래 漢代 右扶風으로 치소는 陝西 咸陽縣 東쪽에 위치. 後漢代에 陝西 興平縣 東南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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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양(美陽)[현] 주 015
각주 015)
美陽: 縣名. 治所는 현재 陝西 武功縣 西南方에 위치해 있었다. 北周 때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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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하였으니, 오늘날 안이(安夷)·무이(撫夷) 두 부(部)주 016
각주 016)
安夷·撫夷: 安夷는 美陽에, 撫夷는 淳化縣 西北에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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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호군(護軍)주 017
각주 017)
護軍: 秦代에 처음 두어진 軍官으로서 군대의 감독관에 해당하는 직무를 수행. 漢代에는 護軍將軍이라는 직책을 두어 군대를 督領케 하였고, 大司馬·大將軍 등은 護軍都尉를 두어 諸部를 감독시키기도 하였다. 때로는 단독으로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後漢末 曹操는 關中護軍을 두어 關中에 주둔한 여러 장군들의 軍馬를 통솔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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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할하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 원래부터 선한 길을 지켰던 자들은 천수(天水) 주 018
각주 018)
天水: 『晉書』 卷14 「地理志」에 의하면 天水郡은 秦州에 속했고 漢武帝가 初置하였다. 明帝가 漢陽으로 개명했으나 晉에서 다시 天水라고 이름하였다. 上邽, 冀 (秦州 앞에 있는 州都), 始昌, 新陽, 顯新 (漢代 顯親県), 成紀 등 6県을 관할하였으며, 8, 500호가 거주했다고 한다. 현재 감숙성 동남쪽에 위치한 天水市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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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안(南安) 주 019
각주 019)
南安: 『晉書』 卷14 「地理志」에 의하면 漢代에 南安郡이 두어졌고 秦州에 속했다. 獂道, 新興, 中陶 등 3縣을 관할했고, 인구는 4, 300호. 현재 隴西縣 東北 渭水의 북쪽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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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경계 지역에 남아있으니, 오늘날 광위군(廣魏郡) 주 101
각주 101)
廣魏郡: 『晉書』 卷14 「地理志」에 의하면 秦州에 속했던 略陽郡은 본래 명칭이 廣魏였는데, 泰始 연간(265~274)에 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한다. 臨渭, 平襄, 略陽, 清水 등 4縣을 관할했고, 인구는 9, 320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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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할하는 것이 이들이다. 그 풍속을 보면 언어는 중국과 같지 아니하고, 강 및 잡호(雜胡)들과 동일하다. 각자 성을 갖고 있으며 그 성은 중국의 성과 마찬가지이다.주 021
각주 021)
各自有姓,姓如中國之姓: 氐人들이 漢族의 성씨를 가졌던 예는 數多하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楊氏나 梁氏처럼 漢族의 姓을 받아들인 경우, 姜氏나 强氏처럼 羌姓과 유관한 것, 혹은 蒲氏처럼 자기들이 창시한 것 등이 있었다. 蒲氏는 후일 苻로 바뀌어지기도 했다. 黃烈 1987: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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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복은 푸른색과 진홍색을 좋아하며 민간에서는 옷감(布)를 짜고 농사에 능하다. 돼지, 소, 말, 나귀, 노새 등을 기른다. 그 부인이 시집을 갈 때에는 임로(衽露)를 입는데, 그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방식은 강족의 것과 비슷하다. 임로는 중국의 포(袍)와 비슷하다. 모두 편발(編髮)주 022
각주 022)
編髮: 즉 辮髮. 머리카락을 땋아서 늘어뜨리는 髮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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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한다. 중국어를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중국인과 섞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들] 부락으로 돌아가면 곧 스스로 저족의 말을 사용한다. 그 혼인방식은 강족과 유사하다. 이들은 대저 과거에 소위 서융(西戎)이라 불리던 사람들로서, 가(街) 주 023
각주 023)
街: 본문 바로 다음에도 武都·陰平 등과 함께 언급되는 지명인데, 이는 아마 邽(규)의 誤謬인 것으로 추측된다. 邽는 天水郡에 속한 縣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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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冀)·원도(豲道) 주 024
각주 024)
冀·豲道: 冀는 天水郡에, 豲道는 南安郡에 속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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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지에 있다. 지금은 비록 모두 군국(郡國)의 통제를 받고 있지만, 전에는 각자 왕과 제후가 그 부락들 사이에 있었다. 또한 옛날의 무도(武都) 주 025
각주 025)
武都: 『晉書』 卷14 「地理志」에 의하면 武都郡은 秦州에 속했고 下辯, 河池, 沮, 武都, 故道 등 5縣을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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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과 음평(陰平) 주 026
각주 026)
陰平: 『晉書』 卷14 「地理志」에 의하면 陰平郡은 秦州에 속했고 泰始 연간(265~274)에 두어졌다. 陰平, 平広 2현을 관할했고, 주민은 3, 000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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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街) 부근에도 역시 만여 개의 락(落)주 027
각주 027)
落: 魏晉南北朝 시대의 사료에 등장하는 落·邑落·部 등의 용어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회단위를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異論이 있을 수 있다. 內田吟風(1975: 33~35)은 落이 2~3개의 帳으로 구성된 최소의 유목단위로서 20餘口로 이루어졌으며, 이 落들이 다시 모여 이루어진 邑落은 인구 수백명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더 큰 단위의 部族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黃烈(1987: 240~251)도 기본적으로 이와 유사한 견해를 표방하였는데, 다만 落의 규모를 평균 10口 정도로 추산한 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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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

  • 각주 001)
    『魏略』은 陝西 京兆 출신으로 魏의 郎中을 역임했던 魚豢이 편찬한 魏나라의 역사서이다. 『舊唐書』 「經籍志」는 『魏略』이 38卷으로 되어 있다고 했고, 『新唐書』 「藝文志」는 『魏略』이 모두 50卷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는 散佚되어 그 구체적인 내용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陳壽의 『三國志』에 裴松之가 붙인 注, 『史記索隱』, 『前·後漢書』의 注, 『文選』의 注, 『北堂書鈔』·『藝文類聚』·『太平御覽』 등에 그 佚文이 보이며, 일찍이 張鵬一은 이들 기사를 수집하여 『魏略輯本』 25卷(1924年刊)을 편찬하였다.
    唐代의 저명한 史家 劉知幾(661~721)는 『史通』에서 “과거 魏나라 때에 京兆사람 魚豢이 『魏略』을 私撰했는데, 그 내용은 [魏] 明帝(227~239)에서 끝난다.”라고 적고, 『魏略』의 찬술 연대를 明帝 末年인 239년부터 魏가 망하는 265년 사이에 저작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魏略』의 기사들 가운데에는 高貴鄕公의 즉위(254)에 관한 기사 및 甘露2년(257)의 기사는 물론, 魏나라 최후의 황제인 陳留王 奐의 晩年에 일어난 기사도 포함되어 있어, 실제 찬술된 연대는 晉 武帝 太康(280~89) 年間일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魏略』은 그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魏나라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지만, 내용은 三國시대의 魏에만 한정되지 않고 曹操가 활동을 시작한 後漢 靈帝(167~189) 말년까지 소급되고 있고, 실제로 魏 건국 이전에 관한 기록이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후한말 曹操와 관련이 깊던 인물은 물론, 그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들에 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隋書』 「經籍志」는 魚豢의 저술로서 『典略』이라는 책이 언급되어 있고 그것이 89卷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여, 38卷 혹은 50卷本의 『魏略』이 사실은 『典略』 속에 포함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 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伊藤德男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全海宗도 『魏略』과 『典略』이라는 이름으로 잔존한 기사들을 상세히 비교 검토한 결과 양자가 서로 다른 것으로 추정했다.
    현존하는 『魏略』의 기사들 가운데 아래에서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부분은 『三國志』 「魏書」에 裴松之가 注를 붙이면서 『魏略』 「西戎傳」을 상당 부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를 『魏略』을 일견해 보면 과거 『史記』나 『漢書』에 보이는 西域에 관한 묘사와 유사한 부분도 많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정보와 사실들이 기록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大秦에 관한 기사는 전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으며, 『後漢書』 「西域傳」의 大秦에 관한 묘사와 字句까지 일치하는 부분이 보인다. 余太山과 같은 학자는 이 점에 주목하여 裴松之(372~451)와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范曄(398~445)이 『後漢書』 「西域傳」을 집필하면서 魚豢의 『魏略』 가운데 大秦에 관한 기사를 인용·보충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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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氐: 고대 종족명. 殷周시대에서 남북조에 이르는 동안 지금의 섬서, 감숙, 사천 交界에 거주했다. 전한 초가에 이들은 각자 수령을 갖고 있었는데, 한무제 元鼎6년(전111) 氐王을 죽이고 武都郡을 설치한 것이 이들에 대한 군현지배의 시작이었다. 그 뒤 元封3년(전108) 일부 氐人들이 주천 방면으로 이주했고, 漢 獻帝 建安24년(219) 5만명에 달하는 氐人들이 扶風·天水 등지에서 한인들과 잡거하게 되었다. 남북조 시대에 들어가 氐人 苻堅이 前秦을 세우고, 呂氏가 後凉을 세우고, 楊氏가 九池國을 세우면서, 많은 수의 저인들이 한족문화를 받아들이고 한족의 언어와 의복을 채용하기도 했다. 농업을 위주로 하지만 목축도 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氐族의 기원과 형성 및 분포에 대해서는 黃烈 1987: 114~16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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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益州: 전109년 한무제에 의해서 두어진 郡으로서, 治所는 滇池였다. 오늘날 雲南 晉寧 동쪽에 위치. 益州郡과 益州는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후자는 한무제가 전106년에 전국에 설치한 13개 刺史部 가운데 하나로서 四川지역을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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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武都郡: 전118년 한무제에 의해서 설치된 郡으로서, 치소는 甘肅지방의 街州 成縣의 서쪽 80리 되는 지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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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福祿: 감숙지방 肅州에 두어졌던 酒泉郡 휘하의 縣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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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汧: 汧縣은 隴州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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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隴: 漢代에 두어졌으며 후한대에는 凉州刺史의 치소가 위치. 晉代에 폐지되었다. 故城은 현재 감숙 淸水縣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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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槃瓠: 盤護라고도 불리우는 신화 속의 인물. 應劭의 『風俗通』에 처음 기재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상고시대에 高辛氏의 딸이 槃瓠라는 개(犬)와 혼인하여 6남6녀를 출생하였고, 이들 자기들끼리 婚配되어 자손이 번성하게 되어 마침내 “長沙·武陵의 蠻”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後漢書』 卷86 「南蠻西南夷列傳」에는 『魏略』을 인용하여 “高辛氏에게는 늙은 부인이 하나 있었는데 王室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녀가 귀가 아파서 귀를 후벼보니 크기가 누에고치만한 물건이 나왔다. 부인은 그것을 표주박(瓠) 속에 넣어두고 사발(槃)로 그것을 덮었는데, 얼마 안있어 개(犬)로 변하였고 그 무늬가 五色을 띄었다. 그런 연유로 반호(槃瓠)라고 이름하였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漢族이 盤古神話를 믿는 것처럼 중국 서남방의 소수민족들도 이와 유사한 신화를 갖고 있는데, 瑤族이나 畬族은 모두 槃瓠를 자기들의 始祖로 여긴다. 이러한 신화가 과거 이들의 토템신앙과 유관하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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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青氐·白氐·蚺氐: 이는 氐族을 집단별로 어떤 색깔의 옷을 즐겨입는가를 기준으로 붙인 이름이다. 다만 蚺은 큰 뱀의 일종인데 (唐 劉恂의 『嶺表錄異』 卷下에는 “蚺蛇. 큰 것은 五六丈이고 둘레가 四五尺이다. 그 다음으로 큰 것 역시 三四丈보다 더 작지는 않으며 둘레도 그러하다. 몸에 반점이 있어 마치 비단으로 무늬를 놓은 것 같다.”라는 설명이 보인다), 이는 柔然을 蠕蠕이라 부른 것처럼 고대 중국인들이 주변의 민족들을 비하하기 위하여 사용한 글자에 불과하다. 黃烈(1987: 133~134)은 이 글자가 원래는 冉이었을 것이고, 冉은 丹의 誤字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즉 蚺氐는 원래 丹氐를 지칭한 것이었고, 이들은 赤色의 의복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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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0)
    興國氐: “興國의 氐”라는 의미. 興國은 감숙 秦安縣 東北의 지명. 後漢 初平연간(190~193)에 陝西 略陽의 氐族 수령인 阿貴가 ‘興國氐王’을 자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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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白項氐: “白項의 氐”라는 의미이겠지만, 白項이라는 지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역시 앞에서 언급된 氐族들 가운데 白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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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馬超 (?~222): 字는 孟起, 扶風 茂陵人. 初平 3년(192) 그의 부친 馬騰이 征西將軍으로 봉해져 郿縣에 주둔하였다. 후일 馬騰은 長安을 습격하였지만 패배하여 西涼으로 도주하였다. 建安 16년(211) 曹操가 漢中의 張魯를 토벌하러 군대를 동원하자 關西의 諸將들이 曹操의 의도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고, 마침내 馬超와 韓遂 등이 起兵하여 저항하였다. 양측 군대가 潼關을 두고 대치했지만 曹操의 이간책이 성공하여 關西軍이 大敗하고 馬超는 涼州로 도주하였다. 馬超는 패전후 전열을 다시 정비하여 隴西 일대를 공격한 뒤 張魯에게 투항하였다. 曹操는 建安17년(212) 그의 부친 馬騰을 살해하고 三族을 멸하다. 따라서 『三國志演義』에서 曹操가 먼저 馬騰을 죽였기 때문에 馬超가 起兵하여 부친의 복수를 한 것처럼 묘사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建安19년(214) 張魯의 部將 楊昂의 참소로 인하여 馬超는 다시 劉備에게 투항하였는데, 마침 成都를 공략할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는 先鋒이 될 것을 자청하였다. 劉備가 稱帝한 뒤 馬超를 驃騎將軍으로 배수하고 涼州를 관할토록 하였으며, 斄鄉侯로 進封하였다. 蜀漢 章武2년(222) 馬超는 향년 47세의 나이로 病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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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夏侯淵 (?~219): 後漢末 沛國 譙縣 (현재 安徽 亳州)人. 曹操가 기병할 때 그를 도와 陳留·潁川太守가 되었고, 官渡之戰 당시 軍糧의 수송에 공을 세웠다. 建安11년(206) 叛將 昌狶를 擊殺하여 공을 세우고 護軍將軍과 博昌亭侯로 봉해졌다. 19년(214) 馬超와 韓遂 등이 이끄는 羌氐部落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20년(215) 曹操가 漢中의 張魯를 격파한 뒤, 夏侯淵은 征西將軍·留守漢中으로 봉하였다. 劉備의 군대와 맞서 싸우다가 24년(219) 黃忠에 의해 定軍山(현재 섬서 勉縣 동남)에서 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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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扶風: 郡名. 원래 漢代 右扶風으로 치소는 陝西 咸陽縣 東쪽에 위치. 後漢代에 陝西 興平縣 東南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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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美陽: 縣名. 治所는 현재 陝西 武功縣 西南方에 위치해 있었다. 北周 때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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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安夷·撫夷: 安夷는 美陽에, 撫夷는 淳化縣 西北에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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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護軍: 秦代에 처음 두어진 軍官으로서 군대의 감독관에 해당하는 직무를 수행. 漢代에는 護軍將軍이라는 직책을 두어 군대를 督領케 하였고, 大司馬·大將軍 등은 護軍都尉를 두어 諸部를 감독시키기도 하였다. 때로는 단독으로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後漢末 曹操는 關中護軍을 두어 關中에 주둔한 여러 장군들의 軍馬를 통솔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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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天水: 『晉書』 卷14 「地理志」에 의하면 天水郡은 秦州에 속했고 漢武帝가 初置하였다. 明帝가 漢陽으로 개명했으나 晉에서 다시 天水라고 이름하였다. 上邽, 冀 (秦州 앞에 있는 州都), 始昌, 新陽, 顯新 (漢代 顯親県), 成紀 등 6県을 관할하였으며, 8, 500호가 거주했다고 한다. 현재 감숙성 동남쪽에 위치한 天水市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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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南安: 『晉書』 卷14 「地理志」에 의하면 漢代에 南安郡이 두어졌고 秦州에 속했다. 獂道, 新興, 中陶 등 3縣을 관할했고, 인구는 4, 300호. 현재 隴西縣 東北 渭水의 북쪽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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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1)
    廣魏郡: 『晉書』 卷14 「地理志」에 의하면 秦州에 속했던 略陽郡은 본래 명칭이 廣魏였는데, 泰始 연간(265~274)에 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한다. 臨渭, 平襄, 略陽, 清水 등 4縣을 관할했고, 인구는 9, 320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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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各自有姓,姓如中國之姓: 氐人들이 漢族의 성씨를 가졌던 예는 數多하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楊氏나 梁氏처럼 漢族의 姓을 받아들인 경우, 姜氏나 强氏처럼 羌姓과 유관한 것, 혹은 蒲氏처럼 자기들이 창시한 것 등이 있었다. 蒲氏는 후일 苻로 바뀌어지기도 했다. 黃烈 1987: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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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編髮: 즉 辮髮. 머리카락을 땋아서 늘어뜨리는 髮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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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街: 본문 바로 다음에도 武都·陰平 등과 함께 언급되는 지명인데, 이는 아마 邽(규)의 誤謬인 것으로 추측된다. 邽는 天水郡에 속한 縣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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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冀·豲道: 冀는 天水郡에, 豲道는 南安郡에 속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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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武都: 『晉書』 卷14 「地理志」에 의하면 武都郡은 秦州에 속했고 下辯, 河池, 沮, 武都, 故道 등 5縣을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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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陰平: 『晉書』 卷14 「地理志」에 의하면 陰平郡은 秦州에 속했고 泰始 연간(265~274)에 두어졌다. 陰平, 平広 2현을 관할했고, 주민은 3, 000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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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落: 魏晉南北朝 시대의 사료에 등장하는 落·邑落·部 등의 용어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회단위를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異論이 있을 수 있다. 內田吟風(1975: 33~35)은 落이 2~3개의 帳으로 구성된 최소의 유목단위로서 20餘口로 이루어졌으며, 이 落들이 다시 모여 이루어진 邑落은 인구 수백명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더 큰 단위의 部族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黃烈(1987: 240~251)도 기본적으로 이와 유사한 견해를 표방하였는데, 다만 落의 규모를 평균 10口 정도로 추산한 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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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배송지, 아귀(阿貴), 천만(千萬), 마초(馬超), 마초, 아귀, 하후연(夏侯淵), 천만
지명
한나라, 익주(益州), 무도군(武都郡), 복록(福祿), 견(汧), 롱(隴), , 부풍(扶風) [군], 미양(美陽)[현], 천수(天水), 남안(南安), 광위군(廣魏郡), 가(街), 기(冀), 원도(豲道), 무도(武都), 음평(陰平), 가(街)
서명
위략(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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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인(氐人)의 기원과 풍속에 대한 설명 자료번호 : jo.k_0004_0030_005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