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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답돈(蹋頓), 누반(樓班) 등을 정벌하고 난 뒤 나머지 무리가 항복함

  • 국가
    오환(烏丸)
후에 누반이 자라자 초왕 [소복연]은 그의 부중을 이끌고 누반을 받들어 선우로 옹립하니, 당돈은 [그의 부하가 되었지만 여전히] 왕이 되었다.주 001
각주 001)
원문은 “後樓班大, 峭王率其部衆奉樓班爲單于, 蹋頓爲王.”인데, 『後漢書』에서는 “後難樓·蘇僕延率其部眾奉樓班爲單于, 蹋頓爲王.”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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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답돈은 계교와 방책을 많이 세웠다.주 002
각주 002)
원문은 “然蹋頓多畫計策”인데, 『後漢書』에서는 “多畫” 대신 “猶秉”이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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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군 사람인]주 003
각주 003)
원문은 “廣陽”인데, 『後漢書』에서는 “廣陽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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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유(閻柔) 주 004
각주 004)
閻柔:三國時代 廣陽郡(현재 北京城 서남쪽) 사람이다. 젊어서 烏丸人과 鮮卑人 사이에 섞여 살았으며 부족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後漢末 幽州牧 劉虞의 從事 鮮于輔 등의 추대로 烏丸司馬가 되어 胡·漢 수만을 이끌고 公孫瓚의 部將 鄒丹을 격파하였다. 이에 烏丸校尉 邢擧를 살해하고 烏丸校尉가 되었으며 袁紹의 총애를 받았고 北邊을 安撫하였다. 建安 5년(200)에 사자를 보내 曹操을 만나 투항하여 烏丸校尉에 임명되었다. 曹操가 河北을 평정하자 部曲과 鮮卑을 이끌고 名馬를 曹操의 군대에게 바쳤다. 三郡烏丸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 關內侯에 봉해졌고, 曹操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거느렸던 幽州와 幷州의 烏丸 만여 落을 이끌고 中原으로 遷徙하였다. 建安 17년(212)에 鮮卑 軻比能部 3천여 騎와 曹操를 따라 河間郡에서 田銀을 정벌하는 데 참전하였다. 曹魏 文帝시기 度遼將軍에 임명되고 縣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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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젊어서 오환과 선비(鮮卑) 사이로 들어가 숨어살았는데, 오환과 선비인들에게주 005
각주 005)
원문은 “其種”인데, 『後漢書』에는 “其種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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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얻었다. 염유는 이에 선비 무리를 이끌고 오환교위였던 형거(邢擧)를 살해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니, 원소염유에게 은총을 내리고 위무하여 북변을 편안하게 하였다.주 006
각주 006)
원문은 “紹因寵慰以安北邊.”인데, 『後漢書』에서는 “袁紹因寵慰柔, 以安北邊.”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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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원상이 패하여주 007
각주 007)
袁紹는 建安 5년(200) 官渡에서 曹操에게 패하자 분을 이기지 못하여 建安 7년(202)에 죽었다. 袁紹의 부하들은 셋째아들 袁尙을 옹립하였다. 曹操는 이를 이용하여 靑州刺史 袁譚을 공격하여 靑州를 점령하였다. 후에 袁譚과 袁尙 형제가 반목하여 서로 싸우는 틈을 타서 曹操는 建安 9년(204)에 袁氏의 본거지인 鄴을 점령하였다. 이에 袁尙은 형인 袁熙가 있던 幽州로 달아났으나 袁熙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尙과 袁熙는 遼西烏丸에게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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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돈에게 달아나주 008
각주 008)
원문은 “後袁尚敗奔蹋頓.”인데, 『後漢書』에서는 “及紹子尚敗, 奔蹋頓.”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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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세력을 빌려 다시 기주(冀州)를 수복하려고 꾀하였다.주 009
각주 009)
원문은 “憑其勢, 復圖冀州.”인데, 『後漢書』에서는 “尚欲憑其兵力, 復圖中國.”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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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태조 [조조]주 010
각주 010)
원문과는 달리 『後漢書』에는 “曹操”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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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河北)을 평정하였는데, 이에 염유는 선비와 오환을 이끌고 [태조에게] 귀부하니, 주 011
각주 011)
원문은 “柔帥鮮卑·烏丸歸附”인데, 『後漢書』에서는 “閻柔率鮮卑·烏桓歸附”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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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드디어 염유를 교위로 삼았다. 여전히 한나라의 사절(使節)주 012
각주 012)
使節:원래의 뜻은 使者가 지니고 다니는 符節을 지칭하나, 문맥상 군사를 지휘하는 부절을 의미한다. 曹魏·西進 時代 이후 都督諸軍事와 刺史, 校尉 등에게 주어지는 부절로 使持節·持節·假節이 있고 종류에 따라 부여되는 권한에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後漢 말기에는 이러한 등급의 분화가 아직 제도화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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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니고 예전처럼 광녕[현](廣寗縣) 주 013
각주 013)
廣寗縣:前漢時代 설치하였다. 治所는 현재의 河北省 張家口市이며, 당시에는 上谷郡에 설치되었다. 西晉시대 下洛縣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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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치소(治所)로 삼아 다스렸다.주 014
각주 014)
원문은 “遂因以柔爲校尉, 猶持漢使節, 治廣甯如舊.”인데, 『後漢書』에서는 “操即以柔爲校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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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建安) 11년(206)에주 015
각주 015)
『後漢書』에서는 “建安 12년의 일”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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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스스로 유성[현](柳城縣) 주 016
각주 016)
柳城縣:前漢時代에 설치되었고, 治所는 현재의 遼寧省 朝陽縣 남쪽이다. 遼西郡都尉의 治所縣이었다. 後漢時代에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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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답돈을 정벌하였다.주 017
각주 017)
원문은 “太祖自征蹋頓於柳城”인데, 『後漢書』에서는 “曹操自征烏桓”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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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숨기고 길을 속여서 [진군하였는데 답돈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100여 리도 이르지 않는 [가까운 곳에 도달하자 비로소] 적들이 이를 깨달았다. 원상답돈은 무리를 이끌고 범성(凡城) 주 018
각주 018)
凡城:현재에 河北省 平泉縣 남쪽에 해당한다. 烏丸大人 蹋頓의 영토였으며 後漢의 右北平郡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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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맞아 싸웠는데, 군대와 말이 무척 많았다. 태조는 높은 곳에 올라 오환의 진(陳)주 019
각주 019)
여기에서 “陳”자는 ‘陣’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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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바라보고 군대에게 진군하지 못하도록 하고 [오환군의] 작은 움직임까지 관찰하다가 이에 그 무리를 습격하여 격파하니, 진에 임하여 답돈의 머리를 베었다. [이에 오환의] 죽은 자가 들을 뒤덮었다.주 020
각주 020)
원문은 “潛軍詭道, 未至百餘里, 虜乃覺. 尚與蹋頓將衆逆戰於凡城, 兵馬甚盛. 太祖登高望虜陳, (柳)[抑]軍未進, 觀其小動, 乃擊破其衆, 臨陳斬蹋頓首, 死者被野.”인데, 『後漢書』에서는 “大破蹋頓於柳城, 斬之, 首虜二十餘萬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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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부환(速附丸)누반, 오연 등은 요동[군]으로 달아났는데, 주 021
각주 021)
원문은 “速附丸·樓班·烏延等走遼東”인데, 『後漢書』에서는 “袁尚與樓班·烏延等皆走遼東”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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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군]에서는 그들 모두를 참하여 그 머리를 [태조의 진영에] 보냈다.주 022
각주 022)
원문은 “遼東悉斬, 傳送其首.”인데, 『後漢書』에서는 “遼東太守公孫康並斬送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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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유주병주에서 염유가 통솔하던 오환 만여 락을 모두 중원(中原)주 023
각주 023)
원문은 “中國”인데, 이는 黃河 유역의 땅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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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옮겼다. 또 그 후왕(侯王)과 대인의 종중(種衆)을 거느리고 더불어 정벌(征伐)에 나섰다. 이때부터 3군의 오환은 천하(天下)에서 유명한 기병[名騎]이 되었다.[배송지주1]주 024
각주 024)
원문은 “其餘遺迸皆降. 及幽州·并州柔所統烏丸萬餘落, 悉徙其族居中國, 帥從其侯王大人種衆與征伐. 由是三郡烏丸爲天下名騎.”인데, 『後漢書』에서는 “其餘眾萬餘落, 悉徙居中國云.”이라고 하였다.
원문의 ‘名騎’를 ‘突騎’ 혹은 ‘烏丸突騎’라고 한다. 後漢시대에는 幽州와 冀州에 烏丸突騎가 배치되었으며 수도인 洛陽에 주둔했던 친위군 將領에 해당하는 長水校尉 휘하에는 烏丸胡騎 732人이 배치되었다(馬長壽, 1962: 142~143 및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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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원문은 “後樓班大, 峭王率其部衆奉樓班爲單于, 蹋頓爲王.”인데, 『後漢書』에서는 “後難樓·蘇僕延率其部眾奉樓班爲單于, 蹋頓爲王.”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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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원문은 “然蹋頓多畫計策”인데, 『後漢書』에서는 “多畫” 대신 “猶秉”이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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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원문은 “廣陽”인데, 『後漢書』에서는 “廣陽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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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閻柔:三國時代 廣陽郡(현재 北京城 서남쪽) 사람이다. 젊어서 烏丸人과 鮮卑人 사이에 섞여 살았으며 부족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後漢末 幽州牧 劉虞의 從事 鮮于輔 등의 추대로 烏丸司馬가 되어 胡·漢 수만을 이끌고 公孫瓚의 部將 鄒丹을 격파하였다. 이에 烏丸校尉 邢擧를 살해하고 烏丸校尉가 되었으며 袁紹의 총애를 받았고 北邊을 安撫하였다. 建安 5년(200)에 사자를 보내 曹操을 만나 투항하여 烏丸校尉에 임명되었다. 曹操가 河北을 평정하자 部曲과 鮮卑을 이끌고 名馬를 曹操의 군대에게 바쳤다. 三郡烏丸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 關內侯에 봉해졌고, 曹操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거느렸던 幽州와 幷州의 烏丸 만여 落을 이끌고 中原으로 遷徙하였다. 建安 17년(212)에 鮮卑 軻比能部 3천여 騎와 曹操를 따라 河間郡에서 田銀을 정벌하는 데 참전하였다. 曹魏 文帝시기 度遼將軍에 임명되고 縣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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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원문은 “其種”인데, 『後漢書』에는 “其種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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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원문은 “紹因寵慰以安北邊.”인데, 『後漢書』에서는 “袁紹因寵慰柔, 以安北邊.”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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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袁紹는 建安 5년(200) 官渡에서 曹操에게 패하자 분을 이기지 못하여 建安 7년(202)에 죽었다. 袁紹의 부하들은 셋째아들 袁尙을 옹립하였다. 曹操는 이를 이용하여 靑州刺史 袁譚을 공격하여 靑州를 점령하였다. 후에 袁譚과 袁尙 형제가 반목하여 서로 싸우는 틈을 타서 曹操는 建安 9년(204)에 袁氏의 본거지인 鄴을 점령하였다. 이에 袁尙은 형인 袁熙가 있던 幽州로 달아났으나 袁熙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袁尙과 袁熙는 遼西烏丸에게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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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원문은 “後袁尚敗奔蹋頓.”인데, 『後漢書』에서는 “及紹子尚敗, 奔蹋頓.”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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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원문은 “憑其勢, 復圖冀州.”인데, 『後漢書』에서는 “尚欲憑其兵力, 復圖中國.”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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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원문과는 달리 『後漢書』에는 “曹操”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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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원문은 “柔帥鮮卑·烏丸歸附”인데, 『後漢書』에서는 “閻柔率鮮卑·烏桓歸附”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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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使節:원래의 뜻은 使者가 지니고 다니는 符節을 지칭하나, 문맥상 군사를 지휘하는 부절을 의미한다. 曹魏·西進 時代 이후 都督諸軍事와 刺史, 校尉 등에게 주어지는 부절로 使持節·持節·假節이 있고 종류에 따라 부여되는 권한에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後漢 말기에는 이러한 등급의 분화가 아직 제도화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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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廣寗縣:前漢時代 설치하였다. 治所는 현재의 河北省 張家口市이며, 당시에는 上谷郡에 설치되었다. 西晉시대 下洛縣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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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원문은 “遂因以柔爲校尉, 猶持漢使節, 治廣甯如舊.”인데, 『後漢書』에서는 “操即以柔爲校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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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後漢書』에서는 “建安 12년의 일”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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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柳城縣:前漢時代에 설치되었고, 治所는 현재의 遼寧省 朝陽縣 남쪽이다. 遼西郡都尉의 治所縣이었다. 後漢時代에 廢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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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원문은 “太祖自征蹋頓於柳城”인데, 『後漢書』에서는 “曹操自征烏桓”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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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凡城:현재에 河北省 平泉縣 남쪽에 해당한다. 烏丸大人 蹋頓의 영토였으며 後漢의 右北平郡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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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여기에서 “陳”자는 ‘陣’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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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원문은 “潛軍詭道, 未至百餘里, 虜乃覺. 尚與蹋頓將衆逆戰於凡城, 兵馬甚盛. 太祖登高望虜陳, (柳)[抑]軍未進, 觀其小動, 乃擊破其衆, 臨陳斬蹋頓首, 死者被野.”인데, 『後漢書』에서는 “大破蹋頓於柳城, 斬之, 首虜二十餘萬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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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원문은 “速附丸·樓班·烏延等走遼東”인데, 『後漢書』에서는 “袁尚與樓班·烏延等皆走遼東”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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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원문은 “遼東悉斬, 傳送其首.”인데, 『後漢書』에서는 “遼東太守公孫康並斬送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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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원문은 “中國”인데, 이는 黃河 유역의 땅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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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원문은 “其餘遺迸皆降. 及幽州·并州柔所統烏丸萬餘落, 悉徙其族居中國, 帥從其侯王大人種衆與征伐. 由是三郡烏丸爲天下名騎.”인데, 『後漢書』에서는 “其餘眾萬餘落, 悉徙居中國云.”이라고 하였다.
    원문의 ‘名騎’를 ‘突騎’ 혹은 ‘烏丸突騎’라고 한다. 後漢시대에는 幽州와 冀州에 烏丸突騎가 배치되었으며 수도인 洛陽에 주둔했던 친위군 將領에 해당하는 長水校尉 휘하에는 烏丸胡騎 732人이 배치되었다(馬長壽, 1962: 142~143 및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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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누반, 초왕, 소복연, 누반, 당돈, 답돈, 염유(閻柔), 염유, 형거(邢擧), 원소, 염유, 원상, 답돈, 태조, 조조, 염유, 태조, 태조, 염유, 태조, 답돈, 답돈, 원상, 답돈, 태조, 답돈, 속부환(速附丸), 누반, 오연, 태조, 염유, 배송지
지명
광양[군, 기주(冀州), 하북(河北), 한나라, 광녕[현](廣寗縣), 유성[현](柳城縣), 범성(凡城), 요동[군], 요동[군], 유주, 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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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답돈(蹋頓), 누반(樓班) 등을 정벌하고 난 뒤 나머지 무리가 항복함 자료번호 : jo.k_0004_0030_0020_0040