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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의 풍습, 문화, 자연환경, 사회제도에 관한 설명

 
  • 국가왜(倭)
남자는 어른과 아이 [구별이] 없이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文身)을 한다.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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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略』에서는 “其俗男子皆點而文”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三國志』 〈倭傳〉에 의거한 것으로 생각되는 『冊府元龜』 권959 「外臣部」 〈土風條〉에서는 “點面文身”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魏略』의 “點而文”은 誤寫일 것이다(石原道博, 2005:45).

옛날부터 그 사신들이 중국으로 왔는데, [그들] 모두 스스로 대부(大夫)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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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夫:중국에서 大夫의 신분이나 지위는 시대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士와 卿 사이에 존재하는 지배층을 의미한다. 倭人들이 大夫를 어떤 신분을 지칭한 것인지 정확히 밝히기 어려우나, 본문에 보이는 國大人과 같은 지배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라고 칭하였다. 하나라의 왕[夏后] 소강(少康)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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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康:夏(전21세기~전16세기로 추정)의 제6대 왕으로서 제5대 왕인 相의 아들이라고 한다. 相이 弑害되어 하의 王統이 중간에 단절된 지 40년 만인 少康에 이르러 中興했으며, 재위기간은 21년이라고 한다.

의 아들이 회계(會稽)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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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稽:會稽郡이다. 이 군은 지금의 浙江省과 江蘇省에 걸쳐 있었다. 會稽郡은 秦代에 처음 설치되었고, 치소는 吳縣(지금의 江蘇省 蘇州市)이었다. 後漢 順帝 永建 4년(129) 會稽郡을 나누어 吳郡을 설치하였고(『後漢書』 「孝順孝沖孝質帝紀」 제6:257), 치소를 山陰으로 옮겼다. 지금의 浙江省 紹興市이다. 雒陽에서 동으로 3, 800리 떨어져 있으며, 14개의 城과 123, 090호, 인구 481, 196명이었다고 한다(『後漢書』 志 第22 「郡國志」4:3489). 三國時代에는 吳의 중심지가 되면서, 會稽郡은 분할되어 南部가 臨海郡, 建安郡, 東陽郡이 되었다

에 봉해지자,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여 교룡(蛟龍)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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蛟龍:상상의 동물로 龍의 일종이라고 한다.

의 해를 피하였다. 지금 왜(倭)의 수인(水人) [주006]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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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人:바다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잡거나 채취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海人 혹은 海部라고도 한다. 여러 지역에 산재하던 이 海人들은 후대에 해산물을 왕실로 공납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은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와 조개를 잘 잡는데, 문신은 원래는 큰 물고기와 바다짐승을 피하려는 것이었으나, 후에 점차 [문신을 하는 것은] 장식이 되었다. 여러 나라들의 문신은 각각 달라 [문신하는 자리나 크기가] 왼쪽이나 오른쪽 혹은 크거나 작은데, 왼쪽 혹은 오른쪽, 크고 혹은 작은데,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다. [주007]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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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에는 “男子皆黥面文身, 以其文左右大小別尊卑之差.”라고 되어 있다.

[왜국(倭國)까지의] 가는 길과 거리[道里]를 헤아려 보면, [그곳은] 마땅히 회계(會稽)동야(東冶) [주008]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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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冶:會稽郡 東冶縣을 가리킨다. 이 縣은 秦代에 처음 설치되었고, 그 治所는 지금의 福建省 福州市란 주장과 福建省 閩侯縣이란 주장이 있다. 그러나 두 곳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크게 다른 추정은 아니다.

의 동쪽에 있어야 한다. [주009]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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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稽에 속한 東冶의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 왔으나, 會稽와 東冶의 동쪽에 걸쳐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장강 하류역에 위치한 會稽의 군치 山陰(현재의 紹興市) 북위 30°로 九州의 남단보다 다소 아래의 위치이고, 東冶는 福建省의 福州市 혹은 福建省의 閩候縣의 어느 쪽이든 북위 26°로 오키나와 남단의 위치이다. 『三國志』 단계에서는 일본열도가 남북으로 뻗어 있는 형태이고 구야한국(김해)에서 남쪽으로 2, 000리 떨어진 위치에 북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둘레 5, 000리라고 하였으므로, 한 변을 약 1, 250리로 추산하면 560km 정도가 된다. 한편 현재의 紹興市에서 福州市까지의 위도 차이에 따른 거리는 450km 정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倭가 東冶의 동쪽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會稽의 治所에서 東冶縣에 이르는 거리 정도로 길게 남북으로 뻗어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나타나듯이, 조선시대 초기에도 일본이 동북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 九州를 북단으로 하고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풍속은 음란(淫亂)하지 않고, 남자는 모두 [모자를] 쓰지 않고 상투를 틀고, 목면(木緜) [주485]
각주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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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木緜”은 판야과(panja科)에 속하는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喬木으로 이해하고 있다. 紅色의 꽃이 피며 열매에 붙은 白毛는 담요 따위의 원료가 되고 織造는 무명보다 못하다. 古貝라고도 한다. 한편 무명이라고도 부르는 목면(cotton)이 중국에서 성행한 것은 당나라 시대 이후이고, 우리나라에는 문익점이 들여왔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3세기의 일본에 무명이 있었을 가능성은 적다. 그렇지만, 춘추전국시대 越族의 무덤에서 삼베, 모시, 비단, 그리고 목면(cotton)으로 짠 천이 福建省 崇安縣 太廟村에서 조사된 바가 있다(森浩一, 1985: 120).

으로 머리를 묶는다. [주011]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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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招頭”의 ‘招’는 ‘罥’, 즉 ‘얽는다’, ‘묶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孟子』 「盡心章句下」, “今之與楊墨辯者, 如追放豚既入其苙又從而招之.”).

그 옷은 모두 가로의 폭이 넓은 천[橫幅] [주012]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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橫幅:옷이 세로 폭이 넓은 것이 아니라 가로 폭이 넓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을 묶어서 서로 이었으며, 실로 꿰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인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거나 말아서 뒤로 묶었으며, 옷을 만드는 것이 홑이불[單被] [주013]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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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被:홑겹으로 만든 옷을 말한다.

과 같은데, 그 중앙을 뚫고 그곳으로 머리를 넣어 입는다. 벼 [주014]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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禾稻:정확하게는 長粒種 계통의 줄기가 긴 벼를 말한다.

와 모시 [주015]
각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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紵麻:모시만을 뜻하는지, 삼베를 짜는 大麻도 포함하여 모시와 대마를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를 재배하고 양잠을 하여 실을 만들며, 세모시, 좋은 비단 [주016]
각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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縑:일반적으로 아주 가는 비단실 두 줄로 짠 좋은 비단을 뜻한다.

그리고 솜 [주017]
각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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緜:木緜과 구별되는 眞緜. 두 마리의 누에가 하나의 고치를 만들면 실이 서로 얽히게 되어 실을 켤 수 없다. 이런 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이다.

을 산출한다.
그 땅에는 소, [주018]
각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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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열도에서도 이미 繩文時代부터 소뼈 등이 출토되고 있어서, 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다만 중국과 같이 농경에 널리 쓰인 것이 아니라, 제사의례용으로 적은 수만을 사육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사신들이 보지 못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말, 호랑이, 표범, 양 그리고 까치 [주019]
각주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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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의 이와 유사한 구절에 대하여 李賢은 “까치는 어떤 곳에서는 ‘닭[雞]’으로 씌어져 있다.”고 注記하였다.

가 없다. 무기로는 창, 방패 그리고 목궁(木弓)을 사용한다. 목궁은 아랫부분을 짧게 하고 윗부분을 길게 한다. 대나무 화살대는 어떤 것은 철로 된 화살촉이고 어떤 것은 뼈로 된 화살촉이다. 있거나 없는 것이 담이(儋耳) [주486]
각주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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儋耳는 儋耳郡으로서 지금의 海南省 儋州市 일원에 있었다.

주애(朱崖) [주021]
각주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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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崖는 朱崖郡으로서 지금의 海南省 海口市 일원에 해당된다.

와 같다. [주022]
각주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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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 「地理志」 〈粤地條〉:1669~1670에 따르면, 이 두 군의 “백성은 모두 삼베를 입는데 單被와 같으며, 중앙을 뚫어 머리를 넣어 입는다. 남자는 농사를 짓고, 벼와 모시를 심고, 여자는 양잠하고 직조한다. 말과 호랑이는 없다. 백성들은 다섯 가지 가축(五畜)을 기른다. 산에는 큰 사슴(麈麖)이 많다. 무기는 창, 방패, 칼, 목궁, 쇠뇌가 있으며, 대나무로 화살을 만들고 뼈로 활촉을 만든다.”고 하였다.

의 땅은 온난하고, 겨울과 여름에도 생채(生菜)를 먹고, 모두 맨발로 다닌다. 집과 방이 있는데, 부모형제는 기거하는 곳을 달리하고, 붉은색 안료를 몸에 바르는데, [주023]
각주 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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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에서는 “並以丹朱坋身, 如中國之粉也.”라고 하여, 丹朱를 몸에 뿌린다고 하였다.

중국에서 분(粉) [주024]
각주 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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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代의 字書인 『釋名』에 따르면 화장품으로서 粉이 있는데, 이는 도정한 곡물을 빻아서 분말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또한 胡粉이라는 것은 곡물을 빻은 가루(粉)에 활석가루(脂)를 섞어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활석은 石脂라고 부른다(森浩一, 1985:123~124). 朱를 쓰는 것이 粉과 같다고 한 것은 붉은색 안료를 화장품처럼 사용하였다는 뜻이다.

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먹거나 마시거나 변두(籩豆) [주025]
각주 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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籩豆:일반적으로 굽접시[高杯]를 말한다. 籩은 과일이나 魚脯를 담는 대나무를 짜서 만든 굽접시이고 豆는 식혜나 김치 등을 담는 나무로 만든 굽접시를 가리킨다. 『三國志』 권30, 〈東夷傳〉의 서문에서 東夷는 夷狄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희생을 올리는 俎나 豆와 같은 제기를 사용하는 의례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왜인조의 변두에 관한 기사도 東夷에는 箕子의 감화가 남아있다고 하는 전설적인 관념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특별히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森浩一, 1985:124).

를 사용하고 손으로 먹는다. 사람이 죽으면 관(棺) [주026]
각주 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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棺:직접 시체나 인골을 넣는 용기로서 ‘널’이라고도 칭한다. 흔히 목관을 떠올리기 쉽지만, 석관·옹관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彌生時代의 九州지역에서는 옹관묘가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옹관을 사용한 무덤들은 땅에 직접 구덩이를 파고 옹관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곽은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옹관이라는 특이한 현상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은 의문이 남는다.

은 쓰지만, 곽(槨) [주027]
각주 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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槨:棺의 겉을 싸는 外棺 혹은 관을 안치하는 墓室을 말한다. 일본의 고분에서는 목관의 주변 공간을 점토로 마무리하고 이를 점토곽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중국의 묘제와 비교하면 곽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은 없다. 흙을 쌓아 봉분[冢]을 만든다. 사람이 죽으면, 10여 일 동안 매장하지 않는데, [주028]
각주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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殯의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시신을 가매장하거나 실내에 안치해 둔 상태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이때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주029]
각주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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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에서는 “가인들은 곡읍하고, 죽은 사람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지 않으며, 등류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논다.”고 하여 다소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곡읍하는 주체가 喪主만이 아니라 家人이라고 하였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 것을 술과 음식을 바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상주(喪主)는 곡읍(哭泣) [주488]
각주 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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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泣:哭은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이고, 泣은 소리는 내지 않고 눈물만 흘리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와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술을 마신다. 장사(葬事)가 끝나면, 온 가족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목욕하는데, (중국의) 연목(練沐) [주031]
각주 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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練沐:小祥 때의 喪服인 練衣(누임질하여 보드랍게 한 명주로 만든 옷)를 입고 물에 들어가서 목욕하는 것을 말한다(石原道博, 2005:46~47).

과 같다.
그 사행[行]이 바다를 건너서 중국에 올 때는 항상 한 사람에게 머리를 빗지 못하게 하고, 서캐와 이를 없애지 못하도록 하며, 의복은 때가 묻어서 더럽고,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며, 부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여, 마치 초상을 치르는 사람[喪人]과 같았는데, 그를 지최(持衰) [주032]
각주 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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持衰:衰는 喪服을 말한다. 상복을 벗는 것을 ‘解衰’라고 하기 때문에, “持衰”는 아마 상복을 입는 것이나 喪事를 치르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된다(石原道博, 2005:46~47).

라고 불렀다. [주033]
각주 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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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에 이 기사는 “바다를 건너서 [중국으로] 올 때에는, 한 사람에게 머리를 빗거나 목욕을 하지 못하게 하고, 고기를 먹거나 부인과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를] ‘지최(持衰)’라고 하였다. 만약 [여행] 도중에 좋은 일과 이로운 일이 있으면, 재물을 가지고 그에게 갚아 준다. 만약 질병이 생기거나 재해를 만나면, 지최가 삼가하고 공손하지 않았다고 여겨서 곧 모두 함께 그를 죽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만약 [중국으로] 가는 자들이 [도중에] 길하고 좋으면, [일행] 모두는 그에게 생구(生口) [주034]
각주 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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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口:이에 대해서는 諸說이 있는데, 중국에 있는 日本留學生, 倭人捕魚者, 捕虜 그리고 奴婢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石原道博, 2005:47). 『漢書』 「李陵傳」에 따르면 변경지역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생구라고 한 예가 있으며, 이러한 용례는 『後漢書』와 『魏略』에도 보인다. 한편 『三國志』 「王昶傳」에 인용된 『任昭先別傳』에서는 매매되는 노비로 나타난다(森浩一, 1985:126).

와 재물을 주고, 만약 질병이나 폭풍 등의 재해를 만나면, 곧바로 그를 죽이려고 하면서, [그들은] 그 지최(持衰)가 삼가지 않았다고 한다. [주035]
각주 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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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에 이 기사는 “만약 [가는] 도중에 좋은 일과 이로운 일이 있으면, 재물을 가지고 그에게 갚아 준다. 만약 질병이 생기거나 재해를 만나면, 지최(持衰)가 삼가하고 공손하지 않았다고 여겨서 곧 모두 함께 그를 죽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진주(眞珠)와 청옥(靑玉)을 산출한다. [주036]
각주 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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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 권30 〈東夷傳〉의 裴松之의 주에 인용된 『魏略』의 「西戎傳」에서는 “積石의 남쪽에 큰 바다가 있는데, 산호와 진주가 난다.”고 하였으므로, 진주는 바다에서 나는 진주(pearl)로 볼 수 있다. 청옥은 『漢書』 「西戎傳」 〈莎車國〉에 “鐵山이 있는데, 靑玉이 난다.”고 하였으므로 암석 상태로 산출되는 옥 종류를 뜻함을 알 수 있다(森浩一, 1985:127). 그런데 玉에는 硬玉(Jadeite)과 軟玉(Nephrite)이 있으며, 이들은 전혀 다른 광물이다. 硬玉은 흔히 翡翠라고도 하며, 그 산지는 세계적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 中國의 玉에 대한 기호는 유명하지만, 硬玉이 산출되지는 않는다. 일본의 경우는 新潟縣 糸魚川市 姫川流域, 北陸의 海岸 및 富山縣의 翡翠海岸, 兵庫縣 養父市, 鳥取縣, 静岡縣 引佐地区 등 여러 곳에서 산출된다. 그래서 일본열도에서는 繩文時代부터 古墳時代까지 지속적으로 옥제품이 사용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曲玉(勾玉)이다. 한반도에서도 신라의 금관에 장식된 곡옥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경옥의 산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경옥제 곡옥은 대부분 일본열도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門田誠一, 1992:51~74).

그 산에서는 단(丹)이 나고, 그 나무로는 매화나무[枏], [주037]
각주 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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枏:‘枏’, ‘枬’은 모두 梅, 즉 매화나무의 古字이다. 흔히 녹나무로 번역하지만, 녹나무는 楠으로 표기한다(實吉達郞, 1977:134).

노송나무[杼], [주038]
각주 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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杼:檜, 즉 노송나무. 일본에서 ‘히노키’라고 부르는 나무이다(實吉達郞, 1977:134).

녹나무[豫樟], [주039]
각주 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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豫樟:흔히 楠으로 표기한다. 枕木과 樟木의 竝稱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모과나무[楺], [주489]
각주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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楺:木瓜로 표기되는 모과나무이다.

상수리나무[櫪], 감귤나무[投], [주041]
각주 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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那珂通世는 “投”는 柀(삼나무)의 誤記로서 杉(삼나무)이라고 주장하였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7). 그러나 감귤나무 중에서 열매가 굵은 것을 왕귤나무, 文旦을 投라고 한다(實吉達郞, 1977:134).

떡갈나무[橿], [주042]
각주 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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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는 “投橿”으로 두 글자가 붙어 있으나, 통설적으로 두 글자를 분리하여 해석해 왔다. ‘橿’은 곧 樫으로도 표기되는 떡갈나무이고, 投橿으로 부르는 나무를 달리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박태기나무[烏號], [주043]
각주 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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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號”는 산뽕나무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나, 뽕나무를 두 가지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박태기나무(花蘇芳, 학명은 Cercis chinensis)를 烏號라고 한다. 그러나 후사자꾸라(Euptelea polyandra)를 오인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實吉達郞, 1977:134). 아울러 烏號는 漢族의 전설상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黃帝가 가졌었다는 활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단풍나무[楓香] [주044]
각주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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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爾雅』 「釋木篇」에서 晉의 郭璞은 “楓欇欇”에 대하여 “楓樹似白楊, 葉圓而岐, 有脂有香, 今之楓香是.”라 注하였다(胡奇光·方環海, 2004:332). 가을에 나뭇잎이 고운 붉은색을 띠기 때문에 紅楓이라 하고, 그것을 또 丹楓이라고도 한다.

가 있다. 그 대나무로는 조릿대(篠)와 해장죽[簳] [주045]
각주 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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簳:학명은 Pleioblastus simonii, 영어로는 Medake이다(實吉達郞, 1977:134).

과 도지[桃支] [주046]
각주 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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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支:桃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桃竹은 나무가 堅實하여, 화살이나 지팡이의 재료로 적합하다.

가 있다. 생강[薑], 귤[橘], 산초[椒] 그리고 양하[蘘荷] [주047]
각주 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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蘘荷:학명은 Zingiber mioga. 일본어로 ‘묘오가’이다.

가 있지만, 이것들을 양념으로 쓸 줄은 모른다. 원숭이[獼猴] [주048]
각주 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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獼猴:일본원숭이. 猴는 猿보다 작은 원숭이를 가리킨다. 중국에는 恒河猴(廣西猴, 獼猴), 紅面猴, 金毛猴의 3종류의 원숭이가 있는데, 신장이 50cm, 체중 7~8kg 정도인데 비하여, 일본원숭이는 신장 50~70cm, 체중 평균 12kg이고 큰 것은 23kg에 이른다. 중국 원숭이와 구별하여 猴가 아니라 猿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實吉達郞, 1977:134).

와 검은 꿩[黑雉] [주049]
각주 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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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雉:일본 꿩. 중국 북부에서 한반도에 자생하는 꿩은 가슴이 오렌지색에 검은 반점이 있으며 목에는 흰 테두리가 있으나, 일본 꿩은 가슴털이 암록색이며 흰 테두리가 없기 때문에 정면에서 보면 앞부분 전체가 검게 보여서 검은 꿩이라고 한 것이다(實吉達郞, 1977:134).

이 있다.
그 풍속은 일을 거행하거나 [어디를] 갈 때, 말하거나 행동해야 하는 것이 있으면. 항상 뼈를 불에 태워서 점치는데, 그렇게 하여 길흉(吉凶)을 묻고, 맨 먼저 점친 내용을 알리는데, 그 말은 영귀(令龜) [주490]
각주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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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龜:중국의 점법을 뜻한다. 『春秋左傳』 〈文公18年條〉에 “令龜有咎”란 구절이 있다. 전609년 가을에 齊侯가 魯를 치기 위한 날을 잡자 곧 병이 들었는데, 의사가 가을까지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魯의 文公은 점을 치게 하면서,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齊侯가 죽기를 바랬다. 惠伯이 龜卜에게 명하였으며 楚丘라는 점쟁이가 점괘를 얻었다. 그는 말하기를 “齊侯는 그때까지 살지 못합니다만, 그 이유는 병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도 그가 왜 죽었는지를 들을 수 없습니다(노의 문공 역시 죽게 된다.). 구복을 명하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문공은 2월 정축에 죽었다. 이처럼 “令龜”란 말은 ‘命龜’와 같은 말로, 점을 칠 때 점을 쳐서 나올 내용을 점쟁이에게 미리 알리는 것을 말한다(森浩一, 1985:130).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고사에서 비롯되어 중국에서 점을 치는 방법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
그리고 唐代 段公路의 『北戶錄』 권2 〈鷄卵卜條〉에는 “倭國에서는 大事는 항상 뼈를 지져서 그 형상을 가지고 점치는데, 이전의 中州의 令龜와 같은 것으로서, 뼈에 그어진 금을 보고 길흉을 점친다.”로 기재되어 있다(石原道博, 2005:47~48). 실제로 사슴이나 멧돼지의 견갑골에 여러 곳을 지진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卜骨). 일본에서는 太占法이라고 한다.
한편 對馬島와 一岐島의 卜部(점술을 행하는 집단)가 행하는 풍습으로는 거북의 등껍질에 네모난 구멍을 파고, 껍질의 표면을 얇게 만든 다음, 그 부분을 불로 지져 금이 가게 한 다음, 兆竹으로 물을 부어넣어 고정시킨 다음, 깨끗한 종이로 균열을 확실하게 만든 다음 판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이 彌生時代부터 존재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의 법(法)과 같은 것으로서, [뼈가] 불에 타서 갈라진 금을 보고 앞으로의 일을 점친다. [주051]
각주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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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 〈倭傳〉에서는 간단하게 “灼骨以卜, 用決吉凶(뼈를 불에 태워서 占卜을 치는데, 그것으로써 吉凶을 결정한다.)”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들은 모이거나 행동할 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고, 천성이 술을 즐긴다.[배송지주1] 대인(大人) [주052]
각주 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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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人:일반적으로 한 사회집단의 長老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문장의 내용에 따라서는 한 집단 세력의 族長, 部落長 나아가 部族長을 가리킬 수도 있다. 중국 고대 사서에 기재되어 있는 大人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松田壽男의 논문(松田壽男, 1986:327~332)을 참조.

처럼 존경해야 할 사람을 만나면, 단지 손뼉을 치는데, [주053]
각주 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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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德明의 『經傳釋文』에서는 “지금의 倭人이 인사를 할 때 양손으로 손뼉을 친다. 鄭大夫(鄭玄)의 이야기와 같다. 무릇 옛날의 遺法이다.”라고 하였다. 인사할 때 손뼉을 치는 왜인의 관습을, 아마도 魏晉時代의 중국인은 중국 고대의 遺法이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기록하였을 것이다. 왜인의 풍속기사 중에서 籩豆, 令龜法, 博手 등, 중국 고대의 유풍이라는 생각되는 것들을 기록한 것은, 〈東夷傳〉 서문의 말미에서 “중국에서 예를 잃었을 때, 이를 四夷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그래서 그 나라를 순서대로 편찬하고 그 異同을 열거하여, 前史의 갖추어지지 못한 곳을 보완하였다.”고 한 취지에 따른 것이다. 〈倭人條〉에는 특히 이러한 취지에 부합되는 기사가 많다(森浩一, 1985:131).

그렇게 하는 것이 [중국에서의]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 사람들은 장수[壽考]하여, 어떤 이는 100살까지 살고, 어떤 이는 80살 내지 90살까지 산다. [주054]
각주 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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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야요이시대 인골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연령은 4~50대가 많아서, 100살까지 살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런데 春耕秋收로 年紀를 삼는다고 하였으므로 1년에 2살씩 계산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그 풍속은 나라[國]의 대인(大人)은 모두 4~5명의 부인을 두고, 하호(下戶) [주055]
각주 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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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戶: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국인이 저술한 漢文典籍에 등장하는 “下戶”는 중국은 물론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포함하여 ‘지배층인 豪民의 奴僕과 같은 처지에 있었던 民’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노태돈, 1999:137~138). 위의 기사의 내용을 통해서 ‘이 시기에 倭에는 大人→下戶→奴隸라는 3층의 계급사회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도 어떤 이는 2~3명의 부인을 두었다. 부인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물건을 훔치지 않고 소송으로 다투는 일[爭訟]도 적다. 법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죄가] 가벼운 자는 그 처와 자식을 몰수하고, 무거운 자는 그 문호(門戶) 및 종족(宗族)을 멸한다. [신분의] 존비(尊卑)에도 각각 등급이 있는데, 서로 잘 신복(臣服)한다. [주056]
각주 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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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京 中華書局本 正史 『三國志』 〈倭傳〉에는 문장이 “其犯法, 輕者沒其妻子, 重者滅其門戶. 及宗族尊卑, 各有次序, 足相臣服”으로 정리되어 있으나, “其犯法, 輕者沒其妻子, 重者滅其門戶及宗族. 尊卑各有次序, 足相臣服”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石原道博, 2005:48). 譯注者는 石原道博의 의견을 좇아서 문장을 해석하였다.


세금[租賦]을 거둔다. 저각(邸閣) [주057]
각주 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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邸閣:식량을 비축하는 큰 창고를 말한다. 〈倭人傳〉 이외에서 보이는 邸閣은 모두 군사용 창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므로, 여기에도 식량 등을 비축하는 군사용 창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森浩一, 1985:133).

도 있으며, [주058]
각주 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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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는 “有邸閣國, 國有市”라고 되어 있으나, “有邸閣, 國國有市”로 끊어서 해석하였다.

나라마다 시장이 있어서 있고 없는 것을 서로 교역하는데, [왕은] 대왜(大倭) [주059]
각주 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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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倭:일본의 사학자 중에서 일부는 大倭를 ‘大和朝廷’으로 해석하고, 다른 일부는 倭人 중의 大人으로 해석한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8).

를 시켜서 그것[교역]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여왕국의 이북에 특별히 일대솔(一大率) [주491]
각주 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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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大率”은 한 사람의 大率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率은 이끈다는 말이므로 帥와 뜻이 통한다. 실제로 ‘大帥’라는 용어는 『三國志』 〈鮮卑傳〉의 裴松之 주에 인용된 魏書의 “宴荔游等, 皆爲大師, 而制屬檀石槐.”라는 말에도 보인다. 20여 邑의 大人은 置鞬落羅, 日律推演, 이라고 하며, 모두 大帥가 되어서 檀石槐에 制屬한다.”라고 나타난다. 한편 『墨子』 「迎敵祠篇」에서 성곽의 방비병 배치에 대하여 서술한 부분에서, “성 위에는……백보마다 百長이 있고 그 곁에 大率이 있으며 가운데 大將이 있다.”고 하였다(森浩一, 1985:133). 아래에 있는 문장들을 볼 때, 女王國에서 檢察과 外交를 담당한 관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을 설치하여 여러 나라를 단속하고 살피도록 하였으므로 여러 나라는 그를 두려워하면서 꺼려하였다. [일대솔은] 항상 이도국(伊都國)에서 다스렸는데, 나라 안에 자사(刺史) [주061]
각주 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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刺史:漢代에 처음 설치되었다. 전한 武帝 元封 5년(전106)에 전국을 13개 州로 나누고 각 주에 刺史를 설치하였다. 자사의 秩祿은 六百石으로 질록 二千石인 郡守보다 관등이 낮았다. 매년 가을에 州 안의 각지를 돌면서 순찰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臧云浦 외 2인, 1991:240).

가 있는 것과 같다. [왜국]왕(倭國王)이 사신을 시켜서 경도(京都), [주062]
각주 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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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三國 魏나라의 수도인 洛陽(지금의 河南省 洛陽市)을 가리킨다.

[대방]군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 [주063]
각주 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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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韓國:이 시기에 한반도 남부에 있던 馬韓, 辰韓, 弁韓 등을 가리킨다.

에 보내거나 [대방]군이( 왜국倭國)에 사신을 파견하면, [그때마다] 항상 나루터로 와서 [사신을] 찾아서, 전달해서 보낸 문서와 [황제가] 하사하여 보내준 물건을 여왕에게 도착하도록 하는 데 실수나 착오가 없었다. [주064]
각주 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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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 不得差錯.”은 위와 같이, “전달해서 보낸 문서와 [황제가] 하사하여 보내준 물건을 여왕에게 도착하도록 하는데, 실수나 착오가 없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밖에도 “傳送한 문서와 賜遺한 물품을 찾아서 내보이다.” 혹은 “문서를 전송하고 賜遺한 물품은 여왕에게 도착하도록 하다.”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石原道博, 2005:48~49).

하호(下戶)가 대인(大人)과 도로에서 서로 마주칠 때에는 뒷걸음을 쳐서 돌아서 풀숲으로 들어간다. 말을 전달하거나 일을 설명할 때는 어떤 자는 몸을 웅크리고, 어떤 자는 무릎을 꿇고, 양손은 땅에 대는데 [주065]
각주 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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彌生時代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자료는 없지만, 古墳時代가 되면 埴輪이라 불리는 토기를 통해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대어 공경을 표하는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 그것은 공경을 나타내는 것이다. [상대에게] 답할 때는 ‘희(噫)’ [주066]
각주 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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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혹은 ‘하이’라는 일본어의 음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비교하자면, ‘예[然諾]’라고 하는 것과 같다. [주067]
각주 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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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然’은 ‘예, 그렇습니다.’, ‘諾’은 ‘알겠습니다.’라는 의미의 대답이다. 당시 일본열도 사회에서는 ‘噫’라는 말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噫는 漢音으로 ‘이’와 ‘아이’라는 음가를 가지고 있다. 전한말의 楊雄이 편찬한 『方言』에는 “南楚에서는 ‘然’이라고 해야 할 때 ‘欸’라고 하거나 ‘醫’라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晉의 郭璞은 ‘欸’의 음을 ‘醫’ 또는 ‘埃’와 동음이라고 하였다. 醫와 噫는 같은 소리이므로, 왜인은 남초인들과 같은 소리로 승낙이나 긍정을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다. 진수는 이러한 공통성에 주목하여 왜인의 대답하는 소리를 특별히 기록했을지 모른다. 남초는 초(장강 중류역)의 남방을 가리킨다. 진수는 왜가 이처럼 오·월·남초와 여러 가지 공통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森浩一, 1985:135).



 

주 001
『魏略』에서는 “其俗男子皆點而文”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三國志』 〈倭傳〉에 의거한 것으로 생각되는 『冊府元龜』 권959 「外臣部」 〈土風條〉에서는 “點面文身”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魏略』의 “點而文”은 誤寫일 것이다(石原道博, 2005:45).
주 002
大夫:중국에서 大夫의 신분이나 지위는 시대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士와 卿 사이에 존재하는 지배층을 의미한다. 倭人들이 大夫를 어떤 신분을 지칭한 것인지 정확히 밝히기 어려우나, 본문에 보이는 國大人과 같은 지배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주 003
少康:夏(전21세기~전16세기로 추정)의 제6대 왕으로서 제5대 왕인 相의 아들이라고 한다. 相이 弑害되어 하의 王統이 중간에 단절된 지 40년 만인 少康에 이르러 中興했으며, 재위기간은 21년이라고 한다.
주 004
會稽:會稽郡이다. 이 군은 지금의 浙江省과 江蘇省에 걸쳐 있었다. 會稽郡은 秦代에 처음 설치되었고, 치소는 吳縣(지금의 江蘇省 蘇州市)이었다. 後漢 順帝 永建 4년(129) 會稽郡을 나누어 吳郡을 설치하였고(『後漢書』 「孝順孝沖孝質帝紀」 제6:257), 치소를 山陰으로 옮겼다. 지금의 浙江省 紹興市이다. 雒陽에서 동으로 3, 800리 떨어져 있으며, 14개의 城과 123, 090호, 인구 481, 196명이었다고 한다(『後漢書』 志 第22 「郡國志」4:3489). 三國時代에는 吳의 중심지가 되면서, 會稽郡은 분할되어 南部가 臨海郡, 建安郡, 東陽郡이 되었다
주 005
蛟龍:상상의 동물로 龍의 일종이라고 한다.
주 006
水人:바다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잡거나 채취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海人 혹은 海部라고도 한다. 여러 지역에 산재하던 이 海人들은 후대에 해산물을 왕실로 공납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주 007
『後漢書』에는 “男子皆黥面文身, 以其文左右大小別尊卑之差.”라고 되어 있다.
주 008
東冶:會稽郡 東冶縣을 가리킨다. 이 縣은 秦代에 처음 설치되었고, 그 治所는 지금의 福建省 福州市란 주장과 福建省 閩侯縣이란 주장이 있다. 그러나 두 곳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크게 다른 추정은 아니다.
주 009
會稽에 속한 東冶의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 왔으나, 會稽와 東冶의 동쪽에 걸쳐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장강 하류역에 위치한 會稽의 군치 山陰(현재의 紹興市) 북위 30°로 九州의 남단보다 다소 아래의 위치이고, 東冶는 福建省의 福州市 혹은 福建省의 閩候縣의 어느 쪽이든 북위 26°로 오키나와 남단의 위치이다. 『三國志』 단계에서는 일본열도가 남북으로 뻗어 있는 형태이고 구야한국(김해)에서 남쪽으로 2, 000리 떨어진 위치에 북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둘레 5, 000리라고 하였으므로, 한 변을 약 1, 250리로 추산하면 560km 정도가 된다. 한편 현재의 紹興市에서 福州市까지의 위도 차이에 따른 거리는 450km 정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倭가 東冶의 동쪽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會稽의 治所에서 東冶縣에 이르는 거리 정도로 길게 남북으로 뻗어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나타나듯이, 조선시대 초기에도 일본이 동북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 九州를 북단으로 하고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 485
흔히 “木緜”은 판야과(panja科)에 속하는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喬木으로 이해하고 있다. 紅色의 꽃이 피며 열매에 붙은 白毛는 담요 따위의 원료가 되고 織造는 무명보다 못하다. 古貝라고도 한다. 한편 무명이라고도 부르는 목면(cotton)이 중국에서 성행한 것은 당나라 시대 이후이고, 우리나라에는 문익점이 들여왔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3세기의 일본에 무명이 있었을 가능성은 적다. 그렇지만, 춘추전국시대 越族의 무덤에서 삼베, 모시, 비단, 그리고 목면(cotton)으로 짠 천이 福建省 崇安縣 太廟村에서 조사된 바가 있다(森浩一, 1985: 120).
주 011
“招頭”의 ‘招’는 ‘罥’, 즉 ‘얽는다’, ‘묶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孟子』 「盡心章句下」, “今之與楊墨辯者, 如追放豚既入其苙又從而招之.”).
주 012
橫幅:옷이 세로 폭이 넓은 것이 아니라 가로 폭이 넓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 013
單被:홑겹으로 만든 옷을 말한다.
주 014
禾稻:정확하게는 長粒種 계통의 줄기가 긴 벼를 말한다.
주 015
紵麻:모시만을 뜻하는지, 삼베를 짜는 大麻도 포함하여 모시와 대마를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주 016
縑:일반적으로 아주 가는 비단실 두 줄로 짠 좋은 비단을 뜻한다.
주 017
緜:木緜과 구별되는 眞緜. 두 마리의 누에가 하나의 고치를 만들면 실이 서로 얽히게 되어 실을 켤 수 없다. 이런 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이다.
주 018
일본열도에서도 이미 繩文時代부터 소뼈 등이 출토되고 있어서, 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다만 중국과 같이 농경에 널리 쓰인 것이 아니라, 제사의례용으로 적은 수만을 사육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사신들이 보지 못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 019
『後漢書』의 이와 유사한 구절에 대하여 李賢은 “까치는 어떤 곳에서는 ‘닭[雞]’으로 씌어져 있다.”고 注記하였다.
주 486
儋耳는 儋耳郡으로서 지금의 海南省 儋州市 일원에 있었다.
주 021
朱崖는 朱崖郡으로서 지금의 海南省 海口市 일원에 해당된다.
주 022
『漢書』 「地理志」 〈粤地條〉:1669~1670에 따르면, 이 두 군의 “백성은 모두 삼베를 입는데 單被와 같으며, 중앙을 뚫어 머리를 넣어 입는다. 남자는 농사를 짓고, 벼와 모시를 심고, 여자는 양잠하고 직조한다. 말과 호랑이는 없다. 백성들은 다섯 가지 가축(五畜)을 기른다. 산에는 큰 사슴(麈麖)이 많다. 무기는 창, 방패, 칼, 목궁, 쇠뇌가 있으며, 대나무로 화살을 만들고 뼈로 활촉을 만든다.”고 하였다.
주 023
『後漢書』에서는 “並以丹朱坋身, 如中國之粉也.”라고 하여, 丹朱를 몸에 뿌린다고 하였다.
주 024
漢代의 字書인 『釋名』에 따르면 화장품으로서 粉이 있는데, 이는 도정한 곡물을 빻아서 분말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또한 胡粉이라는 것은 곡물을 빻은 가루(粉)에 활석가루(脂)를 섞어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활석은 石脂라고 부른다(森浩一, 1985:123~124). 朱를 쓰는 것이 粉과 같다고 한 것은 붉은색 안료를 화장품처럼 사용하였다는 뜻이다.
주 025
籩豆:일반적으로 굽접시[高杯]를 말한다. 籩은 과일이나 魚脯를 담는 대나무를 짜서 만든 굽접시이고 豆는 식혜나 김치 등을 담는 나무로 만든 굽접시를 가리킨다. 『三國志』 권30, 〈東夷傳〉의 서문에서 東夷는 夷狄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희생을 올리는 俎나 豆와 같은 제기를 사용하는 의례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왜인조의 변두에 관한 기사도 東夷에는 箕子의 감화가 남아있다고 하는 전설적인 관념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특별히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森浩一, 1985:124).
주 026
棺:직접 시체나 인골을 넣는 용기로서 ‘널’이라고도 칭한다. 흔히 목관을 떠올리기 쉽지만, 석관·옹관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彌生時代의 九州지역에서는 옹관묘가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옹관을 사용한 무덤들은 땅에 직접 구덩이를 파고 옹관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곽은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옹관이라는 특이한 현상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은 의문이 남는다.
주 027
槨:棺의 겉을 싸는 外棺 혹은 관을 안치하는 墓室을 말한다. 일본의 고분에서는 목관의 주변 공간을 점토로 마무리하고 이를 점토곽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중국의 묘제와 비교하면 곽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 028
殯의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시신을 가매장하거나 실내에 안치해 둔 상태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주 029
『後漢書』에서는 “가인들은 곡읍하고, 죽은 사람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지 않으며, 등류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논다.”고 하여 다소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곡읍하는 주체가 喪主만이 아니라 家人이라고 하였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 것을 술과 음식을 바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주 488
哭泣:哭은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이고, 泣은 소리는 내지 않고 눈물만 흘리는 것이다.
주 031
練沐:小祥 때의 喪服인 練衣(누임질하여 보드랍게 한 명주로 만든 옷)를 입고 물에 들어가서 목욕하는 것을 말한다(石原道博, 2005:46~47).
주 032
持衰:衰는 喪服을 말한다. 상복을 벗는 것을 ‘解衰’라고 하기 때문에, “持衰”는 아마 상복을 입는 것이나 喪事를 치르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된다(石原道博, 2005:46~47).
주 033
『後漢書』에 이 기사는 “바다를 건너서 [중국으로] 올 때에는, 한 사람에게 머리를 빗거나 목욕을 하지 못하게 하고, 고기를 먹거나 부인과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를] ‘지최(持衰)’라고 하였다. 만약 [여행] 도중에 좋은 일과 이로운 일이 있으면, 재물을 가지고 그에게 갚아 준다. 만약 질병이 생기거나 재해를 만나면, 지최가 삼가하고 공손하지 않았다고 여겨서 곧 모두 함께 그를 죽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주 034
生口:이에 대해서는 諸說이 있는데, 중국에 있는 日本留學生, 倭人捕魚者, 捕虜 그리고 奴婢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石原道博, 2005:47). 『漢書』 「李陵傳」에 따르면 변경지역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생구라고 한 예가 있으며, 이러한 용례는 『後漢書』와 『魏略』에도 보인다. 한편 『三國志』 「王昶傳」에 인용된 『任昭先別傳』에서는 매매되는 노비로 나타난다(森浩一, 1985:126).
주 035
『後漢書』에 이 기사는 “만약 [가는] 도중에 좋은 일과 이로운 일이 있으면, 재물을 가지고 그에게 갚아 준다. 만약 질병이 생기거나 재해를 만나면, 지최(持衰)가 삼가하고 공손하지 않았다고 여겨서 곧 모두 함께 그를 죽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주 036
『三國志』 권30 〈東夷傳〉의 裴松之의 주에 인용된 『魏略』의 「西戎傳」에서는 “積石의 남쪽에 큰 바다가 있는데, 산호와 진주가 난다.”고 하였으므로, 진주는 바다에서 나는 진주(pearl)로 볼 수 있다. 청옥은 『漢書』 「西戎傳」 〈莎車國〉에 “鐵山이 있는데, 靑玉이 난다.”고 하였으므로 암석 상태로 산출되는 옥 종류를 뜻함을 알 수 있다(森浩一, 1985:127). 그런데 玉에는 硬玉(Jadeite)과 軟玉(Nephrite)이 있으며, 이들은 전혀 다른 광물이다. 硬玉은 흔히 翡翠라고도 하며, 그 산지는 세계적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 中國의 玉에 대한 기호는 유명하지만, 硬玉이 산출되지는 않는다. 일본의 경우는 新潟縣 糸魚川市 姫川流域, 北陸의 海岸 및 富山縣의 翡翠海岸, 兵庫縣 養父市, 鳥取縣, 静岡縣 引佐地区 등 여러 곳에서 산출된다. 그래서 일본열도에서는 繩文時代부터 古墳時代까지 지속적으로 옥제품이 사용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曲玉(勾玉)이다. 한반도에서도 신라의 금관에 장식된 곡옥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경옥의 산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경옥제 곡옥은 대부분 일본열도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門田誠一, 1992:51~74).
주 037
枏:‘枏’, ‘枬’은 모두 梅, 즉 매화나무의 古字이다. 흔히 녹나무로 번역하지만, 녹나무는 楠으로 표기한다(實吉達郞, 1977:134).
주 038
杼:檜, 즉 노송나무. 일본에서 ‘히노키’라고 부르는 나무이다(實吉達郞, 1977:134).
주 039
豫樟:흔히 楠으로 표기한다. 枕木과 樟木의 竝稱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주 489
楺:木瓜로 표기되는 모과나무이다.
주 041
那珂通世는 “投”는 柀(삼나무)의 誤記로서 杉(삼나무)이라고 주장하였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7). 그러나 감귤나무 중에서 열매가 굵은 것을 왕귤나무, 文旦을 投라고 한다(實吉達郞, 1977:134).
주 042
원문에는 “投橿”으로 두 글자가 붙어 있으나, 통설적으로 두 글자를 분리하여 해석해 왔다. ‘橿’은 곧 樫으로도 표기되는 떡갈나무이고, 投橿으로 부르는 나무를 달리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 043
“烏號”는 산뽕나무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나, 뽕나무를 두 가지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박태기나무(花蘇芳, 학명은 Cercis chinensis)를 烏號라고 한다. 그러나 후사자꾸라(Euptelea polyandra)를 오인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實吉達郞, 1977:134). 아울러 烏號는 漢族의 전설상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黃帝가 가졌었다는 활의 이름이기도 하다.
주 044
『爾雅』 「釋木篇」에서 晉의 郭璞은 “楓欇欇”에 대하여 “楓樹似白楊, 葉圓而岐, 有脂有香, 今之楓香是.”라 注하였다(胡奇光·方環海, 2004:332). 가을에 나뭇잎이 고운 붉은색을 띠기 때문에 紅楓이라 하고, 그것을 또 丹楓이라고도 한다.
주 045
簳:학명은 Pleioblastus simonii, 영어로는 Medake이다(實吉達郞, 1977:134).
주 046
桃支:桃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桃竹은 나무가 堅實하여, 화살이나 지팡이의 재료로 적합하다.
주 047
蘘荷:학명은 Zingiber mioga. 일본어로 ‘묘오가’이다.
주 048
獼猴:일본원숭이. 猴는 猿보다 작은 원숭이를 가리킨다. 중국에는 恒河猴(廣西猴, 獼猴), 紅面猴, 金毛猴의 3종류의 원숭이가 있는데, 신장이 50cm, 체중 7~8kg 정도인데 비하여, 일본원숭이는 신장 50~70cm, 체중 평균 12kg이고 큰 것은 23kg에 이른다. 중국 원숭이와 구별하여 猴가 아니라 猿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實吉達郞, 1977:134).
주 049
黑雉:일본 꿩. 중국 북부에서 한반도에 자생하는 꿩은 가슴이 오렌지색에 검은 반점이 있으며 목에는 흰 테두리가 있으나, 일본 꿩은 가슴털이 암록색이며 흰 테두리가 없기 때문에 정면에서 보면 앞부분 전체가 검게 보여서 검은 꿩이라고 한 것이다(實吉達郞, 1977:134).
주 490
令龜:중국의 점법을 뜻한다. 『春秋左傳』 〈文公18年條〉에 “令龜有咎”란 구절이 있다. 전609년 가을에 齊侯가 魯를 치기 위한 날을 잡자 곧 병이 들었는데, 의사가 가을까지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魯의 文公은 점을 치게 하면서,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齊侯가 죽기를 바랬다. 惠伯이 龜卜에게 명하였으며 楚丘라는 점쟁이가 점괘를 얻었다. 그는 말하기를 “齊侯는 그때까지 살지 못합니다만, 그 이유는 병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도 그가 왜 죽었는지를 들을 수 없습니다(노의 문공 역시 죽게 된다.). 구복을 명하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문공은 2월 정축에 죽었다. 이처럼 “令龜”란 말은 ‘命龜’와 같은 말로, 점을 칠 때 점을 쳐서 나올 내용을 점쟁이에게 미리 알리는 것을 말한다(森浩一, 1985:130).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고사에서 비롯되어 중국에서 점을 치는 방법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
그리고 唐代 段公路의 『北戶錄』 권2 〈鷄卵卜條〉에는 “倭國에서는 大事는 항상 뼈를 지져서 그 형상을 가지고 점치는데, 이전의 中州의 令龜와 같은 것으로서, 뼈에 그어진 금을 보고 길흉을 점친다.”로 기재되어 있다(石原道博, 2005:47~48). 실제로 사슴이나 멧돼지의 견갑골에 여러 곳을 지진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卜骨). 일본에서는 太占法이라고 한다.
한편 對馬島와 一岐島의 卜部(점술을 행하는 집단)가 행하는 풍습으로는 거북의 등껍질에 네모난 구멍을 파고, 껍질의 표면을 얇게 만든 다음, 그 부분을 불로 지져 금이 가게 한 다음, 兆竹으로 물을 부어넣어 고정시킨 다음, 깨끗한 종이로 균열을 확실하게 만든 다음 판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이 彌生時代부터 존재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주 051
『後漢書』 〈倭傳〉에서는 간단하게 “灼骨以卜, 用決吉凶(뼈를 불에 태워서 占卜을 치는데, 그것으로써 吉凶을 결정한다.)”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주 052
大人:일반적으로 한 사회집단의 長老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문장의 내용에 따라서는 한 집단 세력의 族長, 部落長 나아가 部族長을 가리킬 수도 있다. 중국 고대 사서에 기재되어 있는 大人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松田壽男의 논문(松田壽男, 1986:327~332)을 참조.
주 053
陸德明의 『經傳釋文』에서는 “지금의 倭人이 인사를 할 때 양손으로 손뼉을 친다. 鄭大夫(鄭玄)의 이야기와 같다. 무릇 옛날의 遺法이다.”라고 하였다. 인사할 때 손뼉을 치는 왜인의 관습을, 아마도 魏晉時代의 중국인은 중국 고대의 遺法이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기록하였을 것이다. 왜인의 풍속기사 중에서 籩豆, 令龜法, 博手 등, 중국 고대의 유풍이라는 생각되는 것들을 기록한 것은, 〈東夷傳〉 서문의 말미에서 “중국에서 예를 잃었을 때, 이를 四夷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그래서 그 나라를 순서대로 편찬하고 그 異同을 열거하여, 前史의 갖추어지지 못한 곳을 보완하였다.”고 한 취지에 따른 것이다. 〈倭人條〉에는 특히 이러한 취지에 부합되는 기사가 많다(森浩一, 1985:131).
주 054
실제로 야요이시대 인골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연령은 4~50대가 많아서, 100살까지 살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런데 春耕秋收로 年紀를 삼는다고 하였으므로 1년에 2살씩 계산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주 055
下戶: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국인이 저술한 漢文典籍에 등장하는 “下戶”는 중국은 물론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포함하여 ‘지배층인 豪民의 奴僕과 같은 처지에 있었던 民’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노태돈, 1999:137~138). 위의 기사의 내용을 통해서 ‘이 시기에 倭에는 大人→下戶→奴隸라는 3층의 계급사회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 056
北京 中華書局本 正史 『三國志』 〈倭傳〉에는 문장이 “其犯法, 輕者沒其妻子, 重者滅其門戶. 及宗族尊卑, 各有次序, 足相臣服”으로 정리되어 있으나, “其犯法, 輕者沒其妻子, 重者滅其門戶及宗族. 尊卑各有次序, 足相臣服”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石原道博, 2005:48). 譯注者는 石原道博의 의견을 좇아서 문장을 해석하였다.
주 057
邸閣:식량을 비축하는 큰 창고를 말한다. 〈倭人傳〉 이외에서 보이는 邸閣은 모두 군사용 창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므로, 여기에도 식량 등을 비축하는 군사용 창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森浩一, 1985:133).
주 058
원문에는 “有邸閣國, 國有市”라고 되어 있으나, “有邸閣, 國國有市”로 끊어서 해석하였다.
주 059
大倭:일본의 사학자 중에서 일부는 大倭를 ‘大和朝廷’으로 해석하고, 다른 일부는 倭人 중의 大人으로 해석한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8).
주 491
“一大率”은 한 사람의 大率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率은 이끈다는 말이므로 帥와 뜻이 통한다. 실제로 ‘大帥’라는 용어는 『三國志』 〈鮮卑傳〉의 裴松之 주에 인용된 魏書의 “宴荔游等, 皆爲大師, 而制屬檀石槐.”라는 말에도 보인다. 20여 邑의 大人은 置鞬落羅, 日律推演, 이라고 하며, 모두 大帥가 되어서 檀石槐에 制屬한다.”라고 나타난다. 한편 『墨子』 「迎敵祠篇」에서 성곽의 방비병 배치에 대하여 서술한 부분에서, “성 위에는……백보마다 百長이 있고 그 곁에 大率이 있으며 가운데 大將이 있다.”고 하였다(森浩一, 1985:133). 아래에 있는 문장들을 볼 때, 女王國에서 檢察과 外交를 담당한 관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 061
刺史:漢代에 처음 설치되었다. 전한 武帝 元封 5년(전106)에 전국을 13개 州로 나누고 각 주에 刺史를 설치하였다. 자사의 秩祿은 六百石으로 질록 二千石인 郡守보다 관등이 낮았다. 매년 가을에 州 안의 각지를 돌면서 순찰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臧云浦 외 2인, 1991:240).
주 062
京都:三國 魏나라의 수도인 洛陽(지금의 河南省 洛陽市)을 가리킨다.
주 063
諸韓國:이 시기에 한반도 남부에 있던 馬韓, 辰韓, 弁韓 등을 가리킨다.
주 064
“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 不得差錯.”은 위와 같이, “전달해서 보낸 문서와 [황제가] 하사하여 보내준 물건을 여왕에게 도착하도록 하는데, 실수나 착오가 없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밖에도 “傳送한 문서와 賜遺한 물품을 찾아서 내보이다.” 혹은 “문서를 전송하고 賜遺한 물품은 여왕에게 도착하도록 하다.”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石原道博, 2005:48~49).
주 065
彌生時代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자료는 없지만, 古墳時代가 되면 埴輪이라 불리는 토기를 통해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대어 공경을 표하는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주 066
‘아이’ 혹은 ‘하이’라는 일본어의 음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주 067
‘然’은 ‘예, 그렇습니다.’, ‘諾’은 ‘알겠습니다.’라는 의미의 대답이다. 당시 일본열도 사회에서는 ‘噫’라는 말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噫는 漢音으로 ‘이’와 ‘아이’라는 음가를 가지고 있다. 전한말의 楊雄이 편찬한 『方言』에는 “南楚에서는 ‘然’이라고 해야 할 때 ‘欸’라고 하거나 ‘醫’라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晉의 郭璞은 ‘欸’의 음을 ‘醫’ 또는 ‘埃’와 동음이라고 하였다. 醫와 噫는 같은 소리이므로, 왜인은 남초인들과 같은 소리로 승낙이나 긍정을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다. 진수는 이러한 공통성에 주목하여 왜인의 대답하는 소리를 특별히 기록했을지 모른다. 남초는 초(장강 중류역)의 남방을 가리킨다. 진수는 왜가 이처럼 오·월·남초와 여러 가지 공통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森浩一, 1985:135).
 
이름
소강(少康) , 배송지
지명
하나라 , 회계(會稽) , 왜(倭) , 왜국(倭國) , 회계(會稽) , 동야(東冶) , 담이(儋耳) , 주애(朱崖) , , 여왕국 , 이도국(伊都國) , [왜국] , [대방]군 , 한국(韓國) , [대방]군 , 왜국倭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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