倭:唐代(618~907) 이전에 중국인이 일본인이나 그 국가를 일컬은 호칭이다. 『漢書』(권28下 「地理志下」 〈燕地條〉:1658~1659)에는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이라 기재되어 있고, 이 기사에 唐의 顔師古는 “『魏略』云,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이라고 注記하였다. 『後漢書』에서는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嶋爲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이라고 하였다.
帶方郡:2세기 말경부터 遼東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펴고 있던 公孫氏가 公孫康의 치세인 204년경에 樂浪郡 屯有縣(지금의 북한 黃州) 이남의 옛 辰番郡의 땅에 설치한 郡이다. 2세기 초부터 고구려가 점차 강성해지고, 그 중엽에는 한강 이남 지역에서 三韓이 강성해지면서 樂浪郡이 그 지배력에 한계를 보이자, 이 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이후 樂浪郡과 帶方郡에 대한 지배권이 曹魏 明帝 景初 연간(237~239)인 公孫淵의 치세에 魏로 돌아가고, 다시 그것을 계승한 西晉에게 귀속되었다. 그러나 이후 高句麗와 百濟가 세력을 신장하면서 계속 樂浪郡과 帶方郡에 압박을 가하자, 2郡의 세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 美川王(재위 300~330)은 313년에 樂浪郡을 먼저 통합하였고, 그 이듬해 帶方郡이 역시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었다. 이리하여 漢 武帝가 기원전 108년에 古朝鮮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中國의 郡縣은 422년 만에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三國志』 권30 「東夷傳」:830;그리고 李基白·李基東, 1982:69~70 및 石原道博, 2005:39). 韓과 倭는 帶方郡이 관할하는 지역으로 간주되었으므로, 한과 왜는 낙랑군이 아니라 대방군을 기점으로 하여 그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첫머리의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부분은 『漢書』의 顔師古의 주에 인용된 『魏略』의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그래서 『三國志』 〈東夷傳〉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魚鰥이 편찬한 『魏略』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정리한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魏略』이 나온 시기도 太康 연간(280~289)으로 『三國志』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張鵬一, 1924;山尾幸久, 1972:37~45).
『漢書』 「地理志」에 “百餘國”으로 되어 있고, 顔師古의 주에 인용된 『魏略』에는 “依山島爲國”으로 되어 있어, “國邑”이라고 한 것은 『三國志』뿐이다(주375) 참조). 중국 고대에는 사람이 집주한 곳을 ‘邑’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몇 호로 이루어진 것부터 어느 정도 도시화되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큰 규모, 나아가서는 왕이 있는 都邑까지 다양하다. ‘國’은 도읍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읍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국가구조를 都市國家 또는 邑制國家라고 하였으며,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중앙집권체제의 영토국가로 전환되면서 邑은 점차 縣으로 편제되었고, 邑 내부는 몇 개의 里로 나누어졌다(森浩一, 1985:103). 한편 國邑은 都城이나 國의 首邑 혹은 제후들의 封地를 뜻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기사의 ‘國邑’이란 표현은 國과 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今”이라는 용어는 『三國志』 권30 중 烏丸과 鮮卑 관련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東夷傳〉에만 13사례가 나온다. 그러나 이 ‘今’이 반드시 陳壽의 『三國志」 편찬 당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今句麗王宮是也”에서 고구려왕 궁은 236~247년 사이에 『三國志』에 보이며 3세기 중엽에 재위하였던 왕이다. 그러므로 ‘今’은 陳壽가 사용한 원사료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진수는 「東夷傳」의 찬술에서 원사료에 큰 첨삭을 가하지 않고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森浩一, 1985:104~105).
韓國:한반도 남부의 三韓(馬韓, 辰韓, 弁韓)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주로 대방군에서 일본열도로 가는 해로에 접한 馬韓과 弁韓 지역, 지금의 京畿道, 忠淸道, 全羅道, 慶尙南道 지역을 가리킨다.
“其北岸”이라고 하여 마치 狗耶韓國이 왜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읽을 수도 있으나, 아래 문장에서 “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 及郡使倭國”이라 하여 諸韓國이 魏의 京都나 帶方郡과 마찬가지로 왜의 일부가 아니라 外國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북쪽 기슭이 아니라 북쪽 대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那珂通世는 “‘其’字는 왜를 받는 말로, 皇國으로부터 북쪽에 해당하는 대안이라는 뜻이다.”라고 해석하였고, 日野開三郞도 바다를 기준으로 그 남북안을 결정하는 용례가 당송대에 있었음을 지적하여 那珂의 해석을 보완한 바 있다(森浩一, 1985:108).
狗邪韓國:弁辰(韓) 12國의 하나인 加羅로서 지금의 慶尙南道 남부의 金海 지역을 가리킨다. 『後漢書』에서는 “拘邪韓國”, 『翰苑』에 인용된 『魏略』에는 “拘耶韓國”으로 기재되어 있다(石原道博, 2005:40).
里:『春秋穀梁傳』을 위시한 고대 중국의 典籍 등에 따르면, 거의 모두 1里는 300步라고 기재되어 있다. 魏의 1尺은 24.5cm로 복원되고 있으므로 1里의 실제 거리는 435m 정도이다. 『三國志』의 道程이나 日程에 관한 전체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이 거리를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에는 하루 평균 육로로 40里, 수로로도 40里를 여행하였다(山尾幸久, 1972:62~70). 한편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까지 7000里라고 한 것은 실제 거리가 아니라 郡에서 구야한국까지 여행하는 데 걸린 날짜에 40里를 곱해서 얻은 수치일 가능성도 있다. 〈韓傳〉에서 “方四千里”라고 한 기록과 함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거나 과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대마도로 가는 일정이나 대마도의 크기에 대한 부분에서도 동일한 경향이 확인된다.
對馬國:현재의 對馬島를 가리킨다. 對馬島는 ‘쓰시마’라고 읽는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면서 교역을 하기 편리한 나루(津, 일본음으로 쓰)가 많은 섬이라는 뜻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武光誠, 1986:146). 실제로 신숙주의 『海東諸國記』에도 82개의 포구를 조사·기록하였다.
卑狗:‘히코’라고 읽을 수 있다면, 比跪(히코)나 彦(히코) 등으로 표기되는 수장에 대한 존칭이라고 생각된다. 埼玉縣 稻荷山古墳 철검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철검의 명문은 “辛亥年七月中記 乎獲居臣上祖 名意富比垝 其兒多加利足尼 其兒名弓已加利獲居 其兒名多加披次獲居 其兒名多沙鬼獲居 其兒名半弖比 其兒名加差披余 其兒名乎獲居臣 世世爲杖刀人首 奉事來至今 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 吾左治天下 令作此百練利刀 記吾奉事根原也.”인데, 그중에 “比垝”가 바로 ‘히코’에 해당한다. 그 밖에도 이 명문 속에는 “스쿠네(足尼, 宿禰)”, “와케(獲居, 別)” 등과 같은 존칭이 보인다. 이처럼 히코, 스쿠네, 와케 등은 일본열도에서 널리 쓰이던 호족이나 수장에 대한 존칭이었다.
卑奴母離:對馬, 壹岐, 奴, 不彌 4국에서 副官으로 나타나는 직명이다. ‘히나모리’로 읽을 수 있다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夷守(히나모리)’로 추정할 수 있다.(石原道博, 2005:40). 夷守는 일찍부터 변경 지역을 지키는 사람이나 그 역할 또는 장소를 의미하였다. 도성에 멀리 떨어진 지역 중에서 방어나 치안의 요지에 두었다. 이러한 용례에 따르면, 현지의 호족이 임명된 것이 아니라 이들 4국을 관장하는 邪馬臺國에서 파견한 감독관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方四百里”라고 한 경우는 한 변의 길이가 400리임을 뜻한다. 둘레를 나타낼 때는 周로 표현한다. 실제로 대마도는 남북 82km, 동서 18km, 면적 약 709km2이다. 그런데 400리 사방은 30000km2이므로 40배가 넘는 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대마도는 섬 대부분이 해발고도 400m 내외의 험준한 산악지형이며, 전 면적의 80%가 울창한 원시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륙의 산지들은 그 경사가 심하고 해안의 산지들도 바다를 향하여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경작지는 3%에 불과하다.
『三國志』 〈東夷傳〉의 각국 호수 기재방법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부여·고구려·동옥저처럼 “戶八萬”과 같이 기재한 경우, 마한·변한·진한처럼 “大國 萬餘家, 小國 數千家, 總十餘萬戶”와 같이 기재한 경우, 그리고 “有千餘戶”(對馬國), “有三千許家”(一支國), “有四千餘戶”(末盧國), “有千餘戶”(伊都國), “有二萬餘戶”(奴國), “有千餘家”(不彌國), “可五萬餘戶”(投馬國), “可七萬餘戶”(邪馬臺國)와 같이 기재한 경우다. 특히 왜에 관한 기록이 다소 장황한 경향이 있다. 특히 投馬國과 邪馬臺國의 경우는 “有”라고 하지 않고 “可”, 즉 “대략”이라고 한 점도 특징이다. 이는 직접 이곳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傳聞에 따른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북쪽은 한반도의 구야한국을 비롯한 삼한 지역이고, 남쪽은 九州地域 일대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적으로도 철기와 같은 한반도 계통의 유물과 銅矛와 같은 北部 九州와 동일한 유물의 두 계통이 존재한다(武光誠, 1986: 144~146).
瀚海:지금의 對馬海峽에 해당한다. 중국 고대의 여타 漢文典籍에 기재된 瀚海는 보통 北海(北極海), 바이칼湖 그리고 몽골사막의 서북부 등을 가리켰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瀚海는 고유명사로 보기보다는 일반명사로서 ‘큰 바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史記』에서는 곽거병이 흉노 정벌 시에 도착한 북쪽 경계를 한해라고 한 것처럼, 중국이 알고 있는 세계의 동쪽 끝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森浩一, 1985:109~110).
一大國:“一支國”의 誤記이고, 一支國은 지금의 壹岐(이키)이다. 그 증거는 『梁書』와 『北史』에 “一支”로, 『古事記』에는 “伊伎國”으로, 『國造本紀』에는 “伊吉島”로 그리고 『日本書紀』에는 “壹岐島”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石原道博, 2005:40~41).
末盧國:‘마쓰로’, ‘마쓰라’ 등으로 읽을 수 있으며, 이전의 肥前 松浦郡(마쓰라군)으로서 지금의 名護屋(나고야) 혹은 唐津(가라쓰) 부근에 해당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末盧國은 『古事記』에는 “梅豆羅(메즈라)” 혹은 “末羅(마쓰라)”로 기재되어 있고, 『日本書紀』에는 “松浦(마쓰우라, 마쓰라)”라고 기재되어 있다(石原道博, 2005:40~41).
伊都國:이전의 怡土郡(이토군)으로, 지금은 糸島郡(이토시마군)의 深江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伊都(이토)는 伊斗, 伊蘇, 伊覩라고 쓰기도 한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0~41). 1974·1975년에 糸島郡 前原町 三雲 南小路에서 조사된 옹관묘에서는 前漢時代 銅鏡 22면, 비취곡옥 1개, 유리곡옥 12개, 유리제 목걸이 등이 발굴되었다. 인접한 옹관묘에서도 전한 동경 35매가 출토되어, 彌生時代와 古墳時代를 통틀어 가장 많은 동경이 발굴된 무덤이 되었다. 墓壙의 규모도 긴 변 5.2m, 짧은 변 4.2m로 彌生時代 분묘 중 가장 크다. 묘역 역시 폭 24m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옹관묘들이야말로 이도국의 국왕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森浩一, 1985:202~207)
爾支:‘니키’로 읽어서 ‘이나기(稻置)’와 동의어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 않다. 內藤虎次郞은 爾支는 『隋書』에 기재되어 있는 “伊尼翼”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고, 山田孝雄은 主(누시, 니시) 또는 縣主(아카타누시)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0~41).
泄謨觚:內藤虎次郞은 ‘시마코’라고 읽어서, ‘섬(시마)’과 ‘사람(子)’, 즉 “島子”라고 주장하였고, 山田孝雄은 이모코(妹子)라고 주장하였으나 확실하지 않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0~41).
柄渠觚:‘히코코’, 즉 ‘존귀한 자(히코, 彦)’와 ‘사람(코, 子)’을 합한 말인 ‘彦子’로 해석되기도 하고 혹은 ‘히호코’, 즉 ‘해(히, 日)’와 ‘창(호코, 矛)’을 합한 말로 ‘日矛’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泄謨觚”는 『魏略』에는 “洩溪觚”로 기재되어 있다(石原道博, 2005:40~41).
『魏略』에는 “戶萬餘”로 기재되어 있다. 이 ‘萬’을 千으로 보는 견해(石原道博, 2005:40~41)도 있다. 이도국의 중요성에 비해서 『三國志』에 기록된 인구가 적어서 오히려 『魏略』의 기재가 올바른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伊都國에만 대대로 왕이 있었다고 기록한 사실에 주목하여, 『後漢書』에 보이는 107년의 왜국왕 조공기사는 이도국에서 행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군사가 왕래할 때 항상 머무는 곳이라고 한 것 역시 일찍부터 이 지역이 중국의 군현과 교섭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郡使:帶方郡에서 파견한 사신을 가리킨다. 이들은 주로 이도국에 체류하였고, 더 이상 내륙이나 本州로 들어가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倭人傳〉의 내용이 九州 북부 지역은 자세한 반면 다른 지역들은 간략하거나 傳聞을 기록한 사실과도 합치된다.
奴國:『後漢書』의 奴國으로, 이전의 儺縣과 那津으로 지금의 福岡縣 博多 부근이다(石原道博, 2005:40~41). 1784년에 北九州 博多灣 志賀島에서 발견된 金印 “漢委奴國王”의 나라이다. 이 奴國은 甕棺, 箱式石棺, 돌멘 등이 발견되는 北九州 연안에 있는 諸國 聯盟體의 盟主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後漢書』 〈倭傳〉에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光武帝] 中元 2年(57)에 倭의 奴國이 貢物을 바치고 朝賀하였는데, 使人은 大夫를 자칭하였다. [노국은] 倭國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이다. 光武帝는 奴國의 사자에게 印綬를 하사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福岡平野 남쪽에 위치한 春日市 岡本의 통칭 須玖岡本 유적에서는 역시 前漢鏡 30매 전후, 동검, 동모, 동과, 유리제 곡옥, 유리제 관옥 등이 수습되어, 三雲 南小路 무덤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다만 이 유적은 三雲 유적에 비하여 대·중·소형의 거울이 함께 나왔으며, 무기가 많은 특징을 보인다. 須玖岡本 유적 역시 奴國의 국왕묘급으로 생각된다(森浩一, 1985:207~208).
不彌國: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며, 筑前粕屋郡의 宇瀰 혹은 宇美로 비정하기도 한다. 不彌國 이하의 3國의 比定이 大和(야마토)說과 九州(규슈)說의 분기점이 되어 있다. 일본 학자들은 不彌國에 대하여 宇瀰, 太宰府 부근, 津屋崎 그리고 博多와 門司 사이의 港灣으로 서로 다르게 비정하고 있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0~41).
多模:음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다마(玉)’ 혹은 ‘다마(魂)’, ‘도모(伴造)’ 등으로 보기도 하지만, 모두 확실한 것은 아니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0~41).
投馬國: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九州說에서는 薩摩로서 殺馬 혹은 設馬의 誤記로 보거나, 日向兒湯郡 都萬神社란 주장(投馬와 都萬이 음이 통한다고 본다.), 筑後의 上妻, 下妻, 三瀦란 주장이 있고, 大和說에서는 周防 佐婆郡 玉祖鄕이란 설, 瀬戶內海의 備後의 鞆津이란 주장 그리고 出雲 혹은 但馬란 주장 등이 있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1~42).
彌彌:‘미미’로 읽어서 귀(耳)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그 밖에 美美란 주장과 御身(존귀한 몸)이란 설도 있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1~42).
彌彌那利:‘耳成(미미나리)’ 혹은 ‘耳垂(미미타리)’로 해석하기도 한다(石原道博, 2005:41~42). ‘미미나리’가 ‘미미’의 副官이므로 ‘나리’라는 말 속에 부차적인 존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古語에서는 물건의 형상, 옷을 입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고 하므로, ‘미미’와 유사한 존재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미미나리’를 포함하는 지명으로는 나라분지의 耳成山이 남아 있다.
邪馬壹國:3세기 전반 일본열도에 있었던 伊都國 등의 여러 소국들을 통솔하였던 나라. 여왕 卑彌呼가 주재하였던 나라이며 大和政權의 前身으로 보고 있다. 邪馬壹國은 『後漢書』에 “邪馬臺國”으로 되어 있고, 이 “邪馬壹”이 “邪馬臺”의 誤字란 것이 定說이었으나, 근래에는 ‘邪馬壹(야마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 나라가 九州에 있다는 주장 내부에서도 日向이나 大隅 지역에 해당된다는 설과 薩摩나 豊前 지역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大和說에서도 瀨戶內海航行說과 東海(日本海)航行說이 있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1~42, 55). 그리고 『後漢書』에서는 “其大倭王居邪馬臺國. 樂浪郡徼, 去其國萬二千里, 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그 大倭王은 邪馬臺國에 거주하고 있다. 樂浪郡治에서 그 나라는 12, 000里 떨어져 있고, 그 나라의 서북방에 있는 拘邪韓國에서는 7, 000여 리 떨어져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水行十日, 陸行一月”은 문장만 보면 “海路로는 10일이 걸리고, 陸路로는 1개월이 걸린다.”라고 해석할 수 있으나, 당시 여행은 해로이든 육로이든 평균적으로 이동하는 거리는 40里로 거의 같았다고 한다(山尾幸久, 1972:62~70).
伊支馬:‘伊古麻(이코마)’, ‘生駒(이코마)’ 혹은 ‘活目(이쿠메)’ 등으로 해석하였지만, 당시 음은 ‘이지마’에 가까웠던 것으로 생각되므로 확실하지 않다(石原道博, 2005:41~42).
지금까지 기록한 구야한국~이도국과 노국~야마대국의 두 그룹에 대한 방위와 일정 기록방식이 서로 다르다. 전자는 “東南陸行五百里, 到伊都國”과 같이, 어느 나라에서 어떤 방향으로 얼마를 가면 어느 국에 도착한다는 실제 여정에 따라 누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후자는 “東南至奴國百里”와 같이 어느 나라에서 어느 나라로 가는 데는 어떤 방향으로 얼마를 가면 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후자에 대한 일정은 이도국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읽어야 하며, 그 이유는 위의 사신이 원칙적으로 이도국에 머무르면서 더 이상 직접 여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森浩一, 1985:111~113).
“女王國의 以北”이라는 기사에 대하여 本居宣長은 ‘以北’이 아니라 ‘以西’라 하고 아울러 그 앞의 不彌國에서부터 그 방향을 모두 남쪽이 아니라 동쪽이라고 주장하였다(石原道博, 2005:41~43).
이 “奴國”은 앞서 나온 九州의 “奴國”과 다른 나라이며, 이에 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이 奴國은 원래 “☐奴國”이었던 것이 誤脫된 결과가 아닐까 추측된다(末松保和, 1962:23~43 및 石原道博, 2005:41~43).
斯馬國 이하 奴國(九州의 奴國과 같은 이름의 나라가 다시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는 21국은 內藤虎次郞 등이 지명을 비정하였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石原道博, 2005:43~44).
“狗奴國”은 『後漢書』에서는 “拘奴國”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 지명에 대한 비정은 이전부터 일본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末松保和, 1962:23~43). 石原道博(2005: 44~45)은 지금의 ‘熊襲(구마소)’로 비정하면서, ‘熊襲(구마소)’는 ‘구마’와 ‘아소’가 이어진 말이라고 추정하였다.
狗古智卑狗:음은 ‘구코치히코’이며, ‘菊池(久久智)彦’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다(石原道博, 2005:44~45). 이 밖에도 肥後菊池郡 城野鄕, 伊予河野 혹은 祖子致彦으로 지명 비정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 『翰苑』에 인용된 『魏略』에는 “女王之南, 又有狗奴國, 女男子爲王. 其官曰拘右智卑狗, 不屬女王也.”라고 하여 “狗右智卑狗”로 기재되어 있으나, 그중에 ‘右’자는 ‘古’자의 誤記일 것이다. 汲古閣本에서는 ‘智’가 ‘制’자로 기재되어 있다(末松保和, 1962:23~43).
魏 조정 내에서 曺爽과 司馬懿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曺爽이 229년에 서역의 大月氏國을 불러들였다. 당시 위의 수도에서 대월지국의 수도까지의 거리는 16, 370리라고 한다. 晉代에 들어서 『삼국지』를 편찬하게 된 陳壽의 입장에서는 司馬懿의 공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晉의 정통성을 밝히는 방편이 될 수 있었다. 司馬懿는 요동의 公孫淵을 토벌하였고, 요동지역 평정의 최종적인 결과로 倭의 사신을 낙양으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낙양에 온 倭라는 나라도 역시 大月氏國처럼 먼 곳의 국가라고 주장하려고 대방군에서 邪馬臺國까지의 거리를 12, 000리로 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三韓보다 倭에 대해서 더 많은 내용을 할애한 이유도 사마의의 공적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본다(森浩一, 1985: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