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와 위나라가 서로 사신을 파견함
[위(魏)
소제(少帝)
주 001
비미호(卑彌呼)가 마침내 죽자주 024크게 무덤을 만들었는데, 주 025지름이 1백여 보(步)였고주 026순장(殉葬)된 자는 노비(奴婢) 1백여 명이었다. 새롭게 남자 왕을 세웠으나 국중(國中)의 사람들이 승복(承服)하지 않아서 다시 서로 주살(誅殺)하여, 당시 피살된 사람의 수가 1천 명이었다. 다시 비미호 종실(宗室)의 여자(宗女)인 일여(壹與) 주 027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녀는] 나이 13세에 왕이 되었지만, 국중(國中)은 마침내 안정되었다. [장]정(張政) 등이 격문을 써서 일여에게 알려서 깨우쳤다. [일여는] 왜의 대부(大夫)인 솔선중랑장 액사구(掖邪狗) 등 20인으로 하여금주 028 장정 등을 송환시켰고, 이때 [액사구 등이] 대(臺)주 029에 도착하여 남녀 생구(生口) 30인을 헌상(獻上)하고, 백주(白珠)주 0305천 개, 공청대구주(孔靑大句珠)주 0312매(枚) 그리고 이문잡금(異文雜錦)주 03220필을 공물(貢物)로 바쳤다.
-이하 이 열전 전체에 대한 논찬 부분은 이미 국사편찬위원회, 『中國正史朝鮮傳譯註』 1, 신서원, 2004(1990 초판)에 역주되어 있으므로 생략하지만, 여기에 달린 배송지의 주는 번역되지 않아 역주한다. 아래의 내용은 모두 배송지가 인용한 『魏略』 「西戎傳」을 역주한 것이다. -
각주 001)
] 정시(正始) 원년(240)에 [대방군] 태수 궁준(弓遵)
주 002魏 少帝 曹芳(232~274;재위 239~254)은 明帝(재위 226~239) 遭叡의 양자로서 字는 蘭卿이다. 명제 靑龍 3년(235)에 齊王에 책봉되었고, 明帝가 景初 3년(239) 정월에 臨終이 가까워지자, 실권자의 하나였던 司馬懿의 묵인으로 곧바로 皇太子에 책봉되고, 이어 明帝가 죽은 후에 8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다음해(240) 정월에 正始로 改元하였다. 이후 曹爽과 司馬懿의 輔政을 받았다. 曹爽은 名士 何晏 등을 등용하여 玄學淸談의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후세에 와서 ‘正始의 風’이란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正始 10년(249) 정월에 御駕가 明帝의 高平陵을 拜謁하러 갈 때, 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켜서 曹爽을 죽임으로써 司馬氏는 마침내 위의 정치를 오로지하게 되었다. 嘉平 6년(254)에는 少帝 曹芳도 司馬師에 의해 廢位되어 내몰려서 다시 이전의 齊王에 책봉되었다. 265년에 司馬昭에 의해 西晉王朝가 성립하자, 제왕 조방은 邵陵縣公으로 爵位가 내려갔고, 죽은 후에는 諡號를 厲公이라 하였다. 史書에서는 대체로 少帝라 칭한다.
각주 002)
이 건충교위(建忠校尉)주 003
제준(梯儁) 등으로 하여금 조서(詔書)와 인수(印綬)주 004를 받들고 왜국(倭國)에 도착하여 왜왕(倭王)에게 수여하였고, 아울러 조서(詔書)를 가져와서 금(金), 비단(帛), 비단으로 짠 융단(錦罽), 칼(刀), 거울(鏡) 그리고 채물(采物)주 005을 하사하였다. 왜왕은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은조(恩詔)주 006에 감사하는 답서(答書)의 표문(表文)주 007을 올렸다. [적시] 4년(243)주 008에도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大夫) 이성기(伊聲耆)와 액사구(掖邪狗)
주 009등 8인을 파견하여, 생구(生口), 왜금(倭錦), 주 010강청겸(絳靑縑), 주 011면의(緜衣), 주 012백포(帛布), 주 013단목(丹木), 주 014부(𤝔), 주 015단궁시(短弓矢)주 016를 바쳤다. 액사구(掖邪狗) 등은 솔선중랑장(率先中郞長)의 인수(印綬)를 똑같이 하사받았다. 그 6년(245)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왜의 난승미(難升米)에게 황당(黃幢)주 017을 하사하고, [그것을 대방]군을 통해서 [그것을] 수여하였다. 그 8년(247)에 [대방군의] 태수인 왕기(王頎)
주 018弓遵:帶方郡 太守로 劉夏의 후임일 것이다. 244년에 曹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수도인 丸都城을 함락하고, 이후 曹魏郡이 고구려 東川王을 추격할 때, 그는 樂浪郡 太守인 劉茂와 함께 東川王을 찾으러 東濊로 들어간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이후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과 토착 세력이 충돌하면서, 246년경에 그 남부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가 帶方郡의 崎離營(지금의 황해도 平山)을 공략하자, 이를 진압하려고 출동한 帶方郡 太守 弓遵은 韓軍과의 격전 끝에 戰死하였다(李基白·李基東, 1982:123~135). 그가 죽고 난 후인 247년에 王頎가 그 후임으로 대방태수로 부임하였는데, 王頎는 正始 6년의 고구려 재정벌 때 왕인 位宮을 쫓아 肅愼氏의 南界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毌丘儉傳」에 보인다.
각주 018)
가 [그] 관부(官府)에 도착하였다. 왜의 여왕 비미호(卑彌呼)는 구노국(狗奴國)
주 019王頎는 원래 玄菟郡 太守였다. 244~245년에 曹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이 高句麗 東川王을 칠 때, 毌丘儉의 지휘 아래에 있던 王頎는 당시 8萬 戶란 國勢를 자랑하고 있던 夫餘에 간 일이 있는데, 이때 王頎는 부여의 權臣인 大使 位居의 지시를 받은 犬加(狗加)로부터 환영을 받고, 軍糧도 제공받았다. 245년 毌丘儉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과 토착 세력이 충돌하게 된다. 그리하여 246년경에 한반도 남부의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가 帶方郡의 崎離營(지금의 황해도 平山)을 공략하자, 이를 진압하려고 충동한 帶方郡 太守 弓遵은 韓軍과의 격전 끝에 戰死하였다. 바로 弓遵이 戰死한 후,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247년에 그의 후임으로 帶方郡 太守에 임명된 사람이 王頎이다. 王頎는 이후 本國의 명령으로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의 연합세력에 대한 진압에 나선다. 그 결과 韓那奚 등 수십 國이 그를 위시한 중국 郡縣 당국에 항복하여(이 내용은 『三國志』권4 「三少帝紀」 〈正始七年(246) 春二月條와 夏五月條〉:121에 기재되어 있다.), 그동안 그들이 뺏은 樂浪郡 변경지방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李基白·李基東, 1982:78~135).
각주 019)
의 남왕(男王)인 비미궁호(卑彌弓呼)
주 020狗奴國은 본문 윗부분에서 “其南有狗奴國, 男子爲王, 其官有狗古智卑狗, 不屬女王(그 (여왕국) 남쪽에는 狗奴國이 있는데, 그 관직으로는 狗古智卑狗가 있고, 여왕에 소속되지 않았다.)”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왕국의 남쪽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보다 동쪽에 위치한 이세만 연안지역의 세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이 지역은 畿內地域과 마찬가지로 銅鐸을 제의의 심벌로 삼았던 지역이다(三遠式 銅鐸). 그러나 동경이 새롭게 유입되는 시기에 이세만 지역에서는 후한대의 畵文帶神獸鏡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240년경에 邪馬臺國과 狗奴國이 분쟁상태에 있었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각주 020)
와 본래부터 불화(不和)하여, [그녀는] 왜인 재사(載斯)와 오월(烏越) 등을 [대방]군(帶方郡)에 파견하여, 서로 공격한 상황을 보고하였다. [왕기(王頎)가] 새조연사(塞曹掾史)주 021인 장정(張政) 등을 파견하고, 아울러 조서(詔書)와 황당(黃幢)을 보내고, 주 022
난승미(難升米)에게 [그 일을 처리하는 관직을] 수여하고, 격문(檄文)주 023“卑彌弓呼”는 卑弓彌呼(히코미코)의 誤記로 보는 견해가 있다. 彦存(命)의 略稱으로, 姬命(尊)의 약칭인 卑彌呼(히미코)에 대응하는 듯하다. 그런데 內藤虎次郞은 卑彌弓呼素까지를 人名으로 보고, 呼素(코소)는 己曾, 社, 許會, 語曾과 같은 말이며, 女性을 比賣語曾이라 한 것에 대하여 卑彌弓을 男性이란 의미일 수 있다고 하고, 呼素를 나라를 世襲하는 酋長에 해당시키고 있다. 또 山田孝雄은 狗奴(구노)國은 毛野(게노)國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豊城入彦命의 자손일 것이라고 한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53). 그러나 呼의 상고음과 중고음이 ‘호’에 가깝다고 하고 ‘彌呼’를 ‘미코’로 읽어 존칭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森浩一, 1985:157~160).
각주 023)
을 만들어서 알리고 깨닫도록 하였다.檄文:특별한 상황에서 軍兵을 모집하거나, 사람들을 고무하거나, 또는 적군에게 알려서 깨우치거나 詰責하기 위하여 발송하는 글발을 말한다. 또는 급히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글발을 말한다. 『釋名』 釋書契에서는 “檄은 激으로, 下官이 上官을 激迎하는 데 쓰는 글이다.”라고 하였고, 『文心雕龍』 격이편에서는 “檄은 皦이다. 바깥에 알려 드러내고, 분명하게 아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檄은 戰國時代부터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에게 告諭하거나 관리를 부르거나 적을 위협하기 위한 포고문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漢書』 「司馬相如傳」에는 그가 쓴 파촉에 알리는 격문이 실려 있는데, 첫머리에 “파촉태수에게 고한다.”라고 하였고, 끝에는 “檄이 이르면 곧 縣道에 내려, 모두 폐하의 뜻을 알도록 하라.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여, 명령을 하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森浩一, 1985:152~153).
비미호(卑彌呼)가 마침내 죽자주 024크게 무덤을 만들었는데, 주 025지름이 1백여 보(步)였고주 026순장(殉葬)된 자는 노비(奴婢) 1백여 명이었다. 새롭게 남자 왕을 세웠으나 국중(國中)의 사람들이 승복(承服)하지 않아서 다시 서로 주살(誅殺)하여, 당시 피살된 사람의 수가 1천 명이었다. 다시 비미호 종실(宗室)의 여자(宗女)인 일여(壹與) 주 027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녀는] 나이 13세에 왕이 되었지만, 국중(國中)은 마침내 안정되었다. [장]정(張政) 등이 격문을 써서 일여에게 알려서 깨우쳤다. [일여는] 왜의 대부(大夫)인 솔선중랑장 액사구(掖邪狗) 등 20인으로 하여금주 028 장정 등을 송환시켰고, 이때 [액사구 등이] 대(臺)주 029에 도착하여 남녀 생구(生口) 30인을 헌상(獻上)하고, 백주(白珠)주 0305천 개, 공청대구주(孔靑大句珠)주 0312매(枚) 그리고 이문잡금(異文雜錦)주 03220필을 공물(貢物)로 바쳤다.
-이하 이 열전 전체에 대한 논찬 부분은 이미 국사편찬위원회, 『中國正史朝鮮傳譯註』 1, 신서원, 2004(1990 초판)에 역주되어 있으므로 생략하지만, 여기에 달린 배송지의 주는 번역되지 않아 역주한다. 아래의 내용은 모두 배송지가 인용한 『魏略』 「西戎傳」을 역주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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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魏 少帝 曹芳(232~274;재위 239~254)은 明帝(재위 226~239) 遭叡의 양자로서 字는 蘭卿이다. 명제 靑龍 3년(235)에 齊王에 책봉되었고, 明帝가 景初 3년(239) 정월에 臨終이 가까워지자, 실권자의 하나였던 司馬懿의 묵인으로 곧바로 皇太子에 책봉되고, 이어 明帝가 죽은 후에 8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다음해(240) 정월에 正始로 改元하였다. 이후 曹爽과 司馬懿의 輔政을 받았다. 曹爽은 名士 何晏 등을 등용하여 玄學淸談의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후세에 와서 ‘正始의 風’이란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正始 10년(249) 정월에 御駕가 明帝의 高平陵을 拜謁하러 갈 때, 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켜서 曹爽을 죽임으로써 司馬氏는 마침내 위의 정치를 오로지하게 되었다. 嘉平 6년(254)에는 少帝 曹芳도 司馬師에 의해 廢位되어 내몰려서 다시 이전의 齊王에 책봉되었다. 265년에 司馬昭에 의해 西晉王朝가 성립하자, 제왕 조방은 邵陵縣公으로 爵位가 내려갔고, 죽은 후에는 諡號를 厲公이라 하였다. 史書에서는 대체로 少帝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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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弓遵:帶方郡 太守로 劉夏의 후임일 것이다. 244년에 曹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수도인 丸都城을 함락하고, 이후 曹魏郡이 고구려 東川王을 추격할 때, 그는 樂浪郡 太守인 劉茂와 함께 東川王을 찾으러 東濊로 들어간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이후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과 토착 세력이 충돌하면서, 246년경에 그 남부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가 帶方郡의 崎離營(지금의 황해도 平山)을 공략하자, 이를 진압하려고 출동한 帶方郡 太守 弓遵은 韓軍과의 격전 끝에 戰死하였다(李基白·李基東, 1982:123~135). 그가 죽고 난 후인 247년에 王頎가 그 후임으로 대방태수로 부임하였는데, 王頎는 正始 6년의 고구려 재정벌 때 왕인 位宮을 쫓아 肅愼氏의 南界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毌丘儉傳」에 보인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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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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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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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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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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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8)
王頎는 원래 玄菟郡 太守였다. 244~245년에 曹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이 高句麗 東川王을 칠 때, 毌丘儉의 지휘 아래에 있던 王頎는 당시 8萬 戶란 國勢를 자랑하고 있던 夫餘에 간 일이 있는데, 이때 王頎는 부여의 權臣인 大使 位居의 지시를 받은 犬加(狗加)로부터 환영을 받고, 軍糧도 제공받았다. 245년 毌丘儉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과 토착 세력이 충돌하게 된다. 그리하여 246년경에 한반도 남부의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가 帶方郡의 崎離營(지금의 황해도 平山)을 공략하자, 이를 진압하려고 충동한 帶方郡 太守 弓遵은 韓軍과의 격전 끝에 戰死하였다. 바로 弓遵이 戰死한 후,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247년에 그의 후임으로 帶方郡 太守에 임명된 사람이 王頎이다. 王頎는 이후 本國의 명령으로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의 연합세력에 대한 진압에 나선다. 그 결과 韓那奚 등 수십 國이 그를 위시한 중국 郡縣 당국에 항복하여(이 내용은 『三國志』권4 「三少帝紀」 〈正始七年(246) 春二月條와 夏五月條〉:121에 기재되어 있다.), 그동안 그들이 뺏은 樂浪郡 변경지방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李基白·李基東, 1982:78~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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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9)
狗奴國은 본문 윗부분에서 “其南有狗奴國, 男子爲王, 其官有狗古智卑狗, 不屬女王(그 (여왕국) 남쪽에는 狗奴國이 있는데, 그 관직으로는 狗古智卑狗가 있고, 여왕에 소속되지 않았다.)”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왕국의 남쪽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보다 동쪽에 위치한 이세만 연안지역의 세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이 지역은 畿內地域과 마찬가지로 銅鐸을 제의의 심벌로 삼았던 지역이다(三遠式 銅鐸). 그러나 동경이 새롭게 유입되는 시기에 이세만 지역에서는 후한대의 畵文帶神獸鏡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240년경에 邪馬臺國과 狗奴國이 분쟁상태에 있었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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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0)
“卑彌弓呼”는 卑弓彌呼(히코미코)의 誤記로 보는 견해가 있다. 彦存(命)의 略稱으로, 姬命(尊)의 약칭인 卑彌呼(히미코)에 대응하는 듯하다. 그런데 內藤虎次郞은 卑彌弓呼素까지를 人名으로 보고, 呼素(코소)는 己曾, 社, 許會, 語曾과 같은 말이며, 女性을 比賣語曾이라 한 것에 대하여 卑彌弓을 男性이란 의미일 수 있다고 하고, 呼素를 나라를 世襲하는 酋長에 해당시키고 있다. 또 山田孝雄은 狗奴(구노)國은 毛野(게노)國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豊城入彦命의 자손일 것이라고 한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53). 그러나 呼의 상고음과 중고음이 ‘호’에 가깝다고 하고 ‘彌呼’를 ‘미코’로 읽어 존칭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森浩一, 1985:157~160).
- 각주 021)
- 각주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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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3)
檄文:특별한 상황에서 軍兵을 모집하거나, 사람들을 고무하거나, 또는 적군에게 알려서 깨우치거나 詰責하기 위하여 발송하는 글발을 말한다. 또는 급히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글발을 말한다. 『釋名』 釋書契에서는 “檄은 激으로, 下官이 上官을 激迎하는 데 쓰는 글이다.”라고 하였고, 『文心雕龍』 격이편에서는 “檄은 皦이다. 바깥에 알려 드러내고, 분명하게 아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檄은 戰國時代부터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에게 告諭하거나 관리를 부르거나 적을 위협하기 위한 포고문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漢書』 「司馬相如傳」에는 그가 쓴 파촉에 알리는 격문이 실려 있는데, 첫머리에 “파촉태수에게 고한다.”라고 하였고, 끝에는 “檄이 이르면 곧 縣道에 내려, 모두 폐하의 뜻을 알도록 하라.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여, 명령을 하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森浩一, 1985:152~153).
- 각주 024)
- 각주 025)
- 각주 026)
- 각주 027)
- 각주 028)
- 각주 029)
- 각주 030)
- 각주 031)
- 각주 032)
색인어
- 이름
- 소제(少帝), 궁준(弓遵), 제준(梯儁), 이성기(伊聲耆), 액사구(掖邪狗), 액사구(掖邪狗), 난승미(難升米), 왕기(王頎), 비미호(卑彌呼), 비미궁호(卑彌弓呼), 재사(載斯), 오월(烏越), 왕기(王頎), 장정(張政), 난승미(難升米), 비미호(卑彌呼), 비미호, 일여(壹與), [장]정(張政), 일여, 일여, 액사구(掖邪狗), 장정, 액사구
- 지명
- 위(魏), 대방군, 왜국(倭國), 왜, 왜, 왜, 倭, 왜, 대방]군, 대방군, 왜, 구노국(狗奴國), 왜, [대방]군(帶方郡),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