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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와 위나라가 서로 사신을 파견함

  • 국가
    왜(倭)
[위(魏) 소제(少帝) 주 001
각주 001)
魏 少帝 曹芳(232~274;재위 239~254)은 明帝(재위 226~239) 遭叡의 양자로서 字는 蘭卿이다. 명제 靑龍 3년(235)에 齊王에 책봉되었고, 明帝가 景初 3년(239) 정월에 臨終이 가까워지자, 실권자의 하나였던 司馬懿의 묵인으로 곧바로 皇太子에 책봉되고, 이어 明帝가 죽은 후에 8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다음해(240) 정월에 正始로 改元하였다. 이후 曹爽과 司馬懿의 輔政을 받았다. 曹爽은 名士 何晏 등을 등용하여 玄學淸談의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후세에 와서 ‘正始의 風’이란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正始 10년(249) 정월에 御駕가 明帝의 高平陵을 拜謁하러 갈 때, 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켜서 曹爽을 죽임으로써 司馬氏는 마침내 위의 정치를 오로지하게 되었다. 嘉平 6년(254)에는 少帝 曹芳도 司馬師에 의해 廢位되어 내몰려서 다시 이전의 齊王에 책봉되었다. 265년에 司馬昭에 의해 西晉王朝가 성립하자, 제왕 조방은 邵陵縣公으로 爵位가 내려갔고, 죽은 후에는 諡號를 厲公이라 하였다. 史書에서는 대체로 少帝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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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시(正始) 원년(240)에 [대방군] 태수 궁준(弓遵) 주 002
각주 002)
弓遵:帶方郡 太守로 劉夏의 후임일 것이다. 244년에 曹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수도인 丸都城을 함락하고, 이후 曹魏郡이 고구려 東川王을 추격할 때, 그는 樂浪郡 太守인 劉茂와 함께 東川王을 찾으러 東濊로 들어간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이후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과 토착 세력이 충돌하면서, 246년경에 그 남부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가 帶方郡의 崎離營(지금의 황해도 平山)을 공략하자, 이를 진압하려고 출동한 帶方郡 太守 弓遵은 韓軍과의 격전 끝에 戰死하였다(李基白·李基東, 1982:123~135). 그가 죽고 난 후인 247년에 王頎가 그 후임으로 대방태수로 부임하였는데, 王頎는 正始 6년의 고구려 재정벌 때 왕인 位宮을 쫓아 肅愼氏의 南界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毌丘儉傳」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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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충교위(建忠校尉)주 003
각주 003)
建忠校尉:각종 中國歷代官職詞典類를 검색해 보았으나, “建忠校尉”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建忠將軍은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建忠將軍은 雜號將軍이다. 후한 말기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즉 獻帝 建安 4년(199)에 鮮于輔를 建忠將軍에 임명한 기사가 있다. 建忠將軍은 이후 三國 曹魏, 北魏, 北齊에도 설치되었다(徐連達, 199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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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준(梯儁) 등으로 하여금 조서(詔書)와 인수(印綬)주 004
각주 004)
印綬:官吏가 佩用하는 印章과 인장에 매어져 있는 색깔이 있는 끈(綬)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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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받들고 왜국(倭國)에 도착하여 왕(倭王)에게 수여하였고, 아울러 조서(詔書)를 가져와서 금(金), 비단(帛), 비단으로 짠 융단(錦罽), 칼(刀), 거울(鏡) 그리고 채물(采物)주 005
각주 005)
采物:가려서 선택한 물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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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사하였다. 왕은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은조(恩詔)주 006
각주 006)
恩詔:특별히 恩情을 베풀어서 내리는 詔書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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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감사하는 답서(答書)의 표문(表文)주 007
각주 007)
表文:군주 혹은 정부에 올리는 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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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올렸다. [적시] 4년(243)주 008
각주 008)
『三國志』(권4 「三少帝紀」 〈正始四年條〉:120)의 “冬十二月, 倭國女王卑彌呼遣使奉獻”이란 기사로 보아 倭國 大夫 伊聲耆와 掖邪狗 등 8명의 女王 卑彌呼가 파견한 使臣들은 이해(243) 12월에 曹魏의 수도인 洛陽에 도착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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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大夫) 이성기(伊聲耆)액사구(掖邪狗) 주 009
각주 009)
伊聲耆·掖邪狗:內藤虎次郞은 伊聲耆(이·산·가) 掖邪狗(이·사·카)는 동일한 발음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같은 사람이며, 出雲國造의 조부인 伊佐我命(이사가노미코토)에 비정하였다. 出雲郡에는 이 사람을 제사하는 伊佐我神社, 伊佐波神社 그리고 伊佐賀神社가 있다. 藤田豊八은 이소시(伊蘇志)와 이사코(少子, 지이사코)라고 주장하였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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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8인을 파견하여, 생구(生口), 왜금(錦), 주 010
각주 010)
倭錦:왜국에서 만든 비단이라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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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겸(絳靑縑), 주 011
각주 011)
絳靑縑:진홍색과 청색을 섞어서 짠 合絲 비단을 가리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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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의(緜衣), 주 012
각주 012)
緜衣:목화에서 나는 솜으로 만든 옷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일본열도에 목화가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는 아직 없다. 따라서 緜은 眞緜, 즉 누에의 고치를 실로 잣지 않고 솜 상태로 만든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면의는 솜을 누빈 옷을 가리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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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帛布), 주 013
각주 013)
帛布:원래 비단과 무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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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목(丹木), 주 014
각주 014)
丹木:콩과에 속하는 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常綠 喬木이다. 목재가 탄력이 있어서 활을 만들고, 속의 붉은 부분은 깎아서 홍색의 염료로 사용한다. 蘇方木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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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𤝔), 주 015
각주 015)
:전설적인 동물의 이름으로 생김새가 양과 닮았으며, 귀는 4개이고 눈은 등에 달려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글자는 문맥으로 보아 弣(줌통 부) 혹은 弝(줌통 파)의 誤記로 보인다. 줌통은 ‘활 한가운데의 손으로 쥐는 부분’을 가리킨다(石原道博, 20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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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궁시(短弓矢)주 016
각주 016)
短弓矢:길이가 짧은 활과 화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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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바쳤다. 액사구(掖邪狗) 등은 솔선중랑장(率先中郞長)의 인수(印綬)를 똑같이 하사받았다. 그 6년(245)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난승미(難升米)에게 황당(黃幢)주 017
각주 017)
黃幢:노란색의 旗로서 儀仗이나 軍에서 지휘용으로 쓰는 旗를 말한다. 節과 마찬가지로 천자가 자신의 권한을 대행한다는 의미에서 주는 것인데 節보다는 등급이 낮다. 모양은 日傘처럼 생겼는데, 둥근 日傘의 바깥 둘레에 짧은 장식을 돌린 것이다. 왜의 대부 伊聲耆 등을 솔선중랑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그들에 대하여 중랑장의 기를 주었다는 설과 구노국과 싸우고 있는 卑彌呼를 지원하기 위하여 내렸다는 설이 있다. 또한 魏帝의 덕이 五行思想의 土德에 해당하므로 황색을 썼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森浩一, 1985: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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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사하고, [그것을 대방]군을 통해서 [그것을] 수여하였다. 그 8년(247)에 [대방군의] 태수인 왕기(王頎) 주 018
각주 018)
王頎는 원래 玄菟郡 太守였다. 244~245년에 曹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이 高句麗 東川王을 칠 때, 毌丘儉의 지휘 아래에 있던 王頎는 당시 8萬 戶란 國勢를 자랑하고 있던 夫餘에 간 일이 있는데, 이때 王頎는 부여의 權臣인 大使 位居의 지시를 받은 犬加(狗加)로부터 환영을 받고, 軍糧도 제공받았다. 245년 毌丘儉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과 토착 세력이 충돌하게 된다. 그리하여 246년경에 한반도 남부의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가 帶方郡의 崎離營(지금의 황해도 平山)을 공략하자, 이를 진압하려고 충동한 帶方郡 太守 弓遵은 韓軍과의 격전 끝에 戰死하였다. 바로 弓遵이 戰死한 후,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247년에 그의 후임으로 帶方郡 太守에 임명된 사람이 王頎이다. 王頎는 이후 本國의 명령으로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의 연합세력에 대한 진압에 나선다. 그 결과 韓那奚 등 수십 國이 그를 위시한 중국 郡縣 당국에 항복하여(이 내용은 『三國志』권4 「三少帝紀」 〈正始七年(246) 春二月條와 夏五月條〉:121에 기재되어 있다.), 그동안 그들이 뺏은 樂浪郡 변경지방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李基白·李基東, 1982:78~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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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 관부(官府)에 도착하였다. 의 여왕 비미호(卑彌呼)구노국(狗奴國) 주 019
각주 019)
狗奴國은 본문 윗부분에서 “其南有狗奴國, 男子爲王, 其官有狗古智卑狗, 不屬女王(그 (여왕국) 남쪽에는 狗奴國이 있는데, 그 관직으로는 狗古智卑狗가 있고, 여왕에 소속되지 않았다.)”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왕국의 남쪽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보다 동쪽에 위치한 이세만 연안지역의 세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이 지역은 畿內地域과 마찬가지로 銅鐸을 제의의 심벌로 삼았던 지역이다(三遠式 銅鐸). 그러나 동경이 새롭게 유입되는 시기에 이세만 지역에서는 후한대의 畵文帶神獸鏡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240년경에 邪馬臺國과 狗奴國이 분쟁상태에 있었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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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남왕(男王)인 비미궁호(卑彌弓呼) 주 020
각주 020)
“卑彌弓呼”는 卑弓彌呼(히코미코)의 誤記로 보는 견해가 있다. 彦存(命)의 略稱으로, 姬命(尊)의 약칭인 卑彌呼(히미코)에 대응하는 듯하다. 그런데 內藤虎次郞은 卑彌弓呼素까지를 人名으로 보고, 呼素(코소)는 己曾, 社, 許會, 語曾과 같은 말이며, 女性을 比賣語曾이라 한 것에 대하여 卑彌弓을 男性이란 의미일 수 있다고 하고, 呼素를 나라를 世襲하는 酋長에 해당시키고 있다. 또 山田孝雄은 狗奴(구노)國은 毛野(게노)國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豊城入彦命의 자손일 것이라고 한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53). 그러나 呼의 상고음과 중고음이 ‘호’에 가깝다고 하고 ‘彌呼’를 ‘미코’로 읽어 존칭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森浩一, 1985:157~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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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본래부터 불화(不和)하여, [그녀는] 재사(載斯)오월(烏越) 등을 [대방]군(帶方郡)에 파견하여, 서로 공격한 상황을 보고하였다. [왕기(王頎)가] 새조연사(塞曹掾史)주 021
각주 021)
塞曹掾史:郡縣의 佐吏이다. 前漢 시대부터 邊郡의 要塞地區에 설치하였다. 邊塞의 일을 관장하였다. 後漢 시대에도 이 관직이 설치되었는데, 詔書나 命令을 받들어서 使臣으로서 外國이나 邊境으로 파견되었고, 또 邊境地區에 위치한 縣에 가까운 烽火處에도 설치되었다. 晉代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徐連達, 199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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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張政) 등을 파견하고, 아울러 조서(詔書)와 황당(黃幢)을 보내고, 주 022
각주 022)
正始 6년에 倭의 難升米에 하사하도록 대방군에 맡긴 詔書와 黃幢은 2년 후인 正始 8년에 이르러 비로소 難升米에게 假授된 것으로 보인다. 弓遵의 전사와 더불어 초래된 한반도의 상황이 지연된 이유인 것으로 생각된다(森浩一, 198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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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승미(難升米)에게 [그 일을 처리하는 관직을] 수여하고, 격문(檄文)주 023
각주 023)
檄文:특별한 상황에서 軍兵을 모집하거나, 사람들을 고무하거나, 또는 적군에게 알려서 깨우치거나 詰責하기 위하여 발송하는 글발을 말한다. 또는 급히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글발을 말한다. 『釋名』 釋書契에서는 “檄은 激으로, 下官이 上官을 激迎하는 데 쓰는 글이다.”라고 하였고, 『文心雕龍』 격이편에서는 “檄은 皦이다. 바깥에 알려 드러내고, 분명하게 아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檄은 戰國時代부터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에게 告諭하거나 관리를 부르거나 적을 위협하기 위한 포고문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漢書』 「司馬相如傳」에는 그가 쓴 파촉에 알리는 격문이 실려 있는데, 첫머리에 “파촉태수에게 고한다.”라고 하였고, 끝에는 “檄이 이르면 곧 縣道에 내려, 모두 폐하의 뜻을 알도록 하라.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여, 명령을 하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森浩一, 1985: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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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들어서 알리고 깨닫도록 하였다.
비미호(卑彌呼)가 마침내 죽자주 024
각주 024)
卑彌呼以死:『北史』(권4 「倭傳」: 3135)에는 “正始中 卑彌呼死”라 기재되어 있다. ‘正始’는 曹魏 齊王 曹芳의 年號(240~248)이다. 그런데 內藤虎次郞은 ‘以死’를 ‘이미 죽다’라고 읽는다(石原道博, 2005: 53~54). 여기서도 이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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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무덤을 만들었는데, 주 025
각주 025)
卑彌呼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것이 著墓이며, 이것을 최초의 전방후원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大塚初重, 200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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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이 1백여 보(步)였고주 026
각주 026)
1步는 6尺이고, 魏의 1尺은 7寸 9分이라고 한다면, 1보는 약 1.5m이다. 따라서 100여 보라면 150m 전후의 봉토를 가진 무덤이 된다. 그런데 卑彌呼의 무덤으로 지목되고 있는 箸墓古墳은 전체 길이 280m, 後圓部의 길이가 150m이다. 100여 보라는 것이 둥근 부분의 직경만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箸墓의 길이와 거의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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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殉葬)된 자는 노비(奴婢) 1백여 명이었다. 새롭게 남자 왕을 세웠으나 국중(國中)의 사람들이 승복(承服)하지 않아서 다시 서로 주살(誅殺)하여, 당시 피살된 사람의 수가 1천 명이었다. 다시 비미호 종실(宗室)의 여자(宗女)인 일여(壹與) 주 027
각주 027)
壹與:臺與의 誤記일 것이다. 『梁書』와 『北史』에는 “臺與”, 宋本 『太平御覽』에는 “臺擧”로 기재되어 있다. 美稱인 ‘도요(豊)’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內藤虎次郞은 崇神天皇의 皇女인 豊鍬入姬命에 비정하고 있지만, 白鳥庫吉과 橋本增吉 등 九州論者는 본래부터 반대하고 있다(石原道博, 20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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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녀는] 나이 13세에 왕이 되었지만, 국중(國中)은 마침내 안정되었다. [장]정(張政) 등이 격문을 써서 일여에게 알려서 깨우쳤다. [일여는] 의 대부(大夫)인 솔선중랑장 액사구(掖邪狗) 등 20인으로 하여금주 028
각주 028)
『晉書』 武帝紀에 泰始(266) 2년 11월조에 왜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는 기사와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魏의 元帝가 禪讓하여 司馬炎(武帝)이 晉을 세운 다음 해로 축하를 위한 입공이었을 것이다. 이때 입공한 사실에 대해서는 『晉書』 「四夷傳」과 『日本書紀』 神功紀에 인용된 『晉起居注』에도 보인다. 『晉起居注』에서는 “왜의 여왕이 중역하여 공헌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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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 등을 송환시켰고, 이때 [액사구 등이] 대(臺)주 029
각주 029)
臺:曹魏의 國都인 洛陽에 있는 中央官廳을 가리킨다(石原道博, 20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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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착하여 남녀 생구(生口) 30인을 헌상(獻上)하고, 백주(白珠)주 030
각주 030)
白珠:井上秀雄 등은 眞珠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조개로 만든 작은 玉 종류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井上秀雄 등, 1977: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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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 개, 공청대구주(孔靑大句珠)주 031
각주 031)
孔靑大句珠:구멍이 뚫리고 푸른 색깔이 나면서 크게 굽어져 있는 구슬, 즉 曲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貢白珠王千孔, 靑大句珠二枚”라고 읽기도 한다. ‘孔’을 白珠를 헤아리는 단위로 본 것이다. 그러나 白珠와 大(句)珠가 모두 같은 계통의 물건인데, 전자는 ‘孔’으로 후자는 ‘枚’로 헤아렸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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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매(枚) 그리고 이문잡금(異文雜錦)주 032
각주 032)
異文雜錦:특이한 문양이 있는 여러 종류의 비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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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필을 공물(貢物)로 바쳤다.
-이하 이 열전 전체에 대한 논찬 부분은 이미 국사편찬위원회, 『中國正史朝鮮傳譯註』 1, 신서원, 2004(1990 초판)에 역주되어 있으므로 생략하지만, 여기에 달린 배송지의 주는 번역되지 않아 역주한다. 아래의 내용은 모두 배송지가 인용한 『魏略』 「西戎傳」을 역주한 것이다. -

  • 각주 001)
    魏 少帝 曹芳(232~274;재위 239~254)은 明帝(재위 226~239) 遭叡의 양자로서 字는 蘭卿이다. 명제 靑龍 3년(235)에 齊王에 책봉되었고, 明帝가 景初 3년(239) 정월에 臨終이 가까워지자, 실권자의 하나였던 司馬懿의 묵인으로 곧바로 皇太子에 책봉되고, 이어 明帝가 죽은 후에 8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다음해(240) 정월에 正始로 改元하였다. 이후 曹爽과 司馬懿의 輔政을 받았다. 曹爽은 名士 何晏 등을 등용하여 玄學淸談의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후세에 와서 ‘正始의 風’이란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正始 10년(249) 정월에 御駕가 明帝의 高平陵을 拜謁하러 갈 때, 司馬懿가 정변을 일으켜서 曹爽을 죽임으로써 司馬氏는 마침내 위의 정치를 오로지하게 되었다. 嘉平 6년(254)에는 少帝 曹芳도 司馬師에 의해 廢位되어 내몰려서 다시 이전의 齊王에 책봉되었다. 265년에 司馬昭에 의해 西晉王朝가 성립하자, 제왕 조방은 邵陵縣公으로 爵位가 내려갔고, 죽은 후에는 諡號를 厲公이라 하였다. 史書에서는 대체로 少帝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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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弓遵:帶方郡 太守로 劉夏의 후임일 것이다. 244년에 曹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수도인 丸都城을 함락하고, 이후 曹魏郡이 고구려 東川王을 추격할 때, 그는 樂浪郡 太守인 劉茂와 함께 東川王을 찾으러 東濊로 들어간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이후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과 토착 세력이 충돌하면서, 246년경에 그 남부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가 帶方郡의 崎離營(지금의 황해도 平山)을 공략하자, 이를 진압하려고 출동한 帶方郡 太守 弓遵은 韓軍과의 격전 끝에 戰死하였다(李基白·李基東, 1982:123~135). 그가 죽고 난 후인 247년에 王頎가 그 후임으로 대방태수로 부임하였는데, 王頎는 正始 6년의 고구려 재정벌 때 왕인 位宮을 쫓아 肅愼氏의 南界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毌丘儉傳」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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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建忠校尉:각종 中國歷代官職詞典類를 검색해 보았으나, “建忠校尉”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建忠將軍은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建忠將軍은 雜號將軍이다. 후한 말기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즉 獻帝 建安 4년(199)에 鮮于輔를 建忠將軍에 임명한 기사가 있다. 建忠將軍은 이후 三國 曹魏, 北魏, 北齊에도 설치되었다(徐連達, 199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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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印綬:官吏가 佩用하는 印章과 인장에 매어져 있는 색깔이 있는 끈(綬)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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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采物:가려서 선택한 물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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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恩詔:특별히 恩情을 베풀어서 내리는 詔書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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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表文:군주 혹은 정부에 올리는 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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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三國志』(권4 「三少帝紀」 〈正始四年條〉:120)의 “冬十二月, 倭國女王卑彌呼遣使奉獻”이란 기사로 보아 倭國 大夫 伊聲耆와 掖邪狗 등 8명의 女王 卑彌呼가 파견한 使臣들은 이해(243) 12월에 曹魏의 수도인 洛陽에 도착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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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伊聲耆·掖邪狗:內藤虎次郞은 伊聲耆(이·산·가) 掖邪狗(이·사·카)는 동일한 발음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같은 사람이며, 出雲國造의 조부인 伊佐我命(이사가노미코토)에 비정하였다. 出雲郡에는 이 사람을 제사하는 伊佐我神社, 伊佐波神社 그리고 伊佐賀神社가 있다. 藤田豊八은 이소시(伊蘇志)와 이사코(少子, 지이사코)라고 주장하였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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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倭錦:왜국에서 만든 비단이라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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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絳靑縑:진홍색과 청색을 섞어서 짠 合絲 비단을 가리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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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緜衣:목화에서 나는 솜으로 만든 옷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일본열도에 목화가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는 아직 없다. 따라서 緜은 眞緜, 즉 누에의 고치를 실로 잣지 않고 솜 상태로 만든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면의는 솜을 누빈 옷을 가리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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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帛布:원래 비단과 무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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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丹木:콩과에 속하는 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常綠 喬木이다. 목재가 탄력이 있어서 활을 만들고, 속의 붉은 부분은 깎아서 홍색의 염료로 사용한다. 蘇方木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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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전설적인 동물의 이름으로 생김새가 양과 닮았으며, 귀는 4개이고 눈은 등에 달려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글자는 문맥으로 보아 弣(줌통 부) 혹은 弝(줌통 파)의 誤記로 보인다. 줌통은 ‘활 한가운데의 손으로 쥐는 부분’을 가리킨다(石原道博, 20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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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短弓矢:길이가 짧은 활과 화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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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黃幢:노란색의 旗로서 儀仗이나 軍에서 지휘용으로 쓰는 旗를 말한다. 節과 마찬가지로 천자가 자신의 권한을 대행한다는 의미에서 주는 것인데 節보다는 등급이 낮다. 모양은 日傘처럼 생겼는데, 둥근 日傘의 바깥 둘레에 짧은 장식을 돌린 것이다. 왜의 대부 伊聲耆 등을 솔선중랑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그들에 대하여 중랑장의 기를 주었다는 설과 구노국과 싸우고 있는 卑彌呼를 지원하기 위하여 내렸다는 설이 있다. 또한 魏帝의 덕이 五行思想의 土德에 해당하므로 황색을 썼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森浩一, 1985: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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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王頎는 원래 玄菟郡 太守였다. 244~245년에 曹魏의 幽州刺史 毌丘儉이 高句麗 東川王을 칠 때, 毌丘儉의 지휘 아래에 있던 王頎는 당시 8萬 戶란 國勢를 자랑하고 있던 夫餘에 간 일이 있는데, 이때 王頎는 부여의 權臣인 大使 位居의 지시를 받은 犬加(狗加)로부터 환영을 받고, 軍糧도 제공받았다. 245년 毌丘儉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과 토착 세력이 충돌하게 된다. 그리하여 246년경에 한반도 남부의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가 帶方郡의 崎離營(지금의 황해도 平山)을 공략하자, 이를 진압하려고 충동한 帶方郡 太守 弓遵은 韓軍과의 격전 끝에 戰死하였다. 바로 弓遵이 戰死한 후,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247년에 그의 후임으로 帶方郡 太守에 임명된 사람이 王頎이다. 王頎는 이후 本國의 명령으로 韓人 國家의 盟主인 ‘臣智’의 연합세력에 대한 진압에 나선다. 그 결과 韓那奚 등 수십 國이 그를 위시한 중국 郡縣 당국에 항복하여(이 내용은 『三國志』권4 「三少帝紀」 〈正始七年(246) 春二月條와 夏五月條〉:121에 기재되어 있다.), 그동안 그들이 뺏은 樂浪郡 변경지방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李基白·李基東, 1982:78~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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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狗奴國은 본문 윗부분에서 “其南有狗奴國, 男子爲王, 其官有狗古智卑狗, 不屬女王(그 (여왕국) 남쪽에는 狗奴國이 있는데, 그 관직으로는 狗古智卑狗가 있고, 여왕에 소속되지 않았다.)”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왕국의 남쪽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보다 동쪽에 위치한 이세만 연안지역의 세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이 지역은 畿內地域과 마찬가지로 銅鐸을 제의의 심벌로 삼았던 지역이다(三遠式 銅鐸). 그러나 동경이 새롭게 유입되는 시기에 이세만 지역에서는 후한대의 畵文帶神獸鏡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240년경에 邪馬臺國과 狗奴國이 분쟁상태에 있었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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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卑彌弓呼”는 卑弓彌呼(히코미코)의 誤記로 보는 견해가 있다. 彦存(命)의 略稱으로, 姬命(尊)의 약칭인 卑彌呼(히미코)에 대응하는 듯하다. 그런데 內藤虎次郞은 卑彌弓呼素까지를 人名으로 보고, 呼素(코소)는 己曾, 社, 許會, 語曾과 같은 말이며, 女性을 比賣語曾이라 한 것에 대하여 卑彌弓을 男性이란 의미일 수 있다고 하고, 呼素를 나라를 世襲하는 酋長에 해당시키고 있다. 또 山田孝雄은 狗奴(구노)國은 毛野(게노)國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豊城入彦命의 자손일 것이라고 한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53). 그러나 呼의 상고음과 중고음이 ‘호’에 가깝다고 하고 ‘彌呼’를 ‘미코’로 읽어 존칭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森浩一, 1985:157~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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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塞曹掾史:郡縣의 佐吏이다. 前漢 시대부터 邊郡의 要塞地區에 설치하였다. 邊塞의 일을 관장하였다. 後漢 시대에도 이 관직이 설치되었는데, 詔書나 命令을 받들어서 使臣으로서 外國이나 邊境으로 파견되었고, 또 邊境地區에 위치한 縣에 가까운 烽火處에도 설치되었다. 晉代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徐連達, 199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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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正始 6년에 倭의 難升米에 하사하도록 대방군에 맡긴 詔書와 黃幢은 2년 후인 正始 8년에 이르러 비로소 難升米에게 假授된 것으로 보인다. 弓遵의 전사와 더불어 초래된 한반도의 상황이 지연된 이유인 것으로 생각된다(森浩一, 198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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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檄文:특별한 상황에서 軍兵을 모집하거나, 사람들을 고무하거나, 또는 적군에게 알려서 깨우치거나 詰責하기 위하여 발송하는 글발을 말한다. 또는 급히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글발을 말한다. 『釋名』 釋書契에서는 “檄은 激으로, 下官이 上官을 激迎하는 데 쓰는 글이다.”라고 하였고, 『文心雕龍』 격이편에서는 “檄은 皦이다. 바깥에 알려 드러내고, 분명하게 아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檄은 戰國時代부터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에게 告諭하거나 관리를 부르거나 적을 위협하기 위한 포고문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漢書』 「司馬相如傳」에는 그가 쓴 파촉에 알리는 격문이 실려 있는데, 첫머리에 “파촉태수에게 고한다.”라고 하였고, 끝에는 “檄이 이르면 곧 縣道에 내려, 모두 폐하의 뜻을 알도록 하라.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여, 명령을 하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森浩一, 1985: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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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卑彌呼以死:『北史』(권4 「倭傳」: 3135)에는 “正始中 卑彌呼死”라 기재되어 있다. ‘正始’는 曹魏 齊王 曹芳의 年號(240~248)이다. 그런데 內藤虎次郞은 ‘以死’를 ‘이미 죽다’라고 읽는다(石原道博, 2005: 53~54). 여기서도 이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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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卑彌呼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것이 著墓이며, 이것을 최초의 전방후원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大塚初重, 200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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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1步는 6尺이고, 魏의 1尺은 7寸 9分이라고 한다면, 1보는 약 1.5m이다. 따라서 100여 보라면 150m 전후의 봉토를 가진 무덤이 된다. 그런데 卑彌呼의 무덤으로 지목되고 있는 箸墓古墳은 전체 길이 280m, 後圓部의 길이가 150m이다. 100여 보라는 것이 둥근 부분의 직경만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箸墓의 길이와 거의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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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壹與:臺與의 誤記일 것이다. 『梁書』와 『北史』에는 “臺與”, 宋本 『太平御覽』에는 “臺擧”로 기재되어 있다. 美稱인 ‘도요(豊)’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內藤虎次郞은 崇神天皇의 皇女인 豊鍬入姬命에 비정하고 있지만, 白鳥庫吉과 橋本增吉 등 九州論者는 본래부터 반대하고 있다(石原道博, 20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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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晉書』 武帝紀에 泰始(266) 2년 11월조에 왜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는 기사와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魏의 元帝가 禪讓하여 司馬炎(武帝)이 晉을 세운 다음 해로 축하를 위한 입공이었을 것이다. 이때 입공한 사실에 대해서는 『晉書』 「四夷傳」과 『日本書紀』 神功紀에 인용된 『晉起居注』에도 보인다. 『晉起居注』에서는 “왜의 여왕이 중역하여 공헌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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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9)
    臺:曹魏의 國都인 洛陽에 있는 中央官廳을 가리킨다(石原道博, 20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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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0)
    白珠:井上秀雄 등은 眞珠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조개로 만든 작은 玉 종류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井上秀雄 등, 1977: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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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1)
    孔靑大句珠:구멍이 뚫리고 푸른 색깔이 나면서 크게 굽어져 있는 구슬, 즉 曲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貢白珠王千孔, 靑大句珠二枚”라고 읽기도 한다. ‘孔’을 白珠를 헤아리는 단위로 본 것이다. 그러나 白珠와 大(句)珠가 모두 같은 계통의 물건인데, 전자는 ‘孔’으로 후자는 ‘枚’로 헤아렸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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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2)
    異文雜錦:특이한 문양이 있는 여러 종류의 비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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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소제(少帝), 궁준(弓遵), 제준(梯儁), 이성기(伊聲耆), 액사구(掖邪狗), 액사구(掖邪狗), 난승미(難升米), 왕기(王頎), 비미호(卑彌呼), 비미궁호(卑彌弓呼), 재사(載斯), 오월(烏越), 왕기(王頎), 장정(張政), 난승미(難升米), 비미호(卑彌呼), 비미호, 일여(壹與), [장]정(張政), 일여, 일여, 액사구(掖邪狗), 장정, 액사구
지명
위(魏), 대방군, 왜국(倭國), , , , , , 대방]군, 대방군, , 구노국(狗奴國), , [대방]군(帶方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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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와 위나라가 서로 사신을 파견함 자료번호 : jo.k_0004_0030_0040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