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의 풍습, 문화, 자연환경, 사회제도에 관한 설명
남자는 어른과 아이 [구별이] 없이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文身)을 한다.주 001옛날부터 그 사신들이 중국으로 왔는데, [그들] 모두 스스로 대부(大夫)주 002라고 칭하였다. 하나라의 왕[夏后] 소강(少康)
주 003의 아들이 회계(會稽)
주 004
그 풍속은 음란(淫亂)하지 않고, 남자는 모두 [모자를] 쓰지 않고 상투를 틀고, 목면(木緜)주 485
그 땅에는 소, 주 018말, 호랑이, 표범, 양 그리고 까치주 019가 없다. 무기로는 창, 방패 그리고 목궁(木弓)을 사용한다. 목궁은 아랫부분을 짧게 하고 윗부분을 길게 한다. 대나무 화살대는 어떤 것은 철로 된 화살촉이고 어떤 것은 뼈로 된 화살촉이다. 있거나 없는 것이 담이(儋耳) 주 486및 주애(朱崖) 주 021와 같다.주 022 왜의 땅은 온난하고, 겨울과 여름에도 생채(生菜)를 먹고, 모두 맨발로 다닌다. 집과 방이 있는데, 부모형제는 기거하는 곳을 달리하고, 붉은색 안료를 몸에 바르는데, 주 023중국에서 분(粉)주 024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먹거나 마시거나 변두(籩豆)주 025를 사용하고 손으로 먹는다. 사람이 죽으면 관(棺)주 026은 쓰지만, 곽(槨)주 027은 없다. 흙을 쌓아 봉분[冢]을 만든다. 사람이 죽으면, 10여 일 동안 매장하지 않는데, 주 028이때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주 029상주(喪主)는 곡읍(哭泣)주 488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와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술을 마신다. 장사(葬事)가 끝나면, 온 가족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목욕하는데, (중국의) 연목(練沐)주 031과 같다.
그 사행[行]이 바다를 건너서 중국에 올 때는 항상 한 사람에게 머리를 빗지 못하게 하고, 서캐와 이를 없애지 못하도록 하며, 의복은 때가 묻어서 더럽고,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며, 부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여, 마치 초상을 치르는 사람[喪人]과 같았는데, 그를 지최(持衰)주 032라고 불렀다.주 033만약 [중국으로] 가는 자들이 [도중에] 길하고 좋으면, [일행] 모두는 그에게 생구(生口)주 034와 재물을 주고, 만약 질병이나 폭풍 등의 재해를 만나면, 곧바로 그를 죽이려고 하면서, [그들은] 그 지최(持衰)가 삼가지 않았다고 한다.주 035
진주(眞珠)와 청옥(靑玉)을 산출한다.주 036
그 풍속은 일을 거행하거나 [어디를] 갈 때, 말하거나 행동해야 하는 것이 있으면. 항상 뼈를 불에 태워서 점치는데, 그렇게 하여 길흉(吉凶)을 묻고, 맨 먼저 점친 내용을 알리는데, 그 말은 영귀(令龜)주 490
세금[租賦]을 거둔다. 저각(邸閣)주 057도 있으며, 주 058나라마다 시장이 있어서 있고 없는 것을 서로 교역하는데, [왕은] 대왜(大倭)주 059를 시켜서 그것[교역]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여왕국의 이북에 특별히 일대솔(一大率)주 491
각주 004)
에 봉해지자,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여 교룡(蛟龍)주 005의 해를 피하였다. 지금 왜(倭)의 수인(水人)주 006은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와 조개를 잘 잡는데, 문신은 원래는 큰 물고기와 바다짐승을 피하려는 것이었으나, 후에 점차 [문신을 하는 것은] 장식이 되었다. 여러 나라들의 문신은 각각 달라 [문신하는 자리나 크기가] 왼쪽이나 오른쪽 혹은 크거나 작은데, 왼쪽 혹은 오른쪽, 크고 혹은 작은데,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다.주 007[왜국(倭國)까지의] 가는 길과 거리[道里]를 헤아려 보면, [그곳은] 마땅히 회계(會稽)
동야(東冶)
주 008의 동쪽에 있어야 한다.주 009會稽:會稽郡이다. 이 군은 지금의 浙江省과 江蘇省에 걸쳐 있었다. 會稽郡은 秦代에 처음 설치되었고, 치소는 吳縣(지금의 江蘇省 蘇州市)이었다. 後漢 順帝 永建 4년(129) 會稽郡을 나누어 吳郡을 설치하였고(『後漢書』 「孝順孝沖孝質帝紀」 제6:257), 치소를 山陰으로 옮겼다. 지금의 浙江省 紹興市이다. 雒陽에서 동으로 3, 800리 떨어져 있으며, 14개의 城과 123, 090호, 인구 481, 196명이었다고 한다(『後漢書』 志 第22 「郡國志」4:3489). 三國時代에는 吳의 중심지가 되면서, 會稽郡은 분할되어 南部가 臨海郡, 建安郡, 東陽郡이 되었다
각주 009)
會稽에 속한 東冶의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 왔으나, 會稽와 東冶의 동쪽에 걸쳐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장강 하류역에 위치한 會稽의 군치 山陰(현재의 紹興市) 북위 30°로 九州의 남단보다 다소 아래의 위치이고, 東冶는 福建省의 福州市 혹은 福建省의 閩候縣의 어느 쪽이든 북위 26°로 오키나와 남단의 위치이다. 『三國志』 단계에서는 일본열도가 남북으로 뻗어 있는 형태이고 구야한국(김해)에서 남쪽으로 2, 000리 떨어진 위치에 북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둘레 5, 000리라고 하였으므로, 한 변을 약 1, 250리로 추산하면 560km 정도가 된다. 한편 현재의 紹興市에서 福州市까지의 위도 차이에 따른 거리는 450km 정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倭가 東冶의 동쪽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會稽의 治所에서 東冶縣에 이르는 거리 정도로 길게 남북으로 뻗어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나타나듯이, 조선시대 초기에도 일본이 동북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 九州를 북단으로 하고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풍속은 음란(淫亂)하지 않고, 남자는 모두 [모자를] 쓰지 않고 상투를 틀고, 목면(木緜)주 485
각주 485)
으로 머리를 묶는다.주 011그 옷은 모두 가로의 폭이 넓은 천[橫幅]주 012을 묶어서 서로 이었으며, 실로 꿰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인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거나 말아서 뒤로 묶었으며, 옷을 만드는 것이 홑이불[單被]주 013과 같은데, 그 중앙을 뚫고 그곳으로 머리를 넣어 입는다. 벼주 014와 모시주 015를 재배하고 양잠을 하여 실을 만들며, 세모시, 좋은 비단주 016그리고 솜주 017을 산출한다.흔히 “木緜”은 판야과(panja科)에 속하는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喬木으로 이해하고 있다. 紅色의 꽃이 피며 열매에 붙은 白毛는 담요 따위의 원료가 되고 織造는 무명보다 못하다. 古貝라고도 한다. 한편 무명이라고도 부르는 목면(cotton)이 중국에서 성행한 것은 당나라 시대 이후이고, 우리나라에는 문익점이 들여왔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3세기의 일본에 무명이 있었을 가능성은 적다. 그렇지만, 춘추전국시대 越族의 무덤에서 삼베, 모시, 비단, 그리고 목면(cotton)으로 짠 천이 福建省 崇安縣 太廟村에서 조사된 바가 있다(森浩一, 1985: 120).
그 땅에는 소, 주 018말, 호랑이, 표범, 양 그리고 까치주 019가 없다. 무기로는 창, 방패 그리고 목궁(木弓)을 사용한다. 목궁은 아랫부분을 짧게 하고 윗부분을 길게 한다. 대나무 화살대는 어떤 것은 철로 된 화살촉이고 어떤 것은 뼈로 된 화살촉이다. 있거나 없는 것이 담이(儋耳) 주 486및 주애(朱崖) 주 021와 같다.주 022 왜의 땅은 온난하고, 겨울과 여름에도 생채(生菜)를 먹고, 모두 맨발로 다닌다. 집과 방이 있는데, 부모형제는 기거하는 곳을 달리하고, 붉은색 안료를 몸에 바르는데, 주 023중국에서 분(粉)주 024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먹거나 마시거나 변두(籩豆)주 025를 사용하고 손으로 먹는다. 사람이 죽으면 관(棺)주 026은 쓰지만, 곽(槨)주 027은 없다. 흙을 쌓아 봉분[冢]을 만든다. 사람이 죽으면, 10여 일 동안 매장하지 않는데, 주 028이때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주 029상주(喪主)는 곡읍(哭泣)주 488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와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술을 마신다. 장사(葬事)가 끝나면, 온 가족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목욕하는데, (중국의) 연목(練沐)주 031과 같다.
그 사행[行]이 바다를 건너서 중국에 올 때는 항상 한 사람에게 머리를 빗지 못하게 하고, 서캐와 이를 없애지 못하도록 하며, 의복은 때가 묻어서 더럽고,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며, 부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여, 마치 초상을 치르는 사람[喪人]과 같았는데, 그를 지최(持衰)주 032라고 불렀다.주 033만약 [중국으로] 가는 자들이 [도중에] 길하고 좋으면, [일행] 모두는 그에게 생구(生口)주 034와 재물을 주고, 만약 질병이나 폭풍 등의 재해를 만나면, 곧바로 그를 죽이려고 하면서, [그들은] 그 지최(持衰)가 삼가지 않았다고 한다.주 035
진주(眞珠)와 청옥(靑玉)을 산출한다.주 036
각주 036)
그 산에서는 단(丹)이 나고, 그 나무로는 매화나무[枏], 주 037노송나무[杼], 주 038녹나무[豫樟], 주 039모과나무[楺], 주 489상수리나무[櫪], 감귤나무[投], 주 041떡갈나무[橿], 주 042박태기나무[烏號], 주 043그리고 단풍나무[楓香]주 044가 있다. 그 대나무로는 조릿대(篠)와 해장죽[簳]주 045과 도지[桃支]주 046가 있다. 생강[薑], 귤[橘], 산초[椒] 그리고 양하[蘘荷]주 047가 있지만, 이것들을 양념으로 쓸 줄은 모른다. 원숭이[獼猴]주 048와 검은 꿩[黑雉]주 049이 있다.『三國志』 권30 〈東夷傳〉의 裴松之의 주에 인용된 『魏略』의 「西戎傳」에서는 “積石의 남쪽에 큰 바다가 있는데, 산호와 진주가 난다.”고 하였으므로, 진주는 바다에서 나는 진주(pearl)로 볼 수 있다. 청옥은 『漢書』 「西戎傳」 〈莎車國〉에 “鐵山이 있는데, 靑玉이 난다.”고 하였으므로 암석 상태로 산출되는 옥 종류를 뜻함을 알 수 있다(森浩一, 1985:127). 그런데 玉에는 硬玉(Jadeite)과 軟玉(Nephrite)이 있으며, 이들은 전혀 다른 광물이다. 硬玉은 흔히 翡翠라고도 하며, 그 산지는 세계적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 中國의 玉에 대한 기호는 유명하지만, 硬玉이 산출되지는 않는다. 일본의 경우는 新潟縣 糸魚川市 姫川流域, 北陸의 海岸 및 富山縣의 翡翠海岸, 兵庫縣 養父市, 鳥取縣, 静岡縣 引佐地区 등 여러 곳에서 산출된다. 그래서 일본열도에서는 繩文時代부터 古墳時代까지 지속적으로 옥제품이 사용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曲玉(勾玉)이다. 한반도에서도 신라의 금관에 장식된 곡옥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경옥의 산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경옥제 곡옥은 대부분 일본열도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門田誠一, 1992:51~74).
그 풍속은 일을 거행하거나 [어디를] 갈 때, 말하거나 행동해야 하는 것이 있으면. 항상 뼈를 불에 태워서 점치는데, 그렇게 하여 길흉(吉凶)을 묻고, 맨 먼저 점친 내용을 알리는데, 그 말은 영귀(令龜)주 490
각주 490)
의 법(法)과 같은 것으로서, [뼈가] 불에 타서 갈라진 금을 보고 앞으로의 일을 점친다.주 051그들은 모이거나 행동할 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고, 천성이 술을 즐긴다.[배송지주1] 대인(大人)주 052처럼 존경해야 할 사람을 만나면, 단지 손뼉을 치는데, 주 053令龜:중국의 점법을 뜻한다. 『春秋左傳』 〈文公18年條〉에 “令龜有咎”란 구절이 있다. 전609년 가을에 齊侯가 魯를 치기 위한 날을 잡자 곧 병이 들었는데, 의사가 가을까지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魯의 文公은 점을 치게 하면서,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齊侯가 죽기를 바랬다. 惠伯이 龜卜에게 명하였으며 楚丘라는 점쟁이가 점괘를 얻었다. 그는 말하기를 “齊侯는 그때까지 살지 못합니다만, 그 이유는 병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도 그가 왜 죽었는지를 들을 수 없습니다(노의 문공 역시 죽게 된다.). 구복을 명하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문공은 2월 정축에 죽었다. 이처럼 “令龜”란 말은 ‘命龜’와 같은 말로, 점을 칠 때 점을 쳐서 나올 내용을 점쟁이에게 미리 알리는 것을 말한다(森浩一, 1985:130).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고사에서 비롯되어 중국에서 점을 치는 방법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
그리고 唐代 段公路의 『北戶錄』 권2 〈鷄卵卜條〉에는 “倭國에서는 大事는 항상 뼈를 지져서 그 형상을 가지고 점치는데, 이전의 中州의 令龜와 같은 것으로서, 뼈에 그어진 금을 보고 길흉을 점친다.”로 기재되어 있다(石原道博, 2005:47~48). 실제로 사슴이나 멧돼지의 견갑골에 여러 곳을 지진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卜骨). 일본에서는 太占法이라고 한다.
한편 對馬島와 一岐島의 卜部(점술을 행하는 집단)가 행하는 풍습으로는 거북의 등껍질에 네모난 구멍을 파고, 껍질의 표면을 얇게 만든 다음, 그 부분을 불로 지져 금이 가게 한 다음, 兆竹으로 물을 부어넣어 고정시킨 다음, 깨끗한 종이로 균열을 확실하게 만든 다음 판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이 彌生時代부터 존재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唐代 段公路의 『北戶錄』 권2 〈鷄卵卜條〉에는 “倭國에서는 大事는 항상 뼈를 지져서 그 형상을 가지고 점치는데, 이전의 中州의 令龜와 같은 것으로서, 뼈에 그어진 금을 보고 길흉을 점친다.”로 기재되어 있다(石原道博, 2005:47~48). 실제로 사슴이나 멧돼지의 견갑골에 여러 곳을 지진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卜骨). 일본에서는 太占法이라고 한다.
한편 對馬島와 一岐島의 卜部(점술을 행하는 집단)가 행하는 풍습으로는 거북의 등껍질에 네모난 구멍을 파고, 껍질의 표면을 얇게 만든 다음, 그 부분을 불로 지져 금이 가게 한 다음, 兆竹으로 물을 부어넣어 고정시킨 다음, 깨끗한 종이로 균열을 확실하게 만든 다음 판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이 彌生時代부터 존재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각주 053)
그렇게 하는 것이 [중국에서의]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 사람들은 장수[壽考]하여, 어떤 이는 100살까지 살고, 어떤 이는 80살 내지 90살까지 산다.주 054그 풍속은 나라[國]의 대인(大人)은 모두 4~5명의 부인을 두고, 하호(下戶)주 055라도 어떤 이는 2~3명의 부인을 두었다. 부인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물건을 훔치지 않고 소송으로 다투는 일[爭訟]도 적다. 법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죄가] 가벼운 자는 그 처와 자식을 몰수하고, 무거운 자는 그 문호(門戶) 및 종족(宗族)을 멸한다. [신분의] 존비(尊卑)에도 각각 등급이 있는데, 서로 잘 신복(臣服)한다.주 056
陸德明의 『經傳釋文』에서는 “지금의 倭人이 인사를 할 때 양손으로 손뼉을 친다. 鄭大夫(鄭玄)의 이야기와 같다. 무릇 옛날의 遺法이다.”라고 하였다. 인사할 때 손뼉을 치는 왜인의 관습을, 아마도 魏晉時代의 중국인은 중국 고대의 遺法이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기록하였을 것이다. 왜인의 풍속기사 중에서 籩豆, 令龜法, 博手 등, 중국 고대의 유풍이라는 생각되는 것들을 기록한 것은, 〈東夷傳〉 서문의 말미에서 “중국에서 예를 잃었을 때, 이를 四夷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그래서 그 나라를 순서대로 편찬하고 그 異同을 열거하여, 前史의 갖추어지지 못한 곳을 보완하였다.”고 한 취지에 따른 것이다. 〈倭人條〉에는 특히 이러한 취지에 부합되는 기사가 많다(森浩一, 1985:131).
세금[租賦]을 거둔다. 저각(邸閣)주 057도 있으며, 주 058나라마다 시장이 있어서 있고 없는 것을 서로 교역하는데, [왕은] 대왜(大倭)주 059를 시켜서 그것[교역]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여왕국의 이북에 특별히 일대솔(一大率)주 491
각주 491)
을 설치하여 여러 나라를 단속하고 살피도록 하였으므로 여러 나라는 그를 두려워하면서 꺼려하였다. [일대솔은] 항상 이도국(伊都國)에서 다스렸는데, 나라 안에 자사(刺史)주 061가 있는 것과 같다. [왜국]왕(倭國王)이 사신을 시켜서 경도(京都), 주 062
[대방]군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
주 063에 보내거나 [대방]군이( 왜국倭國)에 사신을 파견하면, [그때마다] 항상 나루터로 와서 [사신을] 찾아서, 전달해서 보낸 문서와 [황제가] 하사하여 보내준 물건을 여왕에게 도착하도록 하는 데 실수나 착오가 없었다.주 064하호(下戶)가 대인(大人)과 도로에서 서로 마주칠 때에는 뒷걸음을 쳐서 돌아서 풀숲으로 들어간다. 말을 전달하거나 일을 설명할 때는 어떤 자는 몸을 웅크리고, 어떤 자는 무릎을 꿇고, 양손은 땅에 대는데주 065, 그것은 공경을 나타내는 것이다. [상대에게] 답할 때는 ‘희(噫)’주 066라고 하는데, [이것을] 비교하자면, ‘예[然諾]’라고 하는 것과 같다.주 067“一大率”은 한 사람의 大率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率은 이끈다는 말이므로 帥와 뜻이 통한다. 실제로 ‘大帥’라는 용어는 『三國志』 〈鮮卑傳〉의 裴松之 주에 인용된 魏書의 “宴荔游等, 皆爲大師, 而制屬檀石槐.”라는 말에도 보인다. 20여 邑의 大人은 置鞬落羅, 日律推演, 이라고 하며, 모두 大帥가 되어서 檀石槐에 制屬한다.”라고 나타난다. 한편 『墨子』 「迎敵祠篇」에서 성곽의 방비병 배치에 대하여 서술한 부분에서, “성 위에는……백보마다 百長이 있고 그 곁에 大率이 있으며 가운데 大將이 있다.”고 하였다(森浩一, 1985:133). 아래에 있는 문장들을 볼 때, 女王國에서 檢察과 外交를 담당한 관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각주 067)
‘然’은 ‘예, 그렇습니다.’, ‘諾’은 ‘알겠습니다.’라는 의미의 대답이다. 당시 일본열도 사회에서는 ‘噫’라는 말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噫는 漢音으로 ‘이’와 ‘아이’라는 음가를 가지고 있다. 전한말의 楊雄이 편찬한 『方言』에는 “南楚에서는 ‘然’이라고 해야 할 때 ‘欸’라고 하거나 ‘醫’라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晉의 郭璞은 ‘欸’의 음을 ‘醫’ 또는 ‘埃’와 동음이라고 하였다. 醫와 噫는 같은 소리이므로, 왜인은 남초인들과 같은 소리로 승낙이나 긍정을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다. 진수는 이러한 공통성에 주목하여 왜인의 대답하는 소리를 특별히 기록했을지 모른다. 남초는 초(장강 중류역)의 남방을 가리킨다. 진수는 왜가 이처럼 오·월·남초와 여러 가지 공통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森浩一, 1985:135).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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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會稽:會稽郡이다. 이 군은 지금의 浙江省과 江蘇省에 걸쳐 있었다. 會稽郡은 秦代에 처음 설치되었고, 치소는 吳縣(지금의 江蘇省 蘇州市)이었다. 後漢 順帝 永建 4년(129) 會稽郡을 나누어 吳郡을 설치하였고(『後漢書』 「孝順孝沖孝質帝紀」 제6:257), 치소를 山陰으로 옮겼다. 지금의 浙江省 紹興市이다. 雒陽에서 동으로 3, 800리 떨어져 있으며, 14개의 城과 123, 090호, 인구 481, 196명이었다고 한다(『後漢書』 志 第22 「郡國志」4:3489). 三國時代에는 吳의 중심지가 되면서, 會稽郡은 분할되어 南部가 臨海郡, 建安郡, 東陽郡이 되었다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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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會稽에 속한 東冶의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 왔으나, 會稽와 東冶의 동쪽에 걸쳐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장강 하류역에 위치한 會稽의 군치 山陰(현재의 紹興市) 북위 30°로 九州의 남단보다 다소 아래의 위치이고, 東冶는 福建省의 福州市 혹은 福建省의 閩候縣의 어느 쪽이든 북위 26°로 오키나와 남단의 위치이다. 『三國志』 단계에서는 일본열도가 남북으로 뻗어 있는 형태이고 구야한국(김해)에서 남쪽으로 2, 000리 떨어진 위치에 북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둘레 5, 000리라고 하였으므로, 한 변을 약 1, 250리로 추산하면 560km 정도가 된다. 한편 현재의 紹興市에서 福州市까지의 위도 차이에 따른 거리는 450km 정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倭가 東冶의 동쪽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會稽의 治所에서 東冶縣에 이르는 거리 정도로 길게 남북으로 뻗어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나타나듯이, 조선시대 초기에도 일본이 동북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 九州를 북단으로 하고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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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485)
흔히 “木緜”은 판야과(panja科)에 속하는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喬木으로 이해하고 있다. 紅色의 꽃이 피며 열매에 붙은 白毛는 담요 따위의 원료가 되고 織造는 무명보다 못하다. 古貝라고도 한다. 한편 무명이라고도 부르는 목면(cotton)이 중국에서 성행한 것은 당나라 시대 이후이고, 우리나라에는 문익점이 들여왔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3세기의 일본에 무명이 있었을 가능성은 적다. 그렇지만, 춘추전국시대 越族의 무덤에서 삼베, 모시, 비단, 그리고 목면(cotton)으로 짠 천이 福建省 崇安縣 太廟村에서 조사된 바가 있다(森浩一, 1985: 120).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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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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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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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36)
『三國志』 권30 〈東夷傳〉의 裴松之의 주에 인용된 『魏略』의 「西戎傳」에서는 “積石의 남쪽에 큰 바다가 있는데, 산호와 진주가 난다.”고 하였으므로, 진주는 바다에서 나는 진주(pearl)로 볼 수 있다. 청옥은 『漢書』 「西戎傳」 〈莎車國〉에 “鐵山이 있는데, 靑玉이 난다.”고 하였으므로 암석 상태로 산출되는 옥 종류를 뜻함을 알 수 있다(森浩一, 1985:127). 그런데 玉에는 硬玉(Jadeite)과 軟玉(Nephrite)이 있으며, 이들은 전혀 다른 광물이다. 硬玉은 흔히 翡翠라고도 하며, 그 산지는 세계적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 中國의 玉에 대한 기호는 유명하지만, 硬玉이 산출되지는 않는다. 일본의 경우는 新潟縣 糸魚川市 姫川流域, 北陸의 海岸 및 富山縣의 翡翠海岸, 兵庫縣 養父市, 鳥取縣, 静岡縣 引佐地区 등 여러 곳에서 산출된다. 그래서 일본열도에서는 繩文時代부터 古墳時代까지 지속적으로 옥제품이 사용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曲玉(勾玉)이다. 한반도에서도 신라의 금관에 장식된 곡옥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경옥의 산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경옥제 곡옥은 대부분 일본열도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門田誠一, 1992:5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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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490)
令龜:중국의 점법을 뜻한다. 『春秋左傳』 〈文公18年條〉에 “令龜有咎”란 구절이 있다. 전609년 가을에 齊侯가 魯를 치기 위한 날을 잡자 곧 병이 들었는데, 의사가 가을까지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魯의 文公은 점을 치게 하면서,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齊侯가 죽기를 바랬다. 惠伯이 龜卜에게 명하였으며 楚丘라는 점쟁이가 점괘를 얻었다. 그는 말하기를 “齊侯는 그때까지 살지 못합니다만, 그 이유는 병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도 그가 왜 죽었는지를 들을 수 없습니다(노의 문공 역시 죽게 된다.). 구복을 명하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문공은 2월 정축에 죽었다. 이처럼 “令龜”란 말은 ‘命龜’와 같은 말로, 점을 칠 때 점을 쳐서 나올 내용을 점쟁이에게 미리 알리는 것을 말한다(森浩一, 1985:130).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고사에서 비롯되어 중국에서 점을 치는 방법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
그리고 唐代 段公路의 『北戶錄』 권2 〈鷄卵卜條〉에는 “倭國에서는 大事는 항상 뼈를 지져서 그 형상을 가지고 점치는데, 이전의 中州의 令龜와 같은 것으로서, 뼈에 그어진 금을 보고 길흉을 점친다.”로 기재되어 있다(石原道博, 2005:47~48). 실제로 사슴이나 멧돼지의 견갑골에 여러 곳을 지진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卜骨). 일본에서는 太占法이라고 한다.
한편 對馬島와 一岐島의 卜部(점술을 행하는 집단)가 행하는 풍습으로는 거북의 등껍질에 네모난 구멍을 파고, 껍질의 표면을 얇게 만든 다음, 그 부분을 불로 지져 금이 가게 한 다음, 兆竹으로 물을 부어넣어 고정시킨 다음, 깨끗한 종이로 균열을 확실하게 만든 다음 판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이 彌生時代부터 존재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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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53)
陸德明의 『經傳釋文』에서는 “지금의 倭人이 인사를 할 때 양손으로 손뼉을 친다. 鄭大夫(鄭玄)의 이야기와 같다. 무릇 옛날의 遺法이다.”라고 하였다. 인사할 때 손뼉을 치는 왜인의 관습을, 아마도 魏晉時代의 중국인은 중국 고대의 遺法이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기록하였을 것이다. 왜인의 풍속기사 중에서 籩豆, 令龜法, 博手 등, 중국 고대의 유풍이라는 생각되는 것들을 기록한 것은, 〈東夷傳〉 서문의 말미에서 “중국에서 예를 잃었을 때, 이를 四夷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그래서 그 나라를 순서대로 편찬하고 그 異同을 열거하여, 前史의 갖추어지지 못한 곳을 보완하였다.”고 한 취지에 따른 것이다. 〈倭人條〉에는 특히 이러한 취지에 부합되는 기사가 많다(森浩一, 198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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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491)
“一大率”은 한 사람의 大率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率은 이끈다는 말이므로 帥와 뜻이 통한다. 실제로 ‘大帥’라는 용어는 『三國志』 〈鮮卑傳〉의 裴松之 주에 인용된 魏書의 “宴荔游等, 皆爲大師, 而制屬檀石槐.”라는 말에도 보인다. 20여 邑의 大人은 置鞬落羅, 日律推演, 이라고 하며, 모두 大帥가 되어서 檀石槐에 制屬한다.”라고 나타난다. 한편 『墨子』 「迎敵祠篇」에서 성곽의 방비병 배치에 대하여 서술한 부분에서, “성 위에는……백보마다 百長이 있고 그 곁에 大率이 있으며 가운데 大將이 있다.”고 하였다(森浩一, 1985:133). 아래에 있는 문장들을 볼 때, 女王國에서 檢察과 外交를 담당한 관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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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67)
‘然’은 ‘예, 그렇습니다.’, ‘諾’은 ‘알겠습니다.’라는 의미의 대답이다. 당시 일본열도 사회에서는 ‘噫’라는 말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噫는 漢音으로 ‘이’와 ‘아이’라는 음가를 가지고 있다. 전한말의 楊雄이 편찬한 『方言』에는 “南楚에서는 ‘然’이라고 해야 할 때 ‘欸’라고 하거나 ‘醫’라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晉의 郭璞은 ‘欸’의 음을 ‘醫’ 또는 ‘埃’와 동음이라고 하였다. 醫와 噫는 같은 소리이므로, 왜인은 남초인들과 같은 소리로 승낙이나 긍정을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다. 진수는 이러한 공통성에 주목하여 왜인의 대답하는 소리를 특별히 기록했을지 모른다. 남초는 초(장강 중류역)의 남방을 가리킨다. 진수는 왜가 이처럼 오·월·남초와 여러 가지 공통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森浩一, 1985:135).
색인어
- 이름
- 소강(少康), 배송지
- 지명
- 하나라, 회계(會稽), 왜(倭), 왜국(倭國), 회계(會稽), 동야(東冶), 담이(儋耳), 주애(朱崖), 왜, 여왕국, 이도국(伊都國), [왜국], [대방]군, 한국(韓國), [대방]군, 왜국倭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